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질문과 답변

사형제도에 대한 입장

올더스조에 2023. 5. 30. 18:04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니라.’(9:6)
 
다른 범법은 몰라도 저는 고의로 살인한 자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사형제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96절에서 하나님께서 사형제를 지지하시는 말씀을 하실 때는 율법이 들어오기 전의 말씀입니다. 그후에 율법을 통해 살인(21:12), 유괴(21:16), 수간(22:19), 간음(20:10), 동성애(20:13), 거짓 대언자(13:5), 매춘과 강간(22:24) 등 여러 범죄들에 대해 사형을 명령하였습니다. 성경의 기본적인 법리적 원칙은 일대일 대응개념으로 보응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돈을 천원을 빌렸으면 천원을 갚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개념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우리 마음속에 기록된 양심이 법에 의해 다 알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보면 분명 율법은 폐지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5, 2:14, 7:18)
원수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2:15a)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던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서 못 박으시며’(2:14)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7:18)
그러나 도덕법은 율법이 주어기 전에 우리 양심 안에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법(2:15)으로서 율법이 폐지되었더라도 의식법만이 폐지된 것이고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죠.(13:9)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에 따른 댓가는 반드시 집행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만 해당되고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예수 그리스도도 육체로 오셔서 심판을 받으실 필요가 없는 것이죠. 인과응보는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먼저 나온 개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고 우리의 행위에 따른 보상과 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모두 받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리라.’(14:19)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고후 5:10)
 
그래서 우리가 창조 시부터 우리 안에 기록된 양심의 법에 의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죽을 죄를 지면 자신이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고 신약에 와서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1:32)
 
그들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같은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느니라’(1:32)
 
신약에 와서도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사도들을 속였는데 이것이 결국 하나님을 속이게 되어 심판을 받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보면 이게 죽을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로마서 129절을 보면 속임수마저도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율법과 같이 글자대로 기계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글자대로 하면 어느 누구도 죽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성경도 율법에 의한 사역, 즉 글자의 사역을 죽이는 사역이라고 했습니다.(고후 3:6) 예수님도 글자의 사역으로 인해 사형을 당하셨지요.
 
아무튼 각각의 상황에 맞는 판결을 해야겠지요. 율법에는 살인한 자는 죽이라고 되어 있으나 간접 살인을 하고 간음을 한 다윗도 용서를 받았듯이 말이죠. 모든 법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죠. 그러나 비록 다윗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지만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징계는 이 땅에서 받았습니다.
 
성경의 기본적인 원칙은 사형제를 지지하지만 칼로 무자르듯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상황에 맞게 판사가 판결을 해야 겠지요. 성경, 즉 법의 기본정신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죽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을 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그 여인을 돌로 쳐야 하냐고 물었을 때, 이들이 의도한 것은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이 맞느냐, 아니면 용서하는 것이 맞느냐에는 관심이 없었고, 예수님이 율법대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면 그동안 예수님이 외쳤던 사랑이 없다고 할 것이고, 치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 자로 예수님을 모함하려고 함정을 판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시험하며 이렇게 말한 것은 그분을 고소하려 함이더라.....'(요 8:6)
특히 이들은 여인과 함께 간음한 남자는 데리고 오지도 않았습니다. 법의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것이죠.
성경에서 이 장면의 핵심은 예수님을 함정에 넣어 올가매려고 한 것이었고, 예수님은 여기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고 지혜로운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보여준 사건이었고 모든 사람은 율법아래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 하나로 모든 죄를 주님의 사랑으로 덮어주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한 간음도 용서해야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 여인한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했으니까요.
 
마태, 마가복음은 대속의 주를, 누가복음은 구속의 주를, 요한복음은 생명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깊은 의미는 간음한 여자를 용서해야 된다고 하는 지협적이고 법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자들의 위선을 보여주면서, 율법 아래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생각이 됩니다.(3:20) 특히 간음한 여자는 죄인인 인류를 대표한다고  봅니다. 인류는 원래 하나님의 아내로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을 떠나 다른 남편을 섬기는 간음한 여인이 되었지요, 이 간음한 여인을 정결케하여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는 의롭게 될 자 없으니 율법 밖에 있는 의, 곧 그리스도를 찾아야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3:21)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선하냐 악하냐 이것을 가지고 의를 구했지만 예수님은 율법 안에는 해결책이 없고 율법 밖에서, 곧 제3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의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이 사건 당시 땅에 두 번 글을 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원래 흙은 사람을 예표하고 말씀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고 사람은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사람은 원래 흙으로 만들어진 다음 생명의 숨이 들어가서 첫 번째로 창조(2:7)된 다음, 두 번째로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 지어졌습니다(3:5-7). 이 장면은 거듭남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는  의를 성취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의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네모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창세기 96절의 말씀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다만 모든 것이 기계적일 수 없으니 그 상황에 맞게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성경도 고의가 아닌 부지불식간에 지은 살인은 도피성으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하게 하였듯이요,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