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예수님과 아담의 법리적 죄명

올더스조에 2022. 6. 19. 09:47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사탄이 만든 종교는 사람에게 끝없는 열심을 요구하지만 여기에는 구원이 없다.  우리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사실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열심히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죽었다.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격을 살아내는 것이지 어떤 교리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의 인격이다. 그러나 종교는 형식과 규례를  열심으로 지키게 한다. 그래서 어떤 종교이든 열심히 하면 할수록 사람을 죽이게 된다.  성경은 종교를 글자의 사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글자는 인격적 융통성이 없기 때문에 죽이는 사역이라고 한다.

'.....글자의 사역은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 3:6)

 

이와같이 예수님 당시 율법이라는 글자의 사역하에 있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처형한 공식적인 죄목은 안식일을 범한 죄와 신성모독 죄였다.

 

‘유대인들이 이런 이유로 더욱더 그분을 죽이려 하니라.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더라.’(요5:18)

'유대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요 신성모독 때문이니 곧 사람인 네가 네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니라,' (요 10:33)

'유대인들이 그에게 응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거니와 우리 법에 따라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하리니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요 19:7) 

 

사실 이 죄는 아담이 먼저 범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다고 하시면서 안식하셨다.(1:31~2:2) 그러나 아담은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3:5~6)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이라는 위치를 이탈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제기한 것임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된다. 그래서 인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는 같이 붙어다니며 둘다 죄의 값으로 사형이다. 

 

'엿새 동안은 일하되 일곱째 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요, 주께 안식하는 안식일이니 누구든지 그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라.'( 출 35:2)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반드시 돌로 그를 칠지니라. 타국인이든지 그 땅에서 태어난 자든지 주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 24:16)

 

일반적으로 살인을 한 자를 죽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있지만 안식일을 어긴 자를 죽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죽이라고 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어긴 죄가 곧 신성모독 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하여 이 두 가지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죄목으로 처형하였는가?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바른 영적지식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분의 목표는 항상 영에 있고 영이 살리는 것이고 생명이다.(요6:63)

고린도후서에 ‘....글자의 사역은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3:6) 라는 말씀이 있다. 유대인들은 성경말씀을 거의 다 암송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드려 예수님을 죽였다. 안식일의 완성자 임에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니까 안식일을 어긴 죄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로 알고 있었기에 신성을 모독한다고 사람-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글자의 사역으로 인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성경이 역설적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 처럼 기독교 역사에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참으로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리라.’(요16:2)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다음 부활을 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주님을 붙잡고 ‘꾸짖기 시작하여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 이다’(마16:22)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마16:21) 하셨다. 베드로는 좋은 의도에서 말했지만 사탄의 일에 동참한 것이다. 이것이 모두 하늘의 일, 곧 영의 일을 모르고 글자대로 표면적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개념 없는 열심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자신도 의도하지 않게 사탄의 일에 참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날도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두 가지 원칙은 동일하다.

첫 번째는 사탄이 아담을 속인 ‘이것을 먹는 날에 사람이 죽지 않는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 (창3:5)라는 말이고, 두 번째는 성경을 읽되 문자적으로 받아 들여 유대인들과 같이 생명이 없는 종교인이 되라는 것이다.(롬10:2) 즉 영의 사역자가 아닌 글자의 사역자가 되라는 것이다. 성경의 서신서는 교회 내에서 은사주의, 율법(지식)주의, 영지주의를 경고하고 있는데 사실 이에 대한 근원은 다 하나에서 기원한다. 모든 인간의 문제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에 기원하였듯이 이 또한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깊은 함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 곧 생명의 본질을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표면을 보면 안 되고 이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셔서 글자의 사역이 아니라 영의 사역을 하셨다. 공자나 석가의 말은 심오하지만 일반적으로 다 이해하고 수긍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공자나 석가의 말같이 어렵지도 않은데 알쏭달쏭하고 이해하기 힘들다. 다른 세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주는 계시에 의하면 사람은 본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이것은 물고기가 물속을 이탈하면 사망이듯이 사람에게도 위치를 이탈한 것이 죄이고 사망이다.

그리하여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위해 누군가 와서 원래의 위치로 회복, 곧 구속이 필요하였다. 이것을 예수님이 하셨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했던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원래의 세계, 곧 생명세계로 원위치하였다.(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8:2) 그런데 선악의 지식세계에서 오랜 기간 길들여진 인류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관념 하에 살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제3의 세계다. 성경은 바로 제3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세계, 지식이 아닌 태어나는 생명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리를 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생명을 주러오셨다.(요3:16)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의 왕국, 곧 생명의 세계를 전파하자 선과 악의 이분법 세계에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물 안에는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이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롬1:20) 특수계시만이 성경이 아니고 자연계시도 성경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오직 생명에 있다. 만물은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어떠함과 그분의 일하시는 원리를 알 수 있다. 생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연결되어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죽음을 통해서만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연결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의 음식헌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도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음식헌물로 드려짐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레위기 2장)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물이 되신 것만 알고 생명이 되기 위해 헌물 되심은 잘 알지 못한다.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희생물만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헌물도 죽음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아담이 사탄에 속아 타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이러한 생명의 경륜을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계13:7)이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의 육신은 영생하게 되어 있는데 죄 때문에 육신에 죽음이 왔고 오직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은 이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사람을 죄인으로 창조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이다. 만일 육신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세로부터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정확한 진리는 사람은 본디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헌물로 드려져야 하며 생명의 연결자인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디 영원한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단지 죽지 않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죽지 않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죽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영원한 생명이 만드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든다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지식으로는 단 한 마리의 모기도 만들 수 없듯이 생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은 반드시 죽음을 통해 연결되어야 한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짐으로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는 것이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먹힘으로 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함이라.’(고후5:4) 하였다. 영인 하나님과 육인 사람의 간격은 하늘들과 땅의 차이 보다 크다. 물과 기름도 저절로 섞이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크겠는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합이 된다는 것이다. 곧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만든다고 종교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연합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합은 반드시 상호 죽음 안에서 연합된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상호 죽음 안에서 하나가 되고 연합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죄가 없다면 하나님을 만나도 죽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고 소멸시키는 불이시다.(히12:29) 하나님을 만나서 타지 않을 피조물은 죄가 있든 없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는 근원적으로 번제단에서 만나는 것이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제단주위 피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을 위해서 영-하나님, 곧 불-하나님께 육신은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원리다. 십자가의 전면은 죽음이지만 뒷면은 생명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깊은 생명의 원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육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죽음 없이는 영생이 없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4절의 전반부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고후5:4a)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된 육신 때문에 육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벗어나 신들과 같이 되려고 생각하나 바울은 우리가 육신으로 지어진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새로운 영적인 몸을 입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없으신 영이신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배필로서 몸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시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근원적으로 육으로 지어진 다음은 영적인 몸을 입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15:46) 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성에 속하게 된 것은 죄 때문에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죄가 있기 전에도 본성에 속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또 성경은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고전15:50) 우리가 살과 피로 지어진 것은 죄 때문에 살과 피가 된 것이 아니고 죄 이전에도 살과 피로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데 사탄이 설치해 놓은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 한 것이지 죄 문제만 해결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오직 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한 법리적 혜택을 주신 분으로 믿어야 된다는 논리는 내가 죄가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말도 된다. 이러한 생각은 전능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가 구원해주는 병 주고 약 주는 편협한 분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성경이 주는 정확한 진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도 어차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리적 대속뿐만 아니라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원래부터 죄가 없더라도 예수님을 생명의 연결자로 영접해야 한다. 만물은 다 이런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의 구조는 양성자와 음전자가 있고 이를 연결하는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과 기름도 저절로 섞이지 않고 반드시 중화제가 있어야 한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죄라는 종교적 관념에 박혀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죄 때문에 예수님의 중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기 위해서는 중재자가 필요한 것이다.

아담은 본디 영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생을 얻을 자였다.(창3:22)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이지 실재가 아니었다.(롬5:10) 모형은 그릇이라는 의미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실재의 집이 지어지면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형-육적인 몸에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실재-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지도록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이고 율법적이고 표면적인 관념에서 빨리 탈피해야 생명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보인다. 생명의 세계를 선악의 지식의 관점으로 재단하지 말고 생명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본디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신들과 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에 속아 선악의 지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적전쟁은 위치전쟁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다. 사람은 바로 씨 하나님 앞에 흙-여자의 위치다. 사람은 본래 영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씨를 주시면 그 씨를 발아시킬 토대지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이들이 ‘어떻게 죽은 자들이 일으켜 세워지느냐? 그들이 어떤 몸으로 오느냐?’(고전15:35) 하는 질문에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고전15:36) 하였다. 왜 부활을 묻는 이들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가? 아마도 현대의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고 죄가 없으면 육신이 죽지 않는다는 이분법적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여’ 라고 하는 것 같다. 부활생명이란 말 그대로 죄가 있는 없든 육신이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죄된 육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똑 같은 대자연의 생명의 원리에 의해서 자기 인격의 씨를 뿌리고 영적인 몸을 열매로 거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자식들은 불의한 자의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의로운 자들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다.’(행24:15)

 

그러므로 바울은 죄가 있기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는 이분법적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생명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죄를 대속 받은 그리스도인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완전한 대속 사역을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전 존재적으로 구속을 받았고 전 존재적으로 거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과 혼만 구원을 받았고 몸은 구원받지 못하고 죄 때문에 죽는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을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단순한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으면 죽은 것이고 육신은 죽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으면 산 것이다.(계3:1)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사람의 존재적 위치를 물으셨다. 이 질문은 아담 안에 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질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셨다면 인생은 참으로 절망이지만 행위를 묻지 않고 위치를 물으신 것이 은혜다. 그런데 당시에 아담이 하나님의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나무 뒤에 숨었듯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종교의 나무, 명예의 나무, 도덕의 나무, 심지어 기도의 나무, 의의 나무 뒤에 숨어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위치를 이탈한 인류의 대표자인 빌라도는 정 위치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어디서 왔느냐?’(요19:9) 물었다. 빌라도의 눈에도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과는 다르게 보였다는 것이다. 눈이 둘이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 눈이 하나 있는 사람들의 세계 가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거와 같은 이치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정상적인 위치를 이탈한 자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비정상적인 사람의 위치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를 발견하고 원래의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다름 아닌 구원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창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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