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질문과 답변

사람의 육신은 왜 죽어야 하는가?

올더스조에 2015. 3. 9. 00:04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름

사람들은 늘 육신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왜 인생을 천사처럼 만들지 않았을까? 라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궁극적 소원이 있다면 육신이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의 모든 분야를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보면 근원은 천사 숭배다. 종교 안에서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표면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나 천사 숭배가 주를 이룬다. 이것은 사탄이 아담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3:5) 라는 말에 아담이 속았듯이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의 최종소원이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다는 것을 계시해 주고 있다. 사탄이 지금도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은 똑 같다. 이것을 먹는 날에 너희는 죽지 않는 신들이 될 수 있다.’고 속이는 것이다. 이 근원을 모르니 아담이 속았듯이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 (55:8~9)

세상은 선악과를 먹고 율법이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담 안에 있던 우리들은 사망이라는 개념도 단순히 육체적 죽음과 삶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바라 보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세계다. 성경은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를 기록한 책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세계를 기록한 책이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련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제3의 세계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선악의 법리적 세계가 아닌 생명의 유기적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심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의 근원적 속성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들은 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죽음으로 드려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4:24,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니라.’(12:29)

만유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의 생명의 근원은 영인데 영은 불-기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을 불과 기름으로 표현한다. 불은 생명의 근원을 예표한다. 이것은 생물이나 기계나 마찬가지다. 만유가 다 똑 같은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지구는 크게 핵과 맨틀과 지표면이라는 3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부에 핵이라는 용암이 지구를 움직이는 생명의 근원이다. 지구도 하나의 기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서 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용광로에 철이 들어가면 좋은 쇠는 나쁜 쇠든 들어가면 다 녹아버린다. 같은 개념이다. 우리 인생은 흙-육신으로 만들어졌다. 육은 죄가 있든 없든 어차피 육이지 영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는 인생이 흙-육신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불-하나님께 태워져 영적인 몸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됨

헌물(offering)이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 생명의 교통을 위한 것으로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의미다. 어떤 헌물도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지는 것은 없다. 헌물이란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인생들은 육신이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나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은 절대적 관계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처럼 어느 일방이 조금씩 양보하고 해서 되는 관계가 아니다. 세상에서도 사람간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사람과 완전한 관계가 되려면 내가 완전히 죽어야만 그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옛날 내시들이 왕을 모시기 위해 왕궁에 들어갈 때 생명을 거세 하였다. 이것은 내가 죽고 오직 나는 왕을 위해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희생물이 추가된 것이고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사람은 근원적으로 헌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의 원리

우리 인생은 흙-육신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는 단순히 사람이 흙-육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흙-육신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육은 죄가 있든 없든 어차피 육이지 육은 생명이 아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에게서 난 것이 영-생명이다’(3:6) 육은 무엇을 해도 육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적 생명에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생명의 연합의 원리에 대해서는 클라렌스 라킨의 글을 인용해 보자.

자연적으로 생명이 출생한다는 것은 없다. 모든 생명은 앞서 존재한 생명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죽은 돌은 스스로 무기적 상태에서 유기적 상태로 전환될 수 없다. 두 세계 사이에는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유기적 상태 쪽으로 열려 있다. 돌은 스스로 문을 열수 없는 반면 식물은 그 문을 열 수 있다. 식물은 그 뿌리를 흙 속으로 밀어 넣어 돌을 부술 수 있으며 돌의 화학적 요소들을 취하여 식물의 생명으로 전환되게 한다. 이와 같이 식물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도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이 문은 동물의 세계 쪽으로 열려 있다. 식물은 스스로 육이 될 수 없으나 동물은 식물을 먹음으로 식물적 생명을 동물적 생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에도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이 문은 육 쪽에서 열 수가 없다. 영의 세계 쪽으로 문이 열려 있다.’

,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이 되려면 높은 생명 쪽으로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낮은 생명은 죽음을 통해 높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만일 사람만이 특별한 존재라서 창조 시에 죽지 않는 영생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1:20) 라는 말씀이 이 말이다. 단지 만물을 보고 아 하나님은 계시네이것을 알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인생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려면 죽음을 통해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육은 육이지 영-생명이 아니다.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연합되려면 반드시 죽음을 통해 연합되는 것이다. 식물이 동물에게 삼켜져 동물이 되듯이 육-사람은 헌물로서 영-하나님께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고전15: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mortality)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위 말씀도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고린도전서 1554절에서 육신에 대하여 죽을 것(mortal)’ 으로 번역한 영어 mortal 은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죽을 운명(mortal) 이라는 것이다. 사망이 승리 가운데 삼켜진다’(고전15:54) 라는 말씀은 죽을 운명(mortality)인 육신이 하나님-생명에 삼켜진다’(고전후5:4)는 의미다.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죽게 만들었다고 해서 사망이 아니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이 사망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죽을 것(mortality)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것이다.’(고후5:4) 그런데 여기에 죄가 들어왔다. 그래서 어차피 한 번 죽을 운명(mortality)이었던 몸이 사망(death)의 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조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의 조상인 사탄에게 십자가에서 인격으로 승리하였다. 그래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게 함이라’(고후5:4)는 말을 사망이 승리가운데 삼켜지리라’(고전15:54)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 죽지 않을 몸인데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인생이 죽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사람은 어차피 하나님께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항상 동물로 헌물을 드리기 전에 희생물이 드려졌다. 이것은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헌물로 창조되었는데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우선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음식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식물만 주어졌다.(1:29) 그런데 노아의 홍수 이후에 동물성 음식이 추가로 허락되었다.(9:3) 이로 보건데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피흘림이 필요없는 하나님의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21, 2:1~16) 생명의 원리에 따르면 먹는 것과 사람은 하나가 된다. 사람은 육이지만 식물을 먹고 식물-육이 된 것이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사람은 식물적 인간에서 동물적 인간으로 변화된 것이다. 즉 피흘림이 필요한 헌물로 변화된 것이다.

영적으로 사람의 음식과 하나님의 음식은 같다. 율법의 제사의식에서 드리는 사람과  하나님의 예표인 제사장이 드려진 헌물을 함께 먹었다. 그러므로 예표적으로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잠자는 정도의 죽음-피흘림이 필요없는 식물성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2:21) 그런데 죄가 들어와 피흘림이 필요하게 되자 동물의 희생물 이 추가 된 것이다. 이 모든 희생물과 헌물의 총체는 어린양이다. 어린양은 동물이지만 식물만 먹고 산다. 그러므로 어린양으로 예표되는 인격은 본래 식물성 음식헌물이라는 것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인 것이지 유기적인 것이 아니다. 희생물로서 피가 뿌려졌다고 생명의 연합이 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헌물이 불-하나님께 태워짐으로 생명의 연합이 필요한 것이다. 단순히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피만 제단 주위에 뿌리면 된다.(17:11) 그러나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거듭난 것이 아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높은 생명으로부터 이식받아야 하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 희생물은 제단 위에서 불-하나님께 태워짐으로서 번제헌물이 되어 하나님께 삼켜지는 것이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와 갔다가 나와서 백성을 축복하매 주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고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위의 번제헌물과 기름을 사르매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대고 엎드렸더라.’(9:23~24)

열왕기상 18장에서도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희생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왕상18:38~39)

하나님의 불이 핥아갔다는 것은 결국 그 불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는 뜻이다. 삼켜버렸다는 말은 먹었다는 의미로 연합이 됐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거부하면 더 이상 답이 없다.

모든 생물은 잉태할 때 머리가 먼저 생기고 머리로부터 지체들이 나와 완전한 성체로 자란다. 머리로부터 곧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자연적인 출생은 없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낮은 생명인 사람이 높은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내가 스스로 어떻게 변화되서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완전히 죽고 없어진 상태에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연합됨으로서 태어나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결혼이다. 곧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분의 머리되심 아래 한 몸이다. 생명의 연합, 이것은 큰 신비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힘들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큰 신비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5:32)

 

왜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는가?(17:11, 히9:22)

우리는 지금까지 사람이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로서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죄라는 장애물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주는 가르침은 사람은 헌물로서 하나님께 삼켜져 새로 태어나야 하는데 죄라는 방해물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죄를 통상 선악의 도덕적 관념에서 생각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은 밭으로서 하나님의 씨가 심겨져야 하는데 사탄의 씨가 심겨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할 자가 사탄의 아들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알곡과 가라지에 비유하고 있다.(13:24~25) 우리는 알곡이 심겨져야 할 밭인데 가라지가 심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라지 밭을 알곡 밭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세상에서 가라지를 알곡으로 바꾸는 방법은 없다. 기적적인 능력으로도 안되고 지혜로도 안된다. 세상의 종교에서는 이것을 기적적인 능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고, 철학에서는 지혜를 통해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고전1:22) 그러나 성경이 주는 계시는 죽고 다시 사는 방법 외에 없다. 즉 가라지 밭을 갈아 엎고 거기에 알곡을 심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다른 것은 다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태어나게 해야 한다. 사탄의 자식이었던 사람들을 모두 십자가에서 종결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라지가 심겨 있는 밭을 갈아 엎은 것이 심판-십자가 사건이다. 물론 예수님은 죄가 없기에 갈아 엎어질 이유가 없었다. 그분은 알곡 밭이었지만 가라지 밭의 모습으로 갈아 엎어진 것이다. 갈아 엎어져 가라지가 뽑혀진 것이 심판이다. 가라지 밭이 갈아 엎어져 가라지가 뽑혀진 것이 피 흘림의 심판이다. 이것이 희생물로서 피를 뿌린 것이고 예수님의 대속이다. 그렇다고 갈아 엎어진 밭에 알곡을 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갈아 엎어진 밭이 다시 알곡이 뿌려 질 수 있도록 가라지를 모아 불태우고 곱게 정비되는 것이 구속-원위치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헌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원 상태로 회복된 밭에 알곡이 뿌려져 새싹이 나면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생명의 연합의 과정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창세기 217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와 히브리서 922피 흘림이 없은즉 사면이 없느니라.’의 상관관계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담이 창세기 217절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하고 이를 사면받기 위해 피흘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어떻게 육신이 죽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우리 인생들은 죄 때문에 죽는다고 인정하자. 그러면 예수님은 왜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궁여지책을 내세운 말이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분인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죽으셨다라고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해서 죽었다면 우리는 너무 너무 절망이다. 그것은 어느 특별한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우리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구원이 아니다. 예수님에게도 적용되었던 것이 나에게도 적용되어야 보편적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은 어차피 한 번은 죽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217절 말씀은 육신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사망 노선으로 간다는 말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사망노선으로 가고, 생명과를 먹으면 생명의 노선으로 간다는 것이다. 즉 생명의 노선에서 사망노선으로 위치를 이탈한다는 말이다. 두 노선 안에서 표면적으로 보면 죽음-부활이라는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씨를 땅에 뿌리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과정과 똑 같은 것이다. 그러나 두 노선이 표면적으로는 동일하게 보이나 육체적 죽음 후에는 지옥과 천국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17절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의미는 선악과를 먹으면 생명노선-아들의 노선에서 사망노선-종의 노선으로 위치를 이탈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히브리서 922절은  피 흘림이 없으면 사면이 없다라는 의미는 죄인인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죄인의 죄를 대속하려면 죄없는 자의 피가 필요하다.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려면 물에 빠지지 않은 자가 필요한 거와 같다.  죄인인 우리의 피는 아무리 흘려보았자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  죄인을 대속하려면 죄 없는 얘수님의 피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2절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13:8)

계시록 138절에 창세로부터 죽임 당한 어린양이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예수님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했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인생의 죽음을 오직 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보면 분명히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래서 이것을 궁여지책으로 내 놓은 해석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가 인생이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고후5:4)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이라는 말씀은 인격이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죽임을 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린양은 사실 우리 자신의 인격을 상징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내가 동일시 여겨야 하듯이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보고 그 인격을 먹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야 그는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내가 죄가 있어야만 죽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창세로부터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헌물로 창조되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다.(고후5:4)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육신이 죽는 것을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살펴 본 대로 이것도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크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55:8)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55:9)

만약에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이 같았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담이 왜 생명과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헌물로 창조된 것에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로 삼켜짐으로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길이 얼마나 영광스런 길인지 아담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 길을 영광에 참여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더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아직 성령님께서 주어지지 아니하였더라.’(7: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12 23.)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영광이라고 하셨다. 선악과를 먹고 육신이 영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서 위 말씀의 의미는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물로 드려 진 후 생명의 연합을 위한 번제헌물로 드려져야지만 하나님의 씨-성령을 받고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큰 것이다.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였다고 해도 이 깊고도 넓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담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생명의 길-인격을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아담이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과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인생은 죄가 없더라도 그 누구도 생명과를 먹을 인생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평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왜 사탄의 개입을 허락했느냐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탄의 훼방을 처리했으면 지금과 같은 인생들의 불행은 없지 않았겠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사탄의 훼방이 없었다면 인생은 더욱 더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갔을 것이다. 갈급함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위 등 따뜻하고 배부른 상태에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번제헌물이 되겠다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년왕국에서 증명이 된다. 천년왕국에 육신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분명히 죄가 말소된 사람들이다.(3:19)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3:19)

천년왕국 시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죄가 말소된 상태에서 수명은 나무의 날 수와 같다(65:22) 그리고 사탄이 바닥없는 구덩이에 갇혀 있기 때문에 창세기 2장의 아담의 환경보다 더 좋은 상태이다. 즉 무죄한 상태에서 사탄의 방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모래와 같은 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명으로 영접하지 않고 있다가 천년왕국 마지막 때에 사탄이 무저갱에서 잠시 풀려나자 사탄에 동조하여 주님께 반역을 한다.(21:7)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것을 미리 아시고 인생을 하나님의 경륜에 더 많이 참여시키기 위해 사탄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허락하여 인생들로 하여금 절망 가운데 있게 하여 생명의 구원자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하신 것 같다. 사탄이 비록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인생들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인생들에게 명확하게 죄인임을 인식시켜 회개토록 하여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 하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이다.(5:20) 우리는 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판단할 수 없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