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침례 (홍해와 요르단 강을 건넘)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한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통상적으로 우리는 홍해의 기적만을 말하지만 사실은 요르단 강의 기적도 있었다. 성경에서 물을 통과하는 것은 침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왕국을 예표하는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두 번의 침례를 받은 것이다.
‘주 너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나갈 때까지 홍해를 우리 앞에서 마르게 하신 것 같이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가 건널 때까지 요르단의 물들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셨나니’(수4:23)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물을 통과하는 것을 죄에 대한 심판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분명히 홍해를 통과한 것은 심판의 의미다. 그래서 홍해를 통과하기 전 어린양의 피가 필요했다. 그러나 요르단 강을 통과하는 것이 과연 심판의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라면 문제점이 생긴다. 왜냐하면 홍해를 통과한 이스라엘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르단 강에서 또 심판을 받는다면 이중처벌을 받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어린양의 대속의 피가 완전하지 않다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1. 성경에서 물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첫 번째로 성경에서 물은 죽음과 생명 두 가지를 모두를 예표한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은 생명이 있어 움직이는 창조물과 땅 위 하늘의 열린 궁창에서 나는 날짐승을 풍성히 내라, 하시고’(창1:20)
작은 물은 생명을 예표하고 노아의 홍수와 같이 큰 물은 심판을 의미한다. 작은 물은 마시면 살지만 큰 물은 마시면 죽는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바다는 사망을 예표한다.
‘바다가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계20:13)
그래서 사망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바다는 없어진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계21:1)
이렇듯 물은 죽음과 생명 두 가지를 모두 예표하듯이 십자가도 앞에는 죽음이 있지만 뒤에는 부활이라는 생명이 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것도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만 부활생명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물은 말씀을 예표한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려 하심이요’(엡5:26)
물은 말씀을 예표하는데 이 말씀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고 말씀을 받아드리지 않는 자는 사망을 얻는다. 그러니까 이 말씀도 결국 사망과 생명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물은 육체를 예표한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우선적으로 물에서 난 다음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여기서 그러면 물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바로 답을 주신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요3:6-7)
예수님은 여기서 물은 육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육체로 지어졌다는 말은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은 생명이 없는 육체로 지어졌기에 하나님의 생명인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5절로 7절에서 죄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사람의 육체로 태어난 다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죄 이전에도 근원적으로 육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영생을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자였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자가 아니었다.(창3:22) 또한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사람이 죄가 없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사람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그래서 예수님은 육에서 난 것은 어차피 육이기 때문에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명은 그 왕국이기 때문이다. 개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개의 왕국에 있는 것이고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의 왕국에 있는 것이다. 물고기의 세계에 살려면 물고기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그 왕국에 살려면 그 왕국에 합당한 생명으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죄 이전에도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고 거듭나야 될 존재라는 것이다. 죄란 단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사탄이 설치해 놓은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지 죄 문제가 해결된 것이 영생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거듭나야 할 자로 한 번은 반드시 육체가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시고 계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요3:5-7)
그런데 죄가 들어 왔다. 어차피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죽음을 통해 거듭나야 하는데 죄가 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먼저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것도 죽음을 통해 심판받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근원적으로 사람이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다가 이어서 죄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다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요3:14)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거듭나야 하는데 죄가 들어왔기에 죄 문제 해결을 위한 심판이 먼저 해결해야 된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수학적으로 보면 두 번 죽어야 한다.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 한 번, 그리고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한 번, 이렇게 두 번 죽어야 한다.
심판은 법리적인 문제이지 유기적문제가 아니다. 즉 심판이 유기적 거듭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법리적 심판을 위한 죽음도 필요하고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도 거듭남, 곧 죽음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연합된다는 의미인데 저절로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곧 영안에서 연합된다는 것이다.
3. 강을 건넌 자 : 히브리 사람
성경에서 강을 건너는 것은 침례를 의미한다. 곧 죽음을 의미한다. 성경기록에 보면 아브라함이 맨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온 사람이다. 강을 건넌 자란 의미에서 ‘히브리’라는 말이 나왔다. 성경에서 히브리라는 말은 창세기 14장에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적용하여 등장한다.
‘한 사람이 도피하여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그것을 고하니 이는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평야에 거하였기 때문이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더라. 이들이 아브람과 동맹을 맺었더라.’(창14:13)
아브라함의 이동경로를 보면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 강을 두 번 건넌다. 강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넜다가 다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넜다. 이스라엘 민족도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넜고, 요르단 강을 건널 때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넜다. 하나님의 심판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생명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다. 그래서 생명의 복음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향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땅으로 넘어왔다. ‘메소포타미아’란 의미는 ‘강사이의 땅’이란 의미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강은 한 번만 건너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강을 건너는 것, 즉 침례는 죽음을 상징하고 심판을 상징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람은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번 건넜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처음에 심판을 의미하는 큰 물인 유프라테스 강 중간지점을 건넜고 이어서 생명을 의미하는 작은 물인 유프라테스 상류를 건너 하나님의 왕국을 예표하는 가나안 땅으로 넘어왔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도 처음에는 심판을 의미하는 큰 물인 홍해를 통과한 뒤 광야를 거쳐 생명을 의미하는 작은 물인 요르단 강을 통과한 것이다. 이렇듯 아담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두 번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죄가 없을 때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한 번의 죽음이 필요했는데 죄가 들어와 심판을 의미하는 죽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죄가 없더라도 한 번의 죽음이 필요한 것은 창세기 2장의 아담과 이브의 예표에서도 잘 나와 있다. 하나님께서 이브를 취하는 과정을 보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다음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를 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예표고 이브는 교회의 예표이고 특히 아담이 깊이 잠들다라는 의미는 원어로 죽었다라는 의미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창2:21-22)
여기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아담이 아니고 이브, 곧 교회로서 부활생명이다. 아담이 아담으로 태어나서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브를 생산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2장은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기 전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예표하는 것은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희생물과 헌물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종류가 크게 두 종류다. 희생물과 헌물이다. 희생물과 헌물은 모두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상징한다. 희생물은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물이고, 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통, 곧 생명의 연합을 위해 드리는 제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희생물만 죽음으로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헌물도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이고 강제적인 제물이라면 헌물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자발적인 제물이라는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죄와 관계없이 드려지는 제물이 음식헌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원래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음식헌물(소제)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죽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죽지 않고는 될 수가 없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먹힘으로서 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돌이 풀이 되려면 풀 뿌리가 돌을 뚫어 그 영양분을 섭취하므로서 돌이 풀이 된다. 풀이 소가 되려면 풀은 소에 먹힘으로 소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이 되려면 높은 생명 쪽으로 그 길이 열려 있다. 육적인 생명이 영적인 생명이 되려면 영적인 생명에 먹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생명의 연합의 원리를 ‘...이것은 죽을 것(육신)이 생명(하나님)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생명의 연합의 원리를 아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다. 거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 곧 육적인 몸에서 부활된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명의 연합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다.(히12:29) 육-사람은 죄가 있든 없든 불-하나님을 만나서 타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음식헌물도 일종의 번제 헌물이듯이 사람은 원래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레위기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들이 불로 태워서 헌물로 드려지는 것은 이러한 생명의 연합의 원리가 있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만 없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종교적인 생명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죄를 사함받는 것은 법리적인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법리적으로 죄를 용서받은 것이 영생은 아니다. 죄를 용서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실 수 있는 조건이지 무죄 자체가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죄한 사람도 하나님께 헌물로 드려져야 영생을 얻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보면 희생물은 반드시 죽음으로 드려져야 함에도 죄를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살아 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한다. 희생물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으로 값을 다 치루었기에 살아 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은 죄와 관계없이 헌물로 드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희생물이 아닌 헌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4:6)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은 불과 기름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이 불과 기름은 하나님을 예표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불에 의해 재창조되고 연합된다. 쇠와 쇠는 저절로 연결이 안되고 불에 의해 연결이 되고 흙과 흙도 저절도 연결이 안되고 불에 달구어져 돌이 되고 쇠가 된다. 이 불과 기름은 하나님의 생명을 예표하기 때문에 어떤 기계든 불과 기름으로 움직인다. 이렇듯 사람도 불-하나님을 만나면 번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본디 하나님께 대하여 번제헌물로 창조되었고 죄가 들어와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희생물과 헌물의 공통점은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죽음을 통해 수학적으로 보면 두 번의 죽음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희생물과 헌물은 같이 따라 다닌다.
‘태우는 희생물 곧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헌물로 삼을지니라.’(레1:9)
이 법리적인 희생물의 위치를 신약에서는 대속이라고 하고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의 위치인 헌물로서의 위치를 구속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복음서를 보면 대속물이라는 단어는 마태와 마가복음에 나오고, 구속이라는 단어는 누가 복음에만 나온다. 그러니까 법리적인 대속물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기록한 복음은 마태, 마가복음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마20:2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막10:45)
또 하나님께 드려지는 유기적인 헌물의 위치인 구속자로서의 예수님을 기록한 복음은 누가 복음이라는 것이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사 구속하시고’(눅1:68)
‘마침 그때에 그녀가 나아와 마찬가지로 주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서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말하니라.’(눅2:38)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위를 보고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의 구속이 가까이 이르렀느니라, 하시니라.’(눅21:28)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눅24:21)
그리고 요한복음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기록한 책이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5. 결 론
예수님도 요르단 강에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았다.(마3:16) 예수님이 침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죄가 없더라도 한번은 죽고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침례를 거부하는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시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더라.'(마3:15)
그러므로 사람에게 침례-죽음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의가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침례는 심판을 의미하며 죄인들만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죄 없으신 예수님도 침례를 받았다. 침례는 본디 사람에게 정해진 근원적인 경륜이었다. 사실 아담의 죄의 근원을 살펴보면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한 이러한 사람의 위치를 거부한 것이었다. 죽지 않는 신들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해주신 근원적 위치에 순종하신 것이다. 사람은 본디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침례가 모두 심판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이 물을 두 번 건넌 것은 한 번은 심판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 번은 죄와 관계없이 인생에게 정해진 생명의 코스를 통과한 것이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도 있을건데 왜 하필이면 죽음을 통해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지 이해해야한다. 생명은 오직 영안서만 연합되는데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영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영생 을 주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두 가지 위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법리적인 희생물의 위치와 영생을 주기 위한 유기적인 헌물의 위치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침례도 홍해와 요르단 강에서 두번 있었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반석의 갈라짐도 두번 있었고, 레위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하는 제물도 번제단에서 희생물과 헌물의 위치로 드려졌고, 십자가도 단순히 죄를 위한 희생물로만 드려진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기 위한 헌물의 위치라는 두 가지 방면으로 드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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