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전쟁

희생물과 헌물

올더스조에 2015. 1. 24. 15:12

8. 희생물과 헌물

희생물과 헌물은 동일시 됨

구약의 제사의식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크게 희생물(sacrifice)과 헌물(offering)로 구분된다. 희생물은 죄에 대한 값을 치루기 위한 제물이고 헌물은 하나님과 교통을 위한 제물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인 것이라면 헌물은 생명의 교통을 위한 것으로 유기적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희생물이고 그분과 사귐을 가져야 할 자로서 헌물이다. 그래서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말이 꼭 같이 따라다니고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생의 근본적 위치는 하나님께 헌물로 지음 받았으나 죄로 인해 희생물이 추가된 것이다. 희생물은 반드시 피를 제단의 주위에 뿌렸다. 이것은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니라.(1:17) 하면서 한 가지 제물을 향해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인생은 원래 죄 이전에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으나 죄가 들어옴으로 희생물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희생물과 헌물은 하나의 모형이고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다.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나이다.’(10:5) 라는 말씀은 희생물과 헌물의 실재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모형은 필요 없다는 의미다.

 

인생의 근본적 위치는 번제헌물임

우리의 상식과 통념으로는 인생은 죄인이기 때문에 맨 먼저 죄 헌물을 드리는 것이 우선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성경은 번제헌물이 맨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이 음식헌물, 화평헌물, 죄헌물, 범법헌물 순이다. 이 순서가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는 순서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생의 생각은 다르다. 인생은 늘 죄인이라 관념 때문에 인생은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다섯 가지 제물의 명칭이 ‘~헌물이 아니고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인생의 근본은 헌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원래 희생물로 창조하지 않고 헌물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헌물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모두 태워졌다. 헌물의 종류는 다섯 종류지만 모두 번제의 형태로 드려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헌물 중 번제헌물이 모든 헌물의 기본이고 총체이다. 다른 네 가지 헌물은 이 번제헌물의 발전이고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 헌물이다. 레위기 나오는 모든 헌물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곧 이 헌물은 곧 나 자신을 의미한다. 이 헌물의 대표는 번제헌물이다. 결국 인생의 근본은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서 재, 곧 흙이다. 이것은 인생은 흙이라는 것을 예표하고, 생명이 없다는 것을 예표한다.

 

왜 모든 제물은 불로 태워졌나?

성경에서 태양은 하나님을 예표한다.(4:2) 화덕같이 불태우는 날’(4:1), 불 호수(21:14)와 같이 큰 불은 심판을 상징하고 번제단과 같이 작은 불은 생명을 예표한다. 결국 불은 하나님을 예표한다. 모든 희생물과 헌물은 결국 불로 태워져 재가 되었다. 이 불은 하나님의 불이다. 창세기 324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자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레위기에서는 모세와 아론이 성막에서 번제헌물을 드리자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위의 번제헌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와 갔다가 나와서 백성을 축복하매 주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고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위의 번제헌물과 기름을 사르매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대고 엎드렸더라.’(9:23~24)

열왕기상 18장에서도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희생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왕상18:38~39)

하나님의 불이 핥아갔다는 것은 결국 그 불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는 뜻이다. 소멸할 뿐만 아니라 삼켜 버렸는데, 그 삼켜버렸다는 말은 연합이 됐다는 뜻이다. 불로 삼켜져 버렸다. 이것은 받아졌다는 의미다.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로 삼을 지니라’(1:17) 한 것은 받아졌다.’는 말이다. ‘받아졌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재가 된다는 말이 그 어원이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이 기름으로 받는다는 뜻이다. 기름으로 받는다는 말은 향기롭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기름을 드린다는 것은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기 위한 것이다. 내가 헌물로서 재가 되고 향기로운 냄새가 되면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것인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받아졌다하는 것이 단지 누구한테 물건을 주었더니 받았다 하는 뜻이면 아주 피상적인 것인데,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드렸다, 그 제물을 받아드렸다.’ 하는 뜻은 재가 된다는 뜻이다. 결국 사람의 근본적 위치는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서 재가 되어야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된다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마치고 하나님께 번제헌물과 희생물을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번제헌물과 희생물들을 태워버렸고 주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였더라.’(대하7:1)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4:24, 12:29)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불의 혀 같다’(2:3)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육과 영의 연합, 곧 흙-사람이 불-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인생이 태워져야 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재, 번제헌물이 되어야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죄로 인한 희생물만 생각하고 죄 이전에 근원적으로 인생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단지 죄 때문에 인생에게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계시는 사람은 흙-사람으로서 불-하나님께서 태워져 재가 됨으로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연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죄 이전에도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하셨다.

자고로 어떤 헌물도 살아 있는 채로 헌물로 드려지지 않았고 죽음으로서 드려진다. 아담은 왜 죄를 지었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 곧 번제헌물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희생물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 희생물 안에 헌물을 포함시켜 놓으신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고전1:24) 만약에 예수님이 단지 희생물에만 그친다면 우리에게 영생이 없다. 희생물은 단지 죄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또 단지 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한 희생물이라면 불에 의해 태워질 필요가 없다.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되기 때문이다. 이게 구속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1:14)

그런데 죄들의 용서, 곧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이라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희생물은 다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재가 됨으로서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향기로운 헌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희생물이 태워짐으로 번제헌물이 된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이 한 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불로 태우는 희생물, 곧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1:9)이라고 하면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희생물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헌물이 됨으로서 하나님께 삼켜지는 것이다. 풀은 소가 되기 위해 소에게 삼켜져야 한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삼켜짐으로 높은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죄 이전에도 하나님 앞에 헌물로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재가 되어야만 영생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육신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 번제헌물로 드려짐으로 영생을 얻을 자였다.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곧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려면 스스로 뛰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연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12:39) 하나님은 인생이 죄가 있기 때문에 소멸시키시는 불이 아니라 죄가 있기 전에도 소멸시키는 불이다. -하나님과 만나서 태워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하나님은 용광로와 같다. 용광로 안에서는 쓸모 있는 쇠든 쓸모 없는 쇠든 모두 재창조되기 위해 녹여져야한다. 번제헌물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이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보통 결혼이란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상대적 만남이므로 번제헌물 없이도 그냥 서로 적당하게 어느 선까지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서 결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내가 결혼하려면, 서로가 이해하고 양보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 절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좀 양보하고 내가 좀 양보하고, 이래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는 절대적인 관계이다. 내가 이기든가, 그분이 이기든가 둘 중에 하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가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합, 그것은 먹고 먹힘의 관계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했다. 신약에서 와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표현하셨고, 자신을 먹으라고 하셨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희생물과 헌물이 되심으로 하나님에게도 먹히시고 우리에게도 먹히심으로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 연합되려면 먹히는 과정, 곧 번제헌물로서 반드시 하나님의 불에 반드시 태워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완전한 죽음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죄 이전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희생물과 번제헌물, 이 두 제물의 공통점은 죽음이다. 희생물도 죽어야 하고 헌물도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여 받으시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십자가의 권능과 지혜라는 것이다.(고전1:24)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물이라면 이것은 법리적인 것에 그치고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이 되셨기에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하신 것이다.

대속(代贖), 구속(九屬)과 회개(悔改), ()

대속이란 법리적인 것으로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았다는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켜야 하는데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하는데, 이 죄에 대한 법리적 희생 대가를 대속(ransom)이라 한다. 그러나 법리적 대가를 치렀다고 해서 유기적 생명으로 원 위치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죄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이식하여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인생의 원래 위치, 곧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원 위치로 사람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구속(redemption)이라 하고,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정해주신 사람의 격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하고 돌아가는 것을 회개(repent)라고 한다. ()란 무엇인가? ()의 어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위치에 있다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시에 피조물의 바른 위치를 정해 주셨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에 있는 사람의 위치를 의()라고 한다. 구속이 되면 의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속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의 올바른 위치는 십자가(죽음, , )라는 것이다.

신약에 보면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대속물(ransom)이라고 표현하고 있다.(20:28, 10:45, 딤전2:6) 이것은 구약의 희생물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대속하셨다면 우리의 생명의 연합은 없다. 대속은 법리적인 것으로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속(redemp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구속이란 인생의 원위치란 의미다. 이 위치가 유기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연합될 수 있는 위치다. 인생의 원래의 위치는 흙, 번제헌물이다. 씨가 뿌려질 수 있는 위치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사람을 구속, 곧 인생의 원래의 위치를 찾아 주셨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 되었듯이 신약에서도 대속과 구속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1:14)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이 법리적인 대속(희생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가능한 인생의 원래의 위치, 곧 인생은 하나님 앞에 헌물이라는 위치를 찾아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대속의 의미도 있지만 구속, 곧 인생의 원래의 위치라는 것이다. 어떻게 죽음이 인생의 원래의 위치인가? 이해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는 혼이니까 살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영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람은 단지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로서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혼은 생명이 없는 흙으로서 십자가의 위치 곧 흙, 재의 위치, 번제헌물의 위치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원래의 위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살아 있는 혼이나, 십자가 못박혀 있는 사람이나 생명이 없는 것은 매 한가지라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거부하고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키심으로 다시 인생의 위치를 찾아 주셨다는 것이다.(1:14) 이 위치에 있는 자만을 하나님은 오직 찾으신다. 이 위치에 있는 자만이 생명의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헌물이 하나님의 불에 태워짐으로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있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재가 됨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법리적인 대속이 유기적인 구속을 이룬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희생물이 헌물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구약의 희생물은 신약의 대속물이고 구약의 번제헌물은 신약의 구속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희생물과 헌물이 하나이듯이 대속과 구속이 하나이다. 법리적인 면과 유기적인 면이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단순히 법리적인 대속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인생의 원래의 위치, 번제헌물을 통해 생명의 연합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모두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인생의 원래 위치는 생명이 없는 번제헌물로서 흙, 재의 위치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담은 이 위치를 이탈하여 신이 되고자 하였으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인생의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보석으로의 변화

사람은 흙이고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12:29) -사람과 불-하나님이 연합되면 흙-사람은 살아 있는 돌이 된다.(벧전2:5) 그러나 돌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돌도 불을 가하면 다른 차원의 물질로 변한다. 오직 보석만이 외부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보석은 영생이신 성령 하나님을 상징한다. 살아 있는 돌-사람은 불-하나님에 의해 태워져 보석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 목표는 흙-사람이 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석-사람이 되는 것이다.(고전3:11, 21:11) 이것이 생명의 연합의 실제적인 과정이다. 흙에 불을 가하면 흙은 돌이 된다. 다시 돌에 불을 가하면 돌은 보석이 된다. 이 원리가 똑 같이 적용된다. 육이 영 안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이 불-하나님께 태워져 보석이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지 보석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적 피조물인 사탄의 모습은 보석이 그를 덮고 있다.

네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더니 모든 보석과 홍보석과 황옥과 다이아몬드와 녹주석과 줄마노와 벽옥과 사파이어와 에메랄드와 석류석과 금이 너를 덮었으며 네가 창조되던 날에 네 안에서 네 작은북과 네 피리의 작품이 예비되었도다.’(28:13)

이 말씀은 사람은 흙-육신으로 창조되었고 영적으로 사탄은 보석-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석이 영원하듯이 영적인 피조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흙이라는 위치는 씨-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필요한 위치다. 그래야만 씨-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영생하는 존재였다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지 않고 씨-영으로 창조되었다는 모순이 생긴다.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 영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본적인 창조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사람이 영생하는 존재였다면 끝까지 영생해야지 가다가 어떻게 영생이 끊어질 수 있는가? 영생이란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도 보석과 같이 본질이 변함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영생하는 존재였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은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없이 죽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에게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고 마지막에 불 호수에 가두는 것이다.(21:10)

타락한 현 세상은 율법이 작용하는 세계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법이 작용하는 세계다. 우리는 율법이 작용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용하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옮겨왔다.(8:2) 종의 세계에서 아들의 세계로 옮겨 온 것이다. 노예여자에게서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자로 옮겨 온 것이다.(4:22) 그럼에도 여전히 복음을 생명의 유기적 관점보다는 단순히 법리적 관점에서만 봄으로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그러니 믿어야 한다.’ 이렇게 단순하게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화가가 설악산을 갔다 와서 그 화가가 설악산을 그린다면 그 화가와 설악산의 만남은 그 작품 속에서 만난다. 그 화가가 설악산을 작품으로 그리고자 한다면 설악산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겉만 보고서는 작품세계를 그릴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그분의 인격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한다.(17:3) 그러므로 단순히 법리적인 희생물로서의 예수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기적인 헌물로서의 인격적인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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