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기독교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승리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승리 하세요’ 라는 덕담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적으로 보면 전쟁에서 죽었다면 패한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왜 승리인지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것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지 못하면 나의 구원도 헛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자가 이기는 자이며(요일 5:5),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상속이 약속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계 21:7)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요일 5:5)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니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계 21:7)
그럼에도 ‘이기는 자’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제시해 못해 여러 이단들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인 이기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해 성경적 해답을 찾아 보자.
1. 영적전쟁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지식들
사람의 위치(格)
창조자는 각각의 피조물를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니고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면서 각각의 피조물에 격(格)을 부여하였다. 사람은 인격으로, 개는 개격으로 천사는 전사격으로 나무는 목격으로 창조했다. 그러므로 죄란 피조물이 창조자가 정해준 격을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인격을 이탈하여 천사가 되겠다고 하던지, 천사가 사람이 되겠다고 하든지하는 것을 죄라고 한다. 성경에 의하면 사탄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하였고, 사람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천사(신)가 되려고 하다고 타락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적 의미로 죄라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의 격, 또는 목적을 이탈하다라는 의미고, 의(義)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른 위치에 있다라는 의미다.
사람의 위치, 곧 격이란 무엇인가? 피조물의 위치이고 기점이다. 기점이 없는 인생은 늘 흔들리게 되고 어디로 갈지 모른다. ‘처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느니라.’(창1:1) 라는 말씀은 우주 안에서 우리의 기본적 위치가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이것만을 인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창조자는 피조물에게 각자의 위치-격(格)을 부여한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피조물에게는 창조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성경에서 위치 곧 '자리(seat)'는 히브리어 베텐(beten)에서 기원한 태(womb)라는 의미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리, 곧 위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위치를 떠나면 사망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할 나무가 뿌리가 뽑혀 위치를 떠나면 사망이다. 물고기도 물속을 떠나 자기 위치를 이탈하면 사망이다.
그러나 사람의 위치는 이런 장소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실재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첫 번째로 피조물로서 흙-여자의 위치에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씨로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아들의 위치에 있고, 세 번째로 이 아들이 자라서 결혼할 위치에 오면 신부가 되고 아내가 되는 위치에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실제적 위치는 우리가 부활한 후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공통적으로 사람은 흙으로서 씨가 아니고 씨를 받을 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위치에 있는 아담은 만들어졌다.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아담은 만들어진 위치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위치에 있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은 사탄이 훼방할 수 있으나 거듭난 생명은 사탄이 훼방할 수 없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므로 어떤 피조물이라도 훼방할 수가 없는 것이다.(롬8:38~39) 그러므로 일부 주장처럼 사람이 처음에 영원한 생명을 가졌었는데 죄로 인해 영생을 잃었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사람은 흙-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 지음받았다. 그러나 영으로 지음받은 천사는 제한을 받지 않는 존재다. 타락도 사람이 먼저가 아니고 사탄과 그의 천사가 먼저고, 사람의 타락도 사람 스스로가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보는 관점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타락했다면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 없다. 우리 스스로 헤치고 나오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마13:28)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그래서 구원자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천사처럼 영이라는 제한을 갖지 않은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고 흙-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존재로 천사보다 낮게 창조되었다.(히2:9) 흙-육신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씨-영원한 생명이 뿌려져야할 위치다. 이 위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지켜할 위치다. 왜냐하면 씨의 절대적 소망은 흙에게만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위치(人格)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고정된 것이고 변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으냐?(창3:9)’라고 물으신 것이다. 이것은 아담이 실제 위치한 장소를 물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물으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의 대적 사탄과 비교해서 사람의 위치는 ①능력이 없고, ②육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능력없음과 육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씨, 곧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완전하게 창조됨
비록 사람은 천사보다 능력이 없고 육신이 죽을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완전하게 지음 받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람이 죽을 존재로 창조된 것에 대해 불완전하게 창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적 의미의 완전은 천사처럼 죽지 않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연합을 완전이라고 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어른이 된다고 하듯이 성경적 완전이라는 의미는 신랑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에 있다. 그래서 노아는 당대의 완전한 자였고,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완전한 자라고 하는 것이다.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창 6:9)
그러므로 우리 완전한 자들은 다 이같이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서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드러내시리라.(빌 3:15)
사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도록 완전하게 지음 받았다. 성경에 의하면 세상은 종교와 정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종교와 정치의 근원도 아담의 타락으로 기인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위임하신 3중 직분이 있다. 존재적 생존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하는 대언자의 직분이 있고 이 말씀을 먹고 외부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직분과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직분이 주어졌다. 이 직분은 모두 영적인 직분이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 근원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생명은 영적인 것에 있다. 그런데 위치를 이탈한 아담의 세계는 대언자의 직분을 포기함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 대신 육신적 양식에 몰두하였고, 제사장과 왕이라는 직분이 오도되어 세상의 종교와 정치가 되었다. 세상은 한마디로 빵과 종교와 정치라 할 수 있고 타락한 현 세상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양분하게 된 것이다.(계17,18장) 그래서 현 세상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통합되면 무소불위가 된다. 창세기 11장의 바벨론과 고대 국가는 거의 모두가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국가로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에는 로마 카톨릭이 그랬고 현대에 와서는 중동의 일부국가와 북한이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국가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간단하다. 종교와 정치이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한 후 맨 먼저 종교를 만들었고, 그 이후 도시를 만들었는데 이는 사회로서 정치이다.
전쟁의 기본 원칙
전쟁의 기본 원칙은 나의 강점을 가지고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사탄도 천사의 동류로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과 죽지 않는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에 비해 자신의 강점인 이 2가지를 가지고 아담의 약점을 공격하였다. 아무튼 영적 전쟁의 핵심은 위치 전쟁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는 것이 승리고 이탈하면 패하는 것이다.
2. 우주안의 3대 위치 전쟁
1차 위치 전쟁(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사탄에게 패함
첫 번째 전쟁에서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길을 부끄러워하여 사탄에게 패배하므로 사람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하게 되었다. 첫 번째로 사탄이 유혹한 말은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창3:5) 했는데 ‘신들과 같이 되어’ 라는 말의 의미에는 천사들의 ‘능력’을 추구한다는 말이고, ‘선악을 안다’ 는 것은 지혜를 말한다. 이것은 종교-신과 정치-지혜를 대표하는 말이다.(고전1:22) 즉, 종교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된다’라는 의미이다. 성경에 의하면 신들은 천사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다.(창 6:2, 욥 1:6) 또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선악을 아는데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의미는 하나님은 재판장으로서 만왕의 왕이니까 정치 안에서 왕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원래 사람은 사람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왕이 되어야할 존재인데 종인 천사의 위치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왕이 될 수 있다고 사탄이 유혹한 것이다. 사람의 위치에서가 아닌 천사의 위치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아담을 속인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결과 사람의 목표는 종교 안에서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되는 것인데 이는 표현만 다를 뿐 둘 다 같은 의미이다.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국가에서 왕이 곧 신이었듯이 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목표는 똑 같다는 것이다.
이 세계를 성경은 바벨(세상)이라고 하는데 종교 안에서는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는 왕이 되는 것이 타락한 인류의 꿈이다. 모두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타락한 인류의 소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선악과를 먹고 신이 되기 위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세상에는 사람이 없다고 보신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궤도를 이탈한 기차가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혼동이듯이 세상을 바벨, 곧 혼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세상 왕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짐승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사람 이상인 신이 되고자 했으나 결코 사람은 신이 될 수 없고 사람이하인 짐승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목표는 사람 이상인 신이 되고자 하던지 사람 이하인 짐승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 성경의 계시이다. 또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속성은 숭배할 신(神)을 찾던지 조롱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사람인 예수님이 나타나자 어떤 이는 신으로 숭배했고, 또 어떤 이는 조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사람인 예수님을 믿어야지, 신인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같이 되고자 한다면 헛된 믿음이다.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세상은 예수님을 믿되 참사람으로서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신인 예수님만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빗나간 것이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들어왔나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런 자가 속이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라(요이 : 7)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인격적인 예수님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어떤 면을 추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람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정상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정상적인 사람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2차 위치 전쟁(광야) : 예수님의 인격회복(구속)의 전초전
사람의 위치를 잃은 사람에게 우주 안에서 가장 큰 비밀이 있다면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의 원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잃어버린 사람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이다. 영적전쟁의 핵심은 위치(格) 전쟁이다. 우주 안의 두 번째 전쟁에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위치를 당당히 지켜 사탄과의 최초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을 보고 알게 된다. 창세기 3장과 마태복음 4장, 누가복음 4장의 내용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속은 것이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을 되찾기 위해 아군의 장수로서 적장인 사탄과 마주하게 되었다. 본디 사람과 땅은 하나이기에 인격을 되찾으면 땅도 되찾는 것이다. 이 전쟁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전쟁과 같은 것이다. 최초진지를 돌파해서 교두보를 확보해야 이를 발판으로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예수님은 사탄에게 빼앗긴 인간의 영광을 되찾아 와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①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느냐? 하나님 말씀으로 사느냐?
그 시험하는 자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령하여 이 돌들이 빵이 되게하라, 하거늘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3~4)
첫 번째로 돌로 빵을 만들어 먹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인가? 이 전쟁이다.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는 것은 능력이다.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는 능력은 사람에게 아직도 없다. 무기물이 유기물 되는 법은 아직도 없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 비유를 들어 계시를 하고 있을까? 이것은 사람 속에는 돌로 빵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계속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아담이 사탄에게 유혹 받을 때, 이 능력 때문에 유혹 받았다. 돌로 빵을 만든다는 것은 능력이다. 능력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인가? 이 문제이다. 이 문제에서 아담은 실패했고 예수님은 이 문제에서 승리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인격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 연합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인격이다. 인격은 돌로 빵을 만들어 먹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격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그것이 인격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다.”라고 사람의 위치를 보여주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위임하신 대언자로서의 직분의 위치를 지키신 것이다.
② 세상의 영광이냐? 하나님께 경배 하느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심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그분께 보여주며 마귀가 그분께 이르되, 이 모든 권능과 그 왕국들의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그것이 내게 넘겨졌으므로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리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경배하면 네 것이 되리라,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4: 5-8)
두 번째, 사탄은 세상왕국의 영광을 보이고 이르되 내게 절하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들에게 주겠노라고 했다. 세상의 영광이냐?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냐? 이것이다. 세상의 영광이 인생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인생의 몫이냐? 그것이다. 세상의 영광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람이다. 사탄은 항상 사람이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신이라는 말이다. 네가 신이라면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는 말이다. 네가 하나님이라면 내게 절해봐라. 그러면 세상 영광을 내가 주겠다. 이렇게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영광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 경배할 것인가? 이 문제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입장을 취했다. “나는 사람이 되겠다. 나는 사람으로 살겠다.” 이렇게 답했다. 세상의 영광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이 두 가지를 놓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택하자 마귀가 물러갔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심으로 신인 마귀에게 승리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제사장의 직분을 지키신 것이다.
③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냐?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냐?
그가 또 그분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그분을 세우고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대한 책무를 주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매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4: 9-12)
세 번째 시험은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에게 순종할 것이냐? 이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너희를 보호해줄 것이다. 네가 ‘사람이라면’ 이라고 말하지 않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마귀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는 영적존재이니 여기서 뛰어내려도 안 죽는다. 너는 육신을 가진 약한 존재이니 뛰어내려보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죽는 존재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면 내가 성전 꼭대기에서 던져지더라도 내가 하나님만 표현 한다면 천사들이 와서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십자가에 달렸다. 그래도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만 표현하면 천사들이 항상 보호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은 ‘주 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였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죽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자기가 받은 대로 살고 명령대로 순종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나를 인생으로 지어놓았으면 그대로 살아야 되고, 내가 떨어져 죽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대로 순종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질문했는데, 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부끄러워서 아담은 사탄에게 졌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내놓고 승리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인격)으로서 신인 마귀를 이겼다. 이 위치전쟁에서 예수님의 승리로 아담이 잃었던 인격을 회복하자 마귀는 물러갔고 천사들이 와서 섬겼다.
이에 마귀가 그분을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니라(마4:11)
이것은 무엇인가? 우주 안에서 사람의 위치가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만물의 머리로 창조된 사람이 제 위치를 찾으면 우주질서가 제 위치를 찾는 것이다. 본래 천사는 사람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 사람이 제 위치를 찾자 천사가 와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섬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진실을 보여주셨다. 사람은 돌로 빵을 만들 수 없는 것이 사람이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죽는 것이 사람이며, 사람은 하나님만을 경배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격이다. 이 격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가 질문한 핵심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이것이 결국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했던 질문이라는 것이다. 사탄이 ‘이 돌들로 빵을 만들어 봐라.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봐라’. 이것은 ‘사탄인 나는 능력이 있어서 돌로 빵을 만들 수 있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안 죽는데, 사람인 너는 할 수 없지 않느냐, 사람인 너는 신인 내가 부럽지 않느냐?’ 하면서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사람이신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이 될 것이다’ 라는 창세기 3장 5절의 사탄의 유혹과 같은 말이다. 또 ‘내게 경배하면 이 세상영광을 주겠다.’ 이 말은 이 세상 왕을 시켜주겠다. 이런 의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의 사탄의 유혹이나, 마태복은 4장의 사탄의 유혹이나 같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한 3중 대위 직분은 대언자, 제사장, 왕의 직분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말씀을 먹고 사는 대언자 직분,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 세상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영광으로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는 왕의 직분을 위임 받았다. 사탄은 이 3중 직분을 버리도록 아담을 유혹해서 성공했지만 예수님은 이 3중 직분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끝까지 계신 것이다. 아담은 인생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할 대언자의 직분을 빵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인생의 약점을 파고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육신의 정욕과 바꾸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직분을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리면 죽지 않는 사탄의 능력이 부러워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으로써 종교적인 능력인 안목의 정욕과 바꾸었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왕의 직분을 사탄이 제시하는 세상영광이 부러워 그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정치적인 인생의 자랑으로 바꾸어 놓았다.
창세기 3장 6절에서도 선악의 지식나무를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라고 한다. 이 말씀이 결국은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한 말과 같은 말이다. 먹기에 좋다는 말은 빵의 문제로 생존의 문제이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다는 말은 능력의 종교의 문제다. 지혜롭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가 지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정치를 대표하는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한다.(고전1:22) 지혜만 있다면 세상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탄이 유혹하는 이 말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빵, 능력의 종교, 세상영광의 정치를 가지고 유혹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3중 직분인 대언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으로 바꾸었다.(요일2:16) 그러므로 사탄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사람의 3중 직분을 회복하는 것이 인생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계에서는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에서 예수님이 승리한 이유를 예수님이 ‘말씀’을 암송(인용)해서 이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탄과의 전쟁 무기가 말씀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 없이 말씀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승리하면 되지 않았겠는가? 또 우리가 마귀에게 승리하려면 성경을 다 외워야 하는가? 만약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외워야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그것은 보편적인 사람에게는 복음이 아니고 저주이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이 없이 예수님이 이 땅 오셔서 마태복음 4장과 같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때도 말씀을 인용해서 마귀에게 이겼다고 하겠는가? 만약에 지금처럼 말씀을 인용해서 이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방종교의 부적과 같고 주문과 개념이다. 그렇다고 말씀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존재자체로 마귀에게 승리하기를 원한다. 말씀이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이다. 곧 예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지라고 주신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 말씀을 암송하고 인용했더라도 그 말씀이 내 생명이 되지 않았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말씀은 어떤 원리가 아니다. 컴퓨터에 입력하면 기계적으로 그것이 똑 같이 반응하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콩을 먹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이 소화가 안 되어 그대로 똥으로 나왔다고 하면 그것은 내 생명이 안 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안 된 것이다. 말씀이란 우리가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목표는 예수님이 말씀과 한 덩어리, 곧 말씀이 육신이 되었듯이, 말씀이 생명이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되라는 것이다. 기계적인 것이 아닌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똑 같은 반응을 한다. 그러나 인격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을 인용해서 마귀를 이겼으니 우리도 우리의 어떠함에 관계없이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와 전쟁하면 마귀가 물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말씀 따로 그 사람 따로 있으면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소화해서 내 생명이 되면, 내가 그 인격이 되면 자동적으로 마귀를 이기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어떤 기계적 원리가 아니다. 잘 못 오해하면 기록된 말씀은 변개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찌 보면 율법과도 같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거짓말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어떤 상황 하에서도 자기 자녀에게 아주 정직한 부모가 된다고 하면 그 부모는 아주 무서운 부모가 되는 것이다. 또 그런 자녀가 된다면 무서운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인격은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인격적인 분이다. 성경은 어떤 곳에는 결혼하라고 되어 있고, 어떤 곳에는 결혼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곳에는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어떤 곳에는 시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과를 먹는 그날에 반드시 죽으리라했다.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인생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죄들을 보고 한탄하시고 다시는 백성을 보시지 않겠다고 하시지만 또 다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섬기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건져내지 아니하리라.’(삿10:13)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분의 혼이 이스라엘의 고통으로 인하여 괴로워 하니라’(삿10:16)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으로부터 건져내시지 않았는가? 건져내셨다. 구약성경은 이런 과정의 반복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것을 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 이것을 기계적으로 인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말씀과 사람이 분리되어 말씀을 주문처럼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다. 우리도 말씀을 기계적으로 인용하면 안된다. 성경에 이렇게 기도해서 응답받았으니 우리도 이렇게 하면 응답받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기계는 입력한데로 출력되지만 인격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우리도 다르지 않은가? 자녀들이 요구한다고 다 주는가? 요구해도 안 줄 때도 있고 요구하지 않아도 줄 때도 있는 것이다.
영적전쟁의 핵심은 위치전쟁이다. 예수님은 말씀이라는 수단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인격이 된 존재 자체로 승리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마귀에게 승리하길 원치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승리하길 원하신다. 우리 존재 자체로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다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인 사람을 그렇게 어렵게 살도록 만들지 않았다. 쉽게, 땀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3차 위치 전쟁(십자가) : 예수님이 인격회복(구속)을 완성하심
마태복음 4장의 위치전쟁은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이 땅을 정복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 전쟁이었다면 이제 최종적으로 사탄을 멸하고 이 땅에서 사탄을 멸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이 십자가에서의 최종 위치전쟁이다. 이 전쟁은 다른 말로 하면 진실 Vs 거짓의 싸움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고 예수님은 진실이시기 때문이다. 위치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진실을 보여주자 거짓의 아비 마귀가 물러갔다. 마귀는 우리가 소리 지른다고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사람의 진실을 보여주면 물러가는 것이다. 거짓은 진실 앞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사탄과 예수님의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전쟁에서 예수님이 승리했지만 아직 인격을 완전히 회복(구속)하지 못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정해 준 인격은 천사와 비교했을 때 사람의 운명은 능력 없음과 육신의 연약함, 그리고 죽음이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인격의 일부분인 사람의 능력 없음과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인생의 위치-운명은 회복하였지만 인생이라면 모두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위치-운명은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마귀와의 최초전쟁은 교두보 확보 전쟁과 같은 개념이다. 예를 들어 6.25 전쟁 시에 북한군은 남침을 개시하여 낙동강 방어선까지 쳐들어 왔다. 이때 유엔군은 빼앗긴 땅을 수복하기 위해 인천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빼앗긴 나머지 땅을 회복하였듯이 예수님도 최초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교두보를 확보해야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디 사람과 땅은 하나다.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이 회복되면 땅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 18절에 보면 예수님이 마귀와의 최초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하늘 왕국을 선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8)
누가복음 4장 13절에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마치고 한동안 그분을 떠나니라.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대적 마귀가 멸망하지 않고 잠시 물러간 것이다. 최초진지에서 패하여 다음 방어선으로 후퇴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님과 적장인 사탄과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위치전쟁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인격 중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인 죽음을 회복(구속)하지 않았다. 아담은 최종적으로 자신에 주어진 운명인 ‘죽음’을 두려워하여 마귀와 전쟁에서 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인생의 최종적 운명(인격)을 완전히 회복(구속)하기 위해 죽음의 권능을 가지고 사람을 송사하는 자 마귀와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놓고 일전을 벌일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전쟁이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과 정치를 대표하는 빌라도 앞에서 심사를 받았다.
이에 그들이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라고 너희가 말하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직접 그의 입에서 들었은즉 어찌 우리에게 증인이 더 필요하리요? 하더라(눅22:70-71)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 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곧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하노라.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그가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로 나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노라. 하더라.(요18:37-38)
여기서 보면 핵심 질문은 3가지이다. 예수님을 앞에 두고 세상 종교의 대표자인 유대인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렇게 물었고, 세상 정치를 대표하는 빌라도는 ‘네가 왕이냐?’ 그리고 ‘진리가 무엇이냐?’ 이렇게 물었다. 이 질문은 아담 안에 있는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목표는 종교 안에서는 신(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는 왕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같은 의미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아담에게 했던 질문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람의 진실-위치를 잃어버린 인류의 궁극적 질문은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린 인생의 최종 운명인 죽음을 되찾아 오시기 위해 이제 십자가 앞에 섰다. 이 전쟁이 결국 인류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최종 전쟁이다. 여기서도 사탄은 여전히 유대인과 빌라도를 이용해 자신이 에덴동산과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에게 했던 질문을 또 다시 하면서 사람이신 예수님에게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마태복음 27장 40절에서는 마귀를 대신하여 지나가던 자들이 다음과 같이 조롱하고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 27:40)
즉 지나가던 자들이 마귀를 대신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말은 네가 신이거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이 조롱을 못 견디고 인간의 위치를 이탈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길을 벗어나 다 자기 길로 갔기 때문에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롬 3:10~12)
이제 십자가 앞에 선 예수님은 유대인과 빌라도, 그리고 조롱하는 자들의 얼굴에서 사람을 조롱하는 마귀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럴수록 예수님은 인류를 하나님이 처음 창조할 때의 정해주신 격으로 회복-구속시켜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목적대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셨을 것이다.
오직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고 그 격에만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은 흙이고 벌거숭이고, 빈 그릇으로 창조되어 그 격에서만 하나님의 생명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빗나간 인생에게 씨-생명을 뿌리고 싶지만 다른 씨가 뿌려져 있기에 씨를 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어 주신 격으로 돌아와야 될 절대적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몸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이고 온 인류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하나님이 처음 만들어 주신 격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목표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위치를 이탈하여 사탄의 밭이 되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운명에 만족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빌2:8) 인생의 격을 지켜 마귀와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아담이 빼앗긴 사람의 격(人格)을 되찾아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이 빼앗긴 사람의 위치를 다 찾아오셨기에 즉 구속의 범위를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러므로 이것이 완전한 승리이다. 예수님의 승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의 운명적 위치를 가지고 승리한 것이기에 인류 보편적 승리이다. 그래서 그분은 전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구약에서의 위치전쟁
신약만 위치전쟁인가? 아니다 구약도 위치전쟁이란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아담은 위치를 잃어버리자 땅도 잃어 버렸다. 성경에서 땅과 사람은 하나다. 사람이 없으면 땅도 필요 없다. 땅은 변개할 수 없는 인격을 예표 한다. 그래서 인격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유이듯이 성경은 땅은 영원히 팔수 없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한다.(레 25:23)
땅을 영원히 팔 수 없나니 땅은 내 것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요, 나와 함께 머무는 자니라.(레25:23)
구약은 실재가 아니고 모형이고 그림자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이라는 위치를 정해주셨다. 가나안 땅은 무엇인가? 우리가 변개할 수 인생의 위치를 예표한다. 이 위치를 떠났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환난을 당했다. 아브라함은 기근으로 인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자기 아내 사라가 파라오의 집으로 데려감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였다.(창12:15) 이와 같은 일은 또 다시 반복된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나 그랄에 머물 때 블레셋 왕 아비멜렉 앞으로 아내 사라가 불려가는 수모를 당한다.(창20:1) 또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와 같이 가나안 남방 그랄로 내려갔다.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아비멜렉에 의해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사라와 같은 처지를 당할 뻔하였다. 하나님은 이 세 번의 위기에서 사라와 리브가가 더렵혀지지 않도록 모두 구해주셨다. 이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이삭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두 여인들은 교회의 예표이자 인류를 예표한다. 곧 인격을 예표한다. 사람의 위치는 하나님께 대하여 아들의 위치와 궁극적으로 아내의 위치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의 씨만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라와 리브가의 위치를 섭리적으로 지켜주신 것이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 다섯 여자들의 위치도 하나님의 아내로서 인류를 예표한다. 이 여인들의 행위는 선악과를 먹은 도덕적인 관점을 가진 세상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할 여인들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 여인들의 운명은 자신들의 어떠한 처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의 씨-생명을 받아 아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46장에서 야곱의 일가 일흔 명은 기근이 들자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갔다. 결국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었지만 노예가 되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15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 경고한 말씀이었다.
그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확실히 알지니 네 씨가 자기들의 소유가 아닌 땅에서 나그네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년 동안 네 씨를 괴롭히리라.(창15:13)
이스라엘은 이 위치를 떠나면 항상 환란이 왔다. 결국 구약의 역사는 무엇인가? 이 위치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노예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위치를 찾아주시기 위해 모세를 내세워 출애굽을 통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가나안 수복전쟁에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러니까 성경은 세상의 도덕적인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한 생명의 관점에서 보아야 이해가 된다. 하나님과 인생의 세계는 율법의 세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세계는 선악의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내 목적을 버리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정해 주신 인격 안에만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왜 그토록 자기들의 영토회복을 위해 노력해왔는가? 여기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이 있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탈출 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래 정해주신 위치, 곧 가나안 땅으로 복귀시키고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셨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왕국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바벨론에게 정복 당하고 3차례에 걸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일어났다.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배역함으로 하나님께서 주변 강국을 통해 징벌하신 것이지만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위치를 이탈한 결과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정복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귀환시키심으로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인격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2천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영토, 곧 위치를 회복하는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인격은 절대적으로 변개할 수 없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인격은 땅과 같다. 땅은 씨가 아니다. 땅은 씨가 필요하고 씨는 땅이 필요하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세상의 다른 모든 나라는 고대로부터 자신들의 영토를 변동없이 그대로 가지고 있는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만은 변동이 없는가? 이것은 그들의 땅의 위치가 변개할 수 없는 사람의 위치, 곧 인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씨-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흙-사람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인격은 변개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떠한 상황과 조건 하에서도 인생으로 지켜할 위치라는 것이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뜻을 접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신 것이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4. 이기는 자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우리는 앞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라는 살펴보았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하셨음을 살펴보았다. 사탄과 사람의 전쟁에서 전쟁의 수단은 총, 포가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사탄도 자신의 격을 이탈하여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고, 일부 천사들 중에도 자신의 격을 이탈하여 사람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다.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속아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길은 하나님 정해주신 피조물 자신의 격을 지키는 것이고 이 격을 지켜 생명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도 그분 안에서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 들이 생명의 노선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법리적인 대속의 은혜의 관점에서만 바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희생물에만 국한 시키고 헌물의 의미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이지만 헌물은 유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십자가를 ‘법리적인 대속’의 의미로만 받아 들여 예수님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에 대한 계시가 가려져 있다. 모든 만물에는 생명의 과정이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법칙은 땅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신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에게만 이 법칙이 예외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우주 만물의 생명의 원리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만물은 거듭남이 없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끝난다. 천사도 씨-영으로 창조되어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그래서 1차적 창조로 끝난다. 사람만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씨-하나님으로부터 씨를 받아 다시 태어나야하기 때문에 흙-사람으로 창조된 것이다. 흙-사람의 위치, 이 위치에 있는 자를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시고 이 위치에 있는 자만이 생명의 길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담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었다면 아담은 이 길을 이탈했다는 것이다. 씨-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흙-사람의 위치를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자를 원망하는 것이고 창조자의 안식을 방해한 것이고 사망의 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늘 흙-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고 원망했다. 항상 흙-육신 때문에 안 된다고 했고, 어떻게 하면 이 육신을 벗어나고자 애썼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흙-육신이 이렇게 고귀하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인생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고 인생의 영광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인격을 찾은 것이다. 예수님은 아담이 버린 그 인격을 죽기까지 지킴으로 생명의 길 안에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오르셨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고 승리의 길이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을 지킴으로 이기는 자가 되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분의 인생의 최종열매, 곧 죽으심과 살으심이 생명나무의 열매다. 이 열매를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은 성경에 흐르는 일관된 진리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이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승리를 믿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사람으로 만드셨지 씨-신으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람이신 예수님은 신인 사탄에게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심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기는 자에 대해서 요한일서와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 승리는 바로 사람이신 예수님의 사탄에 대한 인격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요일 5:5)
‘...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에게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계2:11)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니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계21:17)
성경에서의 승리, 곧 이기는 자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흙이다. 씨의 소망은 무엇인가? 열매다. 씨가 열매를 얻으려면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하다. 그래서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원하고 있다. 흙이란 생명이 없다. 사람이 흙의 위치를 지켜야만 하나님께서 씨를 뿌려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한 이 진리를 외면하고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 예수님을 믿더라고 근원이 불분명하니 열매가 없고 가다가 언젠가는 다른 길로 갈 가능성이 있다. 사실 기독교인들 중에 종교통합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의 근원이 불분명한 것도 한 원인이다. 믿음의 근원이 불분명하니 타종교와도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의 근원이 흙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타종교는 대부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사람이 어리석어 잃어버렸다고 한다. 만일 사람이 원래 영생이 있었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영생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승리,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아담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사망의 길로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승리하시고 생명의 길을 회복하시자 사망의 권능을 가진 자 사탄을 조롱하면서 생명이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5:55~5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십자가의 의미에는 표면적으로는 아담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심판인데 내용적으로 보면 사탄에 대한 승리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사탄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인격의 승리라는 것이다. 아담은 인격을 이탈하여 신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인격을 지켰다. 죽음이라는 심판을 통해 생명의 길을 택하신 것이다. 겉모습은 아담으로 죽으셨지만 내용은 아담이 아니다. 아담이 인격을 이탈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격을 지키신 것이다. 인격을 이탈하면 사망이고 인격을 지키면 생명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사망이나 내용적으로 보면 생명이다. 그런데 아담은 원래 영생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의 죄만을 대속하여 죽으셨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승리가 되고, 어떻게 대속이 생명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믿으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속으로 인한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대속은 죄의 용서지 구원, 곧 생명의 거듭남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을 위한 희생물로 드려진 동시에 인생의 원래의 위치인 헌물로 드려진 것이다. 어떤 헌물도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지는 제물은 없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다. 이것을 거부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계시가 닫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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