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람은 본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수많은 성경 가르침을 훼손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고귀한 교리인 주님의 대속과 속죄의 진리를 파괴한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도 아니하시고 죄와 상관없는 분이다. 다만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이다.(고후5:21) 만약 아담의 죄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인 죽음이라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수도 없고 또 죽으셔도 안된다.
사람이 본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결코 성경의 대속과 속죄의 진리를 파괴하지 않고 더 풍성하게 한다. 이 진리가 가려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을 단순히 법리적인 측면에서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는 유기적인 것이지 법리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죽지 않는 천사에게는 사형선고를 안내린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육체적 죽음을 통해 거듭나야 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다.(창2:21~23) 이것은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필연적 과정이다. 그래서 흙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죄가 없다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서 이에 대한 대가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단순히 영적인 죽음이 들어왔다는 것은 맞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영적인 죽음이라는 말은 없다. 아담으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은 사람은 흙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들여 열매를 맺어야 할 운명인데 사탄의 씨를 받아들여 사탄의 열매를 맺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흙-사람이 사탄의 씨를 받아들여 육체가 죽고 불의한 자의 부활로 나타나고 최종적으로 둘째 사망이라는 불호수로 가게 되어있는데 이 과정 전체를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단지 육체가 죽는 어느 특정 과정만이 사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오해는 여기서 오는 것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사망의 세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흙-사람이 씨-하나님을 만나도 표면적으로 동일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흙은 어떤 씨를 만나도 열매를 맺으려면 동일한 과정을 겪는 거와 마찬가지다.
이미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죄가 없었다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지만 죄로 인해 피 흘림의 육체적 죽음으로 발전한 것이다. 죄가 있던 없건 죽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 안에서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하나님의 불을 만나면 죄가 있건 없건 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예수님도 우리의 대속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다시 취하기 위해 죽으신다고 하셨다.(요 10:17)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요10:17)
그러면 왜 죄로 인해 피 흘림의 육체적 죽음이 필요한가?
사탄과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하여 사망의 길로 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인생의 위치를 끝까지 지킴으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흙-사람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서 씨-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이다. 흙과 씨가 연합되어 하나님이 최종 목적인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것이다.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세상이 말하는 율법적인 죄가 아니다. 여기서 죄란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야할 흙-사람에게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가 다시 뿌려지려면 그 밭은 갈아 엎어져한다. 이게 십자가의 심판이다. 이것은 법리적인 것이다. 단순히 밭이 갈아엎어졌다고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갈아엎어진 밭에 씨가 들어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통해 씨가 발아하는 것이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15:50) 육신은 어차피 한 번 바꿔져야할 대상이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어차피 죽음을 통해 영적인 몸으로 바꿔져야 할 대상이었다.(창2:21~23, 요10:17) 그런데 이 과정이 싫어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나 결국 사탄에게 속아 사탄에게 사람의 인격과 인권을 빼앗기고 사탄의 밭이 돼서 사탄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빼앗긴 인격과 인권을 되찾아오려면 희생이 따른다. 그래서 피 흘림이 있는 것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분이기에 죄와 상관없는 분이다. 이것을 내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사탄과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피 흘림 없이 승리는 없다.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과 인권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통해 되찾아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교리적이고 법리적으로 대속이라고 하는 것이고 우리의 죄가 되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다. 단순히 예수님이 법리적인면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지 교리적이고 법리적인 아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흙-육체로 오셨다. 이 위치를 피 흘려 죽기까지 지키자 씨-하나님께서 씨를 뿌려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구속을 대속, 곧 대신으로 많이 이해한다. 물론 대속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만일 대신이라면 믿지 않는 자들의 죄도 다 용서 받고 인류 전체가 구원받아야한다. 그런데 왜 믿는 자들만 구원받는가? 성경은 ‘대신’이라는 말 대신 ‘함께’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생명은 대신 할 수 없다. 열매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성경의 일관된 진리는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생명의 길’을 보고 그분 안에서 함께 죽은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신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고 예수님은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신과 같은 능력은 모두 사라지고 인생의 존재적 위치만 남았다. 인생은 무교병이고 흙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흙이지 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생의 정체성이 폭로된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란 거짓이 폭로되고 진실이 드러난 자리다. 아담 안에서 신이 되고 싶은 모든 인류의 소망이 끝난 자리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너희들의 주제를 알라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흙이고 벌거숭이라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씨-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피조물에게는 생명의 과정이 있다. 예를 들어 땅은 씨를 받아들여 싹을 내고 열매를 산출한다. 바로 이 정상적인 과정을 예수님이 최초로 걸어가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류는 사망의 길 안에 있었고. 가만히 있으면 사망의 열매를 맺는다. 이런 인생에게 예수님께서 생명의 열매를 맺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면 사망 아래 있는 인생은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흙으로서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야 할 밭인데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어 갈아 엎어져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죄에 대한 대가로 갈아엎어지는 것이고 십자가의 고난이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인생은 씨가 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는 단순히 희생물이라는 부정적인 상황만 주로 인식하고 헌물이라는 긍정적 상황은 간과하고 있다. 희생물은 법리적이나 헌물은 생명의 교통을 위한 유기적인 것이다. 내가 흙이 되지 않으면 씨-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자리가 인생의 원래의 위치임을 발견하고 그 자리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시인하면 나는 예수님과 동일시된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지만 흙이라는 인생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믿으면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되어 죽은 자이고 예수님이 살아나심 안에서 나도 살아난 자이다.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헌물로 창조되어 육체가 한번 죽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진리다. 이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 되심을 전혀 훼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의 육체가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죄 때문에 죽음이 왔다고 하는 잘못된 교리가 성경전체에서 계시하고 있는 풍성한 은혜를 가리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위치는 변개할 수 없는 위치다. 사람은 흙이고 재라는 것이다.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씨-생명이 뿌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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