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도

3.4.3 2단계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영(생명)의 사역

올더스조에 2019. 2. 20. 21:14

3.4.3 2단계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영(생명)의 사역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하신 1단계 작전은 외부적인 교육훈련을 통해서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줄 수 없는 결정적 단점이 있기 때문에 실패했다.(3:21) 더군다나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 마저도 율법의 심판을 받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지금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글자대로 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또 다시 글자(율법)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역사적으로도 종교가들이 성경 말씀을 글자대로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들이 너희를 회당들에서 내쫓을 것이요 참으로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리라.’(16:2)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도 율법을 추종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안식일을 어긴 자는 죽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글자대로 충실히 행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성경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영을 몰라서 행한 오해인 것이다. 즉 그릇된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10:2)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사람을 죽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고 글자대로 하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글자는 인격적 융통성이 없고 기계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마저도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지금도 동일하다. 그렇다고 성경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하라는 것이 아니고 성경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영의 사역을 해야 살리는 사역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더 이상 1단계 작전을 수행하실 수 없었고 최종적으로 제시하신 방책은 사람 마음 판에 자신의 생명을 직접 넣어 살리는 영의 사역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인데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 3:6)

예수님은 오셔서 글자의 사역을 하지 않고 살리는 영의 사역을 하셨다. 대표적인 것이 간음한 여자를 살리신 것이다. 율법에는 간음한 자는 죽이라고 되어 있다.(20:10) 그러나 성경의 기본정신은 사람을 살리라고 준 것이지 죽이라고 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간음한 여자를 살리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이라는 1단계 작전을 종결하고, 2단계 작전개념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창세 전에 이미 계획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영의 사역이다. 1단계 작전은 완전하지도 않고 죽이는 사역이었지만 2단계 작전은 완전하며 새롭고 살리는 사역으로 더 이상의 대책은 없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으므로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7: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10:19)

어차피 인류는 죄가 있으나 없으나 예수님이 죽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이 죽어야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탄은 유대인들을 이용해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도록 유혹하고 조롱하였던 것이다.

지나가던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고 그분께 욕하며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네 자신이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수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조롱하며 자기들끼리 이르되, 그가 남들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을 욕하더라.‘(15:29-32)

그렇다면 그 당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예수님을 잡으러 유대인들이 오자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베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잡는 자는 다 칼로 망하리라.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보내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리되면, 반드시 이렇게 되리라, 한 성경 기록들이 어떻게 성취되겠느냐? 하시더라.’(26:52-54)

충분히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가신 것이다. 전쟁에서 상급부대 지휘관 의도는 내 의도와 관계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온 우주 안에 없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계시면 우리 안에 들어올 수가 없다. 반드시 그리스도가 죽어야만 영이 되서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한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성경은 사람의 구조가 영(spirit), (soul), (body) 인데 그중 사람의 주체는 지정의(知情意) 기능을 가진 혼(soul)이라고 한다.(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2:7)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지칭할 때 혼이 사람을 대표하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말대신에 이라고 하는 것이고 혼이 구원받았다, 혼이 죽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낳은 아들들이니라. 그의 딸 디나를 합하여 그의 아들딸들의 모든 혼이 서른셋이더라.'(창 46:15)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태어난 아들들은 두 혼이었으며 야곱의 집의 모든 혼 곧 이집트에 이른 혼은 일흔 혼이었더라.’(46:27)

둘째 천사가 자기 병을 바다에 쏟아 부으매 바다가 죽은 사람의 피같이 되어 모든 살아 있는 혼이 바다에서 죽더라.’(16:3)

성경은 사람을 살아 있는 혼이라고 한다.(2:7) 그래서 사람을 지칭할 때 혼이라고 하며 혼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이다.(10:39, 1:21, 5:20, 벧전 1:9, 1:10, 3:20) 이것을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것은 혼이고 육체는 죄 때문에 죽는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이 있어야 사람이다(2:7).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전 인격적인 구원이지 혼만 구원하고 육체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면 이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전 인격적인 구원도 아니다. 또 사람만 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물도 혼이 있다. '모든 생물의 혼과 인간의 숨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욥 12:10)

그러므로 모든 생물도 사람과 같이 생각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과 생물도 몸, 혼, 영의 구조를 가졌다는 데서 같지만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릴수 있다는 데서 틀린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 16장 3절에서 '모든 살아 있는 혼'이 바다에서 죽더라는 말씀의 의미는 성경에서 사람에게만 '살아 있는 혼'이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이 바다에서 죽는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45절에 말하는 첫 사람 아담은 살아있는 혼이라는 의미는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단지 지정의 기능을 가진 창조된 혼적 생명을 보유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혼적 생명은 창조된 사람의 생명이지 창조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라는 의미는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영이 되었다는 의미다. 예수님이 오셔서 육체로 그대로 계시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없다. 살리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니기 때문이다.(6:63) 그분은 반드시 죽음을 통해 영이 되어야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고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고전15:45) 그리고 로마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5:14)

성경은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이 우리 조상 아담의 죄가 유전이 되서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억울한 일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왜 죄를 짓지 않은 내가 아담의 죄를 물려받아 사망으로 가야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바울은 죄 이전에 사람의 근원적인 목적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형이 아니라 죄가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모형이라는 것이다. 실재가 오면 모형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첫 사람 아담이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다시 태어나야 한다. -아담은 씨-예수를 이식받아 영생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즉 아담은 모형이지 실재가 아니다. 아파트 공사를 할 때 모델하우스는 실재가 아니라 실재인 아파트를 위해 잠시 지어지는 모형이다. 바울은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 사람은 아담은 근원적으로 두 번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지금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인 부활생명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고 모형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고후 5:1)

광야의 장막은 가나안 땅에 건설될 영원한 성전의 모형이고, 교회는 영원한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다. 이 운명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피조물인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이 목적을 벗어나면 사망이다. 내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어차피 이 목적을 벗어나면 사망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이것이 죄고 사망이다.(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16:9)

우리의 낮은 인간적 생각으로 보면 무죄한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억울하게 심판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인류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신 것이다. 어차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인류를 위해 죽으셔야 하는데 합당한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인류가 죄인이 됨으로 인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실 수 있는 합당한 명분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죄인된 인류의 입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죄 값을 대속하기 위한 은혜로 받아드릴 합당한 명분이 생긴 것이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느냐?’(11:33-24)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따라 갈 수도 없다. 우리는 한 때 왜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아담에게 죄를 허용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를 하셨는지, 그리고 우리를 향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담으로 아담이 창세기 3장에서 생명과를 먹고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아담의 후손들은 지금 이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아담이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먹지 않고 생명과를 먹고 구원받았다면 그것이 유전되어 현재 하나님의 왕국이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생명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한다.(1:12) 영원한 생명은 사람이 아닌 제3,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아담이 그 당시 생명과를 먹고 혼자 구원받았다 하더라고 그 생명이 아담의 자손들에게 유전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있는 없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죄인이 되지 않고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생명이신 예수님을 찾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고 율법을 통해 모든 인류를 죄인이 되게하여 그리스도를 찾게 함으로써 은혜가 넘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