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1. 하나님의 안식을 회복하신 분

올더스조에 2024. 2. 24. 12:41

 

 

1. 들어가는 말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보라, 그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므로’(17:5)

 

씨의 소망은 열매이듯이 하나님의 소망은 아들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신다.

 

 

2. 안식일의 배경과 의미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만든 자신의 일을 마치시고 친히 만든 자신의 모든 일에서 떠나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히 구별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며 만든 자신의 모든 일에서 떠나 안식하셨기 때문이더라.’(2:2-3)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기 때문이니라, 하라.’(31:7)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에 만족하시고 7일째 안식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특히 사람은 창조물의 머리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총체이다. 즉 사람 안에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신 후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1:31) 하신 것은 사람을 두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창조물의 머리이기 때문에 우주만물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 안에는 우주만물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소우주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사람이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셨다는 의미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안식하며 상쾌하셨다는 의미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작품이 완성되면 안식하고 만족한다.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2:10)라는 표현이 있듯이 우리는 우주 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작가인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창조주, 곧 작가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라 매우 좋았더라’(1:31) 하시면서 만족하셨다. 세상에 있는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어떤 일을 끝마치고 나면 그 일에 만족하고 마음이 상쾌 하지 않는가?

그리고, 세상에서도 어떤 작가의 작품전시회가 있는데 관람객이 그곳에 가서 그 작품을 만든 작가를 실제 만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관람객은 무조건 그 작가의 솜씨를 칭찬한다. 그 작가를 앞에 두고 작품을 폄훼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이다. 

 

하물며 온 우주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가이신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인 우리는 어떠해야 마땅한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작가를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하게 창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우리 인생을 죽지 않는 천사와 비교함으로서 사람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실례인지 사람들은 잘알지 못하는 것 같다. 창조주 하나님은 깊은 뜻이 있어 우리 인생을 천사에 비해 약한 존재로, 육체가 한번 죽도록 창조하셨다.(8:5, 히 2:7-9)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한번 죽도록 불완전하게 창조하실리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죽는다고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흙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한번 죽고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질서를 경영하기 위해 적재적소에 합당한 창조물을 완전하게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시면서 만족하시고 안식하셨다. 창조물인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래서 안식일의 근원적 의미는 ‘창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의미다. 창조물이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품고 천사가 하나님이 되겠다고 한다든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시고 보시기에 좋다라고 하는데 창조물인 우리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창조물이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가지는 것으로 창조 작가이신 하나님의 안식을 깨는 것이고 동시에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는 항상 같이 따라 다니며 형벌은 동일하게 사형인 것이다. (31:14, 24:16)

 

 

3.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품고 위치를 이탈함으로 하나님의 안식을 깸

 

천사 사탄은 아담을 유혹할 때 자신의 강점을 가지고 사람의 약점을 공격하였다. 사탄은 사람이 자신을 택하면 자신과 같이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유혹한 것이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 3:4-5)

 

그러나 아담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있으려면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고 사람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데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 왜 저를 천사와 같이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고 죽는 존재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창조주 하나님께 불만을 품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결국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법리적 죄명이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에 유대의 종교법정에서 바로 아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로 처형당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런 이유로 더욱더 그분을 죽이려 하니라.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더라.’(요 5:18) 

'아버지께서 거룩히 구별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인 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그에게, 네가 신성모독한다, 하느냐?'(요 10:36)

 

 

4.  하나님의 안식을 회복하신 분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보라, 매우 좋았더라’(창 1:31) 하시고 안식하셨지만 아담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이 깨진 것이다. 사람이신 예수님과 아담의 차이점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고 사람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신 분이라면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품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안식이신 분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자 드디어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이다. 신약의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마 3:17, 17:5, 눅 9:35, 벧후 1:17)

 

하나님은 사람을 누룩없는 무교병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무교병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여 누룩이 들어가 부풀려진 유교병의 위치로 이탈하였다. 아담은 신도 아니면서 신인척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유교병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실 수 없고 오직 무교병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다.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여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그래서 누군가와서 위치를 이탈한 아담을 원래의 위치로 옮겨와야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물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구원할 수 있고, 위치를 이탈한 사람은 위치를 이탈하지 않은 사람만이 구원할 수 있다. 정 위치에 있는 사람 예수님은 오셔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해야만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다시 원위치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원위치 시키기 위해 최종적으로 십자가에서 사탄과 마주하게 되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당시 예수님의 상황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당시 죽을 자를 살리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물위로 걸어가셨고, 자칭 타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웠으며,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인했던 분으로 예수님이 가시는 곳 마다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던 분이었다. 특히, 유대인의 왕은 정치적인 권력자이다. 그런데 졸지에 유대인들과 로마병사들에게 붙잡혀  옷이 모두 벗겨진 채 십자가에서 꼼짝도 못하고  모든 사람에게 전시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수치와 모욕이겠는가? 더욱이 그 와중에 지나가던 유대인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라며 조롱까지 한 것이다. 불난 집에 기름까지 부어진 최악의 수치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당시에 이 수치와 모욕을 반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당시에 예수님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유대인들 중 한명을 예수님의 제자가 칼로 귀를 베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리되면, 반드시 이렇게 되리라, 한 성경 기록들이 어떻게 성취되겠느냐? 하시더라.(마 26:53-54)

 

그렇다. 예수님은 이 당시 상황을 회피할 충분할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뜻 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시하였다. 예수님은 오셔서 자신은 아들로서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자신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뜻을 구한다고 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내가 내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사실 아들이란 아버지의 표현, 곧 얼굴로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다. 씨의 소망은 열매이듯이 아버지의 소망은 아들이고 아버지의 안식은 아들이다. 예수님은 왜 모든 수치와 모욕을 견디셨는가? 사람이 아들의 위치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소망이기 때문이다.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수치를 견디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무교병이라는 사람위치를 지킴으로 마귀에게 승리하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오르신 것이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영원 전 부터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안식이지만 특별히 아담이 잃어버린 사람의 아들의 위치를 회복함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을 회복하신 분이다.

 

사실 안식일의 영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없으며 하나님의 안식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의 소망은 열매이고 아버지의 소망은 아들이듯이 아버지의 안식은 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안식하셨지만 아담이 창조되기 전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의 창시자, 곧 안식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곧 안식일의 주니라, 하시니라’.(마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