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졌으므로 다시는(no more)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는(no more)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는 줄 우리가 아노라. 그분께서는 죽는 것을 통해 친히 죄에 대하여 단 한번 죽으셨으나 살아계심을 통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시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참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위하여 산 자로 여길 지어다.’(롬6:9~11) 위 말씀에서 사망이 다시는 그리스도를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는데 ‘사망’이 그리스도를 한 번 죽게 한 것은 그분의 몸이다. 죄 때문에 예수님의 몸이 죽은 것 같이 우리도 죄 때문에 우리의 몸이 죽은 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죽을 몸으로 창조되었다면 몸은 죄의 삯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성경은 몸이 죽는 이유가 죄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말씀도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구별하지 못한 오해이다. 몸이 죄 때문에 죽는 것이라면 왜 죄인들도 부활하는가? 죄인들은 영원히 부활하지 말고 무덤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 안에서 죽음을 ‘죽지 않고 잔다’라고 표현하셨고 성경은 일관되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부정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생명의 길이건 사망의 길이건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 표면적으로 보면 동일한 육체적 죽음이지만 이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천당과 지옥의 차이다.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동일하게 보면 안되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는 아담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없는 번제헌물로서 죽음이 필요했다.(창2:21~23) 죄가 들어옴으로서 이에 대한 희생물로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법리적인 것이고 헌물은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유기적인 것이다. 수학적으로 보면 희생물과 헌물로서 두 번 죽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태우는 ‘태우는 희생물 곧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레1:9) 이라고 하면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다.(레1:9) 단순히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라면 희생물로서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 단지 예수님이 희생물로 죽으셨다면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없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헌물로서 제단 위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야 한다. 법리적인 희생물 안에 유기적인 헌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희생물과 헌물은 같이 따라 다닌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물로서 단 한번 죽으셨다. 그런데 단순히 법리적인 죄의 대가로서 예수님이 죽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가?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속을 위한 희생물인 동시에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졌기에 부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은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흙-사람에게 하나님의 씨가 들어가면 하나님의 아들로 열매를 맺고 사탄의 씨가 들어가면 사탄의 아들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담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면 아담은 생명의 길을 이탈하여 사망의 길로 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단순히 육신의 삶과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길 안에서는 모든 과정이 생명이고, 사망의 길 안에서는 모든 과정이 사망이라는 것이다. 사망노선 안에서는 육체가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고 부활해도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노선 안에서는 육체가 죽어도 생명이고 모든 과정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인생이라는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서 생명의 노선 안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아담이 빼앗긴 생명노선을 되찾아 오신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는 공짜가 없다. 그래서 피 흘림의 대가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피 흘림을 통해 사탄에게 승리하고 생명노선을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생명노선, 곧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심으로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하나님의 씨를 통해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전적으로 예수님은 유기적인 생명 노선 안에서 하나님의 씨를 통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이 과정 안에서 단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죽음을 법리적이고 교리적으로 표현한 것이 대속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신한 희생물만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번제헌물이 되셨다. 또 죽기까지 생명노선을 지킴으로서 사탄에게 승리하셨다. 십자가는 만유를 포함한 사건이다. 부정적인 모든 것과 긍정적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데 어떻게 죽으실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는 분인데 죄를 속하기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서 죽음을 허락했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으셨다. 자연사가 아니고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 그런데 그분이 죽을 수 없는 분인데 죽으신 것이 아니다. 죽을 수 있으니까 죽으신 것이다.
만일 그분이 그런 식으로 죽으셨다면 우리와 그분은 상관없는 분이다. 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분이고 나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분에게 적용되었던 것이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복음이지 만일 예수님이 죽을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특별하게 죽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절망이고 복음이 아니다.
1. ‘죄 때문에 예수님의 몸이 죽은 것 같이 우리도 죄 때문에 우리의 몸이 죽는 것이다. ’ 라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지 그분이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죄가 없음에도 죽으셨다. 그런데 왜 죽으셨는가? 죄가 없음에도 죽을 수 있으니까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죄가 없음에도 죽을 수 있는 몸이니까 죽으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특별히 전능하신 방법으로 그분에게 죽음을 허락한 것이 아니다. 이런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죄란 개념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할 있다. 죄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 곧 위치 이탈을 죄라고 한다. 인격에서 이탈하면 죄고 인격을 지키면 생명이다. 아담은 흙-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흙-사람의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분이 살아나신 것은 생명의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 의로운 자의 첫 부활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물이 되신 것이지 그분 자신이 죄가 있어서,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몸이 죽으셨다면 이것은 큰 오류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지만 인류의 죄를 위해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그분의 몸은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이 죄인이 아님에도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신 것이지 몸 자체가 죄인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신 것이다. 죄가 없으면 육신이 안 죽다는 논리는 말도 안 되는 논리다. 흙-육신은 원래부터 생명이 없다.
그런데 위 질문에서처럼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또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죄가 해결이 안되어 지옥으로 가야한다. 구원받은 신자가 죄가 있기 때문에 몸이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똑 같이 피를 흘려 죽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래야만 죄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리는 맞지 않다. 우리의 죄에 대한 희생물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하다. 더욱이 우리 몸은 죄를 위한 희생물이 될 수 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구속받았다. 구속이란 원래의 위치를 말한다. 우리의 원래의 위치는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물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이 되기 위해 죽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7~18절에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고전15:17~18) 말씀이 있다. 이 말씀대로라면 의로운 자의 부활이건 불의한 자의 부활이건 부활한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 알 것이다. 이 말씀은 의로운 자의 죽음과 부활, 곧 생명노선 안에 있는 자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자의 부활과 불의한 자의 부활이 있듯이 의로운 자의 죽음과 불의한 자의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원래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수학적으로 두 번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법리적인 희생물이라는 단 한 번의 죽음 안에 유기적인 헌물도 포함시킴으로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하는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한 희생물은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났다. 그런데 우리 몸이 죄로 인해 또 죽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완성이 안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 몸이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물이 되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고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이 되기 위해 죽는 것이다.
2.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죽을 몸으로 창조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죽음은 죄의 삯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속을 법리적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오는 오해이다. 그리고 사람의 몸이 원래부터 죽게 되었다고 해서 죄에 따른 대가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죄에는 당연히 심판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밭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사탄의 밭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밭이 되려면 사탄의 밭은 갈아엎어져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는 밭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게 십자가의 구속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원래의 위치로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밭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열매를 맺는 것이 부활이다. 그러나 흙은 본질적으로 생명이 없다. 단지 씨와 연합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밭에 씨가 들어가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생명을 발아할 수 있다. 흙이 하나님의 최종목표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흙에서 돌로, 최종적으로 돌에서 보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흙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보석으로 바꾸어져야 영원하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번제단이다. 번제단에서 헌물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진다. 사람과 하나님의 생명의 연합의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그래서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죄가 있기 때문에 번제헌물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희생물이 필요하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이 필요하다. 성경이 주는 계시는 사람이 죄가 없다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다.(창 2:21~23)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서 이에 대한 대가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레17:11) 사람이 죄가 없다면 희생물이 필요없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서 희생물이 추가 된 것이다. 그런데 희생물이나 헌물이나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은 매 한 가지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희생물을 태움으로서 번제헌물이 되게 한 것이다. 희생물 안에 헌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레1:9, 17) 이 희생물과 헌물의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다.(히10:5)
번제단 곧 십자가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불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피조물은 없기 때문이다. 용광로에는 좋은 쇠든 버려질 쇠든 어떠한 쇠도 한 목표를 위해 녹여진다. 십자가라는 불랙홀 안에서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한 목표를 위해 녹여지는 것이다. 희생물은 부정적인 것이고 헌물은 긍정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서 번제단에서 희생물도 태워져야 하고, 헌물도 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인생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씨를 받아 열매가 되어야할 존재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물이 되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이지 최종목표가 아니다. 그러므로 헌물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 녹여져 재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흙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씨가 들어오면 살아 있는 돌이 되고(벧전2:5)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최종적으로 보석이 된다고 한다.(계21:11) 이러한 물리적 변화의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위한 우리의 생명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 자신, 곧 생명과 생명의 원리를 계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의 원리를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지 법리적인 혜택정도로만 생각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부정적인 모든 것과 긍정적인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 12:9) 하나님과 우리는 번제단에서 만난다. 우리가 죄가 있기 때문에 번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레17:11) 그런데 우리는 죄가 없더라도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헌물로서 번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불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소멸되지 않는가?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다 소멸된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죄가 없으면 영생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구원을 단지 법리적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나온 발상이다. 그러나 누차 말하지만 무죄는 영생이 아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일 뿐이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육신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기록된 곳이 없고 죄로 인해 사망이 왔다고 기록한다. 사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사탄이 지배하는 체계를 말한다. 즉 사망이란 사탄이 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자신의 열매를 추수하는 과정 안에 있는 세계를 말한다. 지금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사망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생명의 세계로 옮겨 온 것이다. 육체가 죽더라도 산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사망이 아니고 생명의 길 안에서 당연한 과정이다. 씨를 땅에 뿌리면 씨도 죽어야 하고 땅도 죽어야 하는 당연한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아담은 만물에게 적용되는 이 우주적 생명의 원리를 거부하고 신이 되려고 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이라면 죽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영으로 창조되지 않고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흙은 완성품이 아니다. 최종 완성품인 영적인 몸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흙은 자체 씨가 있는 것이 아니고 씨와 한 몸이 돼서 열매를 맺어야 할 운명이다. 이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이 연합은 죽음을 통해 연결된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흙-사람이라는 인격을 이탈하여 하나님의 씨와 연합되지 않고 사탄의 씨와 연합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피 흘려 죽기까지 인격을 지킴으로서 농부이신 하나님의 첫 열매가 되셨다.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 사탄에 대한 승리이고 생명의 길이다. 이 과정을 보면 어떤 법리적인 요소도 없다.
그런데 이 생명의 과정 안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죽음을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는 것이다.(고전1:24)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한 것인데 어떻게 나에게 구원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의 영이고 우리는 형상이다. 영이 실재라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이 실재가 아니고 영이 실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예수님이 대신한 것이지만 영으로 내가 예수님과 동일시하면 나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산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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