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1. 들어가는 말
2.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3. 사람이 죄와 관계없이 거듭나야 한다면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죄를 허용하셨을까?
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두 가지 위치
5. 구약성도의 거듭남에 대하여
6. 결언
1. 들어가는 말
거듭남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다. 왜냐하면 거듭남, 곧 구원이란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없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거듭남과 죄 사함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거듭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담은 창조때부터 원래 거듭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죄 사함은 거듭나기 위한 전제조건이지 죄 사함 자체가 거듭남은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죄 사함을 받은 후에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생명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거듭남, 곧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이와 같이 처음에 창조된 아담도 죄는 없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가 아니었고 근원적으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였다.(창 3:22)
거듭남은 말 그대로 출생의 문제이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타종교의 근본적 차이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거듭남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거듭남에 대해 제대로 성경적 개념을 잡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늘로 오는 빛의 은혜를 받기를 소망한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고, 우리 인간은 육체이기에 우리는 그분을 볼 수도 없고, 음성을 들을 수도 없다는데 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그분은 우리와는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실상은 모르는 것이다. 개가 어찌 사람을 알겠으며, 사람이 어찌 신을 알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신을 확실하게 계시해 주시기 위해 육체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딤전 3:16)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 3:16)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기준을 가지고 빌립 처럼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면서 우리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요 14:8-9)
"빌립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그리하면 우리에게 족하겠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요 14:8-9)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도 없었고, 모습을 볼 수도 없었고 만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곧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신 예수라는 사람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가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계셨던 그것 즉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그것을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요일 1:1)
하나님과 인간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직통으로 그분을 알 수는 없고, 오직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는 말씀과도 같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려 하지 말고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아는 것이지 사람이 신을 알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머리에 잘 숙지하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
아무튼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사람은 흙으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이식받아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성경은 이것을 거듭남, 또는 구원받았다 라고 한다. 그런데 육체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개념으로 영생을 줄 수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도 죽어야 하지만 우리의 죄와 관계없이 죽음을 통해 영-씨가 되어야만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요 12:24) 수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두 번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한마디로 어떤 책이냐 하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을 위해 죽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배열해 놓은 책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해가 안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것은 진리다.
이러한 생명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려면 우리와 같은 동질적인 존재로 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저 하늘에 앉아서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셨을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 뿐만아니라 영생을 위해서도 죽으실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죄 용서와 거듭남을 같은 개념으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아래 말씀은 대표적인 거듭남에 대한 성경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요 3:5-7)
위 말씀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 나야한다'는 의미는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육체로 태어난 다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다. 위 말씀 요한복음 3장에서도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죄 용서에 대한 말은 없다. 사람은 원래 '창조될 때부터 영원한 생명이 없었기에 죄와 관계없이 근원적으로 거듭나야할 존재였다. '죄'라는 것은 법리적으로 용서받아야할 문제이고 '거듭남'은 유기적으로 태어나야 하는 문제이다. 법리적 문제와 유기적 문제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법리적인 죄 용서와 유기적인 거듭남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서 거듭난 것은 아니다. 아담도 처음에는 죄가 없었지만 영생을 얻은 자가 아니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창 3:22) 그러므로 무죄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이지 무죄 자체가 영원한 생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탄이 방해물로 죄를 설치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지 죄 용서가 하나님의 최종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듭남'이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거듭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던 생명을 되 찾는 것이 아니라 제3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씨를 이식받아 유기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이식받아 유기적으로 '태어났다'(요1:13, 벧전 1:23)라고 말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실때 우리를 위해 두 가지 위치를 가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첫번째는 우리 인간의 죄를 법리적으로 대속할 희생물(sacrifice)의 위치이고, 두번째 위치는 우리에게 유기적으로 생명(씨)를 주기 위해 헌물(offering)의 위치로 죽으셨다는 것이다. 주1)
그러므로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게 씨-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른 종교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 주1) 물론 예수님의 대속은 법리적인 죄용서도 포함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죽으셨기에 하나님이 보실때 우리는 유기적으로도 죄가 없다.
2.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에 영원히 살게 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체적 사망이 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도 죄가 들어와 육체적 사망이 왔다고 하는 말이 없다. 성경적 의미의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라는 의미로 사람의 육체적 사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다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였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던 자로 말씀하시지 않는다.(창3:22)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창3:22)
그러므로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될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죽지 않을 운명으로 창조되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신적 사망이 왔다면 소위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말도 맞지 않는 것이며, 현재의 우리의 구원도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운명(Destiny)이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창조되었으면 끝까지 사람이고 천사로 창조되었으면 끝까지 천사인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벌은 받을 지언정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형선고를 받지 않는다. 죽지 않을 놈에게 사형선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은 죽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죄값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창조될 때부터 죽지않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 때문에 처음부터 먹을 것을 주었겠는가?(창1:29)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이 죽지 않을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면 천사처럼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아야 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육신을 가진 사람은 근본적으로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육적이건 영적이건 다 같은 말이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사실 우리가 ‘믿는다’는 말도 ‘먹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공관복음에서는 ‘믿으라’는 말을 하다가 요한복음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먹는대로 자신의 생명이 조성되는 것이다. 예수-영생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 것이고 사탄-사망을 먹으면 사망을 얻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요6:54)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믿으라고 하다가 요한복음에 와서 먹으라는 말로 하나님의 계시가 점차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하셨지 '믿으라'는 말은 없다. 이렇듯 구약성경에는 믿으라는 말은 거의 없고 예수님의 인격을 상징하는 제물을 먹으라는 말이 주류를 이룬다. 우리 생명은 먹는대로 조성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유월절 어린양도 유대인들이 잡아서 먹었고 레위기에서 나오는 제물들도 잡아서 먹었다. 내가 예수 생명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 것이고 사탄의 사망을 먹으면 사망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어야 하듯이 믿는 것도 믿을 만한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먹지 못할 것, 즉 믿지 못할 것을 믿으면 신천지처럼 되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먹는대로 몸이 조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기본개념은 먹는 것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을 고려해서 믿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먹으라는말을 하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니까 공관복음에서는 믿으라고 하다가 요한복음에 와서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니까 제자들마저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리요?'(요6:60) 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사람은 먹어야 사는 존재이지 저절로 자가 발전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를 먹으면 생명으로, 사탄을 먹으면 사망으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목표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념을 먼저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의 조건은 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②피조되지 않은 생명이고, ③ 거룩한 생명이며 ④ 하나님 자신으로 곧 하나님의 영, 성령이다. 그러면 의문점이 든다. 영원한 생명은 피조되지 않은 생명인데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 연결됨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연결, 곧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1:12-13)
그래서 ⑤영원한 생명을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영생을 얻었다 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간 연결자(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선에 전기가 들어오면 ‘살았다’ 하고 안들어 오면 ‘죽었다’ 라고 하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분배하는 것이고,(벧후 1:3)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내가 참여하는 것이다.(벧후 1:4)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벧후 1:3)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벧후 1:4)
이치에도 맞지도 않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영생을 가진 자로 창조했다면 하나님이 두 분이 계신다는 의미임으로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사람도 자기 아들은 낳아야 하듯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소위 세상이 말하는 모든 종교와 근원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른 종교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사람의 행위와 관계없이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또한 천사는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서 아들이 아닌 종의 운명으로 만들어졌기에 영생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천사는 거듭남이 없고 1회 창조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기에 반드시 흙으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종교와 근본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천사처럼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고 한번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창조할 수 밖에 없는가?' 라는 이유를 여기서 깨달아야 한다. 비록 사람은 1차적으로 천사보다 약한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천사는 종의 운명으로, 사람은 만물을 다스릴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기에 반드시 사람은 흙으로 창조된 다음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께서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셨사오니'(시 8:5-6)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죄가 없으면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체적 사망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논리라면 죄 없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육체로 창조된 사람은 죄가 없어도 한번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진리임에도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쉬운 것을 믿지 않고 어렵고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을 믿으려고 한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말은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타락한 아담과 같은 비정상적인 사람에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은 죄는 없지만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의 몸을 입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히 2:16)
죄가 없으면 우리 육체가 살고 죄가 있으면 육체가 죽는다는 말은 틀린말이다. 우리 육체는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한번은 죽도록 창조되었다. 영생이란 우리의 육체적 삶과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사람은 흙으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생명(씨)를 받아 들여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다시 태어나야 할 운명이라고 말한다.(고전 15:44. 46)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4)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우리는 창조될 때부터 본성에 속한 몸으로 창조되었다. 본성에 속한 몸은 근원적으로 영생이 없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해 말하면서 사람의 운명에 대해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몸, 곧 부활의 몸으로 일으켜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적 사망을 인간의 죄와 연결시켜 죄가 있으면 사망이고 죄가 없으면 영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죄가 없는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이지만 무죄가 영생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은 처음에 죄가 없었지만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었고 예수님 또한 죄가 없었고 영생 그 자체였지만 육체가 죽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또 이런 말씀이 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위 말씀을 보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고 살과 피, 곧 본성에 속한 몸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물속에 살려면 물고기의 생명을 가져야하고 공중에 살려면 새의 생명을 가져야 하듯이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영적인 몸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우리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 네가 뿌리는 것으로 말하건대 네가 앞으로 있을 그 몸을 뿌리지 아니하고 밀이든 어떤 다른 곡식이든 다만 맨 알갱이를 뿌리되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에게 몸을 주시며 또 모든 씨에게 그것 자체의 몸을 주시느니라. 모든 육체가 같은 육체는 아니니 한 종류는 사람의 육체요, 다른 것은 짐승의 육체요, 다른 것은 물고기의 육체요, 다른 것은 새의 육체라. 또한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이러하고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저러하니라.'(고전 15:37-40)
바울은 사람의 부활에 대해 죄가 없으면 부활한다고 말하지 않고 사람은 곡식과 같이 자기 씨를 뿌린대로 열매(부활)를 거둔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람의 부활은 죄와 관계없이 정해진 운명이며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그 세계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낼 당시 수신자의 대상은 이미 죄용서를 받고 죄와 관계없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쓴 편지다. 그러므로 소위 부활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은 죄가 없으면 부활하고 죄가 있으면 부활이 없다는 내용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어차피 부활을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의 말씀대로라면 아담은 처음부터 살과 피로 창조되었기에 아담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구원받은 우리의 육체가 죽는 것을 죄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 혼, 몸의 완전한 구원이지 육체는 죄 가운데 있고 영, 혼만 구원받는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흙으로 창조된 다음 한번은 죽은 다음 죽지 않을 운명으로 바뀌도록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으리로다.(고전15:53)
여기서 죽을 것으로 번역된 mortal은 ‘죽을 운명’이라는 의미고, ‘죽지 아니함'으로 번역된 immortality는 ‘죽지 않을 운명’이라는 의미다. 운명은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창조했으면 사람이고 천사로 창조했으면 천사지 천사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위 말씀의 의미는 사람은 죄와 상관없이 ‘죽을 운명’에서 ‘죽지 않을 운명’으로 바뀌어지도록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건 믿지 않건 모든 사람은 부활한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24:15)
그러므로 흙으로 창조된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들은 불의한 자의 부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하나님의 목표는 부활생명에 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자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씨’ 곧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여자의 씨를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을 하는 지휘관이 장애물이 나타났다고 해서 목표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장애물을 제거하고 목표로 나가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로 나아 가는데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씨’란 의미는 여자에게 씨는 없기 때문에 이것은 땅에 없는 씨고 하늘에 속한 씨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씨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씨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3:16)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피로 죄를 용서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씨(영)를 이식 받는다는 의미다. 그러면 어떻게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 씨가 되느냐 것인데 씨라 말은 영이라 의미이기에 예수님이 씨가 되려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심을 통해 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곧 육체를 가진 자가 씨, 곧 영이 된다는 말은 죽어야 한다는 의미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은 육체오 오셔서 죽어야만 씨, 곧 열매가 되어야만 인류에게 영생의 씨를 줄 수 있다.(요 12:24) 예수님이 육체로 그대로 계시면 우리에게 씨를 줄 수 없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면 죽으심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영(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었다. (고전 2:7-8)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씨(영원한 생명)를 주시겠다고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살려주는 영, 곧 영생을 주는 영(씨)이 되심으로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고전 15:45) 예수라는 이름은 육체로 계실때의 예수님의 이름이고 부활후에 그리스도가 되셨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부활 후에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기름부음을 받은자, 곧 성령을 받은 자로 '씨'라는 의미다. 사람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의 부활이 열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 첫번재 부활하신 분으로 하나님의 사람농사의 첫열매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씨와 열매는 하나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열매, 곧 씨가 되셨고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추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떤 책이냐 하면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합리적으로 죽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기록된 책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핍박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야만 인류의 구원이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의 마음과 눈과 귀를 닫아 예수님을 거부하게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기록된 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잠자는 영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도다.'(롬11:8)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예수님 거부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mystery)'이며, 이는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계획이라는 것을 우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를 때까지 일부가 눈머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생긴다는 것이라.'(롬11:25)
즉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가 죽으심을 통해 영이 되심으로 인류에게 영생을 주기위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욕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은 흙으로 창조되어 예수의 씨를 심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심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부활한다.(행24:15) 그 씨가 그 열매를 낳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은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3자, 곧 하나님께로 부터 와야 한다는 것이다. 육은 아무리 무엇을 해도 육이고 영이 살리는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요6:63). 성경에서 포도주는 부활생명을 상징한다. 포도즙을 짜서 놓아두면 자기 의지에 상관없이 공기 중으로부터 효소가 들어와 발효되어 물이 술이라는 새로운 물질로 변화되듯이 우리의 거듭남도 이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찬식 때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면하기 위해 흘린 피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도 함께 상징하는 것이다. 여담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술은 먹으면 안되기 때문에 성찬식 때 포도주가 아닌 포도즙을 사용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는 포도주가 상징하는 것을 잘 모르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노아가 홍수(침례)를 통과한 다음 포도주를 먹고 취했는데 이는 술의 좋고 나쁨에 있는 도덕적인 문제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노아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부활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육체를 상징하는 돌항아리의 물을 부활생명을 상징하는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신 다음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것의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하시니라.(요3:8)
그러니까 거듭남, 곧 영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3자, 하나님께로 부터 와야 하는데 이것은 포도즙이 포도주가 되는 거와 같은 원리다. 포도주는 공기중의 효소가 와서 포도즙을 발효시켜 포도주가 된다. 즉 물이 새로운 물질인 술이 되는 것이다. 포도즙 스스로가 발효되어 포도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기중의 효소가 포도즙 안으로 들어와서 발효되어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이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게 발효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포도주는 하나님의 생명을 예표한다.
곧 성령은 바람이 부는 거와 같이 내 안에 원래 있는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외부로 부터 받는 것이기에 새로운 생명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 영생을 얻은 자를 ‘포도주에 취한 자’라고 하는 것이다.
‘크레테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이라.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 하고 그들이 모두 놀라 의심하며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더라. 다른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이 새 포도주로 충만하다(Full of new wine), 하더라.’(행2:11-13)
* 킹제임스 흠정역성경(그리스도 예수 안에)은 wine을 '포도즙'으로 번역하였는대 이는 포도주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오해한 번역이다.
술에 완전히 취한 자는 술에 의해 완전히 지배를 받기 때문에 본래의 자신이 아니라 술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어 다른 사람이 된다. 이와 같이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자기 생명이 아닌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 들어왔기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즙이 공기중의 효소가 들어와 포도주라는 새로운 물질로 변화하듯이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고후 5:17)
물론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한다고 해서 나에게 어떤 신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겉모습은 똑 같으나 그리스도의 인격(영)을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우리가 부활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정한 운명인 죽고 다시 산 예수의 영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물위로 걸어가신 예수,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하신 예수를 믿어서는 구원이 없다. 호박씨를 심으면 호박이 나고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가 나듯이 반드시 예수님의 죽고 다신 산 씨(영)를 심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6:5)
3. 사람이 죄와 관계없이 거듭나야 한다면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죄를 허용하셨을까?
로마서 5장 14절에 보면 아담은 오실자 의 모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 (模型, figure) 이니라.’(롬 5:14)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사망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4절은 분명히 아담과 같은 소위 원죄가 없더라도 사람에게는 사망이 군림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의아해 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죄와 관계없이 사망이 군림하였으며, 이는 아담은 실재(實在) 가 아니고 모형 (模型, figure)이기 때문이다. 건축의 예를 든다면 모형이란 모델하우스라와 같은 개념으로 모델 하우스는 실제 집이 완성되면 그 역할이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은 죄가 있든 없든, 훌륭하든 안하든 모형으로서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면 그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건축자의 최종목표가 아니듯이 아담은 하나님의 최종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은 첫 사람 아담을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서 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종교다. 그러나 첫 사람은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목적에 이를 수 없다. 왜? 모형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모형으로 육체로 지음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실재인 영에 있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요 6:63)
모형은 무엇을 해도 모형이지 실재가 아니다. 일반적인 우리 그리스도인 들은 죄만 없으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육은 무엇을 해도 육이다. 그래서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고 오직 영만이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르려면 첫 사람 아담에서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전환되어야 한다. 첫 사람 아담은 죄와 관계없이 근원적으로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첫째 사람과 둘째 사람 사이에는 십자가가 있다. 첫째 사람에서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려면 죄와 관계없이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요 16:9)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태어 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죽으심을 통해서만 생명을 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연결지점이 어디서 연결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과 기름이 섞이려면 중화제가 있어야 하고, 원자도 음전자와 양전자 사이에 중성자가 있어 서로를 연결한다. 우리의 육체도 영과 몸 사이에 혼이 있듯이 만물의 구성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듯이 이렇게 삼위일체로 구성되어 있다. 저절로 연결되는 것은 없다. 두 존재가 연결되려면 어떤 중간 매개체, 즉 공통지점에서 만나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도 서로 연결이 되려면 공통지점에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이기 때문에 이 차이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간격이 큰 것이다. 그래서 그 공통지점은 상호 죽음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도 죽어야 하고 사람도 죽으면 공통지점이 생긴다. 사람과 나무의자가 있다면 서로 죽어서 불로 태워 재가 되면 연합이 된다. 이 죽음이란 말은 없어지는 것이니까 영 안에서 연합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만물은 모두 영(불)안에서 연합된다. 불이라는 용광로(번제단) 안에서 만물은 연합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본적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시며 영이시기에 영안에서만 생명의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래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mortality)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 '(고후 5:4)
즉 우리가 육체를 입고 신음하는 것은 육체를 벗고자 함이 아니고 부활의 몸을 입고자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죽을 운명(mortality)'으로 창조된 우리 육체가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삼켜진다는 말은 하나님께 잠겨진다, 곧 하나님께 침례, 곧 성령침례를 받는다는 의미다.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아니하여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시느니라.'(행 1:5)
이러한 죽을 운명으로 창조된 사람을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지성소에 나와 번제단으로 가셨고, 사람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나와 번제단으로 가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이며 십자가다. 영이신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다. 그래서 영이라는 말은 불이라는 의미며 여기서 번제단(십자가)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번제단은 용광로와 같은 곳이다. 불로 태워 새로운 물질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즉 소멸시키는 불이신 하나님 자신이 용광로이며, 십자가라는 것이다.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좋은 쇠는 나쁜 쇠든, 죄인이든 선인이든 모두 불에 탄다. 우리 인생은 내가 죄가 없건 있건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라는 용광로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재창조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원래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위해 번제단으로 가야 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위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우리가 죄가 없더라도 번제단으로 가셔야 했던 것이다. 또한 내가 내 생명을 누구에게 준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셔서 죽으실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계13:8)
죄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근원적인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 안에서 보면 이 말씀은 이해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가 없더라도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부터, 곧 창세전에 계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게 사실일까? 사실이다. 그 예가 창세기 2장에 계시되어 있다. 창세기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계시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아담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부활생명을 예표하는 이브를 산출하기 위해 피흘림이 필요없는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듯이 그리스도는 사람이 죄가 없더라도 사람에게 부활생명을 주기 위해 죽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죽었다'라고 하지 않고 아담이 이브를 산출했을 때의 용어인 ‘잠 잔다’ 라고 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왜 죄를 허용하셨는지 감이 왔을 것이다. 사람은 어차피 죄가 있으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죄가 없으면 사람이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3:24)
율법의 결정적 단점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갈3:21) 율법은 단지 글자이기 때문에 생명을 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처음부터 우리게 생명을 주기 위해 준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한다. 그래서 율법과 죄는 동일체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역설적으로 이 율법이 생명을 줄 수는 없지만 구원자를 찾게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죄, 즉 율법이 없다면 구원자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사람이 죄가 없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근원적으로 죽으셔야 한다는 진리를 어떻게 깨닫겠는가?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아담의 범죄로 죄가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 이것은 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 같이 은혜도 의를 통해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죄를 허락해서 이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를 자연스럽게 찾게하고, 또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게 한 것이다. 율법(죄)는 낚시군이 낚시를 한다면 떡 밥과 같은 것이다. 떡 밥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 없으나 낚시 바늘 앞으로 고기를 모으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이 사람 낚는 어부라면 율법은 사람을 낚는 어부인 예수님 앞으로 모이게 하는 떡 밥의 역할을 한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두 가지 위치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 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목표가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하나님의 창조도 없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와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죄와 관계없이 사람을 위해 죽어야 하는 운명은 창세전에 정해져 있었다.(고전 2:7)
재차 강조하지만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표를 달성하는데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지 죄 용서가 하나님의 창조 목표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이식받아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조상으로하는 새인류를 창조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두 가지 위치를 가지고 죽으셨다. 레위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물의 종류가 크게 희생물(sacrifice)과 헌물(offering)이라는 말이 나온다.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고, 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드려진다. 그런데 공통점은 모두 죽음을 통해 드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앞에 헌물의 위치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위기에 보면 5가지 제물의 종류가 나오는데 그중 음식헌물(소제)를 제외한 4가지 헌물은 모두 죄와 관련된 제물이다. 이중 죄와 관계없는 음식헌물(소제)도 번제단에서 하나님을 예표하는 불로 태워진다. 이 음식헌물이 사람의 근원적 위치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져야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고후5:4) 사람은 죄가 없다면 피 흘림이 필요없는 헌물의 위치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여기에 죄를 대속하기 위한 피흘림이 필요한 희생물의 위치가 추가된 것이다. 그래서 음식헌물을 제외한 나머지 4가지 헌물(화평헌물, 범범헌물, 죄헌물, 번제헌물)에는 모두 동물의 피 흘림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 위치. 곧 대속을 위한 희생물이라는 법리적 위치와 거듭남을 위한 헌물의 유기적 위치로 죽으셨다. 희생물은 피를 제단 주위에 뿌렸지만, 헌물은 하나님을 예표하는 불에 태워졌다. 사람을 예표하는 헌물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지는 것이 실제적인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순히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근원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러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또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법리적 위치고, 헌물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위한 유기적 위치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구속(redemption)이라고 한다. 대속과 구속은 죄 용서라는 개념에서는 같은 의미지만 대속은 법리적 위치고 구속은 유기적 위치로. 대속은 희생물의 위치고, 구속은 헌물의 위치이다. 즉 어떤 사람이 대속이 되었다면 법리적으로 죄용서를 받았지만 유기적으로 영생을 받을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구속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우리가 밭이라면 사탄이 밭에 가라지를 뿌린상태가 현 우리의 상태이다. 여기서 단순히 가라지를 뽑아낸 상태가 대속이고, 이 밭을 다시 알곡이 뿌려지도록 정지작업을 한 상태가 구속이라고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이란 하나님께서 밭에 유기적으로 씨를 뿌릴수 있도록 원래의 위치로 회복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근원적 위치는 하나님께 대하여 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물로 창조된 우리에게 죄가 들어왔기에 헌물로서의 자격이 상실되었지만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와서 희생물이 됨으로서 우리의 죄를 제거하여 우리의 헌물로서의 자격을 회복시켜 주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첫 번째 헌물로 드려짐으로 죽은 자가 운데서 일어나신 첫 열매로서 첫 씨가 되심으로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고전15:20) 그러므로 희생물의 위치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 가능한 것이고, 죄를 대속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은 본래의 영생을 얻기 위한 헌물로서의 유기적 위치로 죽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죽는 희생물'이 아닌 ‘살아있는 희생물’(롬12:1), 또는 '영적 희생물'(벧전 2:5)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희생물이 아니라 '헌물'로 드려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 4:6)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 위치를 가지고 죽으셨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죽음을 예표하는 침례도 두 번으로서, 홍해의 침례가 있었고 요단강의 침례가 있었다. 홍해의 침례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가 있고 요단강의 침례는 죄를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이 헌물로서 죽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반석이 갈라지는 사건도 두 번 있었다. 마태복음 3장에서도 예수님이 죄가 없음에도 요르단 강에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받았다. 예수님은 만류하는 침례요한에게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마3:15) 예수님은 죄가 없어도 침례를 받는 것이 의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죄가 없어도 인간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침례(죽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에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로서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의 위치고,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근원적 관계로서 유기적 헌물의 위치로 드려진 것이다. ‘영이 된다’는 말은 태워져 번제헌물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적 죽음은 창세 전에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통한 부활의 열매가 하나님의 최종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그대로 계시면 하나님의 최종목표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죽으시고 부활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도 육체로 계실 당시 다가올 자신의 죽음애 대해 고난이라고 하지 않고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3-24)
물론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물로서의 죽음에 중점을 둔 마태, 마가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고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근원적 목표인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죽음은 희생물이 아니고 헌물이기에 영광인 것이다. 사람 농사를 짓는 농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이 죽고 부활하는 것이 열매이고 사람의 입장에서도 육체가 죽고 부활하는 것이 영광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도 요한복음에서는 희생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헌물로서 죽음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자연의 이치에 빗대어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시는데 이것은 자신의 죽음이 죄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헌물로서 근원적으로 죽어야만 인류에게 생명, 곧 인류에게 그리스도안에서 부활의 열매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정한 우리의 운명으로 농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열매를 수확하는 것이고, 우리가 이 열매에 참여하는 것이 영광인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을 할 시에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여 휴거한다고 말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보이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15:51-53)
예수님이 재림할 시에 죽은 자가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도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변화된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이것을 농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열매를 수확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 내가 바라보니, 보라,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께서 앉으셨는데 그분의 머리 위에는 금관이 있고 그분의 손에는 예리한 낫이 있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으신 분에게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주의 낫을 휘둘러 수확하소서. 땅의 수확물이 익어 주께서 수확하실 때가 이르렀나이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분께서 자기의 낫을 땅 위에 휘두르사 땅을 수확하시니라.' (계14:14-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농사를 지으시고 그 열매를 수확하는 시기고 사람의 입장에서는 실제적인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되는 시기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조롱과 고난을 끝내고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되는 최종 클라이막스이기에 '복된 소망' 이라고 하는 것이다.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딛 2:13)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려고 사람을 창조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와서 사람을 위해 근원적으로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죄가 없다면 이 섭리를 받아드릴수 있을까? 바울의 해석은 이 오묘한 섭리를 인간은 처음부터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 또한 예수님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명분이 필요했고 인간 또한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였고 율법을 통해 초등학생처럼 가리켰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율법이 초등원리라는 말이 이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 원리 밑에서 속박 당하였느니라.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갈4:3-4)
그러므로 율법이 초등원리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경륜은 고등원리다. 이 십자가의 도를 온전히 깨닫기 바란다. 고린도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권능이요 지혜라고 한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고전 1:24)
단순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죄만을 대속했다면 그것은 지혜가 될 수 없다. 여기에는 수많은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이 심겨져 있다. 온 우주보다 크신 인격적인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원래 사람은 죽지 않도록 창조했는데 죄가 들어와 육체의 사망을 주는 그렇게 단순한 분이 아니다. 선악과를 통해 병주고 그리스도를 통해 약을 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사탄은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아담을 유혹해서 타락시켰다. 이 결과 죄가 들어오고 율법이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율법을 통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사탄이 비록 아담을 타락시키자 하나님은 율법을 인간에게 주었지만 이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더 강화된 대책을 내세우신 것이다. 사탄도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 달성을 위해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철없는 인간은 하나님께 하소연 할 수 있다. 지킬 수 도 없는 율법을 왜 인간에게 줘서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 두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더 많이 구원하기 위한 방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인간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나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쟁의 사령관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최선의 방책을 사용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기록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하심이라.(갈3:22)'
위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준 궁극적인 이유는 이 율법으로 우리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모두를 이 율법을 통해 죄 아래 가두어 우리를 이 율법으로 부터 해방시킬 구원자를 찾게하여 구원을 얻게 하기위한 것이다. 이무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두 가지 위치를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율법의 끝마침'(롬10:14)과 '마지막 아담'(고전15:45)이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14)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이 의미는 '율법의 끝마침'이라 의미는 법리적인 위치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물'이 되셨다는 의미고,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은 유기적 위치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위해 '헌물'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5. 구약성도의 거듭남에 대하여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구약시대에는 거듭남이 없었다. 거듭남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오순절 사건이 후 성령의 강림 후부터의 일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한 후부터 우리의 거듭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셨으며(벧전 1:3)
거듭남이란 말 그대로 부활생명,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영(씨)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단 한 번도 거듭남에 대한 단어가 없다. 왜냐하면 그 씨가 그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거듭남은 베드로전서 1장 3절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가능한 것이다. 성경에서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은 부활 이전의 육체로 계신 분을 말하며,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은 육체가 죽고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성경에서도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사용된다. 특히,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인류에게 궁극적으로 약속하신 여자의 씨, 곧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씨는 그리스도이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이 씨는 단순히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살려주는 영이 되심으로 그리스도(씨)가 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씨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첫 열매라는 의미는 첫 번째 씨라는 의미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그리스도는 새 인류의 조상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우리를 비록 겉모습은 옛사람과 같지만 생명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자 새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또 너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니’(엡 4: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씨를 소유한 자들로서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열매 종류가 된 자들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 중의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 1:18)
그러면 구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나? 이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동물의 제사를 통해 구원받았다. 그러니까 실재가 아니고 모형을 통해 받은 것이다. 돈으로 치면 현금을 받은 것이 아니고 어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없었다. 구약성경에는 거듭남이란 단어가 아예 없으며, 이치상으로도 맞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도 분명히 율법 아래에서는 구속이 없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 4:5)
이런 까닭에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법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영원한 상속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현금이 지불 될 때까지 하늘로 가지 못하고 땅속의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십자가를 통해 현금을 지불 함으로써 그들을 이끄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엡 4:8)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영은 있었다. 그러나 그 영은 사람들 외부에서 역사하는 영이었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처럼 우리 안에 내주하는 영은 아니었다. 즉 십자가가 없었기에 사람과 연합할 수 있는 영이 아니었다. 음식으로 치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피와 살을 먹으라는 것은 곧 십자가에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곧 번제단은 우리가 예수를 먹을 수 있도록 요리하는 도마이다.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오셨고 우리와 똑같은 죽음이라는 운명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죽음을 먹을 수 있는 것이지 예수님의 다른 부분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예수님과 우리는 십자가-죽음이라는 공통된 운명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요 6:54)
우리의 육신 안에 내주하는 하나님의 영을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성령(Holy Ghost 요 7:39) 이라는 단어로 별도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영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살려주시는 영(고전 15:45)이 되심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는 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부활 생명을 가진 몸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예수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인격(영)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6. 결 언
거듭남, 곧 구원은 출생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 과정의 중요한 원리는 예수님과의 '연합'에 있다.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옛 창조 안에서 아담과 이브가 부부로서 한 몸이 었듯이 새창조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교회)가 부부로서 한 몸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죽었고, 함께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롬 6:4)
‘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 6:6)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딤후 2:11)
예수님은 왕이자 종으로서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우리와 함께 죽으신 것이다. 특히 우리의 '거듭남'은 출생의 문제이지 나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부부는 한 몸이다. 가난한 여자가 부자 남자와 결혼하면 부자 남자의 재산이 내 재산이 되듯이 그리스도와 한 몸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고, 그리스도의 인격이 내 인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인 것이다. 시간의 제한 속에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것이 가시적으로 실행이 되지 않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시간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구원(saved)'을 받았고, 하나님께부터 '태어났다(were born)'라고 과거로 말하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saved)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 2:8-9)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were born) 자들이니라.’(요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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