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2. 근본이 있는 분

올더스조에 2024. 3. 6. 12:4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내가 내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일반적으로 '근본 없는 자'란 애비없이 가정교육을 받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덕성과 품성이 망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혈통이 불분명한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소위 세상에서 4대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 중에 예수님만 아버지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혼자 잘 낫다고 하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한 면에서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근본이 있는 분이다.

 

 

1.아담은 위치를 이탈함으로 근본 없는 자가 됨

 

아담은 창조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치에 있었다.(눅 3:38) 아담은 살과 피라는 본성에 속한 몸으로 창조되었기에 육체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천사는 죽지 않도록 창조된 것에 비해 사람은 낮게 창조된 것이다.(히 2:7-9) 천사 사탄은 아담을 유혹할 때 자신에 비해 낮게 창조된 사람의 약점을 공격하였다. 사탄은 자신을 택하면 자신처럼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거짓말로 아담을 속인 것이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 3:4-5)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신이 되겠다고 하는 시도로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사람은 인격(人格)으로 창조되었는데 신격(神格)이 되겠다고 한 것이다. 곧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이것을 죄라고 한다. 사람의 위치는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고, 천사는 하나님과 아들의 종의 운명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아담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이는 근본 없는 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사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모두 근본 없는 자들이 된 것이다.

 

 

2. 근본, 곧 기점없는 인생은 늘 흔들림

 

아담은 위치를 이탈함으로서 근본 없는 자가 되었다. 근본 없는 자란 기점이 없는 자이다. 기점이란 처음 시작되는 점을 의미한다. 창조세계는 기점, 곧 시작이 있다. 형체가 있다는 것은 만드는 시작점이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군대나 학교에서 집합을 할 때도 기준이 되는 사람을 중심으로 줄을 선다. 저절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산이 있다, 건물이 있다, 도로가 있다는 것은 만든 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창조는 증명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창조라는 쉬운 것을 믿지 않고 저절로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은 시작이 있다는 것이며 창조를 인정하는 것이다. 창조를 인정하는 것은 근본, 곧 기점이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기점이 없는 삶을 살았다. 기점이 없는 인생은 늘 흔들린다. 무엇이 기준점인지 모르니 이 사람이 말하면 이리가고 저 사람이 말하면 저리로 간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기준점이 없기에 소위 말하는 세상 여론에 휘둘린다. 기준점 없으니 세상 시류에 휩쓸려 이리 저리 흘러간다. 대부분의 사람은 일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흔들릴 수 없는 것들을 남아있게 하시려고 언젠가 땅과 하늘을 흔드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에는 그분의 음성이 땅을 흔들었거니와 이제는 그분께서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땅뿐만 아니라 하늘도 아직 한 번 더 흔드노라, 하셨느니라. 또, 아직 한 번 더, 라는 이 말씀은 흔들릴 수 없는 그것들을 남아 있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들 중에서 흔들리는 그것들을 제거하심을 표적으로 보여 주나니’(히 12:26-27)

 

 

3. 예수님께서 우리의 근본을 회복시키심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으로 근본 없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마귀에게 승리하시고 사람의 위치를 원래의 위치로 회복, 곧 구속하셨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 1:14)

 

주님의 구속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를 회복한 것이다. 주님으로 인해 근본이 회복된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지금 너무 쉽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질서 하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종의 위치에 있었다. 구약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명의 유기적 관계가 아닌 율법이라는 법리적 질서 하에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 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한다고 죽인 것이다.

 

‘아버지께서 거룩히 구별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인 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그에게, 네가 신성모독한다, 하느냐?’(요 10:36)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 축복은 저절로 온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통해 얻은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근본 있는 자가 되었고 흔들릴 수 없는 왕국을 받는 은혜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움직일 수 없는 왕국을 받을진대 은혜를 소유하자. 이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공경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속한 두려움을 가지고 받으실 만하게 하나님을 섬길지니’(히 12:28)

 

 

4. 예수님은  인성 안에서 근본 있는 분이심

 

물에 빠진 자는 물에 빠지지 않는 자가 구원할 수 있듯이 인격을 잃어버린 자는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 찾아 줄 수 있고, 근본이 없는 자는 근본이 있는 사람이 회복시켜 줄 수 있다. 예수님은 인성 안에서 근본이 있는 분이기에 근본이 없는 우리의 근본을 찾아 주실 수 있었다. 본인이 근본이 없다면 우리의 근본을 찾아 주실 수 없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늘 불만을 가지고 흙이라는 인격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인격을 찾아주시고 우리의 인격이 우주 안에서 얼마나 고귀한 지를 깨닫게 해주셨다. 인격을 회복한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격 안에만 복을 주실 수 있고 인격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신다. 씨는 땅을 필요로 하고 신랑은 신부를 필요로 하듯이 인격은 하나님의 절대적 목표이고 갈망이다. 하나님은 인격 안에만 거하신다. 인격을 되찾은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 곧 인권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인격과 인권을 되찾아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오셔서 인격의 고귀함을 스스로 증명하셨다. 다가올 기쁨으로 인하여 모든 수치와 고난을 견디시고 죽기까지 인격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오르신 것이다. 인격, 곧 사람의 위치를 지킨다는 것은 근본이 있는 인생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위치를 지킨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오셔서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해 자신 스스로의 공으로 돌리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다고 하였다. 이는 근본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는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왔느니라.’(요 6:38)

 

세상에 소위 4대 성인이라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제외 하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이들 외에도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다 자기 잘 낫다고 하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뜻을 구한다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기본 도리와 근본이 있는 분이라는 의미다.

 

특히 골로새서 1장 15-17절 말씀은 예수님은 신성 안에서 근원 자체이시지만 인성 안에서는 그분은 근본 있는 분이라는 의미다.

 

그분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의 처음 난 자이시니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 또 그분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골 1:15-17)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라는 의미는 신성을 의미하고 ‘모든 창조물의 처음 난 자 이시니‘라는 의미는 인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신성 안에서는 창조자로서 근원 자체이시지만 창조물로서는 처음 난 자라는 의미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처음이 아니고 아담이 먼저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제약이 없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다.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존재했기 때문에 창조가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창조 자체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신 예수님을 창조물이라고 하면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란 창조물이다. 그래서 사람이신 예수님은 창조물로 오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런 자가 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요이 7)

 

물론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는 아담과 달리 영원한 생명이 내주하고 계셨다. 예수님의 영은 창조된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계셨지만 육신의 모습을 가지고 계셨기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 것이다.  아담이 무정란이라면 예수님은 유정란으로 오신 것이지만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창조물이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새로운 창조물의 조상이 되려면 반드시 창조물로 오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조상은 사람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예수님은 창조물이라고 이렇게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신성이 훼손될 염려로 인해 예수님은 창조물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 제한을 가진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다.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진리는 예수님은 창조자인 동시에 창조물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하나에 치우치면 안된다. 예수님은 신성 안에서 창조자이시지만 인성 안에서 창조물의 처음 난 자로서 근본이 있는 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