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분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마 1:1)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2장의 예수님의 족보는 미리 보는 생명책이다.
1.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사람의 운명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담은 처음부터 영생이 없었다. 아담은 죄를 범해서 육체의 사망이 온 것이 아니라 육신은 어차피 죽게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롬 5:14)
위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그 이유는 아담은 실재가 아니라 모형이기 때문이다. 모형이란 모델하우스와 같은 개념이다. 건축자의 목표는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실재 집이듯이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아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실재 집이 지어지면 모델하우스의 임무가 종료되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면 아담의 임무는 종료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씨를 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본성에 속한 육체가 하나님의 씨를 이식받은 다음 그 뒤에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도록 정하셨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두 사람, 곧 첫째 사람에 속한 사람인가?, 아니면 둘째 사람에 속한 사람인가? 만을 보신다.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고전 15:47)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는 첫째 사람 아담에게 있지 않고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사람은 죄가 있기 때문에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첫째 사람에서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구약은 창세기 5장 1절에서 ‘이것은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라.’ 시작되지만 신약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마 1:1)로 시작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세대를 구분하실 때도 첫째 사람 아담의 세대와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로 구분하신다. 우리의 입장에서 인류는 여러 세대가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에게는 두 세대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첫째 사람 아담의 세대에서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로 옮겨 오는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골 1:13)
2. 강을 건넌 자, 믿음 조상이자 하나님의 예표인 아브라함
성경에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적용되는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강을 건넌 자라는 의미인 ‘히브리인’과 ‘믿음의 조상’이라는 용어이다. 그리고 예표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표이다.
첫 번째, 강을 건넌 자, 곧 히브리인이라는 의미는 죽음을 통과한다는 의미로 십자가를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타락한 세상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강을 건넜다. '히브리인'이란 단어는 창세기 14:13절에 아브라함을 가리켜 처음 사용된다. 아브라함은 첫째 사람에서 강-십자가를 통과하여 둘째 사람으로 전환된 자의 예표이다.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이 블로그 십자가의 도 참조).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최종목적에 도달하려면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연합, 곧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성경은 이러한 과정을 ‘죽을 것이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진다’(고후 5:4)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저절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신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운명을 본성에 속한 몸에서 십자가를 통과하여 영에 속한 몸으로 변화하도록 정하신 것이다.(고전 15:46) 아브라함은 타락한 세상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강을 건너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 가나안으로 갔다. 그래서 강을 건넌 자, 곧 '히브리인'이라는 의미에는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무리라는 의미에서 교회를 의미하기도 한다.(행 7:38)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던 그 천사와 또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에 있던 교회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말씀들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바로 이 사람이니라'(행 7:38)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교회에 있고 교회는 창세 전에 예정되어 있었다.(엡 1:4) 교회란 첫째 사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죽음을 통과하여 둘째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유기체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교회의 씨를 예표한다.
두 번째로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가 할례의 표적 곧 아직 할례 받지 않은 때에 그가 소유한 믿음의 의를 봉인한 표적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는 아니하였으나 믿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어 의가 그들에게도 인정되게 하려 함이요,’(롬 4:11)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듯이 신약에 와서 믿음의 창시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믿음(faith)’이란 신약에서 와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이 밝혀졌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알파요 오메가 이듯이 믿음도 예수님이 창시자인 동시에 완성자(the author and finisher)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히 12:2)
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그래서 근원적으로 믿음(faith)은 예수님이 창시하고 완성하였지만 이 믿음(faith)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이것은 내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과 같이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의 다른 표현이다. ‘믿음이 좋다’라는 의미는 성령 충만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과 ‘믿음’을 동일시하며, 충만하다 라는 표현을 한다.
‘그는 선한 사람이요, 성령(Holy Ghost)과 믿음(faith)이 충만한 사람이더라. 많은 사람들이 주께 더해졌더라.’(행 11:24)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성령과 믿음은 동일체다. 그런데 성령이란 하나님의 생명이므로 '믿음'과 '성령'과 '생명'은 동일체로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인이 되듯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롭게 된 것이다.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창 15:6)
‘이것은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갈 3:6)
믿음이란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곳이 창세기 15장 6절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 곧 생명의 조상이 된 것이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육신적 혈통에 있지 않고 영적 혈통에 있는 것이다. 생명은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적 혈통의 조상이 아브라함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효력을 상실한 것 같지 아니하니 이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아이들은 아니기 때문이라. 오직, 이삭 안에서 네 씨가 부름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곧 육체의 아이들인 자들 즉 이들이 하나님의 아이들이 아니요 오직 약속의 아이들이 그 씨로 여겨지느니라.’(롬 9:6-8)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의미는 영적 혈통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의미다.
‘그런즉 너희는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갈 3:29)
세 번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표이다. 아브라함은 성경이 말하는 영적 혈통의 조상이다. 곧 생명의 조상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표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듯이 아브라함은 모리야 산에서 자신의 독생자 이삭을 드렸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바쳤으니 곧 약속들을 받은 그가 자기의 독생자를 바쳤느니라.’(히 11:17)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표로서 믿음의 조상, 곧 생명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생명을 받은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예표인 다윗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왕, 제사장, 대언자의 세 가지 직분을 주셨다. 아담은 타락함으로서 이 세 가지 직분을 잃어버렸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직분을 모두 회복하셨다. 다윗도 이 땅에서 왕, 제사장, 대언자의 직분을 가졌다.
다윗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인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출신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동이었듯이 다윗도 베들레헴 출신의 목동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속이는 자 마귀에게 승리하셨듯이 다윗도 마귀를 예표하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마귀는 잔머리를 굴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고 우리를 속인 자다.(창 3:4-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서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고 속인 마귀의 거짓을 폭로하고 승리하셨다. 사람의 위치, 곧 진실을 가지고 거짓을 이긴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확증된 것이다. 인격의 진실로 신 마귀의 거짓을 이긴 것이다. 다윗은 돌 한 개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죽였다. 돌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한다.(벧전 2:5) 다윗의 승리는 돌-예수 그리스도가 속이는 자의 이마-머리를 쳐서 거짓을 폭로하고 승리한 것을 예표한다. 예수님의 승리는 죽지 않는 마귀를 멸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일들을 멸하기 위한 것이다.(요일 3:5) 곧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고 속인 마귀의 거짓을 온 세상에 폭로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마귀의 거짓을 폭로한 진실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요일 3:8)
4.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표이고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의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마 1:1) 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생명의 계보를 기록한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의 대언의 말씀에 따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여러 대를 거쳐 오신 것이다.
인류의 문제는 결국 ‘씨’의 문제였다. 아담의 씨는 모형으로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는 실재 씨가 아니기 때문에 죄가 있든 없든 사망이 군림할 수밖에 없었다.(롬 5:14)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목표를 충족하는 새로운 씨를 산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기 때문에 새로운 씨는 천사도 안되고 오직 사람의 씨로 와야만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우수한 종자 씨를 하나를 개발하려면 바이러스가 틈타지 못하는 엄격한 종묘시설에서 여러 과정을 거치듯이 하나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씨를 산출하기 위해 아브라함이라는 종자 씨 하나를 고른 다음 히브리 민족이라는 종묘장을 만들고 14대 동안 지속적인 종자 개량을 통해 드디어 요셉의 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예수라는 씨를 산출한 것이다. 바로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는 이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조상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모두 강을 건넌 자, 곧 십자가를 통과한 자들이다. 이들은 첫째 사람에서 둘째 사람으로 전환된 자의 예표들이다. 특히,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예수님의 조상으로 등장하는 다섯 여인이 있다. 예표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십자가를 통과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해야할 운명으로 창조되었다. 바로 다섯 여자들은 이러한 것을 예표하는 여자들로서 생명노선 안에서 구원받은 인류를 예표한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남편이 죽자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아들을 생산하기 위해 창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아들을 생산하였다. 당시 아들이 없는 여자는 상속이 없기 때문에 죽은 목숨과 같았다. 그래서 다말은 아들을 얻기 위해, 곧 살기 위해 유일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우리 인간적 관점에 보면 다말을 부도덕하다고 볼 수 있지만 성경은 다말에 대해 책망하는 말이 없다. 다말은 아들을 생산함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 노선에 동참한 여인이 된 것이다.
가나안 이방인 창녀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여리고성을 정복하려고 정탐군을 보내자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이스라엘에게 동조하여 그 대가로 자신과 자기 친족의 생명을 구하였다.(수 2:1-21, 6:17-25) 이후 라합은 유다지파의 통치자인 살몬의 아내가 되어 보아스를 낳으므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창녀 라합은 세상의 가치 기준을 버리고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노선을 택한 것이다. 라합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 노선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자기 민족을 배반하는, 즉 자신의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라합은 십자가를 통과한 자이다.
룻은 이방 모압 여인으로 유대인 남편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죽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유대 땅으로 돌아와 나오미의 친족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아들 오벳을 낳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를 잇는 복을 받았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향 모압으로 돌아가라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니이다.’(룻 1:16-17) 하면서 자기 목숨을 걸고, 곧 십자가를 통과하여 유대 땅으로 돌아와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음으로 예수님 조상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는 당시 왕이였던 다윗의 부름에 순종하여 솔로몬을 낳음으로 예수님의 조상의 반열에 오른 여자이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남편이 있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동침하면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 왕은 절대 권력자이다. 밧세바는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도 죽음이었고, 왕의 부름에 응해도 간통으로 죽음이었다. 성경은 다윗과 밧세바의 동침에 대해 다윗에 대해서는 책망하지만 밧세바를 책망하는 말이 없다. 이렇듯 밧세바는 십자가를 통과하고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아들을 생산한 여자이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결혼 전에 예수님을 잉태하였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마리아는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마리아 또한 죽음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아들을 생산한 여자이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 노선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족보이다. 이 생명노선 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십자가, 곧 강을 건너야 한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강을 건넌 자의 조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인 교회의 씨를 예표한다. 물론 아브라함은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사람으로서 모형이다. 모형은 실재가 오기까지 잠시 머무는 것이다.(롬 5:14) 모형은 실재를 위해 존재하고 실재가 오면 모형은 없어지고 실재가 그 자리를 대치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실재이신 한 씨를 산출하기 위한 약속을 하시는데 성경은 그 씨가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드디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종묘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적합한 그리스도라는 새 인류의 종자 씨를 산출하신 것이다. 이분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사람의 운명, 곧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난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저절로 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과하고 부활하심으로 드러났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롬 1:3-4)
즉 사람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려면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즉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영원 전 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셔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합당한 사람이 가야할 운명을 몸소 시범을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 예수에게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붙여진 것은 부활 이후이다. 따라서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라는 의미는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의 칭호가 아니고 부활 이후 기름부음을 받고 그리스도로서 새인류의 조상-씨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을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처음 걸어가신 분으로 새인류의 조상-씨가 되신 분이다. 그래서 오이 씨를 심으면 오이가 나고 호박 씨를 심으면 호박이 나듯이 그리스도라는 씨를 심으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똑 같은 과정을 거쳐 첫째 사람에서 둘째 사람으로 변화된 새로운 창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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