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심(요 8:6, 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녀를 한가운데 세우고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나이다. 이제 모세는 율법에서 이러한 자를 돌로 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거니와 선생님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니라. 그들이 그분을 시험하며 이렇게 말한 것은 그분을 고소하려 함이더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신 듯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with his finger wrote on the ground). 이에 그들이 계속해서 그분께 물으니 그분께서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땅에 쓰시니라(wrote on the ground). 그들이 그것을 듣고는 양심에 가책을 받아 나이가 가장 많은 자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매 오직 예수님만 남았고 그 여자는 한가운데 서 있더라”(요8:3-9)
1. 성경은 분명히 간음한 자는 죽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이 여인을 살렸을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땅에 글자를 쓰신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이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두 번씩이나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시는 장면을 보면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다.
모든 성경말씀이 그렇듯이 먼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몸이 없으시다. 그래서 자신을 표현할 몸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려면 하나님과 한 마음-한 생명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흙-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씨를 주시는 것이다. 곧 하나님 자신을 사람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비생명적인 것은 만들 수 있지만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원래 만들어질 때부터 영원한 생명이 없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에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신이기 때문에 이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 크다. 영-하나님이 흙-사람에게 우리가 생각하듯이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물과 기름도 섞이려면 중화제가 있어야 하듯이 만물 안에서 서로 다른 두 물질이 연합되려면 반드시 중간 연결자가 필요하다. 쇠와 쇠가 연결되려면 불이 있어야 하고 흙과 흙이 연합하려고 해도 불이라는 중간 연결과정이 필요하다. 흙은 흙 자체로는 도자기와 같은 세라믹이 되지 않는다. 흙이 연합되어 세라믹과 같은 연합체가 되려면 불에 구워져야 되는 것이다. 만물이 다 이러한 연결과정 없이 저절로 연합되는 것은 없다. 식물이나 동물도 사람과 연합되려면 죽어서 불에 요리가 되어 사람에게 삼켜져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사이도 마찬가지다. 영-하나님과 흙-사람을 연결시키는 생명의 연결자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 생명이고 실재-진리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의 생명도 하나님의 생명을 예표하기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재이고 생명이며 사람은 단지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창조된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목표는 항상 보이는 것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에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고후4:18)
형상은 영원하지 않다.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단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영-하나님께로 삼켜져 연합되어야 영원한 몸을 입을 수 있다. 이것을 성경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함이라.’(고후5:4) 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형상을 가지고 계시다면 우리가 볼 수 있기에 믿음이 필요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다.(히11:1)
좌우간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서 사람이 하나님과 한 생명이 되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람에게 살려 주는 영, 곧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신 것이다.(고전15:45) 예수님이 육체로 계신다면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다. 단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잘 모른다. 단지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법리적 혜택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도 오셨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요10:10)
죄라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사탄이 설치해 놓은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단 한 번의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속함과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2중적 임무를 완수 하신 것이다. 이것을 레위기에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대속을 위한 희생물인 동시에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로서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니라.’(레1: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인 동시에 하나님과 인류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로서도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는 것이다.(고전1:24)
아무튼 생명은 보이지 않는 영에 있고 보이는 형상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항상 영에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자의 표면에 있지 않고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영에 있다는 것이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3:6)
2. 율법이 왜 실패했는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를 모르고 율법에 기록된대로 글자대로 행했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는 표면과 이면-영적인면이 있다. 표면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이면은 영원하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표면적인 율법은 현대에 와서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안식일의 이면의 의미인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의미는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시고 자신의 창조에 만족하시고 안식하셨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창1:31)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일을 마치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일에서 떠나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그런데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창3:4-5)
모든 피조물의 타락은 각자의 위치 이탈 때문이다. 사탄은 천사라는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위치에 오르려 했고, 사람은 신의 위치에 오르려다 타락한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고 각자에게 격을 부여하셨다. 사람은 인격으로, 개는 개격으로, 천사는 천사격을 부여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천사가 되겠다고 하든지, 개가 소가 되겠다고 한다든지, 원숭이가 사람이 되겠다고 설쳐 되면 창조질서는 혼란이 온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각각 자신의 창조 목적, 곧 각자의 격(格)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안식일의 영적의미는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임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율법에 보면 안식일을 어긴 자는 죽이라고 되어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안식일을 어긴 것이 무슨 큰 죄라고 죽이라고 하는가? 라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영적의미가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도 글자의 표면보다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셨다.(마12:8)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영적의미를 모르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참지 못하고 죽인 것이다.
성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책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한 자는 죽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녀를 살리신 것이다. 성경대로, 곧 글자대로 하면 그녀는 돌로 쳐 죽여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경대로 하지 않고 그녀를 살리셨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와 한 생명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글자에는 죽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아들은 그 마음을 알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살리신 것이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인격적인 관계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하여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주인과 종은 생명의 관계가 아니라 계약관계이다. 종은 시키는 대로 계약서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대로 행하는 관계다. 율법은 바로 이러한 관계다. 그러나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에 있어야 하는데 아담이 타락함으로서 율법의 관계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사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대로 행하는 생명이 없는 기계적인 인간이 되라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한 생명, 곧 한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를 대신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3:6)
글자에는 인격이 없다. 그래서 글자대로 곧 율법대로 하면 죽이는 사역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오셔서 영의 사역을 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글자의 사역을 했기에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모르고 여전히 종의 세계, 곧 글자의 사역을 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생명으로 영의 사역을 하신 것이다.
원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줄 수 없는 옛 언약-율법은 없었다. 옛 언약은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만일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었다면 율법은 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율법의 가장 큰 단점은 생명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갈3:21)
율법은 너무 너무 좋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생명을 줄 수 없기에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생명을 줄 수 있는 새 언약-성령의 생명의 세계를 회복하신 것이다.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히7:18)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8:2)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은 새 언약 하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글자의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모르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글자의 이면을 알아야 한다고 하니까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게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알고 그 방향에 맞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하니까 도덕법까지도 폐하여 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율법 안에 있는 도덕법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사람 안에 양심의 법으로 주어진 것이다.
3. 그러면 예수님은 왜 땅에 그것도 두 번이나 글자를 쓰셨을까? 이것도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알아야 한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그분의 경륜의 목표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요1:1)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성경에서 땅은 사람의 인격을 예표하고 글자-말씀은 생명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땅에 글자를 쓰시는 것은 흙-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유대인들아, 너희들은 생명이 없기에 글자의 표면대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지만 나는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알기에 그녀를 용서하고 그녀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 같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죄를 사하기 위해서도 오셨지만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주시러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두 번씩이나 땅에 글자를 쓰신 이유는 사람은 근원적으로 두 번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간음한 여인은 인류를 대표한다. 사람은 본디 하나님의 아내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하여 사탄을 택한 것은 간음한 여인이 된 것과 같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상숭배를 간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인류는 법대로 하면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생명을 얻은 것이다. 바로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은 이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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