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과 사람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근원을 모르면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다. 출발이 잘 못되면 목적지가 잘 못되기 때문이다. 우주의 대표는 하나님과 사람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의 머리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근원적 관계를 아는 것이 핵심이다.
하늘과 땅 - 씨와 땅
하늘과 땅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스도와 교회를 예표 한다. 하늘은 무한하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되었고 땅은 유한하기 때문에 단수로 표현되었다. 이 하늘은 무한한 영의 세계이고 땅은 유한한 물질의 세계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 생명-씨다.(요6:63) 그래서 영이 아닌 것은 생명이 없고 유한하다. 영-씨는 하나님이고 육-땅은 사람이다. 모든 씨는 하나님-생명을 예표한다. 그래서 씨앗은 외부적인 충격이 없다면 상하지 않는다. 수천 년 전의 씨앗을 현대에 와서 발견하여 심어도 싹이 난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다.
물질세계인 이 땅의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만들어진 재료는 흙이다. 사람은 피조물의 머리로서 사람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다른 모든 피조물도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늘은 영적세계이기 때문에 하늘에 존재하는 피조물인 천사들은 영으로 창조되었다. 영이란 씨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고, 천사는 씨로 창조되었다. 이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늘과 땅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각의 세계에 적합도록 피조물에게 고유한 몸을 주셨다.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고전15:40)
하나님은 영이시고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영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피조물의 영이 하나님의 영은 아니다. 피조물의 영은 피조된 영이고 하나님의 영은 피조된 영이 아니다. 천사는 영적세계에 살도록 영-씨로 창조되었기에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천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다. 사람은 육체-흙으로 창조되었기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
성경의 주제는 씨-하나님과 땅-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땅은 변개할 수 없는 인격을 예표한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땅-인격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씨-하나님이 땅-사람을 회복하고 회복한 땅-사람에게 씨를 심어 열매를 추수하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땅을 잃어버리자 하나님은 씨를 뿌릴 땅이 없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씨와 땅을 약속하셨다.(창13:15~16)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씨-하나님과 땅-사람으로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아담이 잃어버린 땅-인격을 회복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영-씨가 되셨다.(고전15:45, 갈3:16)
씨 -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다른 종교는 사람을 어떻게 개선해 보겠다든지 가르친다든지 하는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데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씨란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피조되지 않은 생명으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란 ①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고, ②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③ 신성하고 거룩한 생명이고 ④ 하나님의 생명이자 삶이고 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 자신이다. 이 조건에 하나라도 위배되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생명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의롭고 빛이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등등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속성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랑은 하나님이다’라고 할 수 없다. ‘빛은 하나님이다’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같은 단어는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고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이시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시요,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5:20)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말할 때 헬라어로 조에(ZO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반드시 하나님께만 사용되고 피조물의 생명을 말할 때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연합(연결)됨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조물의 입장에서 ⑥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적 생명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입장에서 영원한 생명 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영원한 생명 덩어리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통 ‘영생을 얻었다, 너희 안에 영생이 있다’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중보자 곧 연결자에 의해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라는 의미다. 전등은 전기의 형상이다. 그런데 전등은 전기와 연결되지 않으면 형상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전등에 전기가 연결되어야만 보이지 아니하는 전기를 표현한다. 형상이란 이런 개념이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지만 그 생명에 몸의 세포가 연결되어 있어 육신이 사는 것이다. 세포가 연결되어 있으면 살고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손가락의 어느 부분이 잘라지던지 연결되지 못하게 끈으로 묶어 놓으면 연결이 단절되기 때문에 그 부분은 죽은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별도의 생명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우리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내가 연결됨으로서 형상인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공급을 받고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재(實在)와 형상(形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실재와 형상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생명으로서 실재(實在)고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늘 괴리가 발생한다.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에 안보이시고 사람은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재와 형상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참, 진리, 본체이고 사람은 단지 형상으로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재와 형상이 하나가 되는 나라를 목표로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물이 다 하나님의 이런 의도를 표현하고 있다. 나무의 실재는 씨-뿌리이고 지상으로 드러난 나무는 그 씨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고 보이는 것은 형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행한다고 하면 그것의 실재는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이 먼저 있고 마음에서 명령을 내리면 형상인 내 몸이 실행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영과 혼은 보이지 않고 육체만 보인다. 영과 혼이 실재라면 몸은 형상이다. 만물은 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실재와 피조물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형상뿐이니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형상인 피조물에 의해 규정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바로 실재와 형상이 하나 되는 나라를 목표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경륜의 의도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씨다. 씨의 소망은 무엇인가? 열매다. 열매 안에는 씨가 있다. 이것이 바로 씨와 열매가 하나 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최종적인 모습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TV와 라디오도 마찬가지다. TV에서 영상이 나오면 영상은 실재가 아니고 형상이다. 실재는 영상이 나오도록 전해주는 전파라는 것이다. 라디오도 소리는 형상이고 실재는 전파다. 내가 말을 하는 것도 내 마음이 실재고 목소리는 형상이다. 만물의 원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이런 원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도 여기서 근거하는 것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실재고 보이는 것은 단지 형상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말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고후4:18)
그래서 우리가 실재를 보지 못하고 형상을 섬기면 그것도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상과 형상이라는 단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십계명의 첫 번째 항목을 우리는 흔히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알고 있으나 성경은 ‘너는 나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20:4a) 라고 하면서 우상이라는 말대신 형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 레위기나 신명기에서는 우상과 형상을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해 우상들이나 새긴 형상을 만들지 말고 서 있는 형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를 위해 너희 땅에 돌로 된 형상을 세우고 그것에 절하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레26:1)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너희를 위해 새긴 우상, 곧 어떤 형상의 모습이든지, 남자나 여자의 모습이든지 땅 위의 어떤 짐승의 모습이든지, ..... 어떤 물고기의 모습이든지 만들까 염려하노라.’(신4:16~18)
이 의미는 우리가 실재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형상을 섬기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는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은 영으로 영이 실재고 생명이므로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생명이고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 곧 인격을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겉모습을 섬긴다면 그것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카톨릭과 같이 어떤 그림을 걸어놓고 예수님의 인격이 아닌 어떤 형상을 추구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왜 핍박했는가? 실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도 실재를 모르고 형상만을 추구한다면 예수님이 오셔도 모르는 것이다. 자기들이 기대하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려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행하신 외적인 일만을 가지고 그것이 예수님의 전부인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외적인 일이 예수님 자신, 곧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외적인 일은 오늘은 할 수 있지만 내일은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했다고 내일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되 그분의 마음, 곧 생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인격적인 존재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다. 외부적인 능력적인 면과 내부적인 인격적인 면이다. 예를 들어 가수가 노래를 잘한다고 해서 그 노래가 그 사람 자신은 아니다. 그 사람 자신은 그 사람 마음이다.
성경은 실재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였다.(요17:3)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도 그분의 외양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생명의 연합이 될 것 아닌가?
좌우간 사람은 처음 창조될 때 실재-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래서 영생이 없었다. 물론 차후에 우리가 실재와 형상, 곧 하나님과 사람이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연합되는 세계, 육의 세계가 영의 세계로 흡수 통일되는 세계가 와야만 이 사람은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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