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1단계(글자의 사역)에서 2단계(영의 사역) 로의 전환 조건
예수님 당시에도 성경이 주어진지 2천년이 지나면서 수많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출현을 계시하였지만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이 진리를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고전 2:8)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에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영광의 주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인 지금도, 심지어 수 많은 그리스도인 조차도 하나님의 경륜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때는 어떠했겠는가?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은 누구든지 본능적으로 죽지 않으려고 하는 본성이 있다.(히2:15) 그래서 내가 죄가 없다면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헌물로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또한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려면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그런데 내가 죄 없다고 가정해 보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을 명분도 부족하고, 내가 그것을 받아 드리기도 어려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셨고, 율법을 통해 인류를 죄 아래 가두시고 어떤 육체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지게 하여 이 절망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를 찾게 하셨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그래서 성경은 바로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 3:24)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단지 생명을 주기 위해 생명이신 그리스도 앞으로 유인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율법으로는 자신이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를 찾게 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율법이 말하는 것들은 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입을 막아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롬3:19~21)
그리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이 아닌 새로운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사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방책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주면 받아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수준을 고려해서 처음에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말하노니 상속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아이일 때에는 전혀 종과 다르지 아니하고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가정교사들과 감독하는 자들 밑에 있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 세상의 초등 원리 밑에서 종노릇 하였느니라.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4:1~5)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생명의 상속자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을 고려해 볼 때 처음부터 바로 상속을 하기에는 수준이 어리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왕가의 세자라 할지라도 어린아이일 때는 종들과 같기 때문에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지마라 등등 시시콜콜한 지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내 자식이라도 어린아이에게는 일일이 이거해라, 하지마라 등등 잔소리를 하지 않는가?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깊은 뜻을 어찌 다 알겠는가? 그래서 어린아이 일 때는 종들과 같이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율법을 세상의 초등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들이 기한이 차서 성장하면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실질적인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 바울은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1단계 작전인 율법을 끝내고 새로운 작전단계로 전환되려면 합당한 명분, 곧 1단계 작전을 종결할 조건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세운 방책을 아무렇게나 폐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합당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다음단계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 조건을 알아보자.
① 첫 번째 조건은 인류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만큼 성숙해야 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준지 2천년이 지났기에 인류는 이제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바울은 충만한 때가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다.(갈4:4)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 세상의 초등 원리 밑에서 종노릇 하였느니라.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 4:3~5)
하나님은 율법을 창세기 다음 책인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통해 주셨다.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창세기는 아담이라는 씨를 뿌리는 유아기이고 출애굽을 하던 시기는 율법이라는 가정교사가 필요한 어린아이 시기이며 예수님이 오실 당시는 인류를 창조하신지 약 4천이 지난 시기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만큼 성숙한 시기로 보신다는 것이다.
② 두 번째 조건은 법리적 문제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대속(代贖)’의 문제이다. 아담은 원래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유기적인 생명의 세계 살도록 운명지어 졌다. 그런데 타락하여 하나님과는 법리적 관계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혼란이 온 것이다. 이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리적 체제하에서는 반드시 법리적 통치를 받아야 한다. 법리적 질서 하에서 진 빚이 있다면 반드시 값을 치루어야 한다. 이 값을 치루지 않으면 새로운 질서로 전환되지 않는다. 공의의 심판관인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이 필요하며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없는 자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레 17:11)
아담은 위치를 이탈하여 생명의 세계에서 법리적 율법의 세계로 넘어왔다. 위치를 이탈한 자를 구원하려면 위치를 이탈하지 않은 자가 구원해야 한다.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려면 물에 빠지지 않은 자가 구원해야 한다. 죄의 값을 치르려면 죄 없는 자가 지불해야 한다. 비록 예수님은 율법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 4:15)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이 되고자 했던 자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지키신 분이다.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아담을 대신해 죄 값을 치루시고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율법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전환되려면 율법의 세계에서 아담이 진 죄 값을 누군가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율법의 통치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③ 세 번째 조건은 그 당시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법리적 통치체제인 ‘율법의 무익성’이 증명되어야 한다.(히 7:18) 곧 예수님이 ‘율법의 끝마침(the End of Law)’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롬10: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
아담은 하나님과의 유기적 질서에서 이탈하여 법리적 질서인 율법의 세계로 넘어 온 자다. 그래서 다시 유기적인 생명의 질서로 전환되려면 누군가 와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법리적 질서의 무익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율법이라는 방책은 안 되고 새로운 방책을 강구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게 된 자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이 사람은 등수로 따지면 유사이래 1등인 사람이다. 그래서 만일 이 사람이 율법의 시험을 통과한다면 이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율법을 통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김으로 율법은 계속 유효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람이 율법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모든 인류는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증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율법이라는 법리적 통치체제를 끝내고 다른 체제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유기적으로 죄가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나? 결국 예수님 마저도 유대인들에 의해 법리적 통치체제인 율법에 의해 안식일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처형 당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사람, 유사이래 등수로 따지면 1등인 예수님 마저도 율법의 통치체제하에서는 심판을 받고 처형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롬 3:20)
예수님 마저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이 만천하에 증명되는 것이다. 인류 가운데 수영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수영으로 태평양을 건널 수 없다면 모든 사람은 수영으로 태평양을 건널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태평양을 건너려면 수영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건너야 한다. 결국 죄 없으신 예수님은 율법의 심판을 받고 죽으셨다. 율법이 유기적인 인격체라면 예수님을 알아보고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는 인격적 융통성이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 마저도 죽인 것이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 3:6)
위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작전개념인 1단계 작전인 율법을 통한 글자의 사역과 2단계 작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의 사역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율법인 글자의 한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율법은 너무 너무 좋지만 인격적 융통성이 없기 때문에 글자대로 하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어디서 증명이 되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증명이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신 분이며 율법의 완성자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율법의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말았다.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확증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의 끝마침(the end of law)’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롬 10: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
이 전쟁의 총사령관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보낸 아들 마저도 율법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1단계 작전인 율법을 통한 글자의 사역을 종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율법의 끝마침이 되심으로 율법의 무익성이 증명되었고 율법을 폐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히 7:18)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율법이 아닌 새로운 방책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롬 3:21)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하나님의 통치체제인 율법을 통과하지 못하고 심판받음으로서 율법의 무익성이 증명되었고 ‘율법의 끝마침’이 되셨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방책을 제시하실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방책은 사람이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합격할 수 있도록 커트라인을 완전히 하향 조정한 것이다. 율법으로는 예수님 같은 100점 짜리 인생도 불합격이지만 새로운 방책은 0점 짜리 인생도 합격할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하신 것이다. 즉 이 율법 밖에 있는 새로운 방책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없이 효력이 발생하는 방책인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➃ 네 번째 조건은 유기적인 문제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Last Adam)’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아담이 범죄했다는 것은 법리적 문제뿐만 아니라 유기적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자동차를 운전하다 중앙선을 넘어 사고가 나서 다쳤다고 하자. 중앙선을 넘은 것은 법리적 문제이고 다친 것은 유기적인 문제이다. 아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은 법리적 문제이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유기적 문제이다. 우리는 앞에서도 살펴 보았지만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는 사탄과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담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사탄을 택하였다. 그래서 아담의 자손은 모두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요 8:44)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씨를 받으면 마귀의 아들로, 하나님의 씨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위 그림에서 보듯이 아담은 하나님과의 유기적 생명의 관계에 있어야 하는데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과는 법리적 관계가 되었고 사탄과는 유기적 생명의 관계가 되어 사탄의 아들이 되었다.(요 8:44)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율법이라는 법리적 체제도 끝내야 하지만 그 체제 안에 있는 유기적인 사람도 끝내야 한다. 새로운 질서를 위해서 법리적인 체제도 끝나야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유기적인 사람까지 끝나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새로운 체제를 가져온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씨는 고치거나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씨를 심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면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속였다.(창3:4~5) 그래서 지금도 타락한 인류의 소망이 있다면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 신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 율법으로도 1등 이었지만 아담 안에서도 아담이 소망하는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도 1등 이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이 아담의 목표에 도전해서 실패한다면 모든 아담은 도전해 볼 필요 없이 다 실패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경륜이 전환되려면 예수님은 법리적으로는 ‘율법의 마침’이 되어야 하고,(롬10:4) 유기적으로는 ‘마지막 아담’이 됨으로서 아담의 씨를 끝내야 한다.(고전 15:45)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 된다면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상에 있는 아담의 씨인 자신들로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늘의 은혜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되고, 하나님도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새로운 씨를 제시하실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아담에게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3:4~5) 하였다. 사탄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면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아담을 속인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은 무엇을 해도 흙은 흙이지 결코 씨(영, 신)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인간의 운명은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히 확증되었다. 유사이래 인간은 영생불사의 신이 되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해 왔다. 그러나 다 죽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불리는 사람으로 유사이래 아담이 가장 소망하는 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죽은 자를 살리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하고, 물 위를 걸어가는 등 유사이래 가장 신과 같은 사람으로 신이 되고자 했던 아담이 소망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만일 유사이래 가장 신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시험을 당하고 신이 되지 못한다면 아담의 소망은 끝나는 것이다. 등수로 치면 1등이 나타나서 죽지 않은 신이 되지 못하고 그냥 죽어 버린다면 사탄의 말은 거짓말로 만천하에 폭로되는 것이다.
드디어 가장 신과 같은 사람 예수가 나타나서 십자가에서 신이 될 수 있는지 시험을 받았다. 육체를 가진 그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는다면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사탄의 말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죽는다면 사탄의 말은 거짓말로 확증되는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예수님은 일반 사람과 다름없이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유사이래 가장 신과 같았던 사람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사탄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창3:4)’라는 말이 완전하게 거짓임이 증명된 것이다. 이로써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의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확증 된 것이다. 인류 가운데 1등이 죽었느니 2등부터는 신이 될 가능성에 도전해 보나 마나 다 죽는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담의 소망을 끝냄으로 아담의 씨를 끝낸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아담의 씨가 끝남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새로운 씨가 출현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게 된 것이다. 부패한 아담의 씨로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부패한 씨는 개선하거나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와 도덕은 사람을 어떻게 개선해 보겠다든지, 수양을 통해서 좀 더 나은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문제는 씨의 문제다. 예수님은 아담의 모습으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죽었다. 왜냐하면 옛 질서 안에서 1등으로서 십자가에 죽었으니 2등부터 도전해 보나 마나 십자가에 못 박으면 다 죽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육체의 씨는 끝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아담의 씨로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한 씨 외에는 대안이 없게 된 것이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그런데 그리스도가 씨가 되려면 그대로 육체로 계시면 안 되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이 되셔야만 하는 것이다. 영이 곧 씨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예수님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죽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는 죽었다고 하는 것이며,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함께 산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딤후 2:11)
이로써 아담의 씨는 끝난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새로운 씨 외에는 대안이 없는 것이다. 죽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던 예수님은 일반사람과 다름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담의 씨를 종결함으로서 사람과 사탄과의 유기적 관계를 종결함으로서 마지막 아담이 되셨고, 부활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의 유기적 생명의 관계를 연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심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새로운 씨로서 새 인류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현재의 내 생명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새 사람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옛 사람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 사람이다.
‘새 사람을 입었나니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 3:1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곧 그리스도께서 나를 포함하고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새 사람, 곧 새로운 창조물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새로운 창조물만 있느니라.’(갈 6:15)
➄ 다섯 번째 조건은 인류가 ‘구속’(redemption) 되어야 한다. 구속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씨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의 본래의 위치를 의미한다. 하나님(씨)와 사람(땅)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심겨지지 않은 상태의 밭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절대적으로 이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사탄에게 패하였다. 사람의 위치는 천사(신)에 비해 약하고 능력이 없으며 육신이 죽는다는 것이다. 천사는 영으로서 씨로 창조되었다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씨를 받을 위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밭에 사탄이 와서 씨를 뿌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마 13:28)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람이 위치를 이탈하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씨를 뿌리고 싶어도 씨를 뿌릴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생명-씨를 뿌릴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는 사람이 잃어 버렸기 때문에 반드시 사람이 와서 이 위치를 되찾아 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람(흙)이 아닌 영(씨)로 창조된 천사와 같은 다른 피조물이 와서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씨는 반드시 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기본은 나의 강점을 가지고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가지고 아담을 공격한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을 선택하면 ‘나처럼 죽지 않는 신이 된다.’라고 유혹한 것이다. 결국 아담은 이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찌해도 사람이지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 아담이 아들의 위치에서 종(천사)의 위치로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이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죄란 이처럼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사탄은 하나님이 되고 싶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자고, 아담은 신이 되고 싶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일부 천사들 중에도 사람의 딸들을 부러워하여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심판을 받고 현재 영존하는 감옥에 있다.(창6:2, 유 1:6)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는데’(유 1:6)
모두 다 남의 떡이 커 보여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아담에게 존재적 위치를 물으신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아담의 본성을 가진 인류는 종교적으로 신이 되고 싶고, 정치적으로 왕이 되고 싶어 한다. 지금도 인간은 모두 각 분야에서 신이 되고 싶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인기 있는 것들을 보라. 예를 들어 정상적 인간에 대한 영화는 인기가 없지만 신적인 인간에 대한 영화는 인기가 있다. 예수님도 오셔서 신적인 기적을 행할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지만 십자가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조롱당하였고 심지어 제자들 마저도 모두 외면하였다. 아담 안에 있는 인류는 신과 같은 사람을 흠모하고 숭배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 예수님과 사탄의 1차 위치 전쟁
이제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린 사람의 위치를 되찾아 오기 위해 사람을 대표하여 사탄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광야에서 사탄과 마주하였다.(마 4:1~11, 눅 4 :1~13)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령하여 이 돌들로 빵이 되게 하라(마4:3). ②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마:4:6). ③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세상영광을 주겠다(마4:9).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승리하셨다. 사탄은 항상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 ’ 하면서 예수님을 유혹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말은 ‘네가 신이거든’ 이 말이다. 지금 사탄이 유혹하는 말은 타락한 아담이 너무 너무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돌로 빵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거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여기에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승리하셨다. 사탄은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하면서 유혹했지만 항상 예수님은 ‘사람은 ~ ’ 하시면서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대응하셨다.
또 예수님은 마귀의 세 번째 시험에 대해서도 사람은 세상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사람이다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처음 정해 주신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대응하셨다. 예수님은 단지 ‘나는 신이 아니고 사람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그러자 마귀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겼다.(마 4:11)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담은 창세기 3장에서 천사가 부러워 아들의 위치에서 천사-종의 위치로 이탈함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혼란을 가져왔다.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섬겨할 자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이 우주 질서의 혼란으로 천사들은 자신들이 섬겨할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마귀에게 승리함으로서 원래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고 우주질서를 바로 잡은 것이다. 그러자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섬긴 것이다.
‘이에 마귀가 그분을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니라.’(마4:11)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이용하여 마귀에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말씀을 암송해야 승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한다고 하시는데 만일 그렇게 해서 마귀에게 승리할 수 있다면 인류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승리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되어야 하는데 말씀을 암송할 수 있는 특출한 사람 몇 명만 승리할 수 있다면 이것은 보편적 승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인류 보편적 승리여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특출한 사람 몇 명만 구원받도록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다 주셨다.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으로 힘 안들이고 승리하도록 다 주신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잃어버렸던 왕국을 선포하셨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 왕국을 잃어버렸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사탄과의 1차 전쟁에서 승리하자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왜 오시자마자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6.25 전쟁시 본토를 거의 다 빼앗기고 낙동강 방어선만 남았었는데 인천상륙작전을 발판으로 잃어버린 국토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인천이란 곳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한 아군의 교두보였다. 교두보가 확보되어야 그곳에 병력과 장비, 물자가 축적되고 이를 가지고 계속 공격하여 실지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고 해서 실지가 다 회복되는 것이 아니고 인천은 단지 교두보로서 계속 공격을 위한 발판인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마귀와의 전쟁은 최종 전쟁이 아니고 바로 실지 회복을 위한 교두보 확보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교두보를 확보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천사에 비해 사람의 위치는 연약하고 능력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육신이 죽어야 한다는 약점이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천사에 비해 약점이 있는 이 사람의 위치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에게만 씨를 뿌릴 수 있다. 아담은 창세기 3장에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으로 이 위치를 다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의 1차 위치전쟁에서 사람의 연약함과 능력 없음이라는 위치를 가지고 사탄에게 승리함으로 이 위치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사탄과의 전쟁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니다. 이 전투는 최초진지를 돌파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 전쟁이고 완전하게 승리하려면 적의 최종진지에 승리의 깃발을 꽂아야 한다.
- 예수님과 사탄의 최종 위치 전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해 주신 사람의 최종적 위치는 죽음인 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서 고귀한 것이고 절대적으로 확보해야할 목표다. 이 죽음 안에서만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이 연합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이 위치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왕국의 실지 회복을 위한 최종 전쟁이다. 이제 마귀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전쟁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를 회피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마귀는 유대인들을 이용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네 자신이나 구원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 27:40) 하면서 십자가를 회피하도록 유혹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마귀에게 승리하시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오르신 것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빌 2:8-9)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고 마귀에 대한 승리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식초를 받으신 뒤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고 숨을 거두시니라.’(요 19:30)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고 하신 것은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를 다 완수했다.(It is finished)’라는 말이다. 아담이 잃어버렸던 사람의 위치를 다 회복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속(redemption)’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죄가 ‘위치를 이탈하다’ 라는 의미라면 구속은 ‘원래의 위치로 회복하다’ 라는 의미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아담이 빼앗긴 사람의 위치, 곧 인격(人格)을 다 회복했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승리는 모두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 인격에게만 자신의 생명-씨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은 죽지 않는 신, 곧 천사가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도 아니면서 신처럼 살아 왔다. 사람은 원래 흙-무교병으로 창조되었음에도 누룩이 들어가서 부풀려진 유교병이 되어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사람의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거짓이 폭로되고 진실이 이긴 것이다. 골로새서 2장 15절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아담 안에 있던 사람이 신도 아니면서 신인척 하는 거짓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를 벗겨내고 사람의 진실로서 승리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 2:15)
예수님은 스스로 이기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의 인간의 운명, 곧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mortality)’을 가지고 승리하였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씨-하나님 앞에 흙-사람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아담은 사람이 씨-신이 된다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고 싶어도 복을 주실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복을 받는 길은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해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의 아들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도록 하옵소서.’(요 17:1)
이 의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적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달성되려면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사람이 육체로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이식받아 죽고 부활함으로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아들로 영화롭게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롬 1:4)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간의 운명인 죽음을 가지고 승리하셨다. 예수님은 승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곧, 죽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간의 위치를 지키는 것, 이것이 승리다. 이 승리는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곧 내 승리인 것이다. 우주 안에는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3번의 우주적 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첫 번째는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마귀가, 두 번째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과 마귀가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광야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보리 십자가에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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