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도

3.5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올더스조에 2019. 2. 20. 21:15

3.5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위치전쟁을 통해 마귀로부터 획득한 전리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마귀는 최종적으로 아담이 생각하는 인생 최대의 약점인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가지고 송사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가지고 승리했기에 더 이상 마귀의 송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마귀와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으므로 마귀의 일을 멸하신 것이다. 사탄은 근본적으로 속이는 자로서 잔머리를 굴려 아담을 속이는데 성공했으나 이제는 예수님이 사람의 위치를 당당히 지킴으로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사탄의 속임수를 사람의 진실로서 승리하신 것이다. 더 이상 사탄의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 여자의 씨(예수님)가 네(사탄)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3:15)

이것에 대한 예표가 다윗이 돌 한 개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죽이는 장면이다.

손을 자루에 넣어 거기서 돌을 꺼내어 돌팔매 기구로 던져 불레셋 사람(골리앗)의 이마를 치매 그 돌이 그의 이마에 박혀 그가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지니라(삼상 17:49)

돌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한다.(2:45, 벧전 2:4) 이것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상징인 골리앗에게 승리한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린양이 호랑이를 이겼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어린 다윗이 전사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가? 그런데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위치전쟁으로 사탄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살펴보자.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의 일을 멸함(요일 3:8)

마귀가 인간과 비교했을 때 최대의 강점은 무엇인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최대 약점인 육신의 죽음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게 하여 나한테 경배하면 나와 같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하면서 사람을 속여 둘째 사망으로 인도하는 권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고귀한 인격의 자리를 이탈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가 인간의 최대 약점으로 여기던 첫 번째 사망, 곧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운명인 육신의 죽음을 가지고 마귀와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마귀의 속임수가 사람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길을 사람이신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것이다. 첫 번째 주자로 예수님이 길을 열어 놓으셨기에 우리도 이제 승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적장인 마귀는 십자가의 위치전쟁에서 예수님에게 패배 당했으므로 멸망을 선고 받은 것이다.

...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려고 (2:14)

마귀를 멸한다는 말은 그를 없앤다는 말이 아니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로 죽지 않는다. 마귀는 본질적으로 속이는 자다. 요한일서 38절에서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한다. 마귀의 일들을 멸하므로 우리를 마귀의 속임수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의미다. 마귀의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멸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20:10)

그러므로 지금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여전히 마귀의 자식으로 사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8:44)

피조물의 타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다. 사탄은 원래 천사의 수장으로서 하나님과 종의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자기의 위치를 이탈했는데 이것이 이미 사탄에게는 사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사탄이 타락하자 사형선고를 내렸고 종말에 불 호수에 들어갈 것을 예정하고 있는 것이다.

‘....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25:41)

마귀와 그 졸개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그들을 사람이 이길 때까지 마귀와 그의 졸개들에 대한 형 집행은 연기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은 지금 사탄의 자식들로 채워져 있지만 장차 하나님의 아들들로 세상이 채워지면 그들은 설 곳이 없기에 밀리고 밀려서 불 호수에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을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심(2:15)

아담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운명인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은 한번은 죽는 것이 당연하고(9:27) 그 뒤에는 부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서 사람을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건져내셨다. 사실 이것은 아담이 맨 먼저 맛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려 하심이라.’(2:15)

물론 예수님도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오셔서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26:39)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15:34)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응답이 없었다면 복음이 아니다. 예수님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답하고 있다.

그분께서 친히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5:7)

하나님께서 당시 예수님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분을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으시고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23:46) 하셨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속 사역을 다 이루었다.’(19:30)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서 아담이래 평생을 죽음의 두려움에 있던 인류를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건져내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시고 정사들과 권능들을 이기심(2:14-15)

원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율법의 관계가 아닌 생명관계이다. 그러나 아담이 아들의 위치를 이탈해서 종의 위치로 갔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지고 계약관계가 된 것이다. 율법은 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종인 천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씨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3:19)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사람이 종의 위치에서 아들의 위치를 회복했으므로 아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이 작용할 수 없고 폐기된 것이다.(2:15, 2:14, 7:18)

원수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2:15a)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던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서 못 박으시며’(2:14)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7:18)

또 아담이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갔을 때는 사람이 천사도 아니면서 천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자 몸에 맞지도 않은 천사(정사들과 권능들)의 옷을 벗은 것이다.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2:1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기 전까지 마귀의 졸개인 타락한 천사들은 사람을 조롱하고 있었다. 세자가 될 자가 종의 위치로 갔으니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므로서 우주질서가 회복되었고, 그동안 조롱하던 종(천사)들을 십자가에서 구경거리로 삼으신 것이다.

 

구속 : 사람의 인격과 인권을 회복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의 결정체는 아담이 잃어버린 인격과 인권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부끄러워하여 타락한 천사인 신격을 선택함으로서 인격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영광, 곧 인권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사람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에 만족하시고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을 회복함으로서 사람의 인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1:14)

구속이란 빗나간 사람의 위치(인격)을 원래의 위치로 회복한 것을 말한다.

 

(Sin)의 제거와 죄들(Sins)을 용서함.

요한복음 129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서 죄란 피조물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그러므로 위치를 이탈한 자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다란 성경의 용어는 구속(redemp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단수)란 근원적인 뿌리이고 죄들(복수)이란 외부적인 것으로 죄의 열매를 말한다. 그러니까 내부적인 죄의 뿌리는 제거되어야 하고, 죄의 결과 외부적인 행위인 죄들은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Sin)를 제거하셨느니라.’(9:26b)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죄들(Sins)의 용서를 받았도다.’(1:14)

성경에서 피란 생명을 의미하지만 피 흘림이란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 인격을 회복함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이 바른 관계(위치)에 있으니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의()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라는 의미로 세상이 말하는 의인(義人)과 성경이 말하는 의인(義人)은 다른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보시는 위치는 십자가이다. 이 위치는 나는 피조물이고, 아들이며 최종적으로 흙이라는 위치(). 이것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사람이 꾸민 거짓이다. 원래의 위치로 회복, 구속(救贖, redemption)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빗나간 인생을 원위치로 회복시킨다는 의미이고,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원위치를 깨닫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로 회개(悔改, repent)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위치에 있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보신다. 안타깝게도 이 용어를 정확히 아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요한복음 1610절에 주님께서 ()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라는 말씀이 있다. 아들로서 당연히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의()라는 것이다. 아들이 마땅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하에 있는 것이 의()라는 것인데 이 위치가 십자가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에 세상의 많은 성인군자들은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예수님만은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심(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동일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느니라. 하니라.’(2:36)

물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주와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려면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어떤 공적도 없이 낙하산 인사가 되어 주와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종교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한편으로 그분은 수많은 인류 중에 한 사람으로서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1:4) 아무런 명분도 없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친다면 누가 알아 주겠는가? 고대 전쟁에서는 왕자들 중에서 전쟁에 나가서 승리한 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서 하나님 아들의 명분을 확보하셨고 새로운 인류의 주 - 조상과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자란 의미이다. 대리자란 뜻이다.

 

    ⑦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시고, 사망을 폐하고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드러냄(딤후 1:10)

십자가에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사탄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인류를 구출하는 구원자가 되셨고(4:8),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4:8a)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사망 안에 있던 인류를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키심으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노선으로 이끄셨다. 곧 예수님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시고 인류를 생명(거듭남, 부활생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탄으로 인해 들어온 사망을 폐하신 분이고 부활을 통해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드러내셨다.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딤후 1:10)

 

새 사람을 창조함(2:15, 4:24, 3:10)

원수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이렇게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2:15)

부활된 몸은 아담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새 사람이다. 아담이 흙이라면 부활한 몸은 보석과 같이 영원한 영적인 몸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새 사람으로 생명이 전환되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 사람-새로운 인류가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너희는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3:9-10)

우리가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실 때 될 것이다.(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요일 3:2)

 

예수님께서 새로운 인류의 첫 열매 - 맏아들, 조상이 되심(고전15:20, 8:29, 1:15)

골로새서 115절에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의 처음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향하여 피조물이니 피조물이 아니니 이런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처음난 자첫 열매’ ‘맏아들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아담을 창조하고 아담이 처음 만들어진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한 번은 죽고 부활된 몸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곧 아담은 만들어진 자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난 맏아들로서 새 인류의 조상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담은 이 길을 빗나갔고 예수님이 오셔서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1:15)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난 자’(1:15) 라는 것은 잠든 자들의 첫 열매’(고전15:20) 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하심이니라.’(8:29)

 

우주질서를 정상적으로 회복하심 (1:20)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 화평을 이루사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즉 내가 말하노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느니라.’(1:20)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을 만물의 머리로 창조하셨으므로 인격 중심의 우주를 경영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께 먼저 반역하였고 사람이 동조하므로 하나님의 우주경영에 차질을 가져왔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우주질서는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우주질서 회복을 위해 하늘에 있는 천사와 땅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필요하게 되었다.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의로운 화해헌물이 필요하다.(3:25)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없는 사람이 필요하고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물에 빠지지 않는 자가 필요하다.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헌물로 제시하셨으니...’(3;25)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과 온 우주의 피조물을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죄는 없으시지만 죄인의 모습으로 심판받으셨다.(고후5:21) 즉 그분은 아담을 대신해서 심판받으셨다. 아담은 우주 가운데 피조물의 머리다. 대장이 심판 받으면 그 이하는 자동 심판이다. 전쟁에서 왕이 항복하면 모든 백성은 다 항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심판받았다는 것은 온 우주가 심판받은 것이다. 이것은 법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법리적인 심판만으로는 부족하다. 유기적인 심판이 필요하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사탄의 자식이 되었으므로(8:44) 아담 안에는 사탄이 있는 것이다. 법리적이고 외형적으로는 아담-사람이 심판받았기 때문에 아담만이 심판받은 것 같지만 아담은 결국 사탄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사탄이 심판받은 것이다. 유기적으로도 사탄은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화해헌물이 되셨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만을 위한 화해헌물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천사가 화해하였다는 것은 우주질서가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천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종으로서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예표하는 것이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1차 우주적 위치 전쟁에서 사탄에게 승리하시자 천사가 와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이에 마귀가 그분을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니라.’(4:11)

사람이 천사를 숭배하는 것은 우주질서를 역행하는 것이고 종인 천사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정상적인 우주질서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질서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 질서를 알고 천사를 숭배하는 종교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구원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가 되게하심(2:7)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2:7)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영생을 얻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은 창세기 2장에서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진리다. 우리는 앞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하셨음을 살펴보았다. 사탄과 사람의 전쟁에서 전쟁의 수단은 총, 포가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사탄도 자신의 격을 이탈하여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고, 일부 천사들 중에도 자신의 격을 이탈하여 사람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다.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속아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길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 자신의 격을 지키는 것이고 이 격을 지켜 생명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도 그분 안에서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인격의 승리,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승리고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이사야 258절과 고린도전서 1554절에서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지리라는 말이 이 의미다. 성경이 말하는 승리는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첫 번째로 사망노선에 있던 인류를 예수님의 인격의 승리를 통해 생명노선으로 인도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는 어차피 우리 인생은 한번은 죽을 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하는 것이다.’(고전15:53) 그런데 아담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생명노선을 이탈하여 사망노선으로 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켜 육신이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생명노선으로 가신 것이다. 죽을 몸(육신-사람)이 승리(생명-하나님) 가운데 삼킴을 당한 것이다. -육신이 영-하나님께 삼킴을 당함으로서 부활의 몸이 되도록 하나님이 정한 생명노선으로 가신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함이라.’(고후5:4)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죄 문제는 예수님께서 다 해결하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육신이 죽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죽을 육체가 죽지 않을 생명에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죽을 육체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죽지 않을 육체가 되는 것이다. 우주는 지금 죽을 것이 생명 안에 삼켜져 있다. -생명을 예표하는 공기 안에 지구를 비롯한 해와 달, 별들이 삼켜져 있지 않은가? 죽을 것이 생명 안에 삼켜져 있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세계가 오면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 유한한 땅-사람이 무한한 하늘-하나님께 삼켜져 영원한 세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세계를 성경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한다. 이것을 고린도서전서 1554절과 고린도후서 54절에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세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켜진다는 말은 죽는다는 것이고 생명의 연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동식물을 우리의 목구멍으로 삼켜서 생명의 연합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삼킴을 당하는 생물은 죽지 않을 것이 없다. 또 삼킴을 당하기 전에 죽여서 먹지 살아있는 채로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하나님께 삼킴을 당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우리도 하나님께 제단 위에서 죽음으로 드려져야 하나님께서 삼키시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근본적으로 음식헌물로서 요리되어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 그래서 인생은 원래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헌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노선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법리적인 대속의 은혜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희생물에만 국한 시키고 헌물의 의미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이지만 헌물은 유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십자가를 법리적인 대속의 의미로만 받아 들여 예수님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에 대한 계시가 가려져 있다. 모든 만물에는 생명의 과정이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법칙은 땅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신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에게만 이 법칙이 예외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우주 만물의 생명의 원리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만물은 거듭남이 없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끝난다. 천사도 씨-영으로 창조되어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그래서 1차적 창조로 끝난다. 사람만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씨-하나님으로부터 씨를 받아 다시 태어나야하기 때문에 흙-사람으로 창조된 것이다. -사람의 위치, 이 위치에 있는 자를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시고 이 위치에 있는 자만이 생명의 길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담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었다면 아담은 이 길을 이탈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흙-사람의 위치를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자를 원망하는 것이고 창조자의 안식을 방해한 것이고 사망의 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늘 흙-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고 원망했다. 항상 흙-육신 때문에 안 된다고 했고, 어떻게 하면 이 육신을 벗어나고자 애썼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흙-육신이 이렇게 고귀하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인생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고 인생의 영광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인격을 찾은 것이다. 예수님은 아담이 버린 그 인격을 죽기까지 지킴으로 생명의 길 안에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오르셨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고 승리의 길이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을 지킴으로 이기는 자가 되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분의 인생의 최종열매, 곧 죽으심과 살으심이 생명나무의 열매다. 이 열매를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은 성경에 흐르는 일관된 진리다. 우리는 물위로 걸어가신 예수님도 먹을 수 없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도 먹을 수 없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을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그분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분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이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십자가에 매달리면 누구든지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리를 벗어난 예수님의 다른 것은 우리가 먹을 수 없다.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는 사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격을 지킴으로서 승리하셨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바로 이 인격의 승리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승리를 먹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사람으로 만드셨지 씨-신으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람이신 예수님은 신인 사탄에게 죽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심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기는 자에 대해서 요한일서와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 승리는 바로 사람이신 예수님의 사탄에 대한 인격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요일 5:5)

‘...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2: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2:11)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니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21:17)

성경에서의 승리, 곧 이기는 자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흙이다. 그런데 씨의 소망은 무엇인가? 열매다. 씨가 열매를 얻으려면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하다. 그래서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원하고 있다. 흙이란 생명이 없다. 사람이 흙의 위치를 지켜야만 하나님께서 씨를 뿌려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한 이 진리를 외면하고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 예수님을 믿더라도 근원이 불분명하니 열매가 없고 가다가도 언젠가는 다른 길로 갈 가능성이 있다. 사실 기독교인들 중에 종교통합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의 근원이 불분명한 것도 한 원인이다. 믿음의 근원이 불분명하니 타종교와도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의 근원이 흙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타종교는 대부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사람이 어리석어 잃어버렸다고 한다. 만일 사람이 원래 영생이 있었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영생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승리,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아담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사망의 길로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승리하시고 생명의 길을 회복하시자 사망의 권능을 가진 자 사탄을 조롱하면서 생명이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5:55~5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십자가의 의미에는 표면적으로는 아담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심판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사탄에 대한 승리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사탄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인격의 승리이다. 아담은 인격을 이탈하여 신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인격을 지켰다. 죽음이라는 심판을 통해 생명의 길을 택하신 것이다. 겉모습은 아담으로 죽으셨지만 내용은 아담이 아니다. 아담이 인격을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격을 지키신 것이다. 인격을 이탈하면 사망이고 인격을 지키면 생명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사망이나 내용적으로 보면 생명이다. 그런데 아담은 원래 영생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의 죄만을 대속하여 죽으셨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승리가 되고, 어떻게 대속이 생명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믿으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속으로 인한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대속은 죄의 용서지 생명의 거듭남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을 위한 희생물로 드려진 동시에 인생의 원래의 위치인 헌물로 드려진 것이다. 어떤 헌물도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지는 제물은 없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다. 이것을 거부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계시가 닫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길려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운명, 곧 십자가에 매달리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mortality, 고전15:53)을 가지고 승리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인류 보편적 승리고 이 승리는 인간이면 누구든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사탄에게 승리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다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사탄에게 승리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 인간에게 준 사람의 운명, 곧 인간의 위치를 가지고 승리하시길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인정하면 나도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너무도 쉬운 승리, 너무도 쉬운 구원이다. 나의 모든 힘을 빼고 십자가에 매달리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저 사람이 참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누구든지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되 아들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