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거짓 Vs 진실
세상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 성경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은 개념에 차이가 있다. 세상은 지금 속이는 자 아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세상은 전체가 거짓체계 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오래 동안 깊게 속아 있기 때문에 내가 속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속은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먼저 진리, 곧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침묵한 한 가지 질문이 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 라고 물었다. 이 중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이 질문은 인간이 가진 궁극적인 물음이다. 우리는 진리라는 말을 쓸 때 참(true)과 거짓(false)이라는 헬라적 사고에 익숙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실재(實在)과 형상(形狀)에서 실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실재고 사람은 형상이라는 의미다. 실재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형상이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형상은 생명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사람으로 오셨다. 아담이 단지 형상이라면 예수님은 실재와 형상, 곧 씨와 땅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생명이라고도 하고(요 14:6)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도 하는 것이다.(고후 4:4)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생명이 없었다. 아담에게 영생이 있었다고 한다면 아담과 예수님은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말이 된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지 실재-생명이 아니다.(롬5:14)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그릇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우리는 앞에서 동산은 우리 자신, 곧 인격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동산이라는 자리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정해주신 위치로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인생의 근원적 임무는 동산, 곧 인격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다.(창2:15) 씨-하나님은 흙-인격 안에만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의 입장에서는 이 인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진실이다. 예수님은 실재인 동시에 형상으로 오셨지만 아담의 모습으로 오셔서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위치를 지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생명의 과정을 통해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인생이 결코 씨-실재가 될 수 없음에도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진실을 벗어나 비정상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씨도 아니면서 씨 인척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짓이고 사망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형상의 위치를 벗어나 실재처럼 된 것이 거짓이고 사망이다.
예수님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오셨다. 그러나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는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에서 이탈했다. 하나님의 목적, 곧 하나님이 정해주신 진실의 자리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치를 이탈한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은 ‘진리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결국 이 질문은 진실한 인격이 누구냐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인격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인격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태초에 정해주신 인생의 격이다.
아담은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을 이탈했다.(창3:5~6) 사탄에게 속은 사람은 신도 아니면서 신 인척 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신처럼 되어 있는 상태가 거짓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교병으로 만들었는데 거짓으로 부풀려져 유교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치를 이탈한 사람은 자신이 가짜인데도 가짜인지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 인생의 문제다. 죄란 바로 무교병이라는 진실의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 부풀려져 유교병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진실의 위치를 잃어버린 인생은 너무 오래 전에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잃어 버렸기에 진실이 무엇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 오셔서 볼품없는 무교병으로 참사람의 위치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잃어버린 인생의 진실-원 인격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셨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흙이고 벌거숭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지 씨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육으로 만들어졌지 영이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유교병이 되려고 한다. 사람이면서 죽지 않는 신이 되겠다는 것이다. 인생은 흙이고 무교병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진리고 진실이다. 그 외의 것은 거짓이다. 씨-하나님은 흙-인격에게만 씨를 뿌릴 수 있다. 무교병인 사람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 진실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심으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거짓 대 진실의 싸움이다. 곧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의 진실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이탈하면 사망이다.
사탄에 속은 사람들은 인생이 대단한 위치에 있는 줄 안다. 기독교인들은 인생은 원래 영생이 있었다고 믿고 불교인들은 인간 안에 불성이 있는데 어리석어 찾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까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씨가 아니고 흙이고 벌거숭이라고 드러난 자리가 십자가다. 인간의 정체성이 드러난 자리다. 인간의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자리다. 우리 주님은 진실로서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승리하셨다. 진실로서 거짓을 이기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을 믿느냐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와서 대속이라는 말은 3번 밖에 안 나오고 전부 구속이라는 말을 쓴다. 구속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속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원래의 위치라는 의미다. 아담은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의롭다고 하셨다. 의롭다고 하니까 이것을 세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의롭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위치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위치는 흙이고 번제헌물이고 벌거숭이라는 것이다. 이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구속이다.
죄란 무엇인가? 사람이 신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가 흙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구속받은 것이다.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다.’(엡 1:7, 골1:14) 신과 같은 사람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기 때문에 죄용서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자가 가출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지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신과 같은 사람을 소망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같은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 여기면 내가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은 것이다. 위치를 이탈했던 자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던 자가 목적 안으로 들어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죽지 않는 신들과 같은 사람이 참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거짓이 만천하에 폭로된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사람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거짓이 폭로되고 진실이 드러난 자리다. 예수님은 인생의 진실로서 거짓을 이기신 분이다.
또 하나님이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요일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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