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빌라도의 4가지 질문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께 한 4가지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단 한 글자도 헛되이 기록된 것이 없듯이 이 또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 계시를 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아담 안에 있는 인류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사실 빌라도는 나를 대표하고 있으며 이 질문은 아담 안에 있는 인류의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한 4가지 말은 아담 안에 있는 인류를 대표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4가지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네가 왕이냐?(요18:37) ②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 ③ 네가 어디서 왔느냐?(요19:9) ④ 이 사람을 보라!(요19:5), 너희 왕을 보라!(요19:14) 하나님께서는 절묘하게 이 4가지 질문을 빌라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4가지의 말의 의미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1. 네가 왕이냐?(요18:37)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곧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하노라.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요18:37)
빌라도의 첫 번째 질문은 ‘네가 왕이냐?’였고 예수님은 ‘그렇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담은 본디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로 창조되었습니다.(눅3:38)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니까 사람은 세자로 창조되었고 왕이 될 위치에 있던 자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이어받은 자로 아버지의 상속자입니다. 상속자란 기름부음 받은 자란 의미고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대언자, 제사장, 왕의 3중 직분을 위임받았습니다. 먼저 존재적인 생존을 위해서 대언자로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그리고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과 아래로는 왕으로서, 곧 만유의 머리로서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는 직분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창3:4~5) 라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습니다. 즉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왕이란 세상에서의 왕의 통치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왕이란 창세기의 요셉같이 생명을 분배하는 사역자입니다. 요셉은 이집트 총리로서 가뭄이 들었을 때 미리 양식을 비축하였다가 백성들에게 양식을 분배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재자는 예수님이라면 사람은 본디 하나님과 만유 사이의 중재자로 하나님의 성품을 만유에게 분배하는 왕의 직분을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피조물들도 사람이 회복되어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롬8:19) 예수님께서 여기서 자신을 왕이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하는 사역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네가 왕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렇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초림 때는 대언자로 오셨고 재림 때는 왕으로 오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과의 위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부여한 위임을 끝까지 지킴으로 승리하셨고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겼던 3중 직분을 완전히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의미를 모르는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우리 인간의 참된 왕이 누구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류가 그토록 기다려오던 참된 왕이 앞에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록 빌라도가 이 말의 의미를 모르고 했더라도 ‘네가 왕이냐?’는 이 질문은 왕의 직분을 잃어버린 인류에게는 영원한 질문인 것입니다.
2.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그가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로 나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노라.(요18:38)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은 ‘진리가 무엇이냐?’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 회개라는 의미가 세상이 말하는 의미와 다르듯이 진리라는 의미도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진리냐, 비진리냐를 따지지만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참사람이 누구냐? 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하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요14:6)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습니다.(창3:5~6) 아담 안에 있는 인류는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신들과 같은 사람들로서 자신들이 참 사람인 줄 알고 있지만 위치를 이탈하여 속이는 자 아래서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지구상에는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아담 안에 있는 인류는 가짜 사람이고 예수님은 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치를 이탈한 인류는 진리가 무엇이냐? 즉 참사람이 누구냐?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을 이탈한 빌라도는 자기 앞에 진리되신 예수님을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앞에 두고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니 얼마나 황당한 질문입니까? 그런데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진리되신 예수님께 묻고는 예수님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가까운데 있습니다. 진리를 떠난 인간은 진리가 먼데 있는 줄 알고 찾지만 진리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믿음에서 난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나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에서부터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깊음 속으로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나니 (이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죽은 자들로부터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느니라, 하였으니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6~8)
3. 네가 어디서 왔느냐?(요19:9)
다시 재판정으로 들어가 예수님께 이르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니.(요19:9)
빌라도의 세 번째 질문은 ‘네가 어디서 왔느냐?’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라고 하시며 인간의 존재적 위치를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어디 있는 줄 몰라서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간의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니고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고 각 피조물에게 격을 부여하셨습니다. 개는 개격, 소는 소격, 사람은 인격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피조물에게는 이 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개가 소가 되겠다고 하던지, 사람이 신이 되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목적에 혼란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본디 천사였으나 하나님이 되겠다고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자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습니다. 노름꾼은 또 다른 노름꾼을 만들 듯이 이탈자는 또 다른 이탈자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탈자인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사람의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위치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이탈자인 빌라도가 아이러니하게도 네가 어디서 왔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둘이 있는 사람이 눈이 하나 있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면 비정상으로 취급받듯이 빌라도의 눈에도 예수님은 다르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대답을 한다 해도 빌라도가 알아듣기 만무하기에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사람도 아니고 신과 같은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은 정위치에 계신 참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위치를 이탈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라는 질문하셨는데 이 질문은 지금 아담 안에 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질문입니다.
4. 이 사람을 보라!(요19:5), 너희 왕을 보라!(요19:14)
그때에 예수님께서 가시나무로 엮은 관을 쓰고 자주색 긴 옷을 걸치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보라! 하니라.(요19:5)
그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여섯 시쯤이더라. 그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왕을 보라! 하거늘.(요19:14)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현재 타락한 인류는 사탄의 예표인 불 뱀에게 물려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하자 불 뱀이 나와 이스라엘 백성을 물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를 위해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 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민21:8)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리라.’(민21:9)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용하여 예수님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로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요3:14)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장대 위에 있는 놋 뱀은 죄는 없지만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는 ‘이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라는 법리적 혜택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본질적 의미는 이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면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창세기의 아담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탄의 천사에 비해 인간이 최대 약점인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아담을 유혹하였고 아담은 여기에 속아 넘어 갔습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 있는 인류의 모든 소망은 신(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신과 같은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신과 같은 비정상적 사람입니다. 구약에 보면 누룩이 들어 있는 유교병과 누룩없는 무교병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오직 누룩없는 무교병만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담 안에 있는 인류는 신도 아니면서 신 인척 부풀려진 유교병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무교병으로 만들었지 유교병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하지 신이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과 같은 사람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신과 같은 사람이기에 아담을 대신해서 예수님은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심판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유사이래 자타가 인정하는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타락한 아담이 소망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였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죽은 자를 살렸던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예수님이 신(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하니까 신인지 사람인지를 테스트하기 위한 마지막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도 평범하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실망한 나머지 모두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의 자기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인간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끝난 자리였습니다.
사탄은 십자가에서도 예수님으로 하여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 하면서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생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거기서 죽지 않았다면 사람이 신이 된다는 사탄의 말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여기서 사탄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예수님은 인생의 진실로써 거짓을 이긴 것입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창3:19)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확증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님에게는 신과 같았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흙-사람의 위치만 있었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렸던 인격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의 의미는 신과 같은 사람인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면 사탄의 말이 맞는 것입니다. 아담 이래 인간은 혹시 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예수님 같은 분도 죽었다는 것은 누구도 다 예외없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흙인 사람에게 씨(신)가 될 수 있다고 속였지만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희는 본질이 흙이기 때문에 결코 씨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하게 확증되었습니다. 아담은 천사에 비하여 약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여 사탄의 거짓말에 속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담담히 받아드림으로 사람의 운명인 죽음이라는 진실을 통해 거짓으로부터 승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인생의 격에 만족하시고 그 누구에게도 인생으로서 불만을 제기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되신 것에 하나님께 늘 감사했습니다. 예수님도 물론 죽음 앞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하시면서 인생으로서 본능적으로 죽고 싶지 않다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이란 사실 자신의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피조물의 위치에서 자신의 목적과 창조자의 목적이 상충되자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시면서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바로 창조자의 목적에 순응하셨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바로 그 길이 생명의 길이고 영광의 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이것이 바로 인격의 승리, 진정한 인간승리로 성경이 말하는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이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게하리라.’(계2:7)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자에게 씨-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매달린 참사람인 예수님을 쳐다보고 인간이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인간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아담 안에 있는 신과 같은 사람은 가짜 사람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참 사람인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다름 아닌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유사 이래 가장 신과 같았던 예수님도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십자가에 매달리면 결국 다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갈 필요도 없이 죽은 것입니다. 100짜리 인생도 죽음이라는 시험에서 통과 못했는데 99점이하는 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었다는 말보다는 ‘함께’ 죽었다는 말을 대부분 쓰고 있습니다.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그러니까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지 나 혼자 독립만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 창조 곧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부부로서 한 몸으로 함께 창조되고 함께 살았듯이 새 창조 안에서도 남편이신 예수님과 한 몸으로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법리적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유기적으로는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쳐다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바로 비정상적인 사람의 위치에서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로 전환되는 것이 다름 아닌 구원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옛적에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고 인생이 죽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만이 참사람의 죽음으로 인정되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 있는 인류는 신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격에 만족하지 않고 인생으로 지어진 것을 모두 원망하면서 죽었기 때문에, 곧 창조자를 원망하였기에 참 사람의 죽음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생이라는 운명에 대해 누구에게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마지막 순간에도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시면서 자신의 영마저도 아버지께 맡기며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참사람인 이 사람을 쳐다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담을 대표하는 빌라도는 십자가 앞에 서신 예수님을 향하여 ‘이 사람을 보라!’(요19:5)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 사람을 보고 인생은 흙이고 숨이 코에 붙은 피조물이라는 존재적 진실을 깨닫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과 내가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즉 내가 흙의 위치로 회복되면 비로소 하나님께서 씨-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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