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성경에 이렇게 확실하게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는데 왜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거부했는가를 잘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이 내용을 아는 것이 복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이것을 모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인해 하나님께 버려졌고 교회가 유대인을 대체했다는 등의 잘못된 교리가 나오게 된다. 우선 결론을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의 마음과 눈을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여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 죽어야만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에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거부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과 부활 이후로 구분해서 그 이유를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①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에 계시되어 있는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그리스도의 두 번 오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입장에서는 초림 시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받는 메시아와 재림 시에 오셔서 영광을 받는 메시아의 두 번 오심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고 심지어 2명의 메시아가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61장 2절을 보면 ‘또 주의 받아 주시는 해와 우리 하나님의 원수 갚으시는 날을 포고하고 애곡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게 하려 함이며’ 라는 말씀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받아 주시는 해’는 초림이고 ‘우리 하나님의 원수 갚으시는 날’은 재림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단 한 구절의 말씀에 초림과 재림의 예언의 말씀이 들어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은 현 시대, 즉 “교회 시대”가 “고난(십자가)”와 “영광(재림)” 사이에 끼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갈보리산 이편에 서서 예언이 성취된 “초림”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재림”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구약의 대언자들 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혼의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한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하되 자기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미리 증언해 주실 때에 그 영께서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표적으로 보여 주셨는지 탐구하였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그것들을 수행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수행하였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었는데 그것들은 곧 복음을 선포한 자들이 하늘에서 보내신 성령님과 더불어 이제 너희에게 전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갈망하는 것이니라.’(벧전1:10-12)
위 말씀에서 구약의 대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초림)과 영광(재림)을 탐구하였는데 자기들을 위해 하지 않았고, 우리들을 위해 수행했다고 하는데 이 의미는 그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았지만 고난(초림)과 영광(재림)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천사들 마저도 살펴보기를 갈망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Mystery)였다는 것이다. 지금 시대를 사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너무 쉽게 이야기 하지만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상식적인 관념에서 메시아의 두번 오심을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특히, 그들의 관념 속에서 고대하는 메시아는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정치적 메시아만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② 예수님이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통치체제하에 있었는데 성경은 율법을 ‘글자의 사역’이라고 말하는데 이 율법이라는 ‘글자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 3:6)
안식일의 영적 의미를 모르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예수님을 향하여 참지 못하고 율법에 안식일을 어긴 자는 죽이라고 되어 있으니 글자대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라는 글자의 사역의 한계다. 즉 율법-글자는 인격적 융통성이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마저도 알아보지 못하고 글자대로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도 이 율법이라는 방책을 폐하고 새로운 방책, 곧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義)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대책을 제시하게 되신 것이다.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히 7:18)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롬 3:21)
③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비(Mystery) 속에 감추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셔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해야만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신비(Mystery)로 감추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읽을 때에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바를 깨닫게 되리라.’(엡3:4)
성경이 말하는 ‘신비(Mystery)’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을 신비라고 한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자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 자기 일터로 돌아가 버렸다. 베드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4)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말을 세 번하였는데 이 말은 단지 자기 목숨이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사람을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감옥에도 죽는 데에도 갈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눅22:33)라고 고백했던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가 빈말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물며 베드로가 한 말이 건성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꿈꾸었던 것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이스라엘 모두가 소망하는 정치적 지상 메시아 왕국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 정치적 왕으로 오신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무고하게 처형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초기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5) 라는 질문에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라고 대답하였지만 이것은 진짜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것은 분명하다. 단지 하나님의경륜과 목적을 위해 제자들이 선택되었고, 그러한 말을 한 것 뿐이지 그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그 당시에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구속은 필요 없는 것이 된다. 구속이란 어떤 기준으로 돌아간다는 것인데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구속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은 필요없게 된다.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들 마저도 예수님을 알 수 없어야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롬3:10) 라는 말이 맞는 것이다. 아무도 예수님을 알지 못해야 예수님의 구속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종-율법적인 관계에 있었고 예수님은 아들-생명의 관계에 있었기에 그들로서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상식과 기대 밖에 있던 사람이었기에 그 당시 제자들도,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그리스도의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그리스도)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7-8)
그러니까 이 말씀대로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④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 후에도 이스라엘은 왜 예수님을 계속 거부했냐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목표는 땅에 있다. 즉 이 땅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시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선민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구약성경의 결론은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심판하고 이 땅에 메시아가 다스리는 정치적 지상왕국을 건설하시는 것이었다. 이 왕국이 소위 천년왕국이다. 구약 성경의 예언은 ‘사람의 아들’인 메시야가 이 땅을 실제로 통치할 것이며, 지상 메시아 왕국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단7:13:13-14, 2:34-35, 44-45; 렘23:5; 슥14:9).
현자들이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왔을 때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마2;2) 라고 물었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서 경배하였다.(마2:1-11) 예수님은 왕으로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 30세가 되시고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나타났을 때, 침례 요한은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라고 하였다. 이것은 침례 요한의 사역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마3:3, 사40:3).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정치적 ‘왕국’이다. 요한의 메시지가 만일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이 외적이며 가시적인 이 땅의 왕국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그의 메시지는 ‘메시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요한 자신이 제자들을 보내고 홀로 있었을 때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 오실 그분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마11:3)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사야서 35장 1-10절을 인용하시면서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그것들을 요한에게 다시 보이되 곧 눈먼 자들이 시력을 받으며 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정결하게 되며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할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3-5) 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은 부정하지 않으시고 ‘그렇다.’ 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 또한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시고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하셨다.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이라 불리는 것은 천상의 영적인 왕국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지는 정치적 지상왕국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분이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눈에 보이는 왕국의 기대를 가지고 이렇게 질문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나이까?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때나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6-7)
이것은 분명히 제자들은 영적인 것이 아닌 지상의 눈에 보이는 왕국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영적인 왕국’ 세우려 오셨다면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가시려는 장엄한 순간에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왕국은 영적으로 세워질 것이며 이 땅위가 아니다.’ 라고 상세하게 그들에게 설명해 주어 그들의 잘못된 기대와 생각을 깨우쳐 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세워지는 ‘때나 시기는 알 필요가 없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시대에 하나님의 가용한 통치 대상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이라는 두 부류가 있었다. 만일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렇게 되었다면 성경대로 이 땅에 이스라엘 민족이 중심이 되는 메시아의 지상왕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된다면 문제가 생기는데 이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온 인류가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오직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시냐? 그분은 또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냐? 참으로 또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니’(롬3:29)
이스라엘은 단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된 인류의 대표민족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채택한 방책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예수님을 알 수 없도록 눈 멀게 했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 멀게 된다는 것이라.’(롬11:25)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였고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세웠고, 이 민족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면 성경 예언의 최종 결론인 유대인들 중심의 메시아 지상왕국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구원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눈멈도 하나님이 계시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mystery)라는 것이다.
주) 물론,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 받아들였다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이방인들을 다른 방법을 통해 구원하셨을 것임에 틀림없다.
좌우간 그렇게 된다면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차질이 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부러 그들에게 예수님을 거부하게 하여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할 수 있도록 유대인들에게 잠들게 하는 영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잠들게 하는 영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도다. 함과 같으니라.’(롬11:8)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바울은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넘어짐을 통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으니....’(롬11:11)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적 관점에 보면 과거 유대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 이방인들의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우리는 그 당시 예수님을 핍박한 유대인들을 비난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 우리도 당시 유대인의 입장에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⑤ 또한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 후에도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거부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이 되는 유기체인 교회에 대한 신비였다. 교회는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감추어져 온 신비로서 구약성경에서 전혀 언급된 적이 없으며 신약에 와서 바울에게 처음 계시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이 된다는 개념을 유대인들은 받아드리기 어려웠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그 목적은 이제 교회를 사용하사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곧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작정하신 영원한 목적에 따른 것이라.’(엡3:9-11)
현 시대는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 세 부류가 있지만 구약시대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두 부류만 있었다. 현 시대에 교회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면 한 몸이 되는 생명 유기체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관점은 자신들만이 선민이고 이방인들을 개라고 여겼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경멸했다.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울에게 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라는 영적인 유기체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이 계시되었는데 이것은 다른 시대에는 계시되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분께서는 이제 자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대언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이 신비를 계시하신 것 같이 다른 시대들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그것을 알리지 아니하셨는데 이 신비는 곧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료 상속자가 되고 같은 몸에 속하게 되며 그분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라.’(엡3:5-6)
그래서 바울에게 교회의 신비가 계시된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 때문에 그리스도를 받아 드리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사도 베드로 마저도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먹다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오자 그들의 비난이 두려워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먹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는데 이에 대해 바울이 베드로의 위선을 책망했던 사례도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책망 받아야 했으므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으나 그들이 오매 할례자들인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가 뒤로 물러가 자신을 분리하였으며 다른 유대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느니라.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걷지 아니하는 것을 내가 보고 그들 모두 앞에서 베드로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의 방식대로 살고 유대인들처럼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 이방인들을 강요하여 유대인들처럼 살게 하느냐? 하였노라’(갈2:11-14)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 안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고 하나님은 이들을 도구 삼아 예수님을 죽임 당하게 함으로서 온 인류의 대속물이 되게 하셨고, 또 부활 후에도 일부 유대인들 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눈 멀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약속된 지상 메시아 왕국이 최종적으로 연기되게 하였고, 이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해지게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전에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거부되었고, 부활 후에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거부됨으로써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상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완전히 거부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유대인에게로 향했던 복음을 이방인에게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는 이방인의 구원의 수가 충족될 때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 멀게 함으로서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지상왕국은 연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 멀게 된다는 것이라.’(롬11:25)
결국 이러한 이스라엘의 메시아 거부는 큰 틀 안에서 보면 유대인 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섭리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어떤 사람도 유대인을 비난할 자격과 명분이 없다. 우리도 그 당시 유대인이었다면 앞장 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활용되었기에 지금 우리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는 이방인들의 구원의 수가 충만해지는 시기, 곧 교회가 휴거하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유대인들은 성경의 예언대로 환란을 통해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 올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리니 내가 그들의 죄들을 제거할 때에 이것이 그들을 향한 내 언약이니라, 함과 같으니라.'(롬11:25-27)
'누가 그러한 일을 들었으리오? 누가 그러한 일을 보았으리오? 세상이 하루에 생겨날 수 있으며 민족이 순식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자마자 그 자녀들을 낳았도다.(사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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