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본 희생물과 번제헌물

올더스조에 2015. 4. 27. 18:19

십자가에서 희생물로 드려짐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15:3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27:50, 16:37)

성전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 희생물과 헌물이었듯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떻게 희생물과 번제헌물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사복음서는 예수님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왕으로서의 예수님, 마가는 의로운 종으로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누가는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구속할 구속자이신 예수님을, 요한은 구속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었다. 신들이 되고 싶다는 것은 세상의 왕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들이란 천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종이다. 아담은 사람-아들의 위치에서 신-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아담은 아들의 위치에서 왕이 되어야 하는데 종의 위치에서 왕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씨를 뿌린 결과의 열매가 창세기 6장에서 말하는 옛적의 강력한 자 곧 명성 있는 자들’(6:4) 이고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짐승들로 상징되는 세상 왕들이다.

그러나 아담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종은 결코 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세상에 있는 왕들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왕들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를 대속하려면 이 왕은 심판받아야 한다. 또 아담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한 사악한 종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류를 대표하여 대속물이 되려면 왕으로서 그리고 종으로서 심판받아야 한다. 그런데 왕이란 한 나라의 대표이므로 왕이 심판받으면 종까지 다 심판받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목이 유대인의 왕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공식적인 죄목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것이었다.(27:37, 15:26, 23:38)

'그분의 죄명을 적은 글은 유대인들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15:26)

하나님과 종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통치체계는 율법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에 의해 가짜 왕을 대속하기 위해서는 진짜 왕이 희생물로 심판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마태와 마가가 본 예수님은 대속물(ransom)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이다. 사복음서에 보면 대속물(ransom)이란 단어가 총 2번 나오는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만 각각 1번씩 나온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20:2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10:45)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호칭할 때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15:34)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예수님은 늘 하나님을 호칭할 때 아버지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만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알든 모르든 하나님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다. 이 관계는 심판자와 심판받는 자라는 의미로 두렵고 무서운 관계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다면 율법이 작용되지 않는 친밀한 사랑의 부자관계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희생물로서 심판을 받으시게 되자 하나님은 창조주 앞에 피조물의 입장에 서신 것이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지만 하나님은 응답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희생물로서 심판받으셨다는 것이다.

즉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신 것이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는 율법이 작용하면 그 누구도 율법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이 율법시스템은 아담의 죄로 인해 들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와서 이 율법을 끝내야 한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3:20) 그래서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역설적으로 죄인들을 위해 율법의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희생물로 인해 죄가 용서되었다고 거듭남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무죄가 아니다. 거듭나려면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될 수 있는 위치로 구속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밭이다. 타락이란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 할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었다는 것이고 심판이란 하나님의 밭에 심겨진 가라지가 뽑혀진 것이다. 가라지가 뽑혀나간 것은 심판이지 영생이 아니다. 가라지가 뽑혀진 밭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려면 가라지는 모아서 불태워야 하고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도록 밭이 다시 정비되어야 한다. 이게 구속이다. 음식헌물의 규례와 같이 곱게 갈아서 태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씨-생명을 뿌릴 수가 있다. 음식헌물도 일종의 번제헌물이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먼저 구속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 번제헌물이 사람의 본래 위치다.

 

십자가에서 번제헌물로 드려짐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니라.(23:46)

여기서 대반전이 일어난다. ‘나의 하나님이여하시던 분이 갑자기 아버지여하시는 것이다. 율법에 의해 심판 받으실 때는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지만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하면서 다시 친밀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회복된다. 여러 가지 말이 있을 수 있지만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는 말은 내가 번제헌물이 된다는 말이다. 희생물이 불에 타서 재가 돼서 번제헌물이 되었듯이 희생물로 드려졌던 예수님이 불-하나님께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었다는 의미다. 영이 된다는 말은 태워져서 재가 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본디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로 드려져야 했다. 그래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번제헌물이 사람의 원래의 위치다. 그러므로 마태와 마가에서는 대속물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이고 누가는 구속자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이다.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대속물 이란 단어가 기록되어 있듯이 구속 이란 단어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사 구속하시고 (1:68)

마침 그때에 그녀가 나아와 마찬가지로 주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서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말하니라.(2:38)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위를 보고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의 구속이 가까이 오고 있느니라, 하시니라.(21;28)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24:21)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속을 위해서는 희생물이 필요하고 구속을 위해서는 번제헌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구속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서의 결론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러왔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된 곳이 없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명이고 생명을 주러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20:31)

그러므로 우리는 대속, 곧 죄 사함이 영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담도 무죄하였으나 영생이 없었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3:22)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는 창조, 타락, 대속, 구속, 부활생명이다. 이 경륜의 순서는 개인에게도 적용되지만 시대적으로도 창조(창세기 1, 2), 타락(창세기 3), 대속(교회시대), 구속(천년왕국), 부활생명(새예루살렘) 순이다.

대속이 영생이 아니다. 구속 곧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자에게만 하나님은 영생을 주실 수 있다. 대속은 단지 심판이다. 심판받았다고 해서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생명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의식에서 희생물이 불에 태워져 번제헌물이 됨으로서 희생물과 번제헌물이 동일시 되었듯이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의 대속과 구속이 동일시 되고 있는 것이다. 대속과 구속이 죄용서라는 차원에서 동일하지만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구속되어야 한다.

대속은 단지 법리적으로 죄 용서를 받은 위치지만 구속은 하나님과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위치인 것이다. 대속은 단지 심판으로 피흘림의 죽음이 필요하다. 피흘렸다고 거듭나는게 아니다. 피흘려 죽은 제물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재, 곧 영이 되어야만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면서 희생물로서 죄인들을 위해 먼저 심판을 받으셨고, 희생물인 예수님이 번제헌물이 되기 위해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신 것이다. 그래야만 생명의 연합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표현한 시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편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졌다. 전반부는 심판에 대한 극심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으나(22:1~21) 후반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다.(22:22~31)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시편221절의 말씀과 같이 전반부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였지만 후반부는 아버지여하면서 친밀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돌아서는 것을 보게된다. 인생은 원래 하나님 앞에 생명의 연합을 위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한 번제헌물이었다.(2:21) 그런데 아담은 이 길을 이탈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희생물로서 심판이 끝나자 하나님께서 본래 인생에게 정하신 번제헌물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곧 아버지와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면서 아버지를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