성경연구

십자가의 道

올더스조에 2022. 7. 21. 23:42

십자가의

 

 

 

순 서

1. 들어가는 말

2. 하나님의 창조목표

3.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4. 십자가의 출현 배경

5.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

6. 십자가의 두 가지 위치

7. 결 론

 

 

 

1. 들어가는 말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다른 많은 수단이 있을 것 같은데 왜 하필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 하늘에 앉아서 그냥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처음부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면 되지 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또 예수님을 보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까? 그리고 왜 이것을 믿어야만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자.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해 못하고 표적을 추구하는 유대인들과 세상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에게 십자가는 도무지 받아드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곧 십자가가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다.(고전 1:24)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니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고전 1:22-24)

 

우리는 일반적으로 십자가를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은혜의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지만 성경은 십자가를 은혜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고 말한다. 물론 누군가 나의 죄를 대신 갚아주었다면 분명히 감사할 일이고 은혜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세상에서도 죄인을 사면해 주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일이 있듯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볼 수 있는 일이고 세상 사람들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고 말한다. 누군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갚아주었다는 것은 일종의 혜택으로서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피조물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고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측량의 최대 크기는 우주의 크기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의 크기는 이것을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단순히 우리의 죄 문제만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너무 낮은 수준이다. 우주의 크기보다 더 크고 깊은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통해서 우리에게 병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을 주는 그렇게 단순한 분이 아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며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개념에서 화염검-번제단-십자가가 나왔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인 것이다. 여기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는 말이 나왔다. 결국 십자가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며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어느 한 점으로 알지 말고 입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입체적으로 깨달아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능히 깨닫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3:17-18)

 

2. 하나님의 창조 목표

 

2-1 영이신 하나님은 자신을 형상화할 몸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몸이 없는 영이시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은 자신을 형상화할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영이란 마음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어떤 물건을 잡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잡을 손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자신의 마음, 곧 생명을 표현할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을 창조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려면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야 한다. (1:12-13)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1:12-13)

씨의 소망은 열매이듯이 아버지의 소망은 아들이다. 교회는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표현할 몸으로써 거듭난 사람들의 유기체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1:23)

 

 

2-2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 목표는 자신의 아들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왕국 건설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어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태어나게 해서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인가? 이는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시겠다는 것이다. 왕국이란 그 생명이 그 왕국이다. 예를 들어 동물의 생명을 가지면 동물의 왕국의 일원이 되고, 식물의 생명을 가지면 식물의 왕국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가진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이루어진 왕국, 곧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자 백성이 되는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표다.

 

 

 

3.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3-1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 다시 태어나야 할 운명이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와같이 하나님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창세기 315절에서 인류에게 여자의 씨를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 씨는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씨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3:16)

 

바로 이 씨가 그리스도로서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 곧 씨는 하나님 자신이기에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씨를 주기 위해 사람을 흙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처음에 씨와 땅의 관계이지 사람을 씨로 만들지 않았다. 씨란 영이란 의미다. 천사는 영으로 만들었지만, 사람은 흙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은 씨, 곧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가 아니고 받을 자였다. (3:22)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3:22)

 

 

3-2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육신이 한번 죽고 영에 속한 몸으로 바뀌어지도록 정하셨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씨를 받아 열매를 맺어야 할 운명이다.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열매는 사람의 부활이다. 그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씨의 소망은 열매이듯이 씨 아버지의 소망은 아들이다. 호박씨를 심으면 호박이 나고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가 난다. 마찬가지로 흙 사람도 하나님의 씨를 심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심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부활한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24: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씨-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이식받은 후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야 할 운명이다. 사람의 운명은 본성에 속한 몸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몸이 두 번째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여기서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에 속한 몸으로 바뀐다는 의미는 본성에 속한 몸은 죽을 운명(mortal)’이라는 의미이다. 본성에 속한 몸은 죄가 있건 없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영적인 몸을 입어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성에 속한 우리 몸은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어떤 이들의 주장과 같이 사람은 원래 영생하게 되어 있는데 아담이 죄를 범하여 육체적 사망이 왔다는 말은 명백히 틀린 말이다. 성경은 분명히 창조된 아담은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가진 자로 표현하지 않는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3:22)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육체적 생명과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연결되면 생명이고, 단절되면 사망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 날에(in the day)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2:17) 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그날 죽지 않고 930살까지 살다가 죽었다. 만일 여기서 죽으리라를 육체적 죽음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한 말씀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생명이고, 단절되어 있으면 사망인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내 아들은 내가 낳아야 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1:12-13)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왜 사람을 천사처럼 죽지 않도록 만들지 않고 죽도록 만들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천사는 비록 죽지 않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종의 운명으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영생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으며 1회 창조로 끝난다, 그러나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기에 흙으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씨, 곧 생명을 이식받아 육체가 죽고 영적인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즉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 부활해서 천사와 같은 영적인 몸을 입어야만 죽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한 것으로 여겨질 자들은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고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부활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 (20:34-36)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임으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다시 태어나야 한다. 사람의 육체는 죄와 상관없이 어차피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창조되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체를 가진 사람은 천사와 같이 영적인 몸이라는 부분에서는 같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이고 천사는 죽지 않지만, 영생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고 천사 고유의 생명을 소유한 피조물인 것이다.

 

 

3-3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번제헌물의 운명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한번 죽을 수밖에 없도록 창조되었다면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 앞에 어떤 위치로 창조되었지는 알아야 한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크게 희생물(sacrifice)과 헌물(offering)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한다. 희생물은 죄를 속하기 위한 제물이고 헌물이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드려지는 제물이다. 교회에서 헌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성경적 용어는 헌물(offering)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다섯 종류의 제물을 번제헌물(burnt offering) 음식헌물(meat offering) 화평헌물(peace offering) 죄헌물(sin offering) 범법헌물(trespass offering)로 표현된다. 이 헌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특성을 다섯 종류로 나타내는 것이다.

죄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의 명칭이 헌물이 아니라 희생물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희생물이라고 하지 않고 헌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 헌물은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라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졌다. 그러므로 헌물의 총체는 번제헌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운명은 번제헌물이다. 모든 헌물이 번제헌물이며 좀더 세부적으로 다섯 종류의 헌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다섯 종류의 헌물 중 음식헌물을 제외한 나머지 헌물은 모두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물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고 음식헌물만 죄와 관계없이 드려지는 헌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 중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십자가의 출현 배경

 

4-1 하나님은 영이시다.

 

십자가의 근원적 출현 배경에는 하나님 자신이 ()’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피조물도 각기 고유의 영이 있지만 하나님과 같은 영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만을 피조되지 않은 영으로 영원한 생명, 또는 생명이라고 표현한다. 각피조물도 자신의 고유의 영이 있어 자신의 생명의 역할을 하지만 영원한 생명은 아니다. 그래서 피조물의 입장에서 영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위 없는 믿음도 죽었느니라.’(2:26)

영이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와 같은 존재다. 에너지의 근원이 불, , 바람이듯이 성경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불, , 바람으로 표현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영이 불, , 바람이듯이 우주 안에서도 에너지의 근원이 화력, 수력, 풍력이 되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 자신은 생명인 동시에 심판자이시다. 그래서 성령을 나타내는 불, , 바람 중 큰 것은 사망이고 작은 것은 생명을 나타낸다. 그러면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하나님을 불로 표현하는 성경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니라.’(12:29) 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계시록 20장에서 등장하는 불 호수는 사망을, 사도행전 2장의 불의 혀는 성령을 받을 때의 생명을 나타낸다.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20:14)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20:15)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앉더라.’(2:3)

성령의 두 번째 속성인 물에 의한 침례는 육체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성경은 바다와 같이 큰물에 의한 침례는 심판, 곧 사망을 상징하고, 작은 물에 의한 침례는 생명을 상징한다. 노아의 홍수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의 침례는 사망을,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반석을 모세가 지팡이로 치자 샘물이 흘러나오는 기적과 마지막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요르단강에서 홍해의 기적과 같이 요르단강이 마르는 기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요르단강의 침례로 생명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육체의 사망이 반드시 성경이 의미하는 사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육체가 살아 있더라도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면 사망이고 육체가 죽더라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생명으로 표현한다.

또한, 예수님도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침례 요한에게 요르단강에서 침례를 받았는데 이는 죄와 상관없는 침례로 생명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침례를 만류하는 침례 요한에게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더라.’(3:15) 하셨다. 우리는 통상 침례는 죄인만이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침례를 받았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침례를 받으신 것은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침례, 곧 육체가 한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르단강의 침례는 하나님의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사람의 운명은 죄와 관계없이 생명이신 하나님께 침례, 곧 삼켜져야 한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고전 15: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위 말씀에서 사망이 승리 가운데 삼켜졌도다,’ 라는 말과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은 같은 의미다.  '우리가 하나님께 삼켜지는 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잠겨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과정을 '성령 침례'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아니하여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시느니라.'(행 1:5)

우리는 육체는 죽을 운명(mortal)으로 창조되어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으로 바뀌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immorality)을 입으리로다.’(고전 15:52-53)

 

성령의 세 번째 속성인 바람도 태풍과 같이 큰 것은 사망이고 사람의 숨과 같이 작은 바람은 생명을 상징한다.

그분께서 이것을 말씀하시고 그들 위에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20:22)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것의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하시니라.’(3:8)

 

 

4-2 십자가의 근원적 출현 배경은 하나님은 불이라는 데 있다.

 

위에서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에 대한 물리적 속성이 불, , 바람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중 특히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다’(12:29)라는 개념에서 십자가가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것은 그저 막연하게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 물리적 작용에 의해 영생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이신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의미는 쉬운 말로 하나님은 용광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이 소멸시키는 불이기 때문에, 곧 우리가 용광로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는 죄가 있으나 없으나 모두 죽게 되는 것이다.(33:20)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터이므로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3:20)

영 하나님은 불 하나님이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 하나님은 불타는 칼(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였다.

이같이 그분께서 그 남자를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이와 같이 십자가는 하나님은 소멸키는 불이라는 개념에서 화염검 번제단 십자가 순서로 계시가 발전된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가 죄가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데서 나온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5.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

 

5-1 흙으로 창조된 사람은 불 하나님께 태워져 살아 있는 돌이 되고(벧전 2:5), 영원히 변치 않는 보석이 된다(21:18).

 

사람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저절로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연합을 통해 부활의 몸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만물의 물리적·화학적 법칙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만물은 불로 태워져 연합되고 새로운 물질로 재창조된다. 사람과 나무 의자가 연합되려면 불로 태워져 재가 되면 상호 연합된다. 쇠도 좋은 쇠든 나쁜 쇠든 용광로에 들어가면 똑같이 녹아서 연합되어 새로운 쇠로 재생된다. 흙은 불로 태워져 세라믹 같은 돌이 되고, 돌은 더 강한 불에 태워지면 보석이 된다. 이렇듯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라는 데서 번제단이 나온 것이고 십자가의 개념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실 십자가는 창세기 3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담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화염검으로 막았는데 이 화염검이 구약의 번제단, 그리고 신약의 십자가로 발전된 것이다.

그러므로 흙으로 지어진 우리가 용광로 하나님께 태워짐으로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영적인 몸으로 변화된다고 할 수 있다. 진흙은 불로 한번 굽게 되면 세라믹 같은 돌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를 살아 있는 돌이라고 하는 것이다.(벧전 2:5)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 2:5)

그러나 돌은 영원하지 않다. 돌이 영원히 변하지 않으려면 보석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부활의 몸을 입고 새 예루살렘에 입성한 우리를 보석으로 표현한다. 계시록 21장은 교회의 완성체인 새 예루살렘을 말하고 있는데 교회가 건물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유기적인 연합체이듯이 새 예루살렘 또한 부활한 몸을 가진 성도들의 유기적인 연합체이다. 이 유기체를 성경은 다음과 같은 보석으로 표현한다.

그 도시의 성벽 건조물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그 도시는 순금이며 맑은 유리 같더라.’(21:18)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자를 흙으로, 구원받은 현재의 성도를 살아 있는 돌로, 장차 부활의 몸을 보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을 운명의 몸(mortality)에서 죽지 않을 운명의 몸(immortality)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자연법칙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2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먹힘으로 그 생명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사람의 본성적 생명에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되어야 한다. 이 생명의 연합의 원리에 대해서는 클라렌스 라킨의 글을 인용해 보자.

 

자연적으로 생명이 출생하는 것은 없다. 모든 생명은 앞서 존재한 생명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죽은 돌은 스스로 무기적 상태에서 유기적 상태로 전환될 수 없다. 두 세계 사이에는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유기적 상태 쪽으로 열려 있다. 돌은 스스로 문을 열수 없는 반면 식물은 그 문을 열 수 있다. 식물은 그 뿌리를 흙 속으로 밀어 넣어 돌을 부술 수 있으며 돌의 화학적 요소들을 취하여 식물의 생명으로 전환되게 한다. 이와 같이 식물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도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이 문은 동물의 세계 쪽으로 열려 있다. 식물은 스스로 육이 될 수 없으나 동물은 식물을 먹음으로 식물적 생명을 동물적 생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에도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이 문은 육 쪽에서 열 수가 없다. 영의 세계 쪽으로 문이 열려 있다.”

 

성경도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려면 우리가 하나님께 먹혀야 한다고 말한다. 곧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음식헌물이라는 것이다. 번제단(용광로)에서 불 하나님께 태워지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이 먹는다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열왕기상 18장에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희생물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왕상 18:38~39)

여기서 하나님의 불이 핥았다라는 것은 결국 그 불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는 뜻이다. 소멸할 뿐만 아니라 삼켜 버렸는데, 삼켜 버렸다는 말은 먹었다는 의미로 연합이 됐다는 뜻이다. 결국,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불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곧 먹힘으로 보석이라는 영원히 변치 않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고전 15: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mortal)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위 말씀에서 사망이 승리 가운데 삼켜졌다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 죽을 운명(mortal)’으로 창조된 우리 몸이 생명이신 하나님께 먹힘으로 죽지 않을 운명의 몸(immortality)으로 바뀌어 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음식헌물로서 먹히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먹히는 것을 음식에 빗대어 죽음을 맛본다고 표현한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라.'(16:28)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는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8:52)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5-3 사람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사람은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가발전하는 존재는 하나님 한 분이다. 피조물이란 먹어야 사는 존재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위 말씀에서와 같이 사람은 육적으로는 빵을 먹어야 살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사는 존재다. 창세기 2장에서도 하나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로라고 하셨다. 구약성경에는 대부분 믿으라는 말씀보다는 먹으라는 말씀이 많다. 출애굽시에도 예수님을 예표하는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서 먹었고 구약의 제사의식에서도 드려지는 동물 제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예표하는데 이 제물 또한 먹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근본적으로 먹어야 사는 존재이지 자가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님은 공관복음에서는 믿으라라고 하다가 요한복음에 와서는 다시 먹으라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6:54)

사복음서에서는 인간의 수준을 고려해서 처음부터 먹으라고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까 믿으라는 말을 하다가 먹으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발전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을 먹으라고 하니까 이 말을 오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가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자기들끼리 다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6:51-52)

그러므로 믿으라는 말의 근본은 먹으라는 의미다. 사람은 먹는 대로 자기 몸이 조성된다. 식물을 먹으면 식물성 몸이 조성되고 동물을 먹으면 동물성 몸이 조성된다. 조선일보를 읽은 사람과 한겨레 신문을 읽는 사람은 사상이 다르다. 영어를 먹은 사람은 영어를 하게 되고 한국말을 먹은 사람은 한국어를 한다. 그런데 피조물에게는 각자의 음식이 정해져 있다. 사람은 먹어야 할 것을 먹어야 살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면 죽는다. 가스차에 디젤을 넣으면 차가 고장 나듯이 선악과는 나쁘고 생명과는 좋은 것이 아니라 각 피조물에게 맞는 음식을 먹어야 산다. 사람의 영적음식은 생명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예수-생명을 먹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태어나고, 사탄-사망을 먹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다시 태어난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24:15)

 

 

5-4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연합함

 

우리는 앞서 영생을 얻기 위해 사람은 하나님께 먹혀야 하고, 사람도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영생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먹고 먹힘으로 연합되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화평헌물이다. 다른 헌물은 하나님을 예표하는 제사장이 일방적으로 먹었지만 화평헌물은 드리는 자와 받는 자가 동시에 제물을 먹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먹히고 사람이 예수님을 먹는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가 다른 곳에서는 절대 안되고 반드시 번제단, 십자가라는 것이다. 만물은 영, 곧 불(용광로) 안에서 재창조가 되기 때문에 오직 그 장소는 번제단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나와 번제단으로 가셨고, 하나님으로서 지성소에서 나와 번제단으로 가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가 번제단, 곧 십자가다. 그것도 반드시 그리스도 죽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번제단, 곧 십자가의 출현 배경에는 하나님이 영이듯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영 안에서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도 우리 영 안에 내주하신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8:16)

위 말씀을 보면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신다.

 

 

 

6. 십자가의 두 가지 위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씨를 이식받아 죄가 없더라도 한번은 육체가 죽고 영적인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운명이란 것을 살펴보았다. (고전 15:46)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있기 때문에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예수의 씨를 받아드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씨를 주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그대로 있으면 안되고 영()가 되기 사람을 위해 죽으셔야 했는데 이는 이미 창세 전에 예정되어 있었다.(고전 2:7)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우리의 죄만을 대속하기 위해서 죽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죽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죄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수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두 번 죽어야 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방면과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방면으로 죽어야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의 위치와 생명을 주기 위한 헌물의 위치로 죽으신 것이다. 죄를 대속하는 것은 법리적 위치고, 생명을 주는 것은 유기적 위치다. 그래서 법리적인 희생물은 피를 제단 주위에 뿌리지만, 유기적인 헌물은 하나님의 불로 태우던지 하나님을 예표하는 제사장이 먹었다.

침례는 죽음-십자가를 예표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도 이집트를 탈출할 때 법리적인 죄를 대속하기 위한 홍해의 침례와 유기적인 생명을 얻기 위한 요르단 강의 침례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에서도 모세의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반석이 갈라지는 사건도 두 번 있었다. 아브라함도 갈데아 우르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두 번 건너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다.

성전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 희생물과 헌물이었듯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떻게 희생물과 번제헌물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6-1 십자가에서 희생물로 드려짐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15:3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27:50, 16:37)

 

사복음서는 예수님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왕으로서의 예수님, 마가는 의로운 종으로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누가는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구속할 구속자이신 예수님을, 요한은 구속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었다. 신들이 되고 싶다는 것은 세상의 왕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들이란 천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종이다. 아담은 사람-아들의 위치에서 신-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아담은 아들의 위치에서 왕이 되어야 하는데 종의 위치에서 왕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씨를 뿌린 결과의 열매가 창세기 6장에서 말하는 옛적의 강력한 자 곧 명성 있는 자들’(6:4) 이고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짐승들로 상징되는 세상 왕들이다.

그러나 아담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종은 결코 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세상에 있는 왕들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왕들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를 대속하려면 이 왕은 심판받아야 한다. 또 아담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한 사악한 종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류를 대표하여 대속물이 되려면 왕으로서 그리고 종으로서 심판받아야 한다. 그런데 왕이란 한 나라의 대표이므로 왕이 심판받으면 종까지 다 심판받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목이 유대인의 왕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공식적인 죄목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것이었다.(27:37, 15:26, 23:38)

'그분의 죄명을 적은 글은 유대인들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15:26)

하나님과 종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통치체계는 율법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에 의해 가짜 왕을 대속하기 위해서는 진짜 왕이 희생물로 심판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마태와 마가가 본 예수님은 대속물(ransom)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이다. 사복음서에 보면 대속물(ransom)이란 단어가 총 2번 나오는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만 각각 1번씩 나온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20:2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10:45)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호칭할 때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15:34)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예수님은 늘 하나님을 호칭할 때 아버지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만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알든 모르든 하나님과의 관계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다. 이 관계는 심판자와 심판받는 자라는 의미로 두렵고 무서운 관계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다면 율법이 작용되지 않는 친밀한 사랑의 부자 관계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이라 부른 것은 창조주 앞에 피조물의 입장에서 심판대에서 서신 것이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지만 하나님은 응답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희생물로서 심판받으신 것이다.

,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신 것이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는 율법이 작용하면 그 누구도 율법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이 율법 시스템은 아담의 죄로 인해 들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와서 이 율법을 끝내야 한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3:20) 그래서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역설적으로 죄인들을 위해 율법의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희생물로 인해 죄가 용서되었다고 거듭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무죄가 아니다. 거듭나려면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될 수 있는 위치로 구속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밭이다. 타락이란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 할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었다는 것이고 심판이란 하나님의 밭에 심겨진 가라지가 뽑혀진 것이다. 가라지가 뽑혀나간 것은 심판이지 영생이 아니다. 가라지가 뽑혀진 밭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려면 가라지는 모아서 불태워야 하고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도록 밭이 다시 정비되어야 한다. 이게 구속이다. 음식헌물의 규례와 같이 곱게 갈아서 태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씨-생명을 뿌릴 수가 있다. 음식헌물도 일종의 번제헌물이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먼저 구속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 번제헌물이 사람의 본래 위치다.

 

 

6-2 십자가에서 번제헌물로 드려짐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니라.’(23:46)

여기서 대반전이 일어난다. ‘나의 하나님이여하시던 분이 갑자기 아버지여하시는 것이다. 율법에 의해 심판 받으실 때는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지만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하면서 다시 친밀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회복된다.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는 말은 내가 번제헌물이 된다는 말이다. 희생물이 불에 타서 재가 돼서 번제헌물이 되었듯이 희생물로 드려졌던 예수님이 불-하나님께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었다는 의미다. 영이 된다는 말은 태워져서 재가 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본디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로 드려져야 했다. 그래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번제헌물이 사람의 원래의 위치다. 그러므로 마태와 마가에서는 대속물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이고 누가는 구속자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이다.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대속물이란 단어가 기록되어 있듯이 구속이란 단어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사 구속하시고’ (1:68)

마침 그때에 그녀가 나아와 마찬가지로 주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서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말하니라.’(2:38)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위를 보고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의 구속이 가까이 오고 있느니라, 하시니라.’(21;28)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24:21)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법리적인 대속을 위해서는 희생물이 필요하고 유기적인 구속을 위해서는 번제헌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구속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서의 결론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러 왔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된 곳이 없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명이고 생명을 주러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20:31)

우리는 대속, 곧 죄 사함이 영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담도 무죄하였으나 영생이 없었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3:22)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는 창조, 타락, 대속, 구속, 부활생명이다. 이 경륜의 순서는 개인에게도 적용되지만 시대적으로도 창조(창세기 1, 2), 타락(창세기 3), 대속(교회시대), 구속(천년왕국), 부활생명(새예루살렘) 순이다.

대속이 영생이 아니다. 대속은 단지 심판이다. 심판받았다고 해서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 곧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자에게만 하나님은 영생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생명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의식에서 희생물이 불에 태워져 번제헌물이 됨으로서 희생물과 번제헌물이 동일시 되었듯이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의 대속과 구속이 동일시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인 것이다.(고전 1;24)

대속과 구속이 죄용서라는 차원에서 동일하지만 하나님과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구속되어야 한다. 대속은 단지 법리적으로 죄 용서를 받은 위치지만, 구속은 하나님과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위치인 것이다. 대속은 단지 심판으로 피흘림의 죽음이 필요하다. 피흘렸다고 거듭나는게 아니다. 피흘려 죽은 제물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재, 곧 영이 되어야만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면서 희생물로서 죄인들을 위해 먼저 심판을 받으셨고, 희생물인 예수님이 번제헌물이 되기 위해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신 것이다. 그래야만 생명의 연합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표현한 시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편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졌다. 전반부는 심판에 대한 극심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으나(22:1~21) 후반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다.(22:22~31)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시편 221절의 말씀과 같이 전반부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였지만 후반부는 아버지여 하면서 친밀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돌아서는 것을 보게된다. 인생은 원래 하나님 앞에 생명의 연합을 위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한 번제헌물이었다.(2:21) 그런데 아담은 이 길을 이탈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희생물로서 심판이 끝나자 하나님께서 본래 인생에게 정하신 번제헌물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곧 아버지와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면서 아버지를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희생물이란 기본적으로 대신해서 죽는다는 의미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은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 만이 가능하고 우리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해 죽는 희생물이 아닌 살아 있는 희생물’(12:1), 또는 영적 희생물’(벧전 2:5)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 죄를 용서받은 우리 성도들의 육체가 죽는 것은 희생물로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목적대로 영생을 얻기 위해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희생물이라고 하지 않고 헌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 4:6)

 

 

7. 결    론

 

결론적으로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의 죄만을 심판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으로서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개념에서 화염검 – 번제단 – 십자가가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인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주의 중심이고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다. 십자가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어리석은 것이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인 것이다.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니라.’(고전 1:18)

영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고, 만물은 불 안에서 태워져 재창조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성경은 우리가 현재 육체를 입고 신음하는 것은 육체를 벗고자 함이 아니고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영원한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영원한 세계로 변화하듯이 흙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도 불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화학적 · 물리적 작용을 거쳐 영원히 변치 않는 보석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 그런즉 이 모든 것이 해체될진대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 모든 거룩한 행실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날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서두르라. 그 날에 하늘들이 불이 붙어 해체되고 원소들도 뜨거운 열로 녹으려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약속에 따라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는도다.’(벧후 3:11-13)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악과를 통해 병 주고 그리스도를 통해 약 주는 분이 아니라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계 11:8)이라는 말씀이 있듯이 창세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죽도록 예정되어 있었다.(고전 2:7-8) 왜냐하면 사람은 생명을 얻기 위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요 6:54) 그러므로 번제단, 곧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기 좋게 요리하는 도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도’란 ‘생명의 길’이다. 사실 십자가의 도는 창세기 3장에서 이미 계시 되어 있다. 아담이 타락하자 ‘그분께서 그 남자를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생명나무의 길’로 들어 가려면 불타는 칼, 곧 화염검을 통과해야 한다. 이는 생명을 얻으려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길(the way of the tree of life)’이 ‘십자가의 도(the way of the cross)’인 것이다.

 

사람은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이 죄인이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 드려야 했지만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하고 율법을 주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었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합당한 명분이 생겼고,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이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는 단순히 십자가를 나의 죄를 대속하는 수단으로만 아는 것은 낮은 수준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십자가에는 두 가지 위치가 있는 것이다. 죄를 심판하기 위한 법리적 위치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유기적 위치다. 하나님을 만나서 죄가 있으면 죽고 죄가 없으면 죽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불 하나님을 만나 타지 않을 피조물은 아무것도 없다. 만물은 불 안에서 태워져 새롭게 재창조된다. 곧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