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1.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성경은 두 사람을 말하고 있다. 첫째 사람 아담과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다. 물론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첫째 사람에서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고전 45:46-47)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아담이 영원히 살게 되어 있었는데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육신의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육신적 사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사망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선이 연결되어 불이 들어오면 살았다 하고, 전선이 어딘가가 단절되어 불이 안들어 오면 죽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죄가 없으면 육신이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죄 없으신 예수님은 절대로 죽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반사람들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육신이 죽었다. 그러므로 죄가 들어와 육신이 죽는다는 말은 성경적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도 간단한 진리를 믿지 않는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라고 일관성 있게 말하고 있다.(요 1:12, 벧전 1:23) 만약에 아담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였다면 하나님이 두 분 계신다는 논리임으로 이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비록 천사는 죽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1회 창조로 끝나지만 사람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생을 가질 자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기에 흙으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흙으로 창조된 첫째 사람에서 영에 속한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도록 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땅에 속한 자들은 또한 땅에 속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과 같으니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고전 15:46-49)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죄가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은 다음 부활하도록 되어 있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24:15)
사람은 흙이기 때문에 어느 씨가 들어오느냐가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 하나님의 씨, 곧 예수 그리스도의 씨가 들어오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부활하고, 마귀의 씨가 들어오면 불의한 자의 부활하는 것이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3:16)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요 8:44b)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흙으로 창조된 사람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죽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신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다. 열매란 씨라는 말도 되기 때문에 첫 열매라는 말은 우리의 생명의 조상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첫 열매, 곧 씨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님과 같은 첫 열매 종류가 되는 것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하심이라.'(약1:1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씨로 태어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의 조상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씨를 소유하였기에 '형제'가 되는 것이다.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2:11)
2. 하나님의 목표는 둘째 사람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사람이다. 그것도 첫째 사람이 아니고 둘째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는 신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담이 타락한 깊은 내적 원인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하였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그 안에 영원한 생명, 곧 자신의 생명을 넣어주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반드시 흙으로 창조되어야 했다. 사람이 흙이라는 의미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되었지만 필연적으로 종의 운명으로 창조된 천사보다 약하게 창조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
성경에서 천사는 신으로 불리며 영적인 몸을 가지고 있기에 죽지 않고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전쟁의 기본은 나의 강점을 가지고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로서 자신의 강점을 가지고 아담의 약점을 공격하였다. 한번 죽을 수 밖에 없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는 날에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속인 것이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 3:4-5)
그래서 지금도 타락한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는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특히 이러한 것은 이단 교주들의 공통점에셔 찾을 수 있는데 전부 자신이 죽지 않는 신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의 운명으로 만들었지 신(천사)로 만들지 않았다. 천사는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는 수 만큼 충분히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아담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하나님이 정해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그래서 아담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자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시면서 인간의 근원적 위치를 물으신 것이다. 위치를 이탈한 인간은 지금도 자신이 신도 아니면서 신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누룩있는 빵인 유교병을 받지 않고 누룩없는 빵인 무교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도 아니면서 신인척 부풀려진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 유교병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도 아니면서 신인척 하는 유교병과 같은 비정상적인 사람에서 무교병과 같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교병과 같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만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신도 아니면서 신인척하는 아담은 하나님의 목표에서 빗나갔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다. 예수님은 바로 신도 아니면서 신인척하는 아담을 대신해서 심판받았다.
예수님 당시도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고 물위로 걸어가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하는 기적을 행하자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사람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제자들 마저도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예수님을 버리고 가버렸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신적인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인간의 근원적 위치인 무교병의 위치로 돌아왔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한 지점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하는 신적인 지점에서 구속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하였다. 즉 인간이 흙이라는 하나님이 정해준 인간의 근원적 위치에서 우리를 구속한 것이다. 구속이란 원래의 위치로 되돌린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위치를 이탈한 인간을 원래의 위치로 옮긴다는 의미로 ‘구속’이라고 하고, 사람의 입장에서 인간의 잃어버린 원위치를 발견하고 그리로 돌아간다 의미로 ‘회개’라고 하는 것이다.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었으나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창3:19) 하셨다. 이 말은 아담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사람은 무엇을 해도 흙이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담은 흙인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하나님은 첫째 사람 아담을 흙으로 만든 다음 생명을 이식하여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도록 정하였지만 아담은 이 운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사탄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위치에 오르고자 하였고, 사람은 이탈자인 사탄에게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천사)의 위치에 오르고자 하였다. 노름꾼은 또 다른 노름꾼을 만들 듯이 이탈자는 또 다른 이탈자를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준 피조물의 위치 이탈, 이것을 죄라고 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창3:19) 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유사이래 가장 신과 같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모든 사람은 신이 될수 없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확증된 것이다. 1등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2등부터는 도전하나 마나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안에 모든 인류가 포함된 것이다. 사람은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은 거짓이고 사람은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완전하게 확증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진실로서 거짓을 이긴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다.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준 한번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창조된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여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오르신 분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2:8)
왜냐하면 하나님은 흙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생명의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있었기에 여기에 순응하신 것이다.
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신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죽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목표가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와 같이 사람들은 사람이신 예수님보다 신적인 예수님을 추구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사람에게 있고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라는 것은 조상이라는 의미다. 아담이 옛 창조의 조상이라면 새 창조의 조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새 사람을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 3:10)
성경은 일관되게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한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을 칭할 때 줄곧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실상은 모르는 것이다. 개가 사람을 알 수 없듯이 사람이 신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의 주(조상)이 되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으로만 안다면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의 주라는 것은 생명의 조상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은 십자가에서 죽을 수가 없기때문에 우리를 구속할수 없다. 성경은 일관되게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은 창조물이다. 그래서 성경은 심지어 예수님을 창조물이라고 까지 한다.
‘그분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의 처음 난 자이시니’(골1:15)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창조물이라는 의미다. 정확한 성경적 관점은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창조물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분의 인격적인 부분이다. 요한일서는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라고 주장하는 소위 영지주의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이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그것에 관하여는 그것이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그것이 지금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신은 사람을 구속할 수 없고. 사람이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의미는 값을 치루고 되찾아 온다는 등가의 의미가 있다. 잃어버린 사람을 되찾아오려면 같은 사람으로서 값을 치루어야 한다. 그래서 타락한 아담을 구속하려면 예수님은 반드시 아담이어야 한다.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천사는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사람과는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을 구속할 수가 없다. 아울러 사람에게 생명을 주려면, 곧 사람의 조상이 되려면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신은 사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개념이 없고 신적인 예수님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타락한 아담의 깊은 내적 원인에 기인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신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 2:5)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분으로서, 곧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며(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히 1:3a)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라는 의미는 ‘말씀이 육신되었다’는 의미와 같이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다면 바로 이런 사람(인격)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몸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목표는 몸을 갖는 것이다. 이 몸으로 사람을 창조한 것이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류인 우리들의 조상인 동시에 형제인 것이다. 사람의 형제는 사람이지 신이 사람의 형제가 될 수 없다.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2:11)
결국 성경의 핵심은 두 사람을 말하고 있는데 어느 사람에게 속해 있느냐가 관건이다. 첫째 사람 아담 안에 속해 있는냐, 아니면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느냐? 이다.
'성경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의 道 (0) | 2022.07.21 |
---|---|
예수님과 아담의 법리적 죄명 (0) | 2022.06.19 |
성탄의 의미 (0) | 2021.12.27 |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0) | 2021.12.26 |
사무엘상 28장 ‘부리는 영들(familiar spirits)’ (0) | 2021.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