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람의 위치
사람의 위치는 무엇인가? 곧 격이란 무엇인가? 피조물의 위치이고 기점이다. 기점이 없는 인생은 늘 흔들리게 되고 어디고 갈지 모른다. 창조자는 피조물에게 각자의 위치-격(格)을 부여한다. 이 위치가 피조물에게는 생명의 근원이다.
주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에덴에 동산을 세우시고 자신이 지은 남자를 거기 두셨으며(창2:8)
위 말씀에서 ‘두셨으며’의 ‘두다’(put)는 히브리어 슘(soom), 또는 쉼(seem)으로 근원적 뿌리,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리, 곧 위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위치를 떠나면 사망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할 나무가 뿌리가 뽑혀 위치를 떠나면 사망이다. 물고기도 물속을 떠나 자기 위치를 이탈하면 사망이다.
그러나 사람의 위치는 이런 장소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실재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첫 번째로 피조물로서 흙-여자의 위치에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씨로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아들의 위치에 있고, 세 번째로 이 아들이 자라서 결혼할 위치에 오면 신부가 되고 아내가 되는 위치에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실제적 위치는 우리가 부활한 후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공통적으로 사람은 흙으로서 씨가 아니고 씨를 받을 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위치에 있는 아담은 만들어졌다.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아담은 만들어진 위치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위치에 있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은 사탄이 훼방할 수 있으나 생명은 사탄이 훼방할 수 없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인데 어떤 피조물이라도 훼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주장처럼 사람이 처음에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한다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사탄의 훼방에 의하여 훼손될 수 있겠는가?
사람은 흙-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 지음받았다. 그러나 영으로 지음받은 천사는 제한을 받지 않는 존재다. 타락도 사람이 먼저가 아니고 사탄과 그의 천사가 먼저고, 사람의 타락도 사람 스스로가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보는 관점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타락했다면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없다. 우리 스스로 헤치고 나오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마13:28)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그래서 구원자 있는 것이다.
사람은 천사처럼 영이라는 제한을 갖지 않은 존재로 창조되지 않고 흙-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존재로 천사보다 낮게 창조되었다.(히2:9) 흙-육신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고 씨-영원한 생명이 뿌려져야할 위치다. 이 위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지켜할 위치다. 왜냐하면 씨는 흙에게만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위치(人格)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고정된 것이고 변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인격으로 창조되었다. 세상이 말하는 인격과 성경이 말하는 인격은 다르다. 세상은 거짓아래 있다. 타락한 사람은 신도 아니면서 신처럼 부풀려져 있다. 하나님이 처음 정해주신 격대로 있어야 하는데 부풀려져 있다는 것이다. 무교병으로 있어야 하는데 유교병으로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바로 이것이 죄다.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거짓아래 있다는 것이다. 무교병으로 지음 받았는데 유교병처럼 과대 포장하여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신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이 말하는 인격은 도덕, 명예, 학식 등 사람 자신이 쌓은 것으로 부풀려져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격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할 때에 정해 주신 것으로 변개할 수 없는 위치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이고 고정된 것이다.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복-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이 위치에 있는 사람만을 찾으신다. 우리는 무엇을 하던지 내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이 우주 안에서 나의 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주 안에서 하나님과 인생의 관계에서 인생의 위치를 알아야 흔들리지 않는다. 기점이 없는 인생은 늘 흔들리게 된다. 지금 세상에서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무엇인가? 각자에게 주어진 위치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이 계시하는 인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생의 존재적 위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에게 ‘그것을 가꾸고 지키라.(창 2:15) 하셨다. 동산이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한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표는 동산 – 성막 – 성전 – 교회 – 천년왕국 - 새예루살렘 이렇게 발전이 된다. 그러므로 이 동산은 현재의 교회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이것을 물질적 곳으로 생각해서 찾아 헤매고 다닌다. 그런데 이 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소유주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분은 사람 안에 거하시는 분이다. 인격 안에 거하시는 분이지 물질 안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아담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 동산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이 막고 계시는데 어찌 인간이 찾을 수 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자 그룹들이 그려져 있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마27:51)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동산을 막았던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이 제거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았던 장애물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동산은 물질적인 곳이 아닌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으로 결국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임무는 인격을 가꾸고 지키라는 것이다.(창2:15) 그런데 아담은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치를 이탈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위치를 이탈한 인생의 일상은 어느 때는 신을, 어느 때는 짐승의 위치를 왔다 갔다 한다. 정위치를 잃은 인간의 당연한 결과다. 위치를 이탈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신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과거 왕들은 자칭 신이라 불렀다. 중국의 천자, 일본의 천황, 로마시대의 황제들도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짐승이라 불렀다.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해 바산의 황소, 돼지들, 개들, 여우, 독사들, 짐승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현세상의 문화는 무엇인가? 바로 이 신과 짐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갈등 구조이다. 문학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 이 갈등 구조를 교묘히 이용하면 인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과의 영적전쟁의 핵심은 위치전쟁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흙-인생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씨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흙-인생의 위치를 지킨 자에게만 씨를 심을 수 있다. 위치를 이탈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고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이 차이다.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숭배할 신을 찾던지 조롱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신과 같은 기적을 행하자 많은 사람이 추종했지만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십자가 앞에서 서시자 모든 사람이 외면하고 조롱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다. 왜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는가? 아담이 사람의 위치에서 신의 위치로 이탈했기 때문에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이런 문제의식이 없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사람을 보라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물위를 걸어도 결국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으니 꼼짝 못하는 흙-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거기서 뛰어내렸다면 그분은 사람이 아니다. 아마 제자들도 그런 예수님을 기대하며 십자가까지 따라갔을 것이다. 자기들도 언젠가는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된다는 것을 소망하면서 따라갔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능력 정도면 그분은 거기서 분명히 어떤 신적인 능력을 통해 십자가에서 내려 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그 당시 그랬다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숭배했을 것이고 지금도 예수님은 엄청난 종교적 숭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소망을 모두 저버린 채 일반 사람들과 똑 같이 죽고 말았다. 그러자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음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두 자기 일터로 돌아갔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따랐던 예수님을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인데 자기들이 소망했던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그 사람은 아니구나, 우리가 사람을 잘 못 보았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죽으시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두 흩어져 자신의 일터로 돌아간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십자가가란 무엇인가? 여기서 인생의 정체성이 드러난 자리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이라 칭함으로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매달으니 꼼짝 못하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신과 같은 능력은 다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이 정해주신 존재적 위치만 남았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격만 남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이 되고 싶은 인생이 끝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인생은 흙이고 코에 숨이 붙은 것이 인생이다. 그 자리가 인생의 원래의 위치- 곧 구속의 자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의롭다고 하셨다. 십자가에 있는 인생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일 죽을 수 없는 존재라면 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흙-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위치를 찾아 주신 것이다. 인격을 회복하신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큼 한이 많고 억울한 인생도 없다. 그런데 그분은 거기서 인생으로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죽으셨다. 오히려 성경은 그것을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빌2:7~8) 라고 한다. 또 요한 복음에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요12:23) 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대속사역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라고 아주 단순하게 기계적으로 생각한다. 왜 이것을 죽기까지 순종이라고 하는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 정해 주신 격은 피조물의 처지와 관계없이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씨의 절대적 소망은 열매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씨가 열매를 얻으려면 흙과 연합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피조물의 목적과 창조자의 목적이 부딪친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오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 하셨다. 이 의미는 피조물은 창조자의 더 큰 목적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자의 목적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에만 복을 주실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몸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무엇인가?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곧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목적은 없고 이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갈망은 없다. 그런데 우리 피조물은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니 내가 죽지 않는 신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우리의 목적만을 생각하는데 피조물이란 의미는 자기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니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다. 목표와 방향을 모르니 대부분 구원받고 기화묘초 만발한 하늘에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이방종교에도 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한 인격에 있다. 환경이 아니다. 이 인격의 완성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씨가 뿌려지려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흙-사람이라는 위치를 지켜야한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목적아래 자신의 처지와 관계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바로 이 차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생의 격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수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왜 유독 예수님만 부활하셨는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시고 죄가 없기 때문에 부활하셨다. 또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대답한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그래서 부활했다면 우리에게는 절망이다. 우리 같은 보통 인간에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걸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인류에 모두에게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만을 인정하셨는가? 성경은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하나님이 저주하는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생명의 길 안에서 죽은 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노선 안에 있는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격을 무시하는 것은 창조자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끝내신 다음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창1:31)하시고 안식하셨다. 만족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자기의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좋다고 하는데 자기는 싫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한 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한 것이다. 핑계없는 무덤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정한 죽음이라는 인생의 격을 무시하고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자를 무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생명의 길을 벗어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일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를 찾아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인격(人格), 곧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위치(人格)는 피조물, 아들, 아내의 위치에 있다. 하나님은 씨-생명이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흙-여자의 위치에 있다. 사람은 자체 씨가 있는 피조물이 아니다.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에 흙이 아니고 타락하기 전부터 흙이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외부의 생명공급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다. 살아 있는 혼이란 흙으로서 혼적 기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씨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 영어를 받아 드리면 영어를 하고 한국어를 받아 드리면 한국말을 한다. 여자는 백인과 결혼하면 백인을 낳고, 다시 이혼하고 흑인과 결혼하면 흑인을 낳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마귀의 씨를 받아드리면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요일3:10)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므로...’(요8:44)하는 말씀도 그와 같은 이유다.
어떤 존재에게는 항상 두 가지 면이 있다. 외부적인 위치적인 면과 내부적인 기능적인 면이다. 흙의 위치에 있지만 흙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치는 변동될 수 있지만 기능은 바뀌지 않는다. 자동차의 예를 들어보자, 자동차의 주인이 바뀌면 자동차의 위치는 바뀌지만 기능은 변화가 없다. 사람도 이와 같다. 내가 위치를 이탈하여 마귀의 자식이 되었더라도 기능은 그대로 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이다. 씨는 땅을 필요로 하고 땅은 씨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사람의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인격의 속성은 천사에 비해 연약하고, 능력이 없고, 육체적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님은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이 운명적 위치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 좋은 열매를 생산해야할 밭이 되어야할 운명이지 스스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흙이 자체 씨가 있는가? 사람이 이 위치를 벗어나 다른 씨가 심겨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격에서 누릴 수 있는 사람의 권리를 인권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인격을 원하신다. 그래야만 그분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핵심 내용은 사탄과 사람의 위치전쟁이다. 또 이 전쟁은 사탄에게 속느냐, 속지 않느냐의 싸움이고, 사탄의 거짓 대 사람의 진실의 싸움이다. 무교병 대 유교병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정격 인격에만 복을 주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치를 이탈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인생은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위치를 이탈한 인생은 자신에 없는 것을 가지고 사탄을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서 원래 주신 것을 가지고 승리하길 원하신다. 이 길은 너무도 쉽고 가벼운 길이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마11:30)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거부하고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위치를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죽기까지 지킴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이것이 곧 생명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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