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히 2:14-15)
유사이래 인류의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와 철학,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세상의 그 어떤 수단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서 인류는 늘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여 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예수님의 가장 큰 공적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에서 건져내신 분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에게 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 하나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인생은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선례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또한 그분과 같은 과정을 거쳐 부활할 것이라는 증거가 되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사람이신 예수님의 부활이 단지 예수라는 특별한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절망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예수님에게 적용되었던 부활이 예수님과 같은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들,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였던 우리와 같은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사람의 운명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 곧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한번 죽고 하나님과 연합된 다음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을 정하신 것이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운명을 육신이라는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에 속한 몸으로 바뀌도록 운명을 정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하나님의 생명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 1:12-13) 이를 위해 흙 - 사람은 씨-하나님으로부터 씨를 이식받아 본성에 속한 몸은 죽고 영에 속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흙 사람은 어떤 씨를 이식받느냐에 따라 부활의 몸이 결정된다. 하나님의 씨를 이식받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이식받으면 불의 한 자의 부활로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그러므로 천사는 죽지 않지만 사람의 육체는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한번 죽도록 운명지어졌다. 전쟁의 기본은 나의 강점으로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지 않는 천사 사탄은 육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약점을 공격하였고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 3:4-5)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을 거부하고 사탄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라는 거짓말에 속아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있는 인류는 하나님께서 정한 인간의 운명에 여전히 불만을 가지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mortality)’을 한탄하며 어떻게 하면 육체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는가에 모든 소망을 두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인류의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육체가 죽지 않고 사는 것에 모든 노력을 쏟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한 인간의 운명에 불순종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한 인간의 운명에 순응함으로서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에 속한 몸, 곧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고전 15:20)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람은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라는 것을 시청각 모델로서 보여 주신 것이다.
3.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무엇인가
◦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한다.
우선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고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연결을 의미한다. 전선에 전기가 연결되면 살았다하고 끊어지면 죽었다고 하는 거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할 때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의미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모두 이러한 생명의 법칙을 따른다. 예를 들어 내 손목에 줄을 꽁꽁묽어 피가 통하지 않게 놓아주면 피가 통하지 않는 부분을 죽게된다. 이와 같이 연결되면 살고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의 관점, 곧 글자의 사역이 아닌 영의 사역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글자대로 행하는 자가 아닌 아버지의 마음-영의 사역자다.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생명-영의 사역자이고, 천사는 종으로서 글자의 사역자다.
각각의 창조물은 자신이 살아야 할 세계가 정해져 있다. 나무는 뿌리를 흙속에 박아야 살고, 새는 공중에 살고 물고기는 물속에 살아야 하듯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고 사람은 아들이 되는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운명지어졌다. 그러나 사람은 아들의 위치를 이탈하여 종의 위치로 위치를 이탈하여 율법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영의 사역자가 될 사람이 율법이라는 글자의 사역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 3:6)
율법은 글자의 사역인데 성경은 글자의 사역을 죽이는 사역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글자는 인격적 융통성이 없기에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율법이라는 글자의 사역의 폐해의 끝판 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은 유기적으로 죄가 없으심에 불구하고 오셔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안식일을 어긴 죄로 유대 종교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아담과 이브에게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창 3:4)에서 한 말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고 한 거짓말이다. 이는 천사-사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종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기에 글자의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사망, 곧 죽음이라는 용어가 나올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지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 ‘죄의 삯은 사망’은 육체의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롬 6:23)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위 말씀 중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란 말만 가지고 죄가 들어와 육체의 사망이 왔다고 말한다. 즉 죄가 있으면 육체가 사망하고 죄가 없으면 육체가 사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러한 논리라면 죄 없으신 예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육체가 죽지 말아야 한다. 죄를 용서받은 우리 또한 죽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도 일반사람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죽으셨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육체의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4.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 영원한 생명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 곧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천사는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종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기에 1회 창조로 끝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기에 흙으로 만들어진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 받아 육체가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이 아들이 되는 것을 전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were born)’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were born) 자들이니라.’(요 1:12-13)
◦ 하나님은 용광로 하나님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과의 연합은 죽음이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나려면 왜 육체가 죽어야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다시 태어나려면 저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물리적으로 연합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 불이라는데 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성경은 영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할 때 불, 물, 바람으로 표현한다. 세상에서도 에너지의 근원을 화력, 수력, 풍력으로 표현하는 것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속성에서 기원되는 것이다. 특히 성경은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을 ‘소멸시키는 불’ 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니라.’(히 12:29)
구약의 제사의식에서도 동물을 번제단의 불로 태웠는데 이는 동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불은 하나님 자신으로서 불에 제물이 태워지는 과정을 하나님께서 음식을 드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에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왕상 18:38-39)
위 말씀에도 보듯이 불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그런데 레위기 10장을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이상한 불’을 하나님께 드리다가 죽는 장면이 나온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각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놓되 주께서 그들에게 드리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이상한 불을 그분 앞에 드렸더니 불이 주로부터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주 앞에서 죽으니라.’(레 10:1-2)
그러므로 ‘이상한 불’은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 바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생명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흙-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불 – 하나님과 물리적으로 연합되어야 한다. 그래서 흙 -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죄 때문에도 육체가 죽어야 하지만 근원적으로 사람은 죄와 관계없이 거듭나야 하기 때문에 육체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불이라는 개념에서 창세기 3장의 화염검, 구약의 번제단, 신약의 십자가가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육체로 지어진 사람의 죽음은 창세전에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하나님께 귀중한 것이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왜냐하면 성도가 불-하나님과 연합이라는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만 영에 속한 몸, 곧 부활의 몸으로 변환됨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소멸시키는 불이신 하나님은 용광로 하나님이라고 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물은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모두 재가 되던지 녹여져 하나가 된다. 사람과 나무의자도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태워져 재가 되어 하나가 된다. 이와같이 만물은 용광로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과 사람도 용광로이신 하나님 안에서 서로 하나되어 연합되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다. 흙은 가마에서 구우면 돌이 되고 더 강한 불로 태우면 보석이 된다. 보석은 영원히 성분이 변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현재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물리적 변화에 대해 ‘살아 있는 돌’(벧전 2:5)이라고 표현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부활한 몸에 대해 ‘보석’(계 21:11)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도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더라. 그것의 빛이 지극히 귀중한 보석같고 벽옥 같으며 수정같이 맑더라.’(계 21:11)
5. 성경은 육체의 ‘죽음’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을 ‘죽지 않고 잔다’라고 표현하셨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인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육체의 죽음은 죄와 관계없이 정해진 것으로서 예수님은 이것을 ‘죽지 않고 잔다’라고 표현하셨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물러가라.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분을 비웃더라.(마 9:24. 마 5:39, 눅 8:52)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의 육체의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하셨다. 육체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서 한 번 죽고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졌다.(행 24:15). 그래서 예수님은 죽지 않고 ‘잔다’라고 표현하시는 것이다. 사실 육체의 죽음을 ‘잔다’라고 처음 계시된 곳은 창세기 2장에서 계시되어 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창 2:21-22)
위 말씀에서 ‘잠들다’는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다니엘서 12장 2절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의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땅의 티끌 속에서 잠자는 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깨어나 얼마는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고 얼마는 수치와 영존하는 치욕에 이르며 지혜로운 자들은 궁창의 광채같이 빛나고 많은 사람을 의로 돌아서게 하는 자들은 별들과 같이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단 12:2-3)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의 죽음은 창세전에 정해진 것이다. 에베소서1장 4절에 의하면 교회는 창세전에 택함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유기체이므로 사람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한번 죽도록 정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창건 이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엡 1:4)
따라서 사람의 대표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 번 죽어야 한다는 것도 창세전에 정해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몸을 입으려면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과정을 우리도 똑 같이 거쳐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으로서 첫 열매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두신 것이다.(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부활이라는 첫 열매 종류에 참여하려면 예수님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 중의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 1:18)
농부가 열매를 거두려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농사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야만 하나님의 농사의 열매가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따라서 흙-사람은 근원적으로 한번 죽고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또한 우리가 현재 밤에 잠자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상징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부활을 예표한다. 따라서 육체의 사망이 없는 새예루살렘에는 밤이 없다.
‘거기에는 밤이 없을 터이므로 낮에 그 도시의 문들이 결코 닫지 아니하리라.’(계 21:25)
◦ 성경은 육체의 죽음을 ‘장막의 해체’로 표현한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를 광야의 장막으로 비유하고 예루살렘에 새워진 돌로 세워진 성전을 부활의 몸으로 비유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고후 5:1)
◦ 성경은 육체의 죽음을 '장막을 벗는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것 같이 내가 머잖아 반드시 나의 이 장막을 벗어야 할 줄 알기 때문이라.'(벧후 1:14)
◦ 성경은 육체의 죽음을 ‘새로운 몸을 입기 위한 필연적 과정’ 으로 표현한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를 장막으로 비유하되, 우리의 본성에 속한 육체가 죽는 것은 단순히 육체를 벗어나 몸이 없는 어떤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이라는 새로운 몸을 입기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 성경은 육체의 죽음을 하나님께 ‘삼켜진다’라고 표현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람의 문제는 육체 때문에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몸을 필요로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를 입고 신음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벗고자 함이 아니고 영원히 쇠하지 않는 새로운 몸을 입기 위한 필연적 과정인데 이것을 성경은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진다’라고 표현한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아래 고린도전서 15장 54절은 ‘죽을 운명(mortality)’으로 창조된 육체가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으로 바뀌는 과정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 과정을 요약하여 ‘사망이 승리가운데 삼켜진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5장 4절의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진다’ 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고전 15:54)
◦ 성경은 육체의 죽음에 대해 '죽음을 맛 본다’라고 표현한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다섯 종류 헌물은 드리 자와 받는 자가 있다. 여기서 헌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예표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을 예표하고, 제사장은 받는 자로서 하나님을 예표한다. 모든 헌물은 불로 태운다. 그래서 모든 헌물의 기초는 번제헌물이다. 다른 4가지 헌물은 번제헌물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이 과정에서 번제단의 불은 주의 불로서 소멸시키는 불이신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며 불로 태우는 과정을 하나님께 음식을 드시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 음식헌물의 위치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화평헌물(화목제)은 드리는 자와 받는 자가 동시에 먹었다. 이는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과 하나님이 연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를 먹고, 우리 또한 예수님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을 향해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요 6:54)
구약성경에는 ‘믿으라’는 말이 거의 없다. 창세기 3장에서도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예수님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하였듯이 기본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도 ‘먹는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신약에 와서 사람들에게 바로 예수님을 바로 ‘먹으라’고 하면 사람들이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 공관복음에서 ‘믿으라’고 하다가 요한복음에서 와서야 예수님은 자신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 당시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먹으라고 하자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이것을 듣고 이르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리요?’(요 6:60) 하면서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가시적이고 실재적으로 부활의 몸을 입는 과정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위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삼켜지고, 우리 또한 예수님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연합, 곧 하나님과 사람의 결혼이다. 그래서 사람의 입장에서 부활의 몸에 참여하는 과정을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진다’고 또는 ‘죽음을 맛 본다’고 하는 것이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라.’(마 16:28, 막 9:1, 눅 9:27)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는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요 8:52)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 바울은 육체의 죽음을 ‘헌물로 드려진다’ 라고 표현한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흙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분이 필요하다. 따라서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은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고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따라서 죄를 용서받은 우리의 육체가 죽는 것은 헌물로서 죽는 것이지 죄로 인한 희생물로 죽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죄 때문에 육체가 죽는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을 폄훼하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죄로 인해 죽는다고 해도 우리는 희생물이 될 수도 없다. 희생물의 자격은 오직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완전하게 구속을 받았다. 성경은 이미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 또는 용서를 받았다라고 과거로 말하지 미래로 말하고 있지 않다.(엡 1:7, 골 1:14) 신약성경의 서신서는 이미 죄를 용서받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그 어떤 곳에도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는 말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해 죽는 희생물이 아닌 ‘살아있는 희생물(롬 12:1)’, 또는 ‘영적 희생물(벧전 2:5)’ 되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것은 죄로 인해 희생물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죄와 관계없이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 4:6)
6. 결 론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흙으로 창조하신 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인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의 운명을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에 속한 몸으로 변환되도록 정하셨다.(고전 15:46) 이를 위해 우리 인생은 죄가 없더라도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사람의 운명에 불만을 품고 선악과를 먹으면 육신이 죽지 않는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 안에서 인류는 죽음을 두려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사람농사의 과정에 순응하심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육체의 죽음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얽매여 있던 인류를 건져 내신 분이다.
사실 생명의 깊은 원리는 ‘죽음’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개념에서 창세기 3장의 화염검, 구약의 번제단, 신약의 십자가가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인 동시에 용광로 하나님이기에 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생명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를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혜택 정도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고전 1:24) 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인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누려야 한다.
우리 자신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사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귀중한 것이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또한 우리의 입장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죽음을 거쳐야만 지금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롬 8:18)
그리하여 바울은 현재의 육체의 삶보다 이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있기를 원했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그러나 내가 육체 안에 산다면 이것이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필요하니라.’(빌 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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