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복음이란 무엇인가?

올더스조에 2016. 1. 4. 22:50

복음이란 무엇인가?

 

1. 서 언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복음을 가져왔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복된 소식을 가져온 사람을 유대인들은 왜 죽였을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보기에도 좋은 일만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어리석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훨씬 종교적이고 훨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심지어 성경을 거의 다 외우다시피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란 우리가 흔히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복된 소식이 아니고 다른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 당시 사람들은 알아듣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니 전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2. 복음은 창세 전에 정하신 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었음

지금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이것을 믿으면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다. 이렇게들 간단히 말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6~9)

여기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누구도 예수님을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 마저도 일반 사람들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5) 묻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실망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각자 자기 일터로 돌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쓰임받고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였습니다.

 

3. 그렇다면 왜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요8:23) 예수님은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셔서 사역의 첫마디가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왕국을 전파하셨다면 이 세상 사람들도 다 알아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 왕국을 전파하지 않고 하늘의 왕국을 전파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동물의 왕국, 식물의 왕국 그러는데 그 왕국은 그 생명입니다. 예를 들어 동물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동물의 왕국의 일원이 되고 식물이 되면 식물의 왕국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나면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가지면 사람의 왕국이 되고 개의 생명을 가지면 개의 왕국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명이 그 왕국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왕국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하늘의 생명을 가진 분으로 우리와는 다른 생명을 가진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은 하늘에 속한 생명을 가지고 하늘의 왕국을 누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왕국을 어떤 장소적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왕국은 그런개념이 아니고 그 생명이 그 왕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그들이 이르기를 여기를 보라! 혹은 저기를 보라! 하지도 못하리니, 보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지구상에 있는 그 누구도 예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 이해할 수 없었고 예수님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 밖의 세계를 알래야 알 수가 없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였던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한 이후에야 그때 하신 말씀을 알아듣고 성경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나 석가모니의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심오하지만 그렇다고 이해 못할 말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어려운 말도 아닌데 알쏭달쏭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복음을 받아드리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종종 설교자들 중에 당시 예수님을 핍박하던 유대인들과 로마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 당시에 그 위치에 있었다면 오히려 앞장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칠 수 밖에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기록에도 아무도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요 1:10) 만약에 그 당시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예수님은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그 사람과 같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3:10)라는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넘어짐으로 인해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복음을 받아 드리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제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11:12a)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던’(고전:9) 그 복음을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날 복음을 알고 전한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눈으로 보아도 볼 수 없었고 귀로 들어도 들을 수 없었고 마음으로 깨달아 알 수 없던 내용을 전하는 것이기에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하늘의 왕국을 세상의 관점인 선하냐 악하냐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제3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가정과 같이 태어나서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세계입니다.(3:15) 가족은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라는 생명의 관계 하에 있습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그분의 아들의 위치에 있는 것을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 계신다면 의()라는 개념은 없는 것입니다. 현 세상에서 말하는 의()와는 개념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가출을 해서 다른 사람을 아버지로 섬기고 있다면 그는 아버지께 대하여 불의(不義)한 자가 되지만 다시 돌아와 나의 아들이 되면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이런 문제를 초래하게 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창조주 하나님은 각각의 피조물을 아무렇게나 창조한 것이 아니고 목적을 가지고 창조했고 이를 위해 각자에게 격()을 부여하였습니다. 개는 개격으로, 소는 소격으로, 사람은 인격(人格)으로 창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은 각자의 위치를 지켜야만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가 위치를 이탈해서 소가 되겠다고 한다든지, 원숭이가 사람이 되겠다고 한다면 창조세계는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각자의 피조물에게 정해주신 위치()는 고정된 것이고 변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를 이탈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무엇이라고 하면서 아담을 속였을까요.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3; 4~5) 즉 사탄은 사람의 최대 약점인 죽음을 가지고 아담을 유혹한 것입니다. 이것을 먹는 날에 죽지 않는 신이 될 것이라고 속였습니다. 아담은 씨-하나님 앞에서 흙-사람의 위치로 창조되었지만 흙에 불과한 사람이 씨가 되고 싶어 사탄을 택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네가 어디 있느냐’(3:9) 하시면서 위치를 물으셨고 결국 네가 땅에서 취하여 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 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사람이 신()-씨가 될 수 있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지만 사람의 본질은 흙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위치를 이탈한 인류가 추구하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을 목표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을 목표로 각 분야에서 신이 되기 위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죄란 사람이 사람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데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씨가 뿌려져야 하는데 사탄의 씨가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하나님께서 씨를 뿌려야 하는데 씨를 뿌릴 땅-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문제고 하나님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흙-사람에게 마귀의 씨가 뿌려지면 마귀의 자식이 되고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면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요일3:10)

 

6. 예수님은 잃어버린 인간의 위치를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회복하기 위해서 정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와서 사탄과의 전쟁을 통해 아담이 잃어버린 인격을 되찾아 와야 할 중차대한 임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 위치에 계신 분이라면 아담 안에 있는 인류는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입니다.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신과 같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향하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요14:6) 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란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거와 같은등 어떤 객관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지 않은 정상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주관화되면 진실이 되는 것인데 바로 예수님과 같은 진실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요일5:20)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신도 아니면서 신인척하는 거짓아래 있는 사람이고 예수님만이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복음이란 거짓의 세계에서 진실의 세계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신은 천사를 말하는데 하나님께 대하여 종의 위치에 있는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들의 위치에서 생명의 세계에 계신 분이라면 아담 안에 있는 인류는 아들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종의 위치로 이탈한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하에 있는 생명의 세계인 하나님의 왕국을 말하고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종의 위치, 곧 선과 악이라는 율법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으니 당연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7. 그러면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었을까요?

성경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적용한 죄목은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였습니다. 통상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죄를 대속했다는 것인데 역으로 아담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 어떻게 안식일을 어긴 것이고 신성모독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1:31) 하시면서 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매우 만족 하시고 안식하셨는데 아담은 자기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위치를 이탈하여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창조자를 모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다고 하는데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나를 왜 이렇게 밖에 만들지 못했습니까?’ 라고 항의하고 불만을 가진 겁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보면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의 죄 값은 동일하게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31:14, 24:6) 그러므로 성경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의 영적 의미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관된 한 목표를 가지고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에 영이 생명이고 하나님의 목표는 영에 있습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게 하며’(6:63) 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책으로 성경 말씀은 표면과 이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표면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이면은 영원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현대에 와서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이면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씀의 표면만 알고 이면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유대인들은 성경말씀을 어긴 예수님을 보고 참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위치를 이탈하자 그들에게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유대인들의 개념 안에는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들의 위치에 있는 생명의 세계에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율법의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당시 율법은 조선시대의 유교이념과 같은 것이고 북한의 주체사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질서인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죽음으로 내 몰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3:6)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의미는 구약-옛 언약과 신약-새 언약을 가장 잘 대별해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옛 언약, 즉 율법은 완벽하지만 생명이 없는 글자의 표면만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졌던 성경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는 역효과를 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도 성경에 대해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5:39)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생명나무의 열매, 어린양, 만나, 성전, 제물들, 절기들, 반석 등 여러 주제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표면적인 글자의 사역으로 인해 성경이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데도 예수님을 몰라보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표면적인 말씀만 지킨다면 이것은 율법과 같이 글자의 사역으로 죽이는 사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유대인들과는 반대로 글자의 사역이 아닌 영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가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6:51) 라고 영적인 말씀을 하시자 이 말을 표면적으로 받아드린 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다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6:52) 하였고 제자들도 마저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리요?’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하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8:7) 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모두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8:11) 하시면서 그녀를 살리셨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간음한 자는 죽여야 합니다.(20:10) 그러나 성경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죽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보다는 사람이 우선입니다. 지금도 어떤 종교에서는 자기들의 경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성경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도 생명이 없는 글자대로 하면 죽이는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3:20) 왜냐하면 율법은 기계적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사람에게는 적용하면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마저도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로 정죄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는 결정적 흠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3:21)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말씀을 기계적으로 잘 지켰지만 속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과 한 덩어리, 곧 말씀이 인격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은 말씀과 사람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지어다!’(23:29) 하신 것입니다.

 

8.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류는 생명의 세계에 있어야 하는데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모두 아담의 후손이 되었고 모두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3:10) 심지어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마저도 율법에 의해 심판받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기계적이다 보니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까지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율법에 의해 심판받는 마지막 아담이 되게 하셨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율법을 끝 마치게 하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10:4)

하나님은 인류에게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을 만들려고 했으나 죄 없으신 예수님 마저도 율법에 의해 심판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그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100점 짜리 예수님도 심판받고 죽으셨는데 하물며 그 이하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3:20) 물론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심판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살리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으로는 어떤 육체도 심판의 대상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이제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율법 외에 다른 대책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3:21)

율법 밖에 있는 의, 곧 하나님께서 내 놓은 새로운 대책은 우리의 옛 사람으로는 안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태어나 다른 세계로 옮겨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세계를 끝내려면 율법에 의해 죽은 다음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다른 세계로 옮겨오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라.’(6:8) 이를 통해 율법이 지배하는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위치를 옮겨 온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8:2)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합니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나니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6:14)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산 사람들은 율법 자구의 낡은 세계 안에 있지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세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붙들던 것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구출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 글자의 낡은 것 안에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7:6)

성경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합니다.(1:14) 아담 안에 있는 인류는 말씀과 육신이 분리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가 되신 분이라 것입니다. 말씀이 인격이 되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우리도 예수님 한 사람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이 되어 우리도 그분의 후손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던 사람에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온 예수님과 같은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사람의 위치에서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로 회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사망의 세계에 있던 우리가 영의 생명의 세계로 위치를 옮긴 겁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방법에 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6:5)

 

9. 생명의 연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어떻게 비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인 예수님의 후손이 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육적인 우리는 육적인 후손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으나 영적인 후손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영적인 계보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생명으로 실재고 눈에 보이는 것은 형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tv를 보면 영상은 실재가 아니고 영상이 있기 전에 영상을 나오게 하는 보이지 않는 전파가 실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상이 tv화면에 나오려면 전파를 보내는 곳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물은 다 이런 원리로 구성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기의 형상은 전등입니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려면 전기의 근원인 발전소와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듯 생명은 연결되면 살고 끊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생명도 보이지 않지만 그 생명에 우리의 세포가 연결되어 있으면 살고 끊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 기능을 다하려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연결자, 곧 중재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사람에게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생명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하나님과 흙-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큽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줄 수는 없고 반드시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생명이 만드는 것이라면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든다는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 생명은 내 아들에게만 있듯이 하나님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에게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능을 주셨사오니 이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그가 영원한 생명을 주게 하려 하심이니이다.’(17:2)

예수님은 우리의 죄, 곧 잃어버린 사람의 위치를 회복하시기 위해서도 오셨지만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연결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도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단지 흙의 위치를 지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씨-생명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다시 태어나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려면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생명의 연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한 중재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10. 생명은 죽음 안에서 연결(연합)이 됨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생명의 연결자인데 어느 지점에서 연결이 되느냐 하면 십자가라는 죽음 안에서 연결이 되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하나님과 육-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크기 때문에 저절로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름과 물도 섞이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이 어찌 그냥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기름과 물도 섞이려면 중화제 있어야 하듯이 하나님과 사람도 하나가 되려면 중재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중재자의 죽음 안에서만 오직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도 죽음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흙과 흙도 저절로 한 덩어리로 연합이 안됩니다. 그런데 흙과 흙을 물로 빚어서 불로 태우면, 즉 죽으면 돌로 변화되어 한 덩어리로 연합이 됩니다. 쇠와 쇠도 저절로는 연결이 안됩니다. 용광로 안에 들어가 죽으면 한 덩어리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11.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흙-번제헌물로 위치로 창조됨

그러므로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죽음이 필요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될 수 밖에 없었고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아들로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진 것입니다. 이 연합의 자리가 십자가-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세상으로부터 나와 십자가로 가셨고 하나님으로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와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이 자리가 사람과 하나님이 죽음 안에서 하나되는 자리입니다. 곧 십자가란 사람과 하나님이 생명의 연합이 되는 지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영적 의미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일으로 하신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에 십자가-죽음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께서 정한 생명의 노선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희생물과 헌물이 있습니다.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심판의 의미가 있는 강제적인 제물이라면 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자발적인 드리는 제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아담의 죄를 대속을 위한 희생물의 성격도 있지만 본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헌물로서의 성격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물이 추가된 것입니다. 공통점은 둘 다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만 죄가 없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생명의 연결자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 대한 경륜의 과정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입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을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하려 함이라.’(고후5:4)

위 말씀은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 문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해결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죽는다면 예수님의 대속사역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것은 이 육신을 벗어버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반드시 필수적인 과정이며, 이 과정이 끝나면 새로운 영적인 몸을 입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죽을 몸이 생명-하나님께 헌물로 드려져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면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하고 사탄의 씨가 뿌려지면 사탄의 아들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 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24:15)

 

12. 이 사람을 보라.(19:5)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현재 타락한 인류는 사탄의 예표인 불 뱀에게 물려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하자 불 뱀이 나와 이스라엘 백성을 물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를 위해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 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21:8)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리라.’(21:9)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용하여 예수님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로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3:14)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장대 위에 있는 놋 뱀은 죄는 없지만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면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창세기의 아담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사탄을 택한 아담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신과 같은 비정상적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하지 신이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과 같은 사람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유사이래 자타가 인정하는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타락한 아담이 소망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였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죽은 자를 살렸던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예수님이 신(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하니까 신인지 사람인지를 테스트하기 위한 마지막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도 평범하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실망한 나머지 모두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의 자기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인간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끝난 자리였습니다.

사탄은 십자가에서도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 하면서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생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거기서 죽지 않았다면 사람이 신이 된다는 사탄의 말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절대 죽지 아니하리라.’ (3:4) 라는  사탄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예수님은 인생의 진실로써 거짓을 이긴 것입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3:19)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확증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님에게는 신과 같았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흙-사람의 위치만 있었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렸던 인격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의 의미는 신과 같은 사람인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면 사탄의 말이 맞는 것입니다. 아담 이래 인간은 혹시 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예수님같은 분도 죽었다는 것은 누구도 다 예외없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 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이 완전하게 확증되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여 사탄의 거짓말에 속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담담히 받아드림으로 사람의 운명인 죽음이라는 진실을 통해 거짓으로부터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의 승리, 진정한 인간승리로 성경이 말하는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이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게하리라.’(2:7)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자에게 씨-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매달린 참사람인 예수님을 쳐다보고 인간이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인간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동일시하는 것이 다름 아닌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쳐다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바로 비정상적인 사람의 위치에서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로 전환되는 것이 다름 아닌 구원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옛적에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고 인생이 죽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만이 참사람의 죽음으로 인정되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 있는 인류는 신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격에 만족하지 않고 인생으로 지어진 것을 모두 원망하면서 죽었기 때문에, 곧 창조자를 원망하였기에 참사람의 죽음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생이라는 운명에 대해 누구에게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마지막 순간에도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23:46) 하시면서 자신의 영마저도 아버지께 맡기며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하는 참사람인 이 사람을 쳐다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담을 대표하는 빌라도는 십자가 앞에 서신 예수님을 향하여 이 사람을 보라!’(19:5)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 사람을 보고 인생은 흙이고 숨이 코에 붙은 피조물이라는 존재적 진실을 깨닫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과 내가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즉 내가 흙의 위치로 회복되면 비로소 하나님께서 씨-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누구든지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되 아들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2:23)

그러므로 부활생명, 곧 새사람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다른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3:10)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그리고 장차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만물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