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어머니 하나님
소위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에서는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고 주장한다. 너무 황당해서 대꾸할 가치도 없지만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순진한 자를 삼키고 있기에 속지 말라는 의미에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의 성경구절로 첫 번째가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4:26)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씨’ 라는 성경구절이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또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 ’(창1:26)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라고 했기에 ‘어머니 하나님’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에서와 같이 만물은 모두 음과 양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하나님도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일견 성경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은 속아 넘어 갈 수 있는 말일 수도 있다. 또 그들은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황당한 주장을 한다.
그러면 그들이 주장하는 말이 얼마나 허구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I. 첫 번째로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4:26) 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 뒤 전체 구절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노예 여종에게서 났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노예 여자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태어났고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것들은 풍유(allegory)니라.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인데 하나는 시내 산에서 나와 종이 되게 하는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요,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 해당하는 곳으로 자기 아이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느니라.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4:22~26)
자 그러면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이것은 육신적으로 보면 둘 다 아브라함의 자식인 여종 하갈에서 태어난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스마엘은 노예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태어났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 곧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약속에 따라 태어났다. (갈4:22~23) 그런데 이것은 풍유적으로 말하면 두 언약을 가리킨다고 말한다.(갈4:24) 곧 이스마엘은 옛 언약-율법에 따라 태어났고 이삭은 새 언약-성령에 따라 태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말씀이고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 그러니까 이삭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라는 것이다.(요1:13)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이 육신으로 태어나서 그대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왕국에 들어가려면 그 왕국에 합당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 물 속에 살려면 물고기의 생명의 가져야 하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요3:5) 그러니까 사람은 땅에 속한 육체로 태어나서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얻은 영원한 생명은 우리 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지 원래부터 영생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창3:22)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로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여 아들을 생산해야 할 운명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대하여 아내로서 아들을 생산해야 할 운명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아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고 거듭나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생명의 관계이지 종의 관계가 아니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명의 관계이며 법률적 계약에 의한 종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관계에서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생명의 관계로서 아들과 아내의 위치로 창조되었지만, 천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종의 위치로 창조되었다.
우리의 일반적 상식으로 보면 이스마엘이나 이삭은 둘 다 아브라함의 육체의 자손이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가 되어 부부의 육체적 생식능력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육체적 능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태어났다. 그래서 이삭은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가 아니고 약속에 따라 태어난 자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태어난 자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육신의 뜻에 따라 태어난 자다. 즉 이스마엘은 성령으로 태어난 자가 아니고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표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사라는 하나님의 아내인 사람을 예표하지만 하갈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관계가 아닌 계약관계, 즉 율법아래 있는 종을 예표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갈은 율법아래 있는 아브라함의 여종으로서 이 땅에 속한 예루살렘과 육신을 예표하지만 사라는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자유로운 여자이며 하늘 속한 예루살렘과 성령을 예표하는 것이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요,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 해당하는 곳으로 자기 아이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느니라.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4:25~26)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를 따라 태어나지 아니하고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고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들이다.
‘형제들아, 이제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아이들이니라.’(갈4:28)
이삭은 그리스도의 예표다. 그렇다면 또한 예표적으로 사라는 마리아의 예표이고 아브라함은 요셉의 예표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 되었듯이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능력에 의해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자다.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듯이 이삭도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육체의 자손이라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성령에 따라 태어난 자다. 그래서 풍유적(allegory)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노예 여종 하갈에게서 육신의 뜻으로 태어난 자가 아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자인 사라에게서 성령으로 태어난 자들이므로 사라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갈4:26)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4:26)
아담이 타락하자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씨(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여자에게는 씨가 없다. 남자와 결혼을 하지 않고 여자는 스스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자의 씨’를 주시겠다는 말은 세상에 없는 하늘에 속한 씨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사실 두 씨, 곧 하나님의 씨와 사탄의 씨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씨를 받아야 하는데 사탄의 씨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탄의 씨를 받아들이면 사탄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래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대로 자신의 씨를 사람들에게 주시겠다는 의미다. 그래서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씨’를 주시겠다는 말이 나온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의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니라.(갈3:16)
하나님은 한 분이기에 씨들-복수가 아니고 당연히 한 씨-단수다. 바로 이 씨에 의해 태어난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것은 육체적 씨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씨, 곧 성령님으로 말미암았다.
‘그녀 안에 수태된 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았느니라.’(마1:20)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씨’에 대한 약속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우리들도 육신으로나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태어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자로 모두 여자의 후손들이다. 육신-땅에 속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은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4:26)
그리스도인들은 하갈에게서 육신적으로 태어난 자가 아니고 사라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자라고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씨’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여자에게 씨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은 이 땅에 속한 육체적 생명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여자의 씨’라고 하는 것이다. 땅에는 없는 생명을 주겠다는 의미에서 ‘여자의 씨’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가 다시 태어난 것은 땅에 속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은 두 여자, 곧 하갈과 사라를 비교해서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어느 여자에게서 태어났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여자들이 씨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갈라디아서 4장 26절 말씀은 간단한 말씀이다. 성경은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앞서 분명히 4장 24절에서 ‘그것들은 풍유니라. 이 여자들은 두 언약’라고 한다. 비유적으로 하갈은 옛 언약-율법이고 사라는 새 언약-성령이라는 것이다. 육신으로 태어 난 자와 성령으로 태어난 자를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종교단체에서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 라는 말씀을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자기들만이 무슨 성경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풍유, 곧 비유라고 했는데도 그것을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직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또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씨’라는 말씀 또한 직유적으로 해석하여 ‘여자의 씨’라는 말이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말도 안되는 해석을 하는 것이다. 저들은 또한 자기들의 교주인 어떤 여인을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이 이러한 말도 안되는 주장에도 사람이 속아 넘어간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비유를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망한다. ‘저는 자의 다리가 같지 아니한 것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입의 비유도 그러하니라.... 가시나무가 술 취한 자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입의 비유도 그러하니라.’(잠26:7,9)
성경에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많이 나오지만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특히 고린도전서 8장 6절에서는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노라.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라고 한다. 위 말씀에서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나니’ 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두 분이 아니고 한 분이며 이분은 어머니가 아니고 아버지라는 것이다. 더 이상의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또한 성경은 항상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 호칭하지 어머니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너희가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6)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엡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그분을 알게 하시고’(엡1:17)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림은’(골1:3)
II. 두 번째로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 ’(창1:26)에서 ‘우리’ 라는 단어는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나 이 주장의 허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 한 사람을 만들었지 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man, 단수)을 만들고 ... ’(창1:26)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man, 단수)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him, 단수)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1:27)
창세기 1장에서는 사람의 창조과정을 총론적으로 표현하다가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이브의 창조과정을 단계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man, 단수)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창2:7)
창세기 2장 7절은 분명히 아담 한 사람에 대한 창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에덴에 동산을 세우시고 자신이 지은 남자(man, 단수)를 거기 두셨으며’(창2:8)
그리고 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다음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이브를 만들었다. 엄격히 말한다면 아담은 창조되었고, 이브는 아담이라는 재료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브는 무에서 유가 된 것이 아니고 있는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동시에 따로 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서 이브를 취한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창1:22)
위 성경구절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어머니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된 ‘어머니 하나님’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좌우간 그들의 주장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은 동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두 분이라면 처음부터 두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아담이 창조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창2:18) 하시고는 창조물들을 아담에게 데려갔지만 그들 중에서 협력자를 찾았는데 합당한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담을 위해서는 그를 위한 합당한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더라.(창2:20)
만일 하나님께서 창조물 중에서 아담의 합당한 협력자를 찾으셨다면 이브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이브가 창조된 것은 합당한 협력자가 없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비뼈를 취해 이브를 만드신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창2:21-22)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어머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두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고 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한 사람을 만들고 나중에 아담의 협력자로 아담 안에서 이브를 만든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 ‘사람(man)’으로 번역된 ‘man’은 남자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을 다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남자(man)를 만들고 그들이 ....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자 ’(창1:26)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남자(man)를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him)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1:27)
특히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통상적으로 사람(man)으로 번역된 man은 ‘남자’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그 뒤에 man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여성 대명사(her)를 사용하지 않고 남성 대명사(him)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다. 이것을 증명하는 성경구절이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온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인즉 참으로 자기 머리를 덮지 않는 것이 마땅하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나니’(고전11:7-9) 라고 말하고 있다.
위 말씀에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여자(woman)도 ‘사람(man)’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분명히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지 않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 곧 ‘남자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11:7) 왜냐하면 남자에게서 여자가 났고 남자를 위해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고전11:9)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면 전부 ‘남자(man)’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여자(woman)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여자는 남자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지 여자 단독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남자(man, 아담)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him, 아담) 창조하시고 그들(아담 안에서 이브가 창조됨)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1:27)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은 동격임으로 남자와 여자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어야 하는데 성경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 곧 남자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창세기 2장의 아담과 이브의 계시의 말씀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아담과 이브 부부를 말하면서 ‘이것은 큰 신비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2) 하였다. 즉 아담은 그리스도-하나님을 예표하고, 이브는 교회-사람을 예표한다는 것이다. 아담이 죽음을 통해 이브를 산출했듯이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 교회를 산출하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두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그리스도와 교회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한 분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육체로 창조된 사람이 그 상태로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반드시 죽고 다시 살아야 한다. 아담이 죽음을 통해 이브를 산출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라는 것이다. 이브는 교회의 예표로 부활생명을 예표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육체로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부활생명-교회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그리스도와 교회, 즉 하나님(남성)과 사람(여성)의 연합을 예표하는 것이지 두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영이란 씨고 생명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만일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계시다면 두 씨가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천사는 영적인 피조물로서 모두 남성이다. 하나님도 영으로서 남성이며 천사도 영으로서 남성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다. 천사는 죽지 않는 영적인 피조물로 창조되었지만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을 수 밖에 없는 흙으로 창조되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사처럼 죽지 않는 피조물로 만들지 죽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로 만들었는가?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에게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영적인 존재로 죽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로 단지 죽지 않는 피조된 존재이지 하나님의 생명-영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좌우간 사람은 농부이신 하나님의 열매로 추수가 되려면 영적인 몸으로 부활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이 되면 천사와 같은 영적인 몸을 가진다. 그래서 더 이상 죽지도 않고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을 얻기에 합당한 것으로 여겨질 자들은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고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부활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눅20:34-36)
하나님도 영이시고 천사도 영이고 사람도 부활하면 영적인 몸으로 변화된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로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피조된 천사의 영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영이라고 다 같은 영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과 피조물의 영은 근원이 다르다. 하나님의 영은 피조되지 않은 영이지만 피조물의 영은 말 그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영이란 씨요, 남성이다. 그래서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면 둘 다 영으로 씨라는 의미다.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황당한 것이고 ‘영’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씨와 씨가 연합이 되는가.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는 것인가?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영과 영, 남성과 남성의 연합으로 동성애를 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경망스러운 것이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우리’ 라는 단어는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알다시피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구절이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5:7) 인데 여기서 보면 아버지-성부, 말씀-성자,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히 말씀하고 있다. 저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어머니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라는 성경 말씀도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말도 안되는 허황된 것에 속지 말자.
III. 그리고 세 번째로 저들이 주장하는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에서와 같이 만물은 모두 음과 양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하나님도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허황된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이것도 성경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남성-아담과 여성-이브에 대한 계시는그리스도와 교회, 곧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계시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엡5:32) 즉 양-남성과 음-여성은 씨-하나님과 흙-사람의 관계를 계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신격과 피조물인 사람-인격의 연합을 계시하는 것이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두 신격을 계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격은 남성이지 여성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있다. 씨의 소망은 열매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통해 농사를 짓는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니라.’(고전3:9)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 농사로 첫 열매로 거두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20)
씨-하나님은 흙-사람에게 씨를 뿌려 자신의 아들을 열매로 거두시는 분이다. 그래서 로마서 1장 20절에 ‘만물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과 권능’이 있다는 말은 만물이 양(남성)과 음(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의 관계를 통해 그분의 경륜의 목표를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감 나무 한 그루의 예를 들어보자. 감 나무는 감 씨를 흙 속에 뿌렸을 때 그 씨를 통해 뿌리가 나고 뿌리를 통해 감 나무가 지상으로 자라고 감 나무에 감이라는 열매가 열린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을 예표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씨와 뿌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표한다. 감 씨를 흙속에 심으면 씨는 보이지 않는다. 감 나무가 있다면 감 씨, 즉 감 나무 뿌리는 보이지 않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감 씨의 형상인 감 나무만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만 볼 수 있는 거와 같은 이치다. 생명은 보이지 않고 형상만 보인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보이는 형상인 사람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하신 것이다. 아들을 아버지의 얼굴이라는 것이다. 씨는 보이지 않고 열매를 통해 씨를 안다는 것이다.
사람은 감 나무를 먹지 않고 감이라는 열매를 먹는다. 씨의 소망은 열매이듯이 하나님의 최종적 소망은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한 영적인 몸-열매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한 몸을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고전15:20)
그리고 감 나무가 살아 있다는 것은 감 나무 뿌리, 곧 생명에 나무라는 형상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모든 생물에게 암수 구별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계시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뿌리-생명에 보이는 형상인 줄기가 연결되어 있으면 산 것이고 끊어져 있으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은 생명의 연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전등은 전기의 형상이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려면 전기의 근원인 발전소와 연결되어 야 한다. 똑 같은 원리다. 영원한 생명이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생명은 연결되어 있으면 살고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우리 사람의 육신의 생명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생명도 보이지 않지만 생명에 세포가 연결되어 있으면 살고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 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 별도로 존재한다면 또 다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장 20절에서 만물이 계시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암수 구분없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보이지 않는 생명이신 하나님과 보이는 형상인 사람의 연합을 통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32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만물 안에 있는 양과 음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두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고 씨-하나님과 흙-사람의 관계를 통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이 사람을 통해 얻고 자 하시는 그분의 목표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신격과 인격의 연합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저들이 주장하는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하시더라.’(계22:17)에서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이고 신부는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이 맞지만 신부는 교회(구원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 안에 자기 자신을 주어서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한 연합이 되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의 최종목표는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바로 계시록 22장 7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가 달성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하나님)과 신부(사람)이 따로 따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길’ 하면서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한 한 몸으로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IV. 네번째로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알아보자.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이 살리는 것이고 생명이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목표는 영적인 것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도 글자 그대로에 있지 않고 글자 뒤에 있는 영적인 이면에 있다. 그러니까 말씀도 표면이 있고 이면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성경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있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성경도 자신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하셨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요5:39) 그러니까 구약에 나오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은 예수님의 인격의 어떠함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나무, 어린양, 만나, 반석, 각종 헌물들과 절기들, 율법, 대언자, 구름기둥과 불기둥 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유월절 어린양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린양을 포함한 유월절 절기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Passover)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느니라.‘(고전5:7)
여기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번역한 ‘Passover’라는 단어는 첫 번째 의미가 유월절이고, 두 번째 의미가 유월절 어린양이다. 단순하게 유월절 어린양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지만 유월절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것이다.
또한 출애굽기에 나오는 반석도 예수 그리스도다.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고전10:4)
이렇듯 성경의 의미는 표면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목표로 이면에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영-마음을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보면 안되고 항상 그리스도의 인격에 목표를 두고 해석해야 한다. 성경을 살펴보면 아담의 죄목이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공회에서 정죄받은 죄목은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였다.
‘유대인들이 이런 이유로 더욱더 그분을 죽이고자 하니라.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더라.’(요5:18)
‘유대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요 신성모독 때문이니 곧 사람인 네가 네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니라, 하매’(요10:33)
예수님의 죄목이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로 정죄 받았다는 것은 아담의 죄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왜 안식일을 어기고 신성모독 죄를 지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되 아무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각각의 피조물에게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시고 피조물마다 격을 부여하셨다. 사람은 인격, 천사는 천사격, 개는 개격, 소는 소격으로 창조되었다. 피조물에게는 각자의 격(格), 곧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은 안식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시자 ‘보라, 매우 좋았더라.’(창1:31) 하셨고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일을 마치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일에서 떠나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우리도 어떤 일을 끝마치면 마음이 상쾌하고 그 후에 안식하지 않는가?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기 때문이니라,’(출31:17)
바로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피조물의 대표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안식 그 자체였다. 그러나 아담은 타락함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을 깨어 버렸다. 그러면 피조물의 죄란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피조물에게 생명의 길이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 있는 것, 즉 각자의 격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이란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격, 곧 위치를 이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천사가 되겠다고 하든지, 개가 소가 되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혼란이 온다. 그래서 피조물은 각자의 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위치를 이탈하면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사탄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창3:4~5) 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타락하였다. 즉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다. 사탄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위치에 오르려다 타락한 천사다. 노름꾼은 또 다른 노름꾼을 만들 듯이 이탈자가 또 다른 이탈자를 만든 것이다. 천사들 중에도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사람이 되고 싶어 죄 지은 천사들도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창6:2)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를 말하고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천사에 대한 심판이 유다서에 언급된다.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는데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와 그것들의 주변 도시들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를 음행에 내주고 낯선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로 보복을 당하여 본보기가 된 것과 같으니라.’(유6~7)
이렇듯 피조물은 하나님의 정해주신 각자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데 이 위치를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모두 남의 떡이 더 커 보여서 범한 죄다. 아담 또한 사람이 신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위치를 이탈하였다.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있느냐?’(창3:9) 하시면 사람의 존재적 위치를 물으셨다. 이 질문은 지금도 아담 안에 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질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질문에 아담이 대답하지 않고 나무 뒤에 숨었듯이 지금도 기도의 나무 뒤에, 선행의 나무 뒤에, 도덕의 나무 뒤에, 심지어 의의 나무 뒤에 숨어서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피조물인 아담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을 이탈한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안식을 깬 것으로 안식일을 범한 죄다. 그래서 십계명에 보면 안식일을 범한 자는 죽이라고 하는 것이다.(출31:15)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살인한 자는 죽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안식일을 범한 자는 죽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형에 처하라는 것이다. 또한 피조물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것은 신성모독 죄가 포함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조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면서 안식하셨는데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제기한 것임으로 신성모독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는 항상 같이 따라다니며 동일하게 사형에 처하라고 하는 것이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안식 그 자체였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안식을 깬 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 하나님의 안식이 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마3:17) 하시면서 안식하셨다. 아담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안식을 회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에 대하여 ‘사람의 아들은 곧 안식일의 주니라,’(마12:8)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이라는 것은 표면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실제로 오신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본집이 지어지면 헐어버리는 것이다. 구약은 오실자의 그림자라면 신약은 실제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는 표면과 이면이 있는데 표면은 변하지만 이면은 영원하다. 오늘 날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이면은 영원한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 (고후3:6) 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글자대로 사역하지 않으시고 간음한 여자도 살리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등 사람을 살리는 영의 사역을 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에 성경에 있는 글자대로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로 처형한 것이다. 글자에는 인격이 없다. 그래서 글자에 나와 있는 율법대로 하면 율법 앞에 의로운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안식일과 유월절은 예수님은 자신이다. 모형은 실제가 오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골14~17)
여기서 보면 분명히 의식적인 규례들과 월삭이나 안식일 등은 모두 폐하여졌다. 성경은 율법은 폐하여졌으며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히7:18)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롬6:14)
그러면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율법을 안지켜도 되느냐고 말한다. 답은 의식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나 도덕법은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그 도덕법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하나님께서 양심의 법으로 사람 속에 심어주셨던 것이다.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유월절을 비롯한 절기 등 의식법은 하나의 모형으로서 실제가 왔기에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나 우리 마음 속에 기록된 도덕법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도덕법은 지켜야 되느냐 안지켜도 되느냐 하는 차원을 떠나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야할 도리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도덕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도덕법을 어길 경우 아버지의 징계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주장하는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말씀의 본질을 모르는 황당한 주장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율법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너희는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느니라’(갈5:4)
또 저들은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는 기록들을 보여주면서 예수님과 사도들도 안식일 지켰다고 하면서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서나 사도행전은 신약의 역사서이다. 예수님은 율법아래 계셨다. 당연히 그때는 이스라엘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켰기에 예수님도 지킨 것이다. 또한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장면을 보고 현재의 우리도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한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는 구약과 신약의 과도기적 전환기에 있었다. 구약과 신약은 그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시대가 딱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2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관습에 따라 안식일에 회당에 모였던 것이다. 그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것은 단지 2천년 동안의 관습에 따라 회당에 모인 것이지 구원을 받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자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 날에 회당에 가면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받기 때문에 안식일에 회당에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을 나중에 서신서에서 분명하게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2:16) 라고 한 것이다.
또한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율법도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특히 율법 안에 있는 안식일을 비롯한 각종 절기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대표적인 규례가 안식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게 함으로서 이방인과 구별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표적이었다.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출31:17)
안식일은 이방인에게도 교회에도 주어진 규례가 아니다. 더욱이 이러한 규례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로서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기된 것이다.(골2:17, 히7:18) 그럼에도 이들은 유대인도 아니면서 유대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또 효력이 다해 죽어 없어진 규례들을 붙들고 순진한 자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V ‘어머니 하나님’ 이것은 사실 그 기원을 올라가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여신 숭배사상에 기인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아내로서의 위치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니시느니라.’(창3:4~5)라는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타락했다. 즉 인격이 신격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이것은 사람-여자가 신-남자가 될 것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사람-여자의 깊은 속성에는 여신이 되고 싶은 깊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신은 없다. 하나님은 아담이 신이 되고 싶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타락하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였다. 이것은 흙-사람은 본질이 흙이기 때문에 흙은 흙이지 흙-사람은 결코 씨-신이 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하게 증명되었다. 예수님은 유사 이래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만큼 아담이 소망하는 가장 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의 위치를 지키길 원하시지 신과 같은 사람을 원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신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임으로 심판받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아담-신과 같은 사람을 대표하여 십자가에서 심판받고 죽으셨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창3:4) 라는 사탄의 말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반 사람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죽으셨다. 이를 통해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하게 확증된 것이다. 흙-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씨-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이라는 말은 영인 동시에 씨로 남성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신은 남성이지 여성이 될 수 없다.
성경이 제시하는 모든 문제 근원은 사탄에게 아담이 속았다는데 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이단 종파의 기원은 단 하나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아담의 타락에 기인한다.
계시록 18장에 보면 타락한 세상의 마지막 열매인 ‘큰 바빌론’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녀’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 세상이건 교회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음녀 큰 바빌론은 이렇게 스스로 마음속으로 말한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아 있고 과부가 아니므로 결코 슬픔을 보지 아니하리로다.’(계18:7) 우리의 왕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남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에서 여왕은 없다. 여왕이라는 말은 왕이신 하나님 대신에 사람이 왕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왕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원래 사람의 남편인데 타락한 현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으므로 당연히 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한 인류는 여왕이 될 수 없음에도 스스로 여왕이라고 칭하고, 남편 없는 과부임에도 과부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무의식중에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도 남신이라는 말보다 ‘여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세라미스’, 이스라엘에서는 ‘하늘의 여왕’(렘7:18, 44:17~18), 또는 ‘아스다롯’(삿2:13, 10:6, 삼상12:10) 이라는 여신을 섬겼고, 에베소 지역과 전 아시아 지역에서 여신 ‘다이아나’(행19:27)를, 영국의 드루이드 교도는 ‘하나님의 어머니’를, 중국에서는 ‘상무(성모)’를 섬겼다. 그러므로 모든 이단 종파들이 대부분 여신을 숭배하는데 이 여신숭배 사상은 사실 한 근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시기도 그 당시 여신숭배 사상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아마도 예수님의 재림시기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여신숭배가 극에 달할 것이다. 성경의 예언대로 여신을 숭배하는 카톨릭이 마지막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계18, 19장) 그래서 이단종파들의 모든 여신 숭배사상은 바로 타락한 인간 내면의 깊은 속성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어머니 하나님’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원류들 따져보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들어온 것이며 과거로부터 있어온 이단 종파들의 아류일뿐이다. 지금도 저들은 자기들만 사망의 길로 가면 되는데 여기 저기 두루 다니며 순진한 사람들을 속여 지옥 자식을 두 배나 더 만들고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개종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만들면 그를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요 약
1.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4:26) 을 이용하여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주장은 앞 구절 ‘그것들은 풍유(allegory)니라. 이 여자들은 두 언약’(갈4:24) 이라고 했듯이 구약-율법과 신약-성령을 비유적 표현한 것을 직유적으로 황당하게 해석함 것임. 국어실력이 형편없음을 증명한 것임.
2. 창세기 1장의 26절의 ‘우리’라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의 삼위일체 속성을 나타내는 것임.
3. 성경에서 남성-아담과 여성-이브는 그리스도와 교회 곧 남성-하나님과 여성-사람의 연합을 계시하는 것임(엡5:32) 따라서 만물 안에 계시되는 양과 음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하는 말이 아니고 신격-하나님과 인격-사람의 연합을 계시하는 것임.
4.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과 유월절의 의미를 잘 모르고 왜곡하여 주장하는 것임
5. 어머니 하나님, 즉 여신숭배 사상은 사람(여성)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아담의 깊은 속성에 기인하는 것임.
혹시 이 글을 읽는 하나님의 교회에 다니는 분이 있다면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루속이 나오길 바란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또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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