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0. 정상적인 사람의 아들이신 분

올더스조에 2024. 2. 16. 23:58

 

 

 

1. 들어가는 말

 

예수님은 육체로 계시는 동안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보다 ‘사람의 아들(인자)’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친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83번 말씀하셨다고 한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해야 하는데 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주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담은 타락함으로서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비정상적인 사람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은 ‘정상적인 사람의 아들’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아들에게만 생명을 이식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오셔서 십자가에서 아담 안에 있던 비정상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의 아들을 정상적인 위치로 구속하시고 이들에게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셨다. 아담 안에 있는 비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아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선행적으로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고 먼저 구속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보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더 많이 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사람의 운명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흙 사람에 자신의 생명을 이식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흙 사람의 운명을 본성에 속한 몸이 한번 죽고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도록 정하셨다.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4-46)

 

흙 사람은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 하나님의 씨를 심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심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3. 아담은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

 

성경이 말하는 죄라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피조물의 격을 이탈한 것을 말한다. 사람은 인격, 개는 개격, 천사는 천사격으로 창조되었다. 각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각각의 필요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우주질서가 정상적으로 돌아 가려면 각각의 피조물이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기계도 마찬가지로 각 구성품이 적재적소에 위치해 있어야 제대로 작동된다. 그런데 사람이 신이 되겠다고 하던지, 천사가 사람이 되겠다고 하던지 하면 우주질서에 혼란이 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바로 이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탄은 아담과 이브에게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 3:4-5) 하면서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어 한번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속였다.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신도 아니면서 신 인척 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각 분야의 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누룩이 없는 무교병으로 창조하셨는데 누룩이 들어 있는 유교병같이 부풀려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누룩없는 무교병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씨를 뿌릴 수 있다. 유교병에는 이미 누룩이라는 다른 씨가 뿌려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 시에 정해준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아들이다.

 

 

4. 예수님이 아담이 잃어버린 사람의 원형, 위치를 찾아주심

 

성경이 말하는 진리, 곧 진실한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정해준 사람의 위치를 지킨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의 아들이다. 이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여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오르신 분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 2:8)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준 사람의 아들, 곧 사람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아담은 마귀와 위치전쟁에서 패하였다면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십자가에서 마귀와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하셨다. 이를 통해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원 위치, 곧 구속하신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 1:14)

 

우리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서 처음 정해준 사람의 원형, 곧 위치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사람의 원형을 잃어 버린지 너무 오래돼서 정상적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를 구속하심으로 사람의 원형을 찾아 주셨다. 사람은 흙이고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밭의 운명은 농부의 손에 달려있듯이 흙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피조물로서 자기 목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흙은 토기장이가 누구인지에 따라 자기의 가치가 달라지듯이 우리 인생의 운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5. 구속은 가장 가까운 친족 곧 ‘사람의 아들’이어야 가능함

 

히브리인이 이방인의 노예가 되었을 경우 그를 속량을 할 수 있는 의무가 혈통적으로 가까운 친척에게 그 임무가 부여되었다.

 

‘네 옆에 머무는 자나 타국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 옆에 거하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어 네 옆의 머무는 자나 타국인에게나 혹은 타국인 가족의 가문에게 팔리면 팔린 뒤에 그를 다시 속량할 수 있나니 그의 형제들 중의 하나가 그를 속량할 것이니라. 그의 삼촌이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에서 그에게 가까운 친족은 누구든지 그를 속량할 것이요, 또는 그가 능력이 있으면 자기를 속량하되’(레 25:47-49)

 

마찬가지로 사람을 구속하려면 천사도 안되고 오직 사람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죄는 친족인 사람만이 속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의미며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어 ‘사람의 아들’로 오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람의 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사람의 아들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는 1차적으로 위치를 이탈한 사람을 먼저 원 위치, 곧 구속을 하고,  2차적으로 구속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구속이 먼저고 생명이 나중인 것이다. 구속을 위해서는 정상적인 사람의 아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줄곧 자신을 지칭할 때 ‘사람의 아들’이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보유한 분으로 사람의 아들은 ‘구속’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는 번제단, 곧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성전 바깥 뜰에서 번제단으로 가셨고, 하나님으로서 지성소에 나와 번제단으로 가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가 번제단, 곧 십자가인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는 번제단 위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지성소에서 나와 번제단에 위치한 사람에게만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한 지점은 물위로 걸어간 지점도 아니고, 죽은 자를 살린 지점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원래의 사람의 위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사람의 원형, 곧 사람의 아들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소멸시키는 불(히 12:29) 이라는 개념에서 하나님 자신이 번제단, 곧 십자가라는 사실을 알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것이다. 하나님께서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은 용광로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용광로 안에 모든 철은 들어가 녹여져 재창조 되듯이 번제단, 곧 십자가는 재창조의 능력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소멸시키는 불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번제단, 곧 십자가가 우리의 근원적 위치로 생명의 태와 같은 곳이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이 사람의 원형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을 얻으려면 먼저 구속이 되어야 한다. 곧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 곧 사람의 아들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지성소에서 나와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흙의 위치에 있어야 하나님은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정상적인 아들의 위치에 있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고 씨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줄곧 오셔서 자신을 지칭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보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하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먼저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중인 것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아들, 곧 진실하신 분이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요일 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