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방향과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마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모르니 향방없이 허공에 주먹을 치는 거와 같은 형국이다.(고전9:26) 그래서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는 줄 안다.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안다. 군대의 작전계획은 지휘관 의도를 구체화 시킨 것이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를 구체화 시킨 책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라는 인격과 단체적으로 교회라는 사회를 목표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도 그리스도라는 인격의 연합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관심도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환경에 있지 않고 영-인격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마19:16, 막10:17, 눅10:25, 눅18:18, 행16:30) 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 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담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생명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종의 관계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은 늘 종이라는 행위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존재적 위치를 물으신다. 여기에는 행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아버지는 아들이 무엇을 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존재하는 것 자체로 기쁜 것이다.(창1:31, 3:17)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정해주신 아들이라는 존재적 위치를 회복했다. 우리는 이제 전전긍긍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면서 걱정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남편과 아내의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전히 교회 내의 설교와 우리의 관심은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하면서 행위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을 율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보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에 중점을 둔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그분과의 연합이고 영생이기 때문이다. (요17:3)
우리는 예수님을 알려면 그분의 어떠하심을 알아야 한다. 그럴러면 그분의 인격을 잘게 썰어서 소화될 수 있도록 먹어야 한다. 사람은 먹는데로 자란다. 사탄의 양식을 먹으면 사탄의 자식이 되고 하나님의 양식을 먹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목자들은 양들을 먹이는 자다. 목자들은 양들이 먹기 좋게 먹이를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무우를 먹는다고 하면 무우를 통째로는 먹을 수 없다. 소화가 될수 있도록 잘게 썰어서 먹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믿어라, 이렇게 단순하게 말한다. 이것은 통무를 사람한테 주고 삼기키라는 거와 같다. 그러니 소화가 안된다. 소화가 안되니 그 사람의 생명(피와 살)이 안된다. 하나님의 목표는 인격에 있는데 말씀이 소화가 안되니 인격의 변화가 안되는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의 내용물을 먹어야 하는데 껍떼기만 먹고 있으니 얼마나 가련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격을 먹어야 하는데 피상적 껍데기만 먹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시기에 하나님의 목표는 영-생명에 있다. 영이란 보이는 형상이 아니라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도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있는 것이다. 표면은 시대에 따라 변하나 이면은 영원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 말씀은 완전하고 완벽하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보면 완벽하게 디지털처럼 딱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인격은 수학이 아니다. 기계적인 것 아니다.기계적이고 수학적으로는 2-1은 1이다. 그러나 인격은 2-1은 1이 될수 있고 안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기도한다고 줄 수도 있고 안줄수도 있는 것이다. 또 기도를 하지 않더라도 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기에게 물은 것에 대해' 2-1은 1이다'라고 잘라서 말하지 않았다. 처녀가 결혼해야 되느냐, 안해야 되느냐, 질문에 대해서 결혼 할 수 있고 안할 수 도 있다고 하였다. 참을 수 없으면 결혼하고 참을 수 있다면 결혼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이혼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 남편이 이혼하자고 하면 이혼하고 같이 살자고 하면 살라고 하였다. 만일 율법이 지배하는 구약시대였다면 음행한 연고 없이 부부가 이혼하면 안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경륜하에서는 음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약에서 왜 음행을 하지 말라고 하였는가? 이 말씀의 표면은 부부관계에 있지만 이면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편이시고 사람은 아내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음행을 한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약경륜에 와서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는 하나님께 대하여 음행한 거와 같은 형국이니 그들이 원하면 이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자가 원하면 같이 살므로서 혹시 남편이나 아내가 구원받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전7:16)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표는 영-인격,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소위 킹제임스 성경진영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모르니 표면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하나 결국 문자적인간, 기계적 인간이 되고 만다. 영-인격에 있지 않고 표면적인 것에 집중하고 있으니 도로 분열하고 싸움만 한다. 이 뿌리는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에게 있다. 지식의 세계는 분열하지만 생명의 세계는 연합한다. 교리란 생명을 이론화 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이론으로 생명을 만들 수있는가? 모기 한마리도 절대 못만든다. 단지 누가 옳으니 그르니 싸움밖에 할 수 없다. 이게 교리의 세계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러 오셨지 교리를 주러 오시지 않았다.
우리는 통상 교리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남자와 여자는 이질적이만 왜 같이 살 수 있는가? 같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동물들에게서 아담의 합당한 협력자를 찾지 못했다.(창2:20) 왜 그런가? 생명이 같지 않으면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사람도 이질적이만 같이 살 수 있는 것은 생명이 같아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하셨다. 이것을 가지고 킹제임스 성경 진영에서는 이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교리적으로 해석한다. 물론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교리적으로, 곧 이론적으로 안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한마음-한생명이 되어야 같이 살 수있는데 한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생명이 아니니 부부관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면서 사람인줄 착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의 기록의 목적은 무엇인가? 교리를 알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람되라고 쓰여진 것이다. 교리를 다 알면 무엇하나, 사람이 안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줄 생각하나니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요5:39)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성경을 탐구해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씀을 암송하고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영생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그 뒤에 말씀은 모른다.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는도다'(요5:40) 사람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요한복음 5장 39절만 주로 말한다. 이것은 지식에 대한 내용이다. 지식은 생명이 아니다. 그뒤에 말씀이 더 중요하다. 요한 복음 5장 39~40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영생이 성경에 있는 줄 알고 열심히 탐구한다. 그런데 지식적으로 성경만 열심히 탐구하지 인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날도 똑 같다. 특히 나를 비롯한 킹제임스성경진영의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내용이다. 아담의 세계는 선악의 세계다. 지식의 세계는 한계, 곧 졸업이 있지만 영-인격의 세계는 한계가 없다. 지식의 세계는 나는 모르고 남만 알지만 인격의 세계는 나만 알고 남은 모른다. 하나님은 동산을 창설하시고 가꾸고 지키라고 하셨다. 우리의 인격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고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다.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표는 모든 것이 영-생명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표면적인 것에 집중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곧 생명나무의 열매의 내용물을 먹어야 하는데, 곧 그분의 인격의 내용을 먹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으니 믿어라'하면서 껍데기만 먹고 있는 것이다. 영-인격을 먹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인 것만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예수님의 인격에 대하여 할 말이 없고 이것을 위해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한다. 다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아니고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설교를 듣고 나오는 동시에 다 잊어 먹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모르니 생활설교만 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하나 예수님에 대해 몰라도 한참 모른다.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거와 같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은 나의 어떠함과 관계가 없다. 그 은행을 신뢰하기 때문에 돈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은행을 신뢰하려면 그 은행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 오셨다. 생명은 그분 자신이고 인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되길 원하신다. 그러려면 그분을 우리는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내가 그분을 알아야 그분을 살아낼 것 아니겠는가?(갈2:20) 예수님은 우리의 죄들만을 위해 죽으신 단순한 분이 아니다. 바울을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지식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4~19)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으라고 말한다. 여기에 우주라는 말은 없지만 바울의 기도는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전 우주적 기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의 크기를 우주에 비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우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우주다. 우리는 우주의 크기를 알 수 없다.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 그분의 인격의 크기는 우주적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수준은 얼마나 왜소하고 가련한 상황에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입체적으로 알기를 원하신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단순한 한 점(點), 또는 한 선(線)만으로 알기 원하시지 않고 입체적으로 알고 그리스도의 인격의 충만을 누리기를 원하신다.(엡3:19)
'성경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본 희생물과 번제헌물 (0) | 2015.04.27 |
---|---|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 (0) | 2015.04.22 |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시에 왜 재 또는 흙을 뒤집어 쓰거나 옷을 찢었을까? (0) | 2015.03.12 |
사망(Death) vs 죽을 운명(mortality) (0) | 2015.03.09 |
예수님은 누구인가? (0) | 2015.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