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율법(문자)주의, 은사주의, 영지주의에 대한 경고

올더스조에 2016. 3. 30. 00:13

 

1. 기원과 배경

창세기 2장과 3장에 보면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가 나오는데 사실 성경은 두 노선에 대한 대립을 기록한 책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율법과 은혜, 또는 율법과 복음(생명) 이렇게 대별해서 말을 하곤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세계가 성경에서 계시고 되고 있는가에 대해 그 기원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내부 적인 면과 외부적인 면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표현하려면 두 가지 방면이 있다는 것이죠, 내부적인 면과 외부적인 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수가 있다고 하면 그 가수가 노래를 잘한다고 해서 그 노래가 그 가수 자신은 아닙니다. 또 어떤 축구선수가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의 운동실력이 그 사람 자신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단지 그 사람 자신이 아니고 외부적인 능력입니다. 이렇듯 모든 존재에게는 두 방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몸이 없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자신을 표현할 몸으로서 두 방면의 피조물이 필요하시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벧후1:4) 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내부적인 성품을 대표하는 피조물로 창조되었고, 천사는 외부적인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살펴보면 천사는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을 가진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비록 천사보다 낮게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되어 피조물의 머리로 창조되었습니다.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8:5)

그러면 왜 천사들은 영으로 창조되어 죽지도 않는데 사람은 흙-육신을 가진 자로 천사보다 낮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씨-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려면 사람은 영-씨로 창조할 수 없고 반드시 흙으로 밖에 창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만든다면 하나님은 한 분인데 또 다른 하나님이 새로이 생긴다는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근원적으로 거듭나야 할 운명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내에서는 사람이 죄 때문에 거듭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영원한 생명이 없었기에 근원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죄만 용서받으면 다 되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죄를 용서받은 것은 구속 받은 것이지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말할 때 죄 문제를 우선 말하지 않고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3:3) 라고 말하신 후에 뒤에 가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3:14) 라고 하시면서 뒤에 가서 죄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란 단지 사탄이 설치해 놓은 장애물로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제거해야할 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설령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생명의 연결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할 자는 것이죠.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지 자체 영생이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참으로 그분께서는 창세 전에 미리 정하여졌으되 이 마지막 때에 너희를 위해 드러나셨으며’(벧전1:20) 라는 말씀이 있듯이 예수님이 오실 것은 창세 전에 미리 정하여졌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우리의 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오셔야 했다면 창세 전에 정해질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단지 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사람을 죄인이 되도록 창조하셨다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이 타락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정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요

말이 좀 다른 곳으로 갔네요, 사람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구원의 상속자, 곧 사람의 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해 섬기라고 보내어진 섬기는 영들이 아니냐?(1:114)

내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려 하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네 동료 종이요 예수님의 증언을 가진 네 형제들 가운데 속한 자니 너는 주의하여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19:10)

그래서 성경은 천사숭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꾸며 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2:18)

그러므로 비록 사람이 지금은 천사보다 낮게 창조되어 천사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지만 성경은 심지어 우리가 아들로서 종인 천사들을 판단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물며 이 세상 삶에 속한 일들은 얼마나 더 많이 판단하겠느냐?(고전6:3)

하나님의 왕국에서 사람은 왕이신 하나님의 상속자 곧 세자로서 창조되었고, 천사는 신하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왕좌들, 통치들, 정사들, 권능들 이런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에서 신하인 천사들의 직급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1:16)

물론 사탄의 왕국에서도 정사들 권능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사탄이 타락하면서 함께 타락한 천사들이 있고 사탄이 자신의 왕국에서 왕 노릇하면서 하나님 왕국의 통치체계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6:12)

그래서 과거 왕조시대를 보면 왕이 있고 장차 왕이 될 세자가 있고 신하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통치체계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은 것은 머리 속에 그 개념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오지에 스마트 폰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스마트폰을 주어 보았자 그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대 왕국의 통치체계는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체계를 모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두 가지 세계는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은 생명의 세계이지만 직장은 선악의 지식세계, 곧 계약에 의한 율법의 세계입니다. 직장 내에서도 사장과 종업원의 관계는 율법의 관계지만 사장과 사장의 아들은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선악과를 먹은 세계라면 교회는 생명과를 먹은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 질서, 즉 회사용어로는 지배구조, 군대용어로는 지휘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고 그 아래 아들, 곧 사람이 있고 신하들로 천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세자로서 신하들을 다스릴 위치지 천사를 숭배할 위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질서를 아는 것이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이 통치질서를 모르니 사람들은 그저 종교적으로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올바른 방향이 중요합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면 사람은 원래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고 천사들은 종으로서 율법의 세계, 곧 선악의 지식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원 안에서 보면 사람은 원래부터가 새 언약-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옛 언약-율법이라는 것은 영원 안에는 없었는데, 우리가 타락했기 때문에 옛 언약이 생긴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옛 언약이 먼저이고 새 언약이 다음이지만 영원 안에서는 새 언약뿐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사람은 새 언약의 세계, 곧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2.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통치질서의 혼란

그러면 아담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질서에 혼란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3:4~5) 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종의 위치로 갔다는 것입니다. 즉 생명의 세계에서 선악의 지식세계로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네가 어디 있느냐?’(3:9) 하시면서 사람의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세계에 있어야 될 아들이 종의 세계인 선악의 지식세계, 율법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단지 아무렇게나 준 것이 아니고 이러한 위치 이탈의 필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씨를 뿌린 결과의 열매라는 거죠.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3:19)

그러면 성경은 이 율법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한 사람의 상태를 무엇이라고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아래 있던 우리를 구속하시자 성경은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2:14~15)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 말씀에서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율법아래 있던 인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천사인척 천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이것을 벗겨내고 사람의 진실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사람에게는 적합한 옷이 아니고 천사에게 적합한 옷이라 겁니다. 이 세계가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땅 위에 살아야 하는데 물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사망인 거와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준 목적은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이것을 지킬 수 없으니 율법으로부터 죄를 알게 하고,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3:20)

이 죄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찾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3:24)

비록 사람이 타락해서 율법이 주어졌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하나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어찌 사탄이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비록 사탄으로 인해 사람이 율법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했지만 이것 마저도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로 가는데 디딤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근원적으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 보변 율법은 거룩하고 완전하지만 결정적 흠이 있었는데 이것은 생명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종교적인 사람을 만들겠다면 가능하지만 생명을 줄 수가 없다는데 결정적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3:21)

결국 사람이 타락해서 율법이 주어졌지만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에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 ....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31:31~33)

즉 옛 언약은 외부적인 교육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서 생명을 줄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내놓은 새로운 대책은 곧 새 언약은 사람 속 중심부에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주어서, 곧 생명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달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예레미아 3131~33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두 번에 걸쳐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날들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들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한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8:10)

그 날들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10:16)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와 사망의 세계인 율법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위치를 옮겼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했을 때의 그 상태로 원 위치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8:2)

이것은 중력의 세계에서 무중력의 세계로 위치를 옮긴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율법은 우리에게서 폐하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으므로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7:19~20)

 

3. 옛 언약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교회들에게 주는 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옛 언약 하에서 너무나 오랜기간 살았기 때문에 옛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교회들에게 서신서를 통해 경고하고 있는데 이것을 율법(문자)주의, 은사주의,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물론 이 세 가지는 모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3:4~5) 라는 한 가지에서 기원합니다. 이 세 가지 경고의 기원이 다른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들어온 열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수직적으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씨를 부린 결과의 필연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첫 번째 율법(문자)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갈라디아서가 바로 이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3:3)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주로 행하고자 한 것은 율법 중에 의식법인 할례였습니다.

형제들아, 나 곧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핍박을 받겠느냐? 그렇다면 십자가의 실족하게 하는 것이 그쳤으리라.(5:11)

율법(문자)주의 이것은 종-천사의 세계입니다. 종들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가 아닌 계약관계로 글자대로 시키는 일만 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3:6)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옛 언약-구약경륜과 과 새 언약-신약경륜을 잘 대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왜 나왔는가에 대한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옛 언약은 돌 판에 쓰여진 언약이란 면 새 언약은 마음 판에 기록된 언약입니다. 글자 대 생명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인데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3:3)

율법은 종들에게 적용되는 세계로 종과 주인은 계약관계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은 돌 판에 기록되어 진 것으로 생명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관계임으로 마음 판에 기록한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신약경륜 하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패러다임이 구약경륜에 비해서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큰 것입니다. 구약은 외부적인 교육훈련을 통해서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이고 신약은 생명을 바꾸어서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개를 아무리 훈련시켜도 사람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개를 사람으로 만들려면 생명을 바꾸어서 재창조 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3:6) 라는 말씀의 의미는 율법(글자)는 완전하지만 인격이 없기 때문에 어떤 육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글자는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의 영적의미는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다’(1:31)고 하시면서 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품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습니다.(3:6) 아담은 바로 하나님께 대하여 나를 왜 천사처럼 만들지 못하고 이렇게 밖에 만들지 못했습니까? 라고 항거한 거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는 같이 따라 다니고 동일하게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의미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로 처형한 것입니다. 즉 그들은 글자대로, 곧 성경대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셔 글자의 사역을 하지 않고 영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글자대로 간음한 여자를 정죄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살리셨습니다. 성경대로 하면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죽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표면을 보면 안되고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하나였기에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에 간음한 여자를 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3:6) 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성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책이지만 글자에는 인격이 없기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 기계적으로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을 근거로 사람을 정죄하곤 합니다. 이때 정죄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고 책임을 성경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우리가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가 된 사람, 곧 하나님의 마음-생명을 가진 사람이 돼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말씀이 인격이 된 사람이 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입니다. 세상의 법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살려서 사람되게 하려는 것이지 처벌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세상에서도 법대로 한다면 판사가 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판사가 있는 것은 판사가 그 법과 하나가 되서, 곧 그 법이 인격이 돼서 판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 같은 범죄라도 판사의 인격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글자의 사역을 하지 않고 영-인격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관념은 글자의 사역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가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6:51)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6:52) 하면서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6:54) 하시자 제자들마저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리요?’(6:60) 라고 하였습니다. 글자의 사역을 하던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것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6:61)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6:63)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어려운 말도 아닌데 알쏭달쏭합니다. 왜냐하면 영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는 신약경륜 하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니까 이것을 오해하여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글자대로 한다면 원칙 상 구약경륜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8:51) 라고 영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것을 또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는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켤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네가 이미 죽은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크냐? 또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네 자신을 누구로 만드느냐?(8:52~53) 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불교경전처럼 어려운 용어를 쓴 책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생명의 본질을 기록한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표면보다는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단순하게 받아들여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성경대로 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할 때 마다 성경중심, 성경중심 이야기 합니다. 또 성경신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뜻에서 하는 거겠지만 성경대로 하면 자신도 그 글자에 올무가 될 뿐만 아니라 또 그 글자가 사람을 죽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한다는 사람들 보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없고 파리한 심판자의 마음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문자적인 사람들을 향해 성경은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고전3:3) 하면서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늘 문자적이기 때문에 영에 속한 일, 곧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 그러나 돌에 써서 새긴 사망의 직무에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영광 곧 없어질 영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무에는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느냐? 정죄의 직무도 영광이 될진대 의의 직무는 영광이 더욱 뛰어나니라(고후3:7~9)

바울은 여기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글자의 사역 대 영의 사역, 사망의 직무 대 영의 직무, 정죄의 직무 대 의의 직무로 대별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언약이 외부적인 교육훈련을 통해서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이라면 새 언약은 생명을 바꾸어서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개를 아무리 훈련시킨다고 해도 사람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개가 사람이 되려면 생명을 바꾸어야 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창조자 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율법은 완전하고 너무 너무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실패한 것은 이것을 사람이 지킬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킬 힘-생명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3:21)

율법은 완전하고 좋은 것이지만 생명을 줄 수 없는 결정적 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에 합당한 사람을 만들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놓으신 대책은 자신의 생명을 사람 속에 넣어 주어서 자신에 목적에 합당한 사람을 만들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만일 그 첫 언약이 흠이 없었더라면 둘째 것을 구할 여지가 없었으려니와 그들에게서 흠을 발견하시고 그분께서 이르시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 ........ 그 날들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들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한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8:7~10)

그래서 옛 언약은 돌 판에 기록한 것이라면 새 언약은 마음 판에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고후3:3) 성경은 새 언약 하에 있는 우리를 글자의 사역자 아닌 유능한 영의 사역자라고 합니다.(고후3:6) 그러니까 우리는 글자에 속한 사람 곧 땅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영이 우리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무슨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성령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느니라.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0~11)

바울은 영에 속한 사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5~16)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에 속한 사람은 소위 신령한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왜 이리 길게 설명하느냐 하면 지금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신약경륜 하에 있으면서도 구약경륜 하에 있는 것 같이 글자의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좌우간 성경은 글자대로 하는 율법을 향해 초등학생이 배울 과목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 세상의 초등 원리 밑에서 종노릇 하였느니라.(4:3) 물론 율법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더하여 진 것이지만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바울은 이것을 상속자가 아이였을 때에는 가정교사와 감독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구약시대는 사람에게 초등학생 시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는 가정교사와 감독자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였을 때는 이제 내가 말하노니 상속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아이일 때에는 전혀 종과 다르지 아니하고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가정교사들과 감독하는 자들 밑에 있느니라.(4:1~2)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늘 말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충만한 때가 이르러서 곧 하나님께서 정한 초등학부 과정이 끝났기 때문에 아버지 집으로 들어오게 하여 상속자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4:4~7)

그래서 분명히 성경은 율법은 폐하여졌고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7:18)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신약경륜 하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6:14)

이렇게 말 할 때마다 늘 질문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율법을 안지켜도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이러한 질문이 초등학생의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과정에서 다 배운 것을 가지고 대학교에 와서 왜 또 들추어 내느냐는 것입니다. 대학생이 되면 초등학교 과정은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어려웠던 문제가 중학교에 가면 쉬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외부적인 것이라면 새 언약 곧 생명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건강이 좋지 않아 암이 생겼다고 하면 암을 수술한다고 해서 암이 완전히 완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건강하지 못하면 다시 암은 재발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현상을 치료하는 것이라면 신약은 생명의 본질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치료하면 그 생명의 오류로 인해 나탄 현상은 자동적으로 낫게 되는 것입니다. 습진은 우리의 면역체계의 이상으로 나타는 병입니다. 이 습진은 고약만 바른다고 낫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강화되면 자동적으로 치료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의 의식법은 폐기되었지만 도덕법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2:16~17) 라고 하면서 의식법의 폐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면 신약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명나무의 열매, 반석, 만나, 절기들, 제물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델하우스는 실재 집이 지어지면 없어지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실재가 왔기 때문에 그림자를 붙들고 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도덕법도 글자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서, 곧 내 인격이 돼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도덕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에는 관계없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따른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 큰 아들이 당연히 지켜야할 인간의 도리를 아버지 앞에서 지키지 않았다면 징계를 받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의식법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재가 왔기 때문에 그림자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차조심해라, 거짓말하지마라, 착하게 살아라, 등등 당연히 지켜야 될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숙한 아들이 돼서도 이런 말을 듣는 아들이 된다면 그는 아들로서 명분이 초라해지는 것이고 한심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성숙하면 그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야 하는데 다 큰 아들이 되서도 어린아이들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초등학생 때와 같이 다시 가정교사와 감독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가 바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오용하여 세상사람들도 잘 행하지 않는 방탕과 음행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초등학생을 다루듯이 권면하고 징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아버지를 대신할 자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단들은 율법 아래있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온갖 비리를 다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도한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그 씨는 그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아들이란 열매란 의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아들로서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로서 열매가 없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 하에 있던 사람들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기에 성경말씀을 글자대로 표면적으로 지킴으로 유대인들은 외식하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기에 기계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살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위와 마음이 분리된 사람이 아니라 행위와 마음이 하나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영이 시기에 행위 이전에 영, 곧 마음의 동기를 먼저 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5:28)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약경륜 하에 있습니다. 우리는 글자의 사역자가 아니고 영의 사역자입니다. (고후3:6)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초등학생처럼 글자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사역자라는 것입니다. 곧 말씀이 육신이 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아들로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율법의 완성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의 글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폐하러 오지 아니하고 성취하러 왔노라.(5:17)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어떤 것도 빚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느니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어떤 다른 명령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말씀 안에 간략하게 들어 있느니라.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성경 말씀의 본질은 구약이건 신약이건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 뒤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죽으시고 살아나심을 통해 우리에게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에 즉 하나님의 생명-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에 우리는 거듭났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성령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느니라.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 3:6)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경륜과 신약경륜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큰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경륜 하에 있음에도 신약성경을 지식으로 전한다거나 그대로 전한다면 원리상 구약경륜 하에 있는 글자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체부와 같이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말씀을 전할 때마다 주가 말하노라하면서 그들은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같이 자신들 또한 말씀이 육신 된 것 만큼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쓴 편지가 성경이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그들이 하나가 되었기에 그들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217절에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길, ..’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성령과 신부가 따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한 연합이 되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신약의 사도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신약경륜의 원칙 하에서 자신들이 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신약경륜의 원칙 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을 때 신약성경을 표면적인 글자대로 전한다면 그것 또한 원리상 구약경륜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것을 보면 각기 나름대로 그것을 표현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똑 같은 하나님을 말씀을 읽고도 각자 느낌과 표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서 다른 사람의 탁월성입니다. 사도들도 각자 자기가 받아드린 주님을 자기 나름대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표현하기를 원하십니다. 획일적으로 기계적인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지식-율법의 세계는 졸업이 있지만 인격-생명의 세계는 졸업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단지 말씀을 글자대로 지식적으로 전한다면 그것은 구약경륜 하에 있는 글자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전하고 공부한다 하더라도 그 뒤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다면 글자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주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는데 설교자들은 주님을 알기보다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중점을 두고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정작 주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한 인류는 항상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으리이까?’(19:16, 10:17, 18:18, 16:30)라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정해주신 아들이라는 존재적 위치를 회복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전전긍긍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면서 걱정하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남편과 아내의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전히 우리의 관심은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하면서 행위적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을 율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보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중점을 둡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그분과의 연합이고 영생이기 때문입니.

지금 대부분의 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믿어라, 이렇게 단순하게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위해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합니다. 다 좋은 이야기지만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아니고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은 나의 어떠함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 은행을 신뢰하기 때문에 돈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행을 신뢰하려면 그 은행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가라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기초 원리는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가서 죽은 행위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침례들에 관한 교리와 안수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기초를 다시 놓지 말지니라.(6:1)

이러한 기초 원리는 입문에 필요한 것이고 젖을 먹는 갓난아이 수준이라고 말합니다.(5:13)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러한 것을 아는 것이 대단한 수준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갓난아이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 더하여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생명은 그분 자신이고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그분을 우리는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알아야 그분을 살아낼 것 아니겠습니까?(2:20) 예수님은 우리의 죄들만을 위해 죽으신 단순한 분이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지식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3:14~19)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우주라는 말은 없지만 바울의 기도는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전 우주적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의 크기를 우주에 비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우주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크기를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분의 인격의 크기는 우주적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수준은 얼마나 왜소하고 가련한 상황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입체적으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단순한 글자대로 한 점(), 또는 한 선()만으로 알기 원하시지 않고 입체적으로 알고 그리스도의 인격의 충만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3:19)

옛 언약을 글자의 사역이라고 했듯이 율법주의란 문자주의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아담의 범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율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자의 사역이 우리에게 가깝고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교회들을 보면 신약경륜 하에 있으면서도 글자의 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형상이기 때문에 사람은 보이는 형상을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괴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은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목표는 항상 영적인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영과 형상의 관계인데 보이지 않는 영이 실재고 사람은 형상으로 실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문자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아마도 생명사망용어의 개념 입니다. 이것은 근원에 대한 문제이기에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는 계시가 닫혀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먼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란 거룩하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피조되지 않은 생명으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생명 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만든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한 분인데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든다는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단순히 죽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죽지 않지만 피조되었기에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피조물인 우리가 피조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인데 이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연결됨으로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등은 전기의 형상입니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려면 발전소와 연결되어 전류가 통해야 불이 들어오는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사망은 육신의 사망의 의미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합니다. 곧 다른 길로, 다른 생명, 곧 사탄의 생명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하게 죄가 들어와 육신의 사망이 왔다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은 타락한 아담의 깊은 속성에 기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시고 우리는 그분의 농사입니다. 성경은 씨를 땅에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개념으로 기록된 생명의 책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이분법적 세계를 기록한 책이 아니고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가 있든 없든 한 번은 반드시 죽고 영적인 몸, 곧 열매로 추수되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날 안에(in the day) 네가 반드시(surely) 죽으리라, 하시니라.’(2:16~17)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날 안에 육신이 죽지 않고 930년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날 안에 반드시 죽으리라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안에 육신은 안죽었습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성경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셔 구속사적 관점에서 용서해 주어서 바로 그날 육신이 죽지 않고 930년을 살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위적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날 안에(in the day) 반드시(surely) 죽으리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작위적 해석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육신의 죽음이 왔다면 죄인은 죽어서 부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부활합니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24:15)

그러니까 이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었도다.’(3:1) 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위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너무도 깊게 사탄에게 속아 있기 때문에 사람의 육신은 영생하게 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신에 죽음이 왔다고 단순하게 믿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육신의 죽음과 삶에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임에도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사실 사탄이 아담을 유혹한 말과 같이 죽지 않는 신들이 되고 싶은 아담의 깊은 속성에 기원합니다.(3:5) 성경은 우리의 육신이 살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으면 사망이고(2:1)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으면 육신이 죽어도 산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11:25)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는다면 그 당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죽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 죽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라고 하면서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아니하리라.’(6:50) 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믿는 이들은 육신이 죽지 않는가?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의 삯은 사망’(6:23) 이란 말씀의 의미를 죄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 마저도 죄로 인해 육신이 죽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너무도 큰 모순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죄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 된 것이고 예수님의 구속은 완성이 안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의 몸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사망이 왔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망의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사탄도 영으로서 일종의 씨, 곧 사망의 씨로서 흙-아담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서 아담이 사탄의 자식으로 거듭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자식이 되면 사망의 길로 가서 최종적으로 불호수로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생명의 길로 가서 최종적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은사주의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은사주의 이것도 아담이 신이 되고 싶어 타락한 원인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은사, 즉 기적과 능력은 신-천사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생명의 세계, 곧 인격의 세계에 살도록 운명지어 졌지만 아담의 타락으로 율법의 세계, 곧 천사-종의 세계로 위치를 옮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사람이 맞지도 않는 천사의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15) 그래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에 비해 자랑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모세(율법)와 천사 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옛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천사 대 아들, 모세 대 그리스도를 비교해서 천사보다 아들이, 모세보다 그리스도가 우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에게 적용되는 율법의 세계에서는 기적과 은사와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1:1~2)

지나간 때 즉 옛 언약 하에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과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이제 새 언약 하에서는 생명-인격의 세계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들로, 인격으로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사람들이 왜 은사를 신봉하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타락한 아담의 속성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경고하는 바울의 서신서가 고린도전서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인격에 있는데 은사는 하나의 능력에 불과한 것이지 은사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목표인 인격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은사는 오늘은 있어도 내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오셔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반문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여러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 33년 중 그분께서 기적을 행한 경우는 3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는 그분에게는 어떤 신적인 요소도 없고 오직 사람-인격 그 자체만 남았습니다. 구속이란 사람을 원래의 위치로 회복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속하셨지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간 지점에서도 죽은 자를 살린 지점에서도 구속하지 않았습니다. 즉 십자가에 매달린 그 사람이 사람의 원형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기적의 본래의 목적은 하나님의 경륜이 전환되는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역사 6000년 가운데 기적이 일어난 기간은 불과 약 5%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성경은 기적이 일어난 시기는 첫 번째로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일어났으며, 이 시기에 율법이 주어지고 약 1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엘리야와 초기 대언자들의 시대에 일어났으며 1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기로 약 7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 마저도 생애 33년중 오직 3년 동안만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적은 어떤 일상적인 삶속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이 전환되는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그렇게 능력이 많았던 바울자신도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했고 디모데에게 위장병을 고치기 위해 포도즙을 먹으로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있는 병을 위하여 포도즙을 조금 쓰라.(딤전5:23)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언제든지 기적적인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하나님의 행정의 원칙은 기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장차 환란시대에 일어날 여러 가지 기적이 예언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 말씀이 확증되기 위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여러 이단들을 보면 기적과 은사로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위치를 이탈한 인류는 신과 같은 능력을 사모하는 것이 기본 속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사람-인격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과의 광야 대전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령하여 이 돌들이 빵이 되게 하라,(4:3) 하면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하시면서 사람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지금도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방법은 여전히 너희가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었지 신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필요한 만큼 하늘에 충분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인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게 구원에 이른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100%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을 다 주셨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 곧 씨-하나님 앞에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면 씨가 뿌려져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내가 힘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단지 힘을 완전히 빼고 나는 흙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저 사람이 바로 나다라고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영지주의입니다. 이 또한 아담이 신이 되고 싶어 타락한 본성에 기원합니다. 영지주의라는 것은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통상적으로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또는 단지 영이다 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경고하기 위해 주로 쓰여진 성경이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서입니다. 성경이 주는 정확한 진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입니다. 창조주인 동시에 창조물인 것입니다.(1:15) 사람들은 예수님을 창조물이라고 하면 큰일 날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분을 창조물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신 되심에 있지 않고 사람 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자신을 지칭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보다 대부분 사람의 아들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자라는 말은 어떤 모델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신은 사람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구속할 수 있습니다. 사람만이 사람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654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영생의 근거가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살과 피가 없는 예수님을 추구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살과 피를 가지신 분이고 우리의 영생의 양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있다는 것입니다. 살과 피라는 의미는 그분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를 칭할 때 줄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신들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속성은 신적인 예수님만을 알려고 하고 살과 피가 없는 예수님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신이라면 예수님은 살과 피도 없고 십자가에서 죽을 수도 없고 우리를 구속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54절에서 우리의 영생의 근거는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에 있다고 말합니다. 곧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죄가 없어서 죽으실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살과 피가 있기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살과 피가 없다면 죽으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참사람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나오더라’(6:34)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요한은 서신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4:3)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물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해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격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본의 아니게 베드로가 그랬듯이 적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생의 근거는 예수님의 신 되심에 있지 않고 그분의 살과 피, 사람이신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아담은 이 살과 피를 피해 신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영생의 근거가 살과 피에 있음에도 이것을 거부하고 사람이 신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살과 피를 무시한 영과 생명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종교의 허다한 문제들이 여기서 일어났고 그 결과는 언제나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근거 없는 영은 영생 안으로 이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라는 말은 조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이라는 겁니다. 구속자는 법적으로 친족 중에 가장 가까운 자라야 됩니다. 가장 가까운 자가 대를 잇던지 재산을 소유하든지 팔았던 땅-인격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우신 분으로서 자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내놓으심으로서 우리를 위한 온전한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23:46) 민수기 27장이나 룻기 3장에 보면 룻이 시집갈 때 그 말이 나옵니다. 가까운 친척 중에서 상속 무를 자를 찾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가까운 자라야만 나를 구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더 가까운 분이 누구인가? 이것은 십자가에서 영까지 다 바쳐 놓은 그 사람이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분입니다. 먼 사람이 아니고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다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다른 데서는 다 다르고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갈 때도 거리가 생기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때도 거리가 생기고 심지어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을 봐도 우리와 거리가 생깁니다. 가까운 친척이 아니고 아주 먼 거리에 있습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 있는 석가모니를 보아도 너무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혀있는 예수님을 보면 우리와 너무 가까운 친척입니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11:30)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상하게 이방세계에 들어오면서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먼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위대한 사람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옛적에 강력한 자 곧 명성있는 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6:4)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위대한 자의 나라도 아니고 황제의 나라도 아닙니다. 단지 연한 초목같고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의 나라입니다.(53:2) 사자나 호랑이의 나라가 아니고 어린양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먼 친척은 나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단지 내가 숭배하고 경배할 수는 있지만, 내가 그분으로 말미암아서 구속은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담은 사탄이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질은 흙이지 영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쳐다보고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진실이 흙임을 깨닫고 그리로 돌이키는 것이 다름 아닌 회개고 구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히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사람의 조상-주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