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위한 ‘회개’란 무엇인가?
1. 성경의 용어의 개념은 세상에서 말하는 우리의 상식적 수준과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용어의 개념은 지금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용어의 개념과는 다르다. 세상에서도 각 분야에서는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이 서로 다르듯이 성경은 ‘하나님의 왕국’에서 통용되는 용어의 개념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생명과 사망도 우리의 육체적 삶과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연결되어 있으면 생명이고, 단절되어 있으면 사망이다. 우리가 육체가 살아 있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면 사망이고, 육체가 죽어 있더라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또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And you hath he quickened, who were dead in trespasses and sins;
위 말씀에서 보면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과 관계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죽어 있었고(were dead, 과거), 이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살아났다(quickened, 과거) 라고 모두 과거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명과 사망을 세상에서 말하는 일반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원래 죽지 않게 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체의 사망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인 성경을 보는 관점이 잘 못 되었기 때문에 오는 오해이다.
2.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가족, 즉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생명의 노선 안에서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인 동시에 왕이고, 우리는 아들인 동시에 왕가의 자손이라는 하나님의 왕국, 즉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기록된 책이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4~15)
그 세계를 이해하려면 그 세계에 맞는 관점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고 우리가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가족관계 안에서, 즉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의 노선안에서 기록되어 있다. 같은 생명을 가진 가족 안에서는 율법이 작용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왕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본래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 곧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아담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율법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즉, 하나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된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과 아들 이재용의 예를 든다면 아들 이재용이 종업원이 되겠다고 가출한 것이다. 이것을 죄라고 하는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하기 위해 각 피조물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천사가 사람이 되겠다고 하던지, 사람이 천사가 되겠다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예들 들어 어떤 기계 제품에서도 그 부속품들의 합당한 위치가 정해져 있고 그 부속품들이 정 위치에 있어야만 기계가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데 그 기계의 부속품 중 하나가 엉뚱한데 있으면 제품을 만든 이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적 의미의 죄라는 의미는 도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각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義)라는 성경적 용어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른 위치에 있다’ 라는 의미다.
3.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사람의 운명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의 갈망은 자신을 표현할 형상(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고 자신의 영원한 생명(씨)를 이식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목표는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야 한다.(요 1:12-13, 벧전 1:23)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영원한 생명은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담은 원래 창조될 때부터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창 3;22)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창 3:22)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흙으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영에 속한 몸으로 바뀌어야 할 존재였다.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들어와 육체의 사망이 오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본성에 속한 몸은 죽고 영에 속한 몸으로 바뀌어 지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래 말씀에서도 증명된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사도행전 24장 15장 말씀을 보면 사람은 죄가 있던 없던 모든 사람이 한번 죽고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져 어떤 씨를 심느냐에 따라 자기 운명이 결정된다. 호박씨를 호박이 나고,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가 나듯이 예수 생명의 씨를 심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 사망의 씨를 심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4. 죄란 무엇인가?
우리는 회개를 하기전에 죄가 무엇이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죄를 알아야 회개를 할 것 아닌가?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일반적 상식수준에 있는 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하려면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셨던 그 위치를 지켜야 한다. 씨는 흙에 뿌려지듯이 씨-하나님은 흙-사람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는 본래 흙으로 지어져 천사보다 능력이 없고, 육체가 한번은 죽어야했다. 그런데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 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 아시느니라, 하니라’(창 3:4~5)
만물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격이 있다. 천사는 천사의 위치를 지켜야 하고, 사람은 사람의 위치를 지켜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세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위치를 이탈하면 피조세계는 혼란이 온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피조물의 위치 이탈'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천사장이었던 사탄은 하나님의 위치에 오르려다 타락했고 사람은 천사의 위치 오르려다 타락했다. 흙으로 지어진 사람이 영-신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흙이 씨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죄다.
5. 성경이 말하는 '구속(redemption)'과 '회개(repentance)'
하나님의 입장에서 타락한 아담은 어떤 상태인가? 흙으로 창조된 아담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려고 해도 이미 다른 씨가 심겨져 있어 씨를 뿌릴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씨가 심겨져 있는 아담에게 자신의 씨를 뿌리려면 밭인 아담을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한 원래의 상태로 갈아 엎어야 한다. 원래의 상태로 ‘밭을 갈아 엎는다’는 의미는 육체가 죽는다는 의미다. 이것을 예수님이 아담을 대신하여 갈아 엎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을 자신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원래의 위치로 십자가에서 회복하신 것을 ‘구속’이라고 하고 사람의 입장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위치가 사람의 원래의 위치임을 깨닫고 그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 1:14)
위치 이탈이 죄라면, 원 위치는 구속이다. 구속이 되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가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다. 회개란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인데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원래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임을 인정하고 그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회개란 말 그대로 어느 지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회개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어디로 돌아갈지도 모르고 회개를 한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자기 죄를 아무리 많이 자백해도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아닌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는 단수 죄(Sin)이고 이 단수 죄의 열매가 죄들(Sins, 복수)이 되는 것이다. 죄(Sin)라는 씨를 뿌리면 그 열매가 죄들(Sins)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 곧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도덕적인 죄들을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죄인 위치를 이탈한 죄인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인간의 원래의 위치임을 인식하고 그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단회적인 것이다.
'그들이 이것들을 듣고는 잠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8)
여기서 어떤 이들은 요한일서 1장 8-9절 말씀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일서 1장 8-9절의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단회적인 회개가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고나서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 죄를 지었을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경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백을 하면 깨끗하게 해주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Sins)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한일서 1 :8-9)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들(Sins)을 지을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죄들(Sins)을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 진다. 하나님은 이러한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대책으로 구원받은 후에도 죄들(Sins)을 자백하면 그 죄들(Sins)을 깨끗하게 해주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담의 차이라면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지키신 분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 2:8)
6. 사람의 위치(人格)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왜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가? 하나님은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목적이다. 그래서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人格)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피조물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 이것보다 우주 안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신 것이다.
사람의 위치, 곧 人格은 세상이 말하는 인격과는 다르다. 세상이 말하는 人格은 돈과 명예, 학식 등으로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人格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정해주신 것으로 이것은 결코 변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힘 안들이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기 원하신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구원을 받는 것이 그리 어렵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 흙이라는 연약함과 한번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 이것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이다. 사람의 연약함과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위치 그대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데 있다.
7. 죄에 대하여라 함은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요 16:9~10)
우리는 앞에서 죄란 ‘사람의 위치이탈’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요한복음 16장 9절에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한다.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16장 9절은 죄 이전에 근원적인 문제를 말한다고 본다.
성경이 주는 진리는 우리는 죄가 없더라고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에 속한 몸으로 바뀌어질 운명이며, 어떤 씨를 심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데 예수 생명의 씨를 심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 사망의 씨를 심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죄 문제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그렇지가 않다. 죄 용서와 영생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 아담은 처음에 무죄하였지만 영생을 얻을 자였다.(창3;22) 무죄가 영생은 아닌 것이다. 무죄는 법리적 문제지만 영생의 문제는 유기적인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도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다 말하고 있다.(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다만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함이거니와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또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 10:10)
성경이 주는 진리는 죄 용서를 위해서도 예수님이 죽어야 하지만, 생명을 주기 위해서도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레위기에 보면 예수님의 인격을 상징하는 제물이 크게 희생물(sacrifice)와 헌물(offering),로 나누어지는데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이고, 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드려진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제물의 공통점은 모두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죄와 관계없이 영생의 씨를 주기 위해 육체로 오셔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창세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전 2:7)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이 죄가 없더라고 영생을 주기 위해 사람을 위해 죽어야 했고 사람 또한 원래 죄가 없더라도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드려야만 했다. 그래야만 예수님과 연합하여 같은 부활이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죄의 원래의 의미는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다’라는 의미고 구원이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있는 것으로 생명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16장 9절에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 주는 진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이 죄가 없더라도 육체로 오셔셔 죽어야 했고 사람은 죄가 없더라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드려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오묘한 하나님의 경륜의 진리를 사람이 처음부터 받아드릴 수 있을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죄를 허용한 후 율법을 주어서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었지만, 이 율법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그러나 성경 기록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하심이라’(갈 3:22)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 3;24)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당시에 예수님을 거부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의도적인 계획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예언대로라면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드렸다면 성경의 예언상 지상에 메시아왕국이 도래하게 되고 성경은 거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되면 이방인의 구원기회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일부러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눈멀게하여 이 복음을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로 전환하여 이방인을 구원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를 때까지 일부가 눈머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생긴다는 것이라'(롬 11:25)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믿지 아니하는 데 가두어 두신 것은 친히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심이라.'(롬 11:32)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리니'(롬 11:26)
아무튼 우리의 최고 사령관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곧 무지한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방책을 강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의 낮은 생각이 어찌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갈 수 있겠는가?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느냐? 누가 그분께 먼저 드려서 다시 보답을 받겠느냐?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분께로 돌아가나니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롬 11:33- 36)
'성경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道)를 아십니까? (0) | 2023.02.23 |
---|---|
하나님께서 유대인, 곧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이유 (2) | 2022.12.30 |
십자가의 道 (0) | 2022.07.21 |
예수님과 아담의 법리적 죄명 (0) | 2022.06.19 |
두 사람 (0) | 2022.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