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올더스조에 2015. 5. 2. 23:42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5)

우리는 예수 그분이 과연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그분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그저 종교적으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이렇게 알고 있지는 않은가? 그분은 왜 이 땅에 오셨으며 무엇 때문에 핍박받으시고 죽으셨는지 알고 있는가?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 말하라고 하면 별로 할말이 없다. 단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런 일을 행하신 분이다, 라고 피상적인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분의 외형을 아는 것이지 그분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표는 영-마음에 있다. 영이 생명이다. 그래서 성경말씀도 피상적으로 기록된 표면을 알 것이 아니라 이면에 기록된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다. 기능적인 면과 성품적인 면이다. 즉 외형과 내면이다. 가수가 있다고 하면 그 가수가 노래를 잘 한다고해서 그 노래가 그 가수 자신은 아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을 잘한다고 해서 그 운동이 그 자신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지만 그 행위가 그분 자신은 아니다. 행위란 오늘은 할 수 있어도 내일은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마음, 곧 생명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신 외형적인 일이 어떤 것인지에만 치중하고 있다. 복음은 그분 자신이지 그분의 행위가 아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의 생명이지 그분의 외부적인 일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은 법리적인 것이다. 이것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법리적으로 죄를 용서 받았을 지언정 구원은 아니다. 예수님과 내가 연합되어 죽고 연합되어 다시 살아야 구원이 있는 것이다.(롬6:5) 외형적이고 법리적인 혜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외부적인 것이 아니고 내부적이고 유기적인 것이다. 그럴려면 그분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연합되는 것이다.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간직하리라.(요12:24~25)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표는 영-생명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아는 것도 표면에 있지 않고 이면에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는 닫혀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들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사55:8~9)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생명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고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먹힘으로 높은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음식이 되어 먹힐려면 죽어야 한다. 살아 있는 채로 먹히는 것은 없다. 사람은 하나님께 헌물로 창조되었다. 헌물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음식이다. 음식이란 어떤 생물이건 죽인 다음 불로 요리하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물은 불로 태워졌다. 먹고 먹히는 관계가 생명이 연합의 과정이다. 이것은 우주 가운데 만고불변의 진리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하나님께 먹힘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죽을 육체가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motality)이 생명에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즉 사람은 처음에 죽을 운명(motality)인 육체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생명에 삼켜짐으로 죽지 않을 운명(immotality)인 영적인 몸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아담이 죄가 없었다면 육신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간직하리라.’(요12:25) 하셨다. 쉽게 말하면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 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 어디에도 예수님이 죄를 위해 죽으신다는 말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단순하게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억지로 해석을 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는가?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흙-사람의 위치를 지켜야 했다. 즉 하나님께 번제헌물이 되어야만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 위치를 이탈해서 신과 같이 되려고 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창3:5) 그래서 예수님은 죄 이전에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길은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이다. 그런데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서 필생즉사(必生卽死)의 길을 간 것이다.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 이 진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주신 위치를 어떻게 지켰는가? 즉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대하는 참사람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길을 가시고자 하심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요10:17)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죽지 않을 몸인데 인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정해져 있다.(고후5:4)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갈망이다. 사람은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안에 포함되고 하나님의 경륜이 달성이 된다. 그런데 아담이 이 길을 이탈함으로서 하나님의 우주 경영에 차질을 가져 왔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길을 가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인생으로서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음받은 것을 부끄러하였지만 예수님은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시고 인생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그 길을 가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로 가시기 전 아들로서 아버지께 기도함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서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멀리 나아가사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8~39)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죽지 않을 분인데 죽으셨다고 말한다. 죽을 수 없는 분인데 어떻게 죽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들은 말이 안되면 하나님의 전능성을 들고 나온다. 죽을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죽으실 수 있으니까 죽으신 것이다.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비정상적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비정상적인 위치에서 정상적인 위치로 옮겨오는 것이 구원이다. 이러한 비상식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에서 빨리 탈출해야 하나님의 계시가 보인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시고 인생으로서 고뇌를 하셨다. ‘내 혼이 슬퍼 죽을 지경이니’ 라고 하셨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참 사람의 고뇌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육신의 죽음을 앞두고 번민과 고뇌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만일 예수님을 신으로만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말을 받아 드릴 수 없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은 자를 살리고 물위로 걸어가신 분이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하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씀을 단지 인성을 가진 예수님의 고뇌 정도로 아무런 생각없이 종교적이고 기계적으로 받아 들인다. 그러나 내 자신이 한 번 예수님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당시에 사람들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요11:27) 라는 소리를 들으신 분이다. 이런 말을 들으신 분이 과연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하고 싶었겠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요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금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이때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런 까닭으로 왔나이다.’(요12:27)

예수님은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어찌보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은 세상에 있는 우리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안중근 의사는 유언으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가 독립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하였다. 또 안중근의 어머니는 ‘나라를 위해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라고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는 아주 당당하게 죽었다.

세상적으로 보면 안중근 의사가 예수님보다 훨씬 당당하지 않은가? 더 살려달라고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었다. 그런데 죽음의 가치로 보면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한 죽음이라면 안중근 의사 죽음은 대한제국을 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대의적 명분으로 보면 예수님의 죽음과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비교할 수가 없다. 이순신 장군조차 죽음 앞에서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하면서 너무도 당당하고 초연했다. 예수님도 잡히시기 전 날 저녁에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언약의 피니라.’(마26:28) 라고 하셨다. 우리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여기까지만 하셨다면 참으로 이순신장군이나 안중근 의사 만큼 죽음 앞에서 당당하셨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인생의 위치를 발견해야 한다. 참사람의 본을 발견해야 한다. 인류역사 가운데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처럼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죽은 자들이 비단 이 둘 뿐이겠는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들이 위대할지는 몰라도 참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인간의 원형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아담이 잃어버린 인간의 원형을 발견해야 한다.

아담 안에서 신-왕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속성은 죽음 앞에서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과 같은 사람들을 선호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었기에  우리 생각으로는 이 정도의 명분 있는 죽음이라면 너무도 당당히 의롭게 죽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시기 전날 밤에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이때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요12:27) 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자가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재차 말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자를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피조물과 창조주, 아들과 아버지의 뜻이 충돌하는 상황에 부딪친 것이다. 피조물은 본능적으로 육신이 죽지 않고 더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창조주는 피조물의 생각보다 더 큰 뜻이 있어 피조물에게 죽음의 경륜을 허락한 것이다. 이것은 인생에게 죽음이 없다면 거듭남, 곧 부활, 영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강을 건너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을 건너야만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도 죽음의 홍해를 건너 생명의 광야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의 과정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날 저녁에는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언약의 피니라.’(마26:28) 하시면서 기꺼이 죽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날 밤이 깊어지자 죽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내 혼이 슬퍼 죽을 지경이다’(마26:38) 하셨고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마26:39) 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신으로만 아는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온 인류를 위한 죽음인데 당당하게 죽으셔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처럼 당당하게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대할 것이다. 조선시대 신하들은 왕이 사약을 내려도 왕이 있는 곳을 향해 사배하고 사약을 마시고 초연하게 죽었다. 이에 비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너무도 평범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참사람으로서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너무도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우리도 죽음을 앞둔다면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지 않은가?

‘내 혼이 슬퍼 죽을 지경이니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이 말은 나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도 먼 예수님과 하나과 되려고 했다. 위대하신 예수님, 옛적에 강력한 자 곧 명성있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예수님, 전능자로서의 예수님을 추구해 왔다. 찬송가 마저도 능력이신 예수님을 추구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인격의 승리, 곧 사람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는 것이 승리다. 우리는 인격을 이탈한 아담 안에서 정상적인 사람, 곧 참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는게 아니라 여전히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속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죽음 앞에서 ‘내 혼이 슬퍼 죽을 지경이니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우리게 너무도 먼 분이다. 또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 없다. 우리의 구속자는 사람이어야 한다. 신은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 없다. 아담이 옛인류의 조상이듯이 구속자란 새인류의 조상이란 의미다. 신은 사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또 구속자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야 구속자가 될 수 있다.(레25:23~25) 성경에서 땅은 인격을 상징한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땅을 팔았는데 그의 친족이 와서 그 땅을 되사겠다고 하면 땅를 샀던 사람은 그 친족에게 되팔아야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규다.

예수님은 어디서 우리를 구속하셨는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물위로 걸어간 지점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지점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 아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전능자는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없고 구속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이 말은 나도 할 수 있는 말이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다. 여기서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속자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 예수님은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는 기도를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있지만 아들과 아버지의 뜻이 부딪히면 당연히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는 것이 아들이고 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시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였다.(히5:7) 그러자 ‘하늘로부터 한 천사가 그분께 나타나 그분을 강건하게 하니라.(눅22:43) 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응답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응답을 받으셨다면 이어서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응답이 없자 예수님은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그분의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눅22:44)

실제 사람은 애가 타면 눈이 충혈되고 피 땀이 난다고 한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얼마나 고뇌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한 번 그분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얼마나 애가 타겠는가?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이 위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참 사람은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 앞에서 당당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우리가 선망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하여 눈물로 기도하되 자기 뜻을 접고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는 사람이 참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 다른데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께 기도함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 날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마태와 마가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 하고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마27:51, 막15:37) 라고 기록하고 있다. 너무도 간단하고 평범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우리 모두는 창조주 앞에 피조물이다. 창조주란 심판자를 의미한다. 내가 하나님을 단지 창조주로 안다는 것은 심판자와 심판받는 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된다. 판사와 죄인의 관계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된다면 생명의 관계, 곧 심판이 통하지 않는 사랑의 관계가 된다. 하나님을 단지 창조주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 보다 크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날까지 기도하실 때 항상 아들로서 ‘아버지여’ 하시면서 기도하셨다. 기도하실 때마다 응답받으셨고 심지어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마3:17, 마17:5) 는 말씀을 직접 두 번씩이나 들으신 분이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들로서 아버지께 기도하였지만 확실한 응답을 받지 못하셨다. 우리 생각에도 다른 것은 응답받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절대절명의 순간에는 응답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데서 응답받으면 뭐하는가? 결정인 순간에 응답받아야 되는거 아닌가?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은가? 그래서 예수님도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 라고 기도하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응답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아들로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수행하신 분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께 기도하였지만 응답이 없자 이제 죽음의 극한 상황 앞에서 피조물로서 창조주 앞에 서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셨지만 이제는 ‘나의 하나님이여’ 라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인생은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들로서 아버지를 불렀지만 응답이 없자 최종적으로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 앞에 서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냐는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 몰 수 밖에 없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적이고 기계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아담이 지은 죄를 누군가 와서 대속해야 한다. 대속물로서 곧 희생물로서 죽어야 한다. 죄인을 구원하려면 죄 없는 자가 구원해야 한다.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려면 물에 빠지지 않은 자가 구원해야 한다. 아담은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누군가 와서 이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아는데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창3:22)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려고 한 것이므로 신성모독을 한 것이다. 또한 사람이 신이 되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깨 것이다. 사람은 피조물로서 창조자의 최종 작품이다. 우리가 보기에 사람은 부족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라, 매우 좋았더라’(창1:31) 하시고 안식하시며 상쾌해 하셨다. 우리도 어떤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이 완성되면 안식하고 상쾌해 하지 않는가?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기 때문이라.(출31:17)

그런데 사람이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작품인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가진 것이므로 피조물이 창조자를 모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대가(大家)의 걸작품에 문외한이 그 위에 덧칠하려고 하는 거와 같은 것이다. 피조물은 지어진 그대로 감사해야 하는데 그 위치를 이탈한다는 것은 창조에 불만을 가진 것이 됨으로  창조자를 모독하는 것이고 창조자의 안식을 깬 것이다. 그래서 신성모독과 안식일을 어긴 죄는 항상 같이 붙어 다니며 죄에 대한 결과도 동일하게 사형이다.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반드시 돌로 그를 칠지니라. 타국인이든지 그 땅에서 태어난 자든지 주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24:16)

엿새 동안은 일하되 일곱째 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요, 주께 안식하는 안식일이니 누구든지 그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라.(출35:2)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 대하여 신성모독을 한 것이고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창2:17) 그래서 예수님의 죄목은 반드시 이 두 가지여야 한다.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어떤 죄목으로 처형을 당하셨나? 예수님의 죄목은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신성모독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 안식일 어긴 죄이다.

그분께서 잠잠하시고 아무것도 대답하지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그분께 물으며 그분께 이르되, 네가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하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사람의 아들이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 우리에게 증인이 더 필요하리요? 신성모독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하매 그들이 다 그분을 죽을 죄를 지은 자로 정죄하고(막14:61~64)

유대인들이 이런 이유로 더욱더 그분을 죽이려 하니라.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더라.(요5:18)

그런데 이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에 의해 심판 받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심판 받았다는 것이 된다. 율법은 인격적인 것이 아니고 외형적인 돌판에 쓰여져 있기 때문에 율법을 어기면 아들이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율법의 본질은 외형에 있지 아니하고 그 이면에 있다. 그런데 이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마음 판에, 곧 인격 안에 새겨 넣어야 하는데 돌판에 새겨진 그대로 표면적인 것만을 가지고 지킨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한계는 기계적 인간, 율법적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것인데 이것을 기계적이고 표면적으로 받아드려 예수님을 안식일 어긴 죄로 처형한 것이다. 그래서 이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신과 같은 사람들로서 신성모독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안식을 방해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타락한 신과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신성모독했다는 이유로, 안식일을 어긴 자들이 오히려 안식일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긴 죄로 죽인 것이다. 이것이 외형적인 율법의 한계다. 이러한 율법의 세계에서는 하나님도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율법은 완전하지만 융통성이 전혀 없는 비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율법에 의해 처형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옛날 왕조시대에도 있었다. 왕은 아버지로서 왕자를 죽일 마음이 없음에도 정해놓은 국법 때문에 할 수 없이 왕자라도 법을 어기면 목을 쳐야하는 거와 같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돌판에 기록된 율법의 시대는 끝나야 하며 하나님의 법이 마음 판에 기록된 생명의 세계로 넘어와야 하는 것이다.(렘31:31~34)

이스라엘 민족이 외형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켰지만 그 율법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컴퓨터와 같이 어떤 글자를 입력하면 글자 그대로 출력하는 기계적 인간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유대인들은 외형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지만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경륜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말씀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표면적인 말씀을 키기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 그 말이다.(고전13:3)

좌우간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율법을 끝내고 사람 속에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넣어줘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와서 구약경륜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의 경륜을 열어야 한다. 이것을 예언한 말씀이 예레미아 31장의 말씀이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다시는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그들의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다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렘31:31~34)

그래서 바울이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이 신약경륜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히브리서에서 두 번 인용하고 있다.(히8:8~11, 10:16~17) 바로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즉 외부적 교육훈련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요망하는 사람이 안되기 때문에 사람의 내부적인 생명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경륜을 실현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경륜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와서 율법을 끝내야 한다. 율법이 끝나려면 율법의 완성자가 율법에 의해 심판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율법이 더 이상 인류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율법에 의해서 누군가가 의롭게 된다면 다른 사람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율법은 계속 유효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인류 유사이래 1등이신 예수님이 율법에 의해 심판 받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롬3:19)

그래서 하나님과 인류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한 의(義)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한 의가 드러났느니라.(롬3:21)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심판받으셨고, 율법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롬10:14) 그분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시지만 그분이 율법에 의해 죽으심으로 율법이 끝난 것이다. 율법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의 합격기준에 도달할 자가 없고 율법으로 더 이상 하나님의 경륜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기시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14)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심에 불구하고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으셨다. 그래서 그분이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그분은 죄가 없음에도 율법의 효용성을 끝내기 위해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이제 그 누구도 율법에 의해 의롭게 될 자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100점짜리인 예수님도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은 1점부터 99점까지는 시험장에 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율법으로는 인류가 하나님의 합격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두 번째,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번제헌물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왜 실패했는가? 완전하지만 사람 안에 그 법을 지킬 수 있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 법을 지키지 않고 싶어서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법리적 관계로는 안되고 사람 속에 하나님의 법을 넣어 주어서 하나님과 생명의 유기적 관계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경륜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경륜이다.(렘31:32)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31:32)

율법은 완전하지만 외율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 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율법이 끝나고 생명의 성령의 세계로 경륜이 전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롬8:2)

피조물이란 자신의 목적이 없다는 의미다. 피조물은 창조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이 몸의 역할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자기 자신-생명을 사람에 주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흙-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고 거듭나도록 정해져 있다.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사람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신이 죽은 다음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즉 사람은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 되어야만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사탄에 속아 하나님의 몸이 되어야 할 자가 사탄의 몸이 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아들이 되어야 할 자가 종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와서 종의 세계를 끝내고 아들의 세계를 열어야 한다. 종이 아들이 되는 방법은 죽고 다시 태어나는 방법 외에는 없다. 종의 세계는 율법에 의한 심판의 세계다. 그래서 이 세계를 끝내려면 누군가  율법을 종결하고 율법이 작동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로 넘어와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표면적으로는 율법의해 심판을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그분은 내적으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율법이 작동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에서 부활하셔서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심판을 받으셨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이 정한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도 죽으심이 필요한 것이다.

십자가-죽음이란 인생라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누구든지 거쳐할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운명 앞에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마저도 십자가에 매달리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르되, 내가 내 어머니 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또한 벌거벗은 채 그리로 돌아가리라. 주신 분도 주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욥1:21)

우리 인생은 죄가 없더라도 어머니의 태에서 벌거벗고 나왔고 또한 벌거 벗은 채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허황되고 황당한 믿음에서 탈출해야 한다. 예수님은 법리적으로는 율법에 의해 희생물로서도 심판을 받으셨지만 유기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로도 죽으신 것이다.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번제헌물이 되어야만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희생물로 죽었다고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흙-사람은 불-하나님께 태워져야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헌물이란 하나님의 음식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음식으로 드려져야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채로 먹는 음식은 없다. 요리가 돼서 상에 올라가려면 죽어서 요리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영이란 내가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재가 되고 연기가 된다는 말이다. 번제헌물로 드렸다는 말이다.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이라는 말이 있다.(계13:8) 사람들은 이것을 예수님이 인류의 죄 때문에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서, 창세로부터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 드려져야 영생이 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짐으로 영생이 있는 것이다.(고후5:4)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크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헌물로 창조되었고 모든 헌물은 불에 태워졌다. 이 헌물은 우리 자신이다. 레위기에 보면 음식헌물이 나오는데 음식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피흘림이 필요없는 식물성 헌물이다. 음식헌물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사실 아담이 드려야 할 인격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되기를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음식헌물도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진다. 불에 태워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지 않을 쇠는 없다. 좋은 쇠든 나쁜 쇠는 어떤 쇠도 용광로에 들어가면 다 녹는다.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에게 허락한 음식은 식물이었다.(창1:29) 사람은 먹는 대로 몸이 조성된다. 음식과 사람은 하나다. 성경에서 사람의 인격을 상징하는 대표적 동물이 어린양이다. 양은 식물만 먹지 동물은 먹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들 중에서 하나님께 헌물로 드려지는 양, 소, 염소, 비둘기 등 모든 헌물들은 모두 식물성 음식을 먹는 동물들이다. 그런데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들인 사자, 표범, 곰 등은 동물을 먹고 산다. 즉 피를 먹고 산다는 것이다.

사람은 본디 어린양의 인격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인격만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는 어린양의 인격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어린양은 식물만 먹고 산다.  사람의 몸은 육신이지만 식물에 의해 조성된 육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은 식물성 육신을 가진 자로 죄가 없더라도 피흘림이 필요없는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창2:21)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이에 대한 심판으로 피흘림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동물성 음식이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다.(창9:3)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서 다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돌아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 하고 숨을 거두셨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왜 나를 버렸습니까?” 하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묻는 말이라고 할 수 있고, 탄원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원망하는 말일 수도 있고 불평하는 말일 수도 있다. ‘왜 버렸습니까! 나를 왜 버렸습니까! 내가 버림받을 일을 하지 않았는데 왜 나를 버렸습니까!’ 하는 말이다. 원망도 되고 탄원도 되고 갈망도 되는 여러 가지 인간의 복잡함에 대하여 우리가 대답을 들어야 할 자리에서 못 듣는 한(恨)을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최종적이고 최후적인 비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전체의 흐름은 하나님은 의인은 절대로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를 버렸습니까!’ 하는 말은 예수님 같은 사람은 당연히 버림받지 않아야 하는데 왜 저를 버립니까? 하는 뜻이다. 어찌보면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100% 충성하신 분인데 나를 왜 버리십니까? 하는 절규와 비탄 등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어떤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너무도 평범하게 죽으신 것이다.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 그런데 그 이후에 누가복음에는 ‘내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고 요한복음에 보면 ‘다 이루었다’(요19:30) 고 하셨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는데 뒤이어 내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 하면 말이 안된다. 하나님께 대한 호칭도 ‘하나님’ 하다가 ‘아버지’로 바뀐다.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다. 이것은 심판자와 심판받는 자와 관계로서 무서운 관계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들로서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더없이 친근한 사랑의 관계다.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이 분명히 있어야 복음이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답이 없었는데 히브리서에 보니까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5:7)

주님은 죽음을 앞두고 참 인생으로서 죽음을 두려워 하셨고 이로부터 구원해달고 눈물과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다는 것이다. 잡히시기 전날에는 가능하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땀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고(눅22:44), 십자가상에서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 라고 기도하셨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응답이 없지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는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요한복음에는 ‘다 이루었다’(요19:30) 하시면서 대반전을 이루고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하신 말씀은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①‘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 ②‘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③‘다 이루었다’(요19:30) 이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 하다가 갑자기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면 무언가 이상하다. 갑자기 피조물로서 창조주 앞에 절규와 비탄을 하다가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면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 뒤에는 분명히 무언가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 때문에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서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이 복음서에는 없었는데 히브리서에 나와 있는 것이다. 주님의 모든 기도가 응답되고 있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5:7)

주님께서 ‘나를 왜 버렸습니까?’ 하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 들으셨다’고 하는데 들으시고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예수님께 하셨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오직 하나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필요로 한다. 아담은 위치를 이탈했으니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즉 의인 필요하다. 그래야만 온 인류가 구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왜 버리셨습니까?"라는 질문에 하나님은  “나는 의인이 필요하다”고 대답하셨던 것 같다.

의인(義人)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바르고 완전한 관계를 가진 사람을 보고 의인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의인이라는 말은 정의 개념이다. 도덕적이고 사회적 개념이기도 하다. 북한의 정의와 남한의 정의 개념이 다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의(義)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바르고 완전한 관계를 의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 가니....’(요16:10) 라고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가 없으면 ‘의’라는 말 자체가 없다. 세상의 의와 하나님 나라의 의의 개념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사람으로 온 인류를 구속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의인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 구속이란 우리를 원위치로 돌아가게 해서 참 인간이 되게 한다는 의미로 의인이 되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절규에 하나님은 ‘나는 의인이 필요하다.’ 이렇게 대답 하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앞뒤가 안 맞는다.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해 놓고 마태는 ‘큰 소리를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마27:50) 라고 했는데 요한은 전혀 그런 말이 없다. ‘큰 소리를 외쳤다’는 말도 없고, ‘왜 버리셨습니까’ 라는 말도 없고, 그냥 ‘다 이루었다’ 했다. 분명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렇게 지나올 때 시간적으로 봐도 그렇고 영적으로 봐도 그렇고 어떤 결론에 이르러 한 말이기 때문이다.

절규에서 찬양으로의 전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예수님은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절규하자 하나님으로 부터 응답을 받으셨다.(히5:7) 그렇지 않고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서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전환될 수 없는 것이다.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는데 그 이후에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셨다. 여기서 '손'이라는 것은 권능이고 전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은 무엇인가? 영이라는 것은 생명의 내용이다. 자기 생명의 내용을 내 놓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죽어도 영만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피조물이다. 내 것이 하나도 없다. 영 마저도 하나님의 것이다. 주신 분도 주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시다.(욥1:21)

마가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종의 복음이라고 한다. 마태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수님을 보았다. 유대인의 왕이란 의미는 유대인은 전 인류를 대표하므로 인류의 왕이란 의미다. 그런데 아담은 세상의 왕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왕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왕이다.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는 빌라도의 질문에 그렇다고 인정하셨다.(마27:11) 마가는 하나님의 의로운 종(사53:11)으로서의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아담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한 사악한 종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위로는 왕에서 부터 아래로는 종까지 전 인류를 포함하여 대속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공식적인 죄목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었다.(막15:26) 왜 종으로는 기록이 안되었을까? 왕이란 그 나라의 대표다. 왕이 심판받으면 종까지 포함하여 온 백성이 심판받은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하신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대속물로서의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대속물(ransom) 단어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각각 한 번씩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마20:2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막10:45)

사람들은 대속과 구속을 동일하다고 생각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대속은 단지 법리적인 심판에 대한 죄 용서지만 구속은 하나님이 씨-생명을 넣어 줄 수 있는 유기적인 인생의 위치를 말한다. 대속을 법리적인 희생물이 필요하지만 구속을 위해서 유기적인 헌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누가는 예수님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가 하면 우리를 위해서 구속을 해 줄 수 있는 적합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사람의 복음, 인간의 복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냥 인간이 아니었다. 구속에 적합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제물을 드리려면 제물에 적합한 짐승이 있다. 그래서 양이나 송아지나 비둘기나 이런 것들이 선택된 것이다. 누가는 이것을 본 것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원 위치라는 뜻이다. 원 위치된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줄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시고 보시고 좋았더라 하는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생명을 넣어 줄 수가 있다. 그래서 누가는 구속에 적합한 인간으로서 예수를 전한 것이다. 그냥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구속은 인간을 제자리로 돌리는 것이지, 인간을 천당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변호하는 것이지 인간을 영으로 바꾸어서 천당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구속은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가 전하는 이 복음이 구속의 입장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복음서에 보면 대속이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듯이 구속이라는 말은 누가복음에만 네 차례 나오고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사 구속하시고 (눅 1:68)

마침 그때에 그녀가 나아와 마찬가지로 주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서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8)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위를 보고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의 구속이 가까이 오고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21:28)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눅 24:21)

레위기에 의하면 사람은 죄가 없더라고 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죄를 속하기 위해 대속물, 곧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죄인라는 관념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희생물’ 이라고 불러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근원을 보기 때문에 희생물의 관점에서 보시는 것이 아니라 헌물의 관점에서 우리를 보신다. 그런데 죄라는 장애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헌물을 받으시기 전에 희생물로서의 피를 먼저 요구하시고 희생물이 피를 흘리면 그 희생물이 죄없는 헌물이 되는 것이다. 희생물이나 헌물의 공통점은 죽는다는 것이다. 희생물이 피가 뿌려지고 나면 죄없는 헌물이 된다. 희생물 곧 헌물이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되려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 태워진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삼키셨다는 것이다. 헌물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짐으로 번제헌물이 되어 하나님의 음식이 되어 생명의 연합이 되었다는 의미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음식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낮은 생명은 높음 생명에 먹힘으로 높은 생명에 연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진다는 말이 그 말이다.(고후5:4)

그러므로 마태나 마가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대속물로서의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다면 누가는 우리 인간을 구속하는 헌물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가 전하는 복음에서 구속을 위해 그 영마저 아버지의 전권 앞에 내 놓는 제물로서 한 인간을 본다. 제물이 되려면 완전하게 드려야 한다. 완전히 불살라서 재만 남게 된다. 거기에 다른 것이 남으면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재만 남았다.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는 말은 재가 된다는 말이다. 번제 헌물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대속을 위해서 마태가 본대로 왕을 보냈고 마가가 전하는 대로 종을 보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대속을 이룰 수는 있지만 구속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도 종도 많았고 왕도 많았다. 하지만 종이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인류가 구속되지는 않는다. 국가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왕도 필요하고, 종도 필요하지만 사람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구속자가 필요하다. 구속이란 원위치로 돌아오게 한다는 의미다. 사람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왕도 아니고 종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참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구속은 영을 아버지 앞에 내놓는 한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왕을 통해서나 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려고 온 사람들이고, 대속하려고 온 사람들이지만 구속자로서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왔다. 우리를 원래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왔다. 그래서 복음은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인간을 되돌리는 것이고, 그 되돌려진 사람을 통해서 나라를 이루는 것이므로 아무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구속의 면에서 볼 때는 영까지 아버지 앞에 내 놓는 한 인간이 필요하다.

사람은 결국 영까지 구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만 바꾸자는 사람은 많다. 수양 하자는 것은 생각을 바꾸자는 것이다. 지혜를 얻자는 사람은 다 생각을 바꾸자는 사람이다. 공부를 하자는 사람도 모두 생각을 바꾸자는 사람이다. 그것만 해도 상당히 훌륭해 보인다. 훌륭해 보이는데 속에 보면 다른 게 또 들어있다. 아주 위대해 보이고 도를 통한 것 같고 굉장해 보이고 저런 사람 같으면 하나님도 부럽지 않겠는 사람도 속에 다른 게 또 있다.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게 그 말이다. 인간은 자기를 다 내놓았을 때 주님의 손을 경험할 수가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내놓았을 때 이삭은 자기의 전부였고 삶의 전부였고 어쩌면 생명의 전부였는데 내놓고 부활의 하나님을 경험했다. 야곱도 모세도 다윗도 다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려면 생각만 내려놓아서 안 되고 더 깊이 자기 삶의 내용을 내놓아야 한다.

사람들은 참 이상한 것이 자기는 죽어도 영은 내놓지 않고 죽으려고 한다.  우리가 ‘애국자’ 이렇게 말을 하면 분명히 옥에도 가고 죽기도 하는데 영은 갖고 간다. 그래서 애국자의 영이 있어서 길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영이 지금 길이길이 역사에 남아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남겨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는 안 내놓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영은 원래 내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12장 9절에 보니까 영들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영은 아버지가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은 근원(根源)이 있다는 말이다. 그냥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근원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우리에게 있던 우리 육체의 아버지들이 우리를 바로잡아도 우리가 그들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우리가 더욱 복종하고 이로써 살아야 하지 아니하겠느냐?’(히 12:9)

그런데 그 영은 내가 붙들고 있으면 사탄이 이용하고 아버지 손에 맡기면 아버지가 사용한다. 누구에게 맡기냐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이 달라진다. 아담은 사탄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사탄이 사용한다. 아버지 손에 있으면 아버지께서 사용한다.  이것은 내 총을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군인이 내 총을 적군에게 맡기는 거와 같다. 그러므로 내 영은 항상 아버지 손에 있어야지 내 영이 되면 안 된다.

천당에 가려는 사람도 그 영이 천당에 가려고 한다. 알고 보면 얍삽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영은 내 것이 아닌데 그것을 꼭 가지고 천당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당은 아버지 집이지 내 집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왜 예수님을 믿느냐고 질문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천당에 가려고 믿는다고 대답한다. 아주 당연하게 대답한다.

우리가 한 예를 들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보자.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처음에 하셨다. 나중에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하셨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르다.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말은 영을 내려 놓았다는 말이 아니고 생각을 내려놓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十字架)에서 그 영을 아버지 손에 내려놓았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는 생각을 내려놓고 십자가에서는 영을 내려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렇게 했냐하면 생각을 구속할 뿐 아니라 영까지 구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구속이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은 우리 생각은 구속할 수 있어도 영은 구속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내가 구속이 된다는 것은 어떤 모델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우리를 구속했다면 우리는 생각을 내려놓으신 분께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하고 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처음에는 ‘우리 아들이 뭐가되게 해주세요! 합격하게 해주세요! 기도하다가 마지막에 가면 조금 미안하니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한다. 그러면 만일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의 구속이 이루어졌다면 이 정도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영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지금은 그 수준이 아니라 내 전체가 드려지는 수준으로 바꿔졌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까지만 가고 마치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까지 가야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다음에 열두군단이 되는 천사를 불러 잡으러 온 사람들을 쳐부셨다면 기독교 왕국은 건설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종교생활은 가능할 것이다.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이 상태는 종교이다. 경건한 신자들이다. 날라리가 아니고 아주 경건한 신자들이 하는 생활이다.

그런데 왜 십자가까지 갔는가? 그것은 우리 구속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오면 생각을 구속하는 수준만은 아니다. 석가모니 앞에 가면 생각을 구원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지혜를 찾는 것이니까. 생각을 잘 묶는 것이 지혜이다. 그것을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계속해서 수양을 하는 것이다.  거기가면 그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많이 한다. 직관력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예민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적절한 말을 해준다. 그래서 스승의 얘기를 듣는다. 예수님은 거기서 머문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 속에 들어있는 사탄에게 사로잡힌 그것을 지금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까지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는 이 자리에서 아버지 손앞에 영을 내어 놓으신 분을 봤다.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하는 분을 봤고, 요한은 '다 이루었습니다!' 라는 주님을 봤다. 누가복음이 먼저 써지고 요한복음은 뒤에 써졌다.  요한은 벌써 누가복음을 읽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 주님께서 자기 영을 아버지께 부탁하시고 돌아가셨구나!’ 하고 알았다. 그랬으니까 '다 이루었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마지막을 보면 ‘단지 구속을 위해서 죽은 어린양이었다.’고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예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 지혜가 있는 사람이기도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도하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최후를 보면 이 사람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우리의 구속을 위한 어린양이고 우리의 영원한 모델이며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표현한 시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편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졌다. 전반부는 심판에 대한 극심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으나(시22:1~21) 후반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다.(시22:22~31) 그런데 시편 22편에서는 전환의 이유를 직접 말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말하지 않았다. 뒤에 보면 ‘큰 회중 가운데서 드릴 나의 찬양은 주로부터 나오리이다.’(시22:25)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지금 찬송을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줄 알았는데 주님으로부터 응답이 와서 찬양을 드린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5:7)

이렇게 응답을 받으셨다. 구체적으로 어떤 응답을 받으셨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고 찬양을 드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라는 기도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누가 복음을 거쳐서 요한복음에 이르러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가진 것이란 없는 것이다. 포기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제자들이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습니다.’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것 조금 버리고 온 것이다. 별것 없다.

영은 내 것이 아니다. 인생자체가 내 것이 아닌데 어떻게 영만 내 것일 수가 있겠는가? 단지 영의 아버지 앞에 생명의 근본이요, 내용이요, 모든 것의 모든 것인 영을 제출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창조적인 전환의 세계에서 그의 이름을 찬송 할 수 있는 것이다. 시편에도 중간에 말은 없지만 예수님에게도 그런 사건이 발생했을 것이다. 자기 영을 내놓는 그런 사건을 통해서 찬송이 나왔기 때문에 ‘큰 회중 가운데서 드릴 나의 찬양은 주로부터 나오리이다.’(시22:25) 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 크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하면 이 육신이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영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담도 인생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고후5:4)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다. 우리 인생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드리기에 딱 안성마춤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은 ‘보시기에 매우 좋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천사처럼 영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드릴 수 없다. 주님께서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기에 좋은 흙의 위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씨는 흙에 뿌려져서 씨와 흙이 한 몸이 된다. 흙-사람은 씨-하나님과 연합되어 실질적인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하나님과 한 몸이 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있는가? 그래서 죄로 인해 대속물로 들려질 때는 비탄과 탄원이 나왔지만 이제 헌물로 드려짐으로 하나님과 한 몸이 되니 찬송이 나오는 것이다.

구속을 완성하심 - 다 이루었다.

누가는 구속자로서의 예수님을 보았다. 그러나 구속이 하나님의 최종목표가 아니다. 구속된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생명을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주기 위해 구속이 완료된 한 사람을 보았다. 요한은 구속을 완성하기 위하여 어린양으로서 죽임 당하신 아들 예수를 본 것이다. 그래서 '아 다 이루어 졌구나!' 그렇게 본 것이다. 제물이 다 준비됐으니까 제물이 다 준비 되면 불만 때면 되지 않는가! 불만 때면 재가 나온다. 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제사가 다 됐구나!' 이렇게 하는 것이다. 피는 소반에 받아서 지성소로 들어가고 고기는 다 불태워서 동편 재버리는 곳에 버리고 그렇게 하면 제사가 다 됐다는 것이다. 요한은 그것을 본 사람이다. 완전하게 제사가 된 한사람 보았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은 하나님께 주신 임무를 '다 완료하였습니다.(It is finished)' 라는 사람을 본 것이다.

그러나 구속의 완성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다. 구속이 완료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은 흙-사람에게만 씨 생명을 넣어주실 수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생명의 복음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예표로 가득차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거듭남의 표적 등이 있고, 예수님 자신이 직접 나는 ‘생명의 빵’(요6:35)이라 하셨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라고 하셨다. 또 요한복음이 기록의 목적을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은 구속이 완성된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심에 있어서 왕이고 종이었다. 그리고 구속에 있어서 헌물로서 아들이었다. 종으로서 의인도 필요하고 구속의 헌물로서 아들도 필요하다. 아들이 아니면 헌물이 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 구속이시며 완성자시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1:22,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 영을 아버지 앞에 드린 그래서 구속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전하는 것이다.

구속자는 법적으로 친족 중에 가장 가까운 자라야 된다. 가장 가까운 자가 대를 잇던지 재산을 소유하든지 팔았던 땅-인격을 다시 살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우신 분으로서 자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내놓으심으로서 우리를 위한 온전한 대속의 제물이 되셨다. 민수기 27장이나 룻기 3장에 보면 룻이 시집갈 때 그 말이 나온다. 가까운 친척 중에서 상속 무를 자를 찾는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가까운 자라야만 나를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 보다 더 가까운 것이 사람이다. 사람보다 더 가까운 분이 누구인가? 이것은 십자가에서 영까지 다 바쳐 놓은 그 사람이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분이다. 먼 사람이 아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와 다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다른 데서는 다 다르고 거리가 있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갈 때도 거리가 생기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일 때도 거리가 생기고 심지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을 봐도 우리와 거리가 생긴다. 가까운 친척이 아니고 아주 멀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 있는 석가모니를 보면 너무 멀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혀있는 예수님을 보면 너무 가까운 친척이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마11:30) 하셨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상하게 이방세계에 들어오면서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너무 먼 사람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도저히 따라 갈수 없는 위대한 사람처럼 만들어 버렸다. 옛적에 강력한자 곧 명성있는 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위대한 자의 나라도 아니고 황제의 나라도 아니다. 단지 연한 초목같고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고 흠모할 만 것이 없는 자의 나라다. 사자나 호랑이의 나라가 아니고 어린양의 나라다. 그러므로 먼 친척은 나를 구속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숭배하고 경배할 수는 있지만, 내가 그로 말미암아서 구속은 받을 수는 없다.

나를 구속하실 분은 나와 가장 가까운 분이다. 자신의 영까지라도 자기가 가질 수 없어서 아버지 손에 내놓은 그 사람이라야 나를 구속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위대한 사람이 나의 친척이 아니고 알고 보면 아주 지극히 가난한 사람이 나의 친척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나의 친척이다. 영까지라도 가지고 천당에 가겠다고 한 사람은 나의 친척이 아니다. 영을 가지고 천당에 가겠다는 사람은 나와 가깝냐 하면 가깝지 않다는 것이다. 죽었는데도 영은 안 죽고 가지고 간다니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가?

가까운 사람은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자기 영을 내놓는 그 사람이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세상에서도 보면 위대한 사람이 나와 가까운 사람인 줄 알지만 위대할수록 나와 멀어지고, 높을수록 나와 점점 멀어진다. 우리는 가까운 것을 찾아야 된다. 가장 가까운 것이 우리 모두 인간의 공통점이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 영도 자기 영이 아닌 줄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나에게 가까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이웃이고 내 친척이다.

그 분이 다 이루신 것을 우리는 누린다. 헌물이 완성됐을 때 제사가 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게 되었다하는 말이 그 말이다. 한 사람이 완전하게 헌물이 되어서 그 영까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불살라진 그 사람이 내 구속이 됐다는 말은 그것이 내 구속의 모델이란 말이다. 이제 내가 돌아 갈 곳이 생겼다. 내가 어디로 갈지 모르던 사람인데 저 히말라야산으로 갈지 백두산으로 갈지 한라산으로 갈지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산은 내가 올라가기에 너무 너무 어려운 산이다. 그 산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인류 중에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러나 우리 구속자, 우리 표적은 누구냐 하면, 더 이상 내려 갈 수 없고 더 이상 올라 갈 수도 없는 자리가 있다. 그것은 우리를 인간 본연의 자리로 구속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안식이고 안정이다. 이러면 요동하지 않는다. ‘다 이루었다’ 하시는 이가 있다. ‘다 이루었다’ 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는 확고하게 뿌리를 박아야 한다. 거기에 내 인생의 뿌리를 박아야 어떤 일이 생겨도 안 흔들린다. 아무리 전봇대를 많이 박고 콘크리트로 해놓아도 바람이 부니까 부러지고 다 날아가 버린다. 바나나 나무 같은 것은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데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지 않는다. 야자나무도 휘청휘청하는데 절대로 안 부러진다. 뿌리가 든든하고 기본이 확실하면 흔들려도 상관이 전혀 없다.

지금 서양에서는 불교를 비롯한 동양 종교가 굉장히 인기를 끌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 목사들까지도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런가?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모르고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무죄가 영생이 아님에도 무죄가 영생인 줄 착각하고 있다. 인생의 근원을 모르고 죄의 근원을 모르다보니 전하는 복음도 현상에 대한 처방을 하고 있다. 현상에 대한 처방만을 놓고 본다면 불교가 훨씬 심오하고 그럴듯하다. 그러니 소위 명성있는 목회자들도 이상한 길로 빠지는 것이다. 열매는 씨의 결과다. 근원-씨가 없는데 무슨 열매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은 늦더라도 근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구속하기위해서 ‘내 영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하셨다. 우리도 내 영은 꼭 기어코 붙잡고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우리의 근원은 흙-먼지, 재로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불에 태워짐으로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있는 것이다. 내가 흙임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씨는 흙에만 씨를 뿌릴 수 있다. 사람이 본래 죽지 않을 영-씨라고 한다면 씨-하나님은 절대로 생명을 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