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계에서는 예수님을 대단히 위대한 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통상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하면서 범접할 수 없는 분으로 숭배를 한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분이다.(딤전3:16) 그런데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지 숭배를 받으러 오셨다고 하지 않았다.(요10:10)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려함이라.(요10:10)
예수님이 오신 핵심 목적은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예수님은 희생물로서 인생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를 구속해야 했다. 그리고 그분은 구속받은 인생들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새 인류의 조상이 되어야 했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이다. 예수님은 새 사람, 곧 새 인류다.
원수 되게 하는 것 즉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화평을 이루려 하심이요,(엡2:15)
또 너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니 (엡4:24)
새 사람을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 (골3:10)
새 사람이란 옛 사람 아담과는 겉모습은 같지만 생명이 틀리다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생명이 없었다. 그러나 새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져서 새 인류의 첫 열매-조상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는데 이는 단지 그 상태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창조하셨다. 첫 사람 아담에게는 생명이 없었다. 단지 하나님의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 형상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야 하나님의 그리스도-위임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러 오셨지 경배를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경배는 하나님 한 분으로 족하다. 아들은 아버지를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한 생명으로 태어났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히2:11)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기를 원하신다.(갈2:20) 성경 어디에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했다는 말은 없다. 하나님은 경배해야 하고 예수님을 기뻐해야 한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니라.(빌3:3)
물론 우리는 주님의 구속과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만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된다. 모든 종교는 신과 사람을 분리시켜 사람으로 하여금 신을 경배하게 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경배하라고 하지 않고 한 생명으로서 살라고 한다. 예수님과 한 생명이 된 우리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배다. 씨의 소망은 열매다. 우리가 아들이 되면 참 경배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이르기를, 사람들이 마땅히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나이다, 하매 (요4:20)
이 말의 요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해야 할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해 할 장소가 교회당이냐, 성당이냐, 라고 묻는 거와 똑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에서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서도 경배하지 아니할 때가 이르느니라. (요4:21)
정작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경배란 장소적 개념도 아니고 어떤 의식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 (요4:23~24)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에 어떤 장소와 형식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씨의 절대적 소망은 열매-아들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절대적 갈망은 아들이다. 여기서 진리란 예수님이고 곧 아들이다. 영과 진리로 경배한다는 의미는 내가 아들이 되면 그것이 참된 경배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성전이라는 모형을 통해서 경배를 했다. 성전과 성전 안에서의 모든 기구들과 의식과 제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모형이었다. 그러나 성전의 실재이신 예수님이 오셨음으로 이제는 어떤 장소와 의식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이다. 실재가 있는데 그림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 그림과 실재 사과가 있다면 실재 사과를 먹을 수 있지 그림을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씨의 소망은 열매이듯이 아버지의 소망은 아들이다. 아들이 되면 참된 경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들이었다.(창6:2, 욥1:6)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라는 것이다.(히1:5)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깊은 빛을 받아야 한다.
오늘 날 우리는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님을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도 없고 인간의 존재만 남은 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위대한 능력의 신으로서 숭배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종교적으로 믿는다. 그래서 결국은 사탄이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창3:5) 라는 유혹의 말로 아담을 속였듯이 오늘 날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 물위로 걸어가신 예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신과 같은 예수를 믿는다. 신과 같은 예수를 믿고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한다. 도로 아담으로 가는 것이다. 여기에 사탄의 깊은 함정이 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경건한 자와 굳센 믿음을 가진 소위 빛을 남긴 사람들이 이 유혹에 넘어갔는지 모른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굳센 믿음의 소유자들일수록 이 속임수에 넘어간다. 우리 조상 아담이 맨 먼저 이 유혹에 속았고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명성있는 영적 거인들이 속아 넘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신들과 같은 위대한 영적 거인들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님을 너무도 당연히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하였다.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고전1:23)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유대인들의 관념에는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은 최소한 모세와 같은 지도자였다. 모세가 이집트의 노예된 상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했듯이 그들이 대망하는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메시아였다. 특히 신명기 18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세와 같은 대언자를 일으키겠다고 약속했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들을 그의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그가 그들에게 말하리라.(신18:18)
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신21:23) 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아닌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 있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겠지만 그들은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메시아의 고난을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자기들의 고난으로 해석하였다. 더구나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근본이념인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하였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이 오셔서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것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의 관념상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은 모세의 기적과 비교해서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 때문에 바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세보다 예수님이 뛰어나신 분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히3:1~6)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면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 유대인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예수님은 조선시대로 말하면 유교와 같은 유대인의 국가질서인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구약적 관념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간혹 우리는 목회자들이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장면을 기록한 성경 말씀을 보고 그들을 비난하는 설교를 하는데 과연 우리가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유대인들은 인류의 대표다. 유대인들이 그러했다는 것은 모든 인류가 그러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들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됨과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된 것이다.(롬11:25)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눅23:34)
그러니까 당시에 유대인들의 정상적인 관념으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하는 일을 가지고 저들이 알지 못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이 기도는 조만간 응답될 것이다. 지금 서서히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이방인을 대표하는 그리스인에게는 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고전1:23) 당시에 그리스인들의 관념으로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여겼고 지혜만 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지혜를 추구하는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한다는 말이 있다.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자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는 것이고 정치를 대표하는 이방인 그리스인의 입장에서는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3장 6절에서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보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했는데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는 말은 종교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지혜롭게 할 만큼’이라는 것이 세상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정치를 대표하는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천사와 같은 신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사53:2)
여기서 우리는 강한 빛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신적인 예수님을 믿고 신들과 같이 된다면 도로 아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능치 못할 일 없다고 하면서 신적인 능력을 쫓아가는 것은 속은 것이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라는 의미는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지 능력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적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신으로만 숭배만 하고 있다면 빗나간 것이다. 이것도 결국 신들과 같이 되고 싶은 타락한 아담의 속성인 것을 모르고 속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은 타락한 아담의 속성은 무엇인가? 신과 같은 사람을 숭배하고 정상적인 사람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정상적인 사람이신 예수님을 의로 여겼다.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지 않는 자는 참 사람이 아니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참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자리가 인생의 정 위치라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사람이신 예수님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사람으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알지 사람이 어떻게 신을 알겠는가? 우리가 추구할 것은 사람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들이 될 필요가 없다. 신들-천사들은 하늘에 이미 하나님이 원하는 만큼 다 있다. 우리가 신들과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과 같은 예수님을 믿고 신들과 같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힌 정상적인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고 정상적인 사람이 될 것인가? 이 갈림길에 있다. 지금도 사탄은 이 두 길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아담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 수 있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능력을 가진 천사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져서 그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였다. 이것이 죄고 멸망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거꾸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이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져서 그 열매를 먹어야 한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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