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전쟁

죄란 무엇인가?

올더스조에 2015. 1. 24. 15:10

6. 죄란 무엇인가?

위치() 이탈

성경이 말하는 근원적인 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인 죄가 아니다. 죄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다라는 의미다. 이것은 다른 말로하면 그 격을 이탈하다. 그 위치를 이탈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각각의 피조물마다 목적을 두고 창조하셨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그 목적 안에 있어야 하고 천사는 천사로서 그 목적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달성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피조물에 대한 목적은 그 피조물의 격이라 할 수 있고,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개는 개로 있어야 하고 소는 소로 있어야 되고 나무는 나무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피조물은 자신의 격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그런데 그 격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 한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사망이다. 왜냐하면 창조물이 그 목적에 이탈하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바벨의 세계를 성경은 혼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탄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고, 일부 천사들 중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죄를 범한 천사들이 있다.(6)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으니(:6)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남의 떡이 커 보임으로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아담의 타락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였다.(3:5) 즉 사람의 관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천사로 옮겨 간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그 날 안에(in the day) 너희 눈이 열리고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3:5)

그러나 아담은 그 날에 신이 되지 못했다. 사람이 신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아담은 흙-사람이면서 영-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지만 신이 되지 않고 사탄의 아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할 자가 사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사탄이라는 이탈자가 또 다른 이탈자를 만든 것이다. -천사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종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고 사랑의 관계다. 그러나 주인과 종의 관계는 율법의 관계다.

아담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결과 하나님은 자신의 씨를 뿌릴 흙-사람이 필요한데 이미 마귀의 씨가 뿌려진 흙-사람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의 위치로 이탈해 버렸으니 하나님이 보실 때 이 땅에는 자신의 씨-생명을 줄 흙-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제고 사람의 문제다.

 

위치를 이탈한 사람의 결과

하나님이 정해놓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을 죄(sin, 단수)라고 하고 위치를 이탈한 사람의 외부적인 행위를 죄들(sins, 복수)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군인이 자기 위치를 이탈하여 탈영했다고 하면 그것이 죄고 그 군인이 하는 행위는 자동적으로 죄들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군인으로서 합당한 일을 해야 적법한 것인데 탈영을 하면 자신하는 모든 행위는 불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류의 문제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왕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였으나 성경은 그들을 짐승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 사람들이 신들이 되고 싶어 하고 사람이 죽는 것을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사탄에게 속아 있다는 것이다. 너무도 깊게 속아 있기 때문에 무엇에 속아 있는지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무엇에 속아있는가?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흙-사람에게 만 씨를 뿌릴 수 있다. 그런데 흙에 다른 씨가 뿌려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씨를 뿌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씨가 뿌려져 있는 밭-사람은 갈아 엎어져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아담 안에서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갈아 엎어져 심판을 받았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은혜로, 우리에 대한 혜택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것은 너무 낮은 수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라고 하였다(고전1:24)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모든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세상은 악도 죽어야 하지만 선도 죽어야 한다. 선과 악은 한 뿌리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가정과 같은 곳이다. 왜 이혼을 하는가? 선악과 때문이다. 왜 싸우는가? 선악과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선과 악의 대결이다. 예수님은 이 세계를 종결하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열어 놓으셨다. 아담이 옛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여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죽음을 통한 경륜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이 들어 있다.

좌우간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치로 창조되었고, 천사는 종의 위치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죄란 아담이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전락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3:9) 하시면서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타락한 아담에 이 질문을 하시는가? 이 말씀에서 우리는 강한 빛을 받아야한다. 이 질문에 대한 영적 빛 비침이 없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가련하게도 하나님의 이 질문에 아무런 빛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죄가 무엇인지, 인류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뿌리 없는 믿음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죄를 말하지만 죄가 무엇인지, 구속을 말하지만 구속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에게 하시는 영원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치, 곧 격을 묻고 계시는 것이다. 격을 이탈한 인생, 곧 아버지와 아들의 노선에서 종의 노선으로 이탈한 인생들의 속성은 항상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으리이까?’(19:16, 10:17, 18:18, 16:30) 하면서 행위적 관점에서 하나님께 접근한다. 선악과를 먹은 인생의 속성은 종의 근성, 노예 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야 할 자가 사탄의 아들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종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노예 여자에게서 난 자와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4:22) 이 말은 선악의 지식 세계와 생명의 세계를 대별하고 있다. 생명의 세계와 선악의 지식세계, 곧 율법의 세계는 서로 차원이 다른 세계다.

선악과를 먹은 세상은 늘 모든 문제를 옳으냐, 그르냐, 또는 선하냐, 악하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다른 차원의 세계다. 독수리와 물고기가 있다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능력이 있고 힘이 세서 더 우월하고 어느 한 쪽은 낮은 이런 차원이 아니라 두 세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 창조된 흙-사람은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을 심으면 심는 대로 그것을 발아하여 열매를 맺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흙-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거듭나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생명의 세계를 목표로 이 세상을 창조했는데 사탄으로 말미암아 흙-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선악의 지식의 세계라면 교회는 생명의 세계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침례자 요한보다 크다’(7:28)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라는 말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 악의 대표인 가인과 선의 대표인 아벨을 낳았다는 의미다. 가인 따로 아벨 따로가 아니고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가인과 아벨의 대결의 역사이다. 어떤 때는 아벨이 승리하고 어떤 때는 가인이 승리하지만 결국 한 뿌리이기 때문에 결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의 세계, 즉 가인과 아벨의 선악의 세계가 완전히 없어져하는데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세상의 문제다. 왜냐하면 선이 악을 이기더라도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선도 없어져야 하는데 어느 한 쪽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해결의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 세상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당과 야당도 타락한 아담의 대표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런 세계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을 종결하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여시려고 오신 것이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곧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에서의 이탈을 죄라고 한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천당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데 구원의 정확한 개념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 온 것이다.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창조자의 목적 안으로 들어 온 것이 구원이다.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성경의 관점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없이 믿으면 구원이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선악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성경은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고 생명 노선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생명의 관계에서는 선악과, 곧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명의 세계를 율법적인 관점에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고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결국은 나를 얽어매는 법은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율법보다 상위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세계, 곧 생명의 세계에 와 있다.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서는 다섯 여자가 나온다. 이 여자들은 율법의 관점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할 대상이다. 그런데 생명의 관점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렇다고 악을 행하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더 중요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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