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또 몸의 죽음은 인간의 죄와 상관없고 창조의 산물이라면 왜 죄인들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씻겨져야 할까?(히10:19, 22)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인들의 악한 마음에도 뿌려졌고 죄로 더러워진 몸에도 뿌려진 것이다.(히10: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으로 얻었나니(히10:19)
우리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모든 것이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의 죽음이 우리의 죄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한 죽음은 우리의 죄에 대한 법리적 대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죄 용서가 아니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죄 이전에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고 어떤 헌물도 산채로 드려지는 것은 없다.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야 했다.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는 것이다. 죄로 인해 수학적으로 희생물로서 한 번, 헌물로서 한번 두 번 죽어야 했다. 그러나 희생물과 헌물이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피 흘림을 통한 희생물이 법리적이고 외부적인 것이라면 헌물로 인한 생명의 연합은 유기적인 것이다. 유기적으로 생명의 연합을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법리적인 희생물에만 국한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위 질문처럼 죄인들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 없다. 죄인의 몸은 죽어야 하는 것이지 씻겨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들의 용서, 즉 구속이 중심적 요소다.(골1:14) 히브리서 10장 19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신자의 몸을 씻는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죽음을 통해 거듭나서 새롭고도 산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2절에서도 몸에 피를 뿌린다는 말은 없다. 히브리서 10장 22절의 ‘마음에 뿌림을 받아’에서 마음은 영적인 것이지 육신이 아니다. 또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생명의 연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할 때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구원은 받은 신자가 말씀을 통해 성화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신자들이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인정함으로서 점점 더 성화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 된 육신의 몸을 씻는다면 이것은 큰 오류다. 왜냐하면 돌은 아무리 씻어도 돌인 것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란 본질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씻어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들(sins)은 내 몸을 떠나 외부적으로 이미 행하여 진 것이므로 씻는 것이 아니고 피 값으로 용서받아야 하고 죄(sin)된 육신은 본질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씻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죽음을 통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몸은 무죄한 몸이 있고 죄 된 몸이 있다. 처음 아담은 무죄한 육체였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무죄한 육체는 영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위치다. 즉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밭이어야만 씨-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죄 된 육체란 무엇인가? 밭인 사람에게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잡초가 무성한 밭에 씨를 뿌리려면 갈아엎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고 구속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공로다. 나는 사탄의 밭이 된 자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갈아엎어져야 할 밭이라고 인정하면 전적으로 나는 구속받은 것이다.(골1:14) 구속이란 씨-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지 구원이 아니다. 구속받아 죄가 없더라도 씨와 흙이 연합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한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다. 구속받은 위치는 창세기 2장 7절의 아담의 위치다. 그 당시 아담은 죄가 없었다. 그러나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죽고 다시 태어나야 했다.(창2:21~23) 아담은 완성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영생이 있었다고 하면 그는 완성품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진 재료는 흙으로서 생명이 아니다. 죄가 있으나 없으나 본질은 흙으로서 똑 같다. 살과 피는 영적인 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자들이나 사탄의 씨가 들어와 사탄의 자식이 된 자들이나 모두 육신은 죽어야 한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 온자는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가 들어온 자는 불의한 자의 부활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생명의 길, 사망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를 보면 흙에 씨가 뿌려지면 흙은 씨와 한 몸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흙은 자체로 생명이 없고 씨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됨으로서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 흙에 씨를 뿌린 농부는 무엇을 거두는가? 열매를 거두지 흙을 거두지 않는다. 그래서 부활한 영적인 몸을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고전15:20)육신은 씨가 아니고 흙임으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창3:19) 흙-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고전15:50) 이것이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만유를 통해 계시하는 우주적 진리다.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진리를 거부하면 성경의 계시는 영원히 닫혀 있는 것이다.
씨-하나님께서 흙-사람에게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는 바뀌지 않았다. 비록 사탄이 들어와 흙-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자신의 열매를 거두려 하였지만 어찌 감히 한 낱 피조물인 사탄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당할 수 있겠는가?(고전1:24) 사람이 만들어진 재료는 흙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시고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천사처럼 씨로 창조되었다면 거듭남이 없다. 그러나 흙으로 창조되었기에 잘못되었더라도 다시 재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로 사람을 재창조하신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재창조되어 내 안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거듭났다 하더라도 육은 죄가 있건 없건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육은 땅에 속한 몸이지 하늘에 속한 몸이 아니다. 각각의 세계에 맞는 몸을 입어야 그 세계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땅에 속한 자들은 또한 땅에 속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과 같으니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니라.’(고전15:48~49)
우리가 땅에 속한 몸을 지닌 것은 죄 때문에 땅에 속한 몸을 가진 것이 아니다. 죄 이전에 땅에 속한 몸을 가졌다. 땅에 속한 몸으로는 죄가 있건 없건 하늘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영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까지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하늘에 속한 영적인 몸으로 거듭나려면 우리의 육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은 씨-하나님을 예표하고 땅은 사람을 예표한다. 하늘은 공기와 같고 무한하다. 그래서 하늘은 하늘들로 복수이고 땅은 단수이다. 이 의미는 하늘 안에 땅이 삼켜져 있다는 것이다. 현재 땅은 공기와 같은 영안에 삼켜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 곧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땅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제한이 있다. 그러면 제한을 가진 땅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영원한 영의 세계 안으로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삼켜진다는 것은 삼킴을 당한 대상이 없어지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이다. 육의 세계가 영의 세계 안으로 흡수통일 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의식에서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 있다. 희생물은 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고 헌물은 하나님과 교통을 의미한다. 사람이 죄가 없을 때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헌물만 드리면 된다. 그러나 죄로 인해 희생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들어온 이후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희생물과 헌물이 동시에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레위기를 보면 번제헌물, 음식헌물, 화평헌물, 죄헌물, 범법헌물 이 다섯 가지 헌물의 명칭이 모두 헌물로 끝나지만 그 안의 내용을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용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은 하나라는 것이다. 또 이 희생물과 헌물은 결국 그리스도의 한 인격을 예표한다. 다섯 가지 헌물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여러 방향에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 오면 이 희생물과 헌물은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으로 통일되었다. 구약에서 모형으로 나타난 것이 신약에 와서 실재로 나타난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10:5)
이 말은 희생물과 헌물은 실재가 아니고 모형이기 때문에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로 예표되었던 희생물과 헌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희생물과 헌물은 모두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졌다. 이것은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번제헌물만이 태워진 것이 아니라 모든 헌물은 번제단에 향기로운 헌물이 되기 위해 불에 의해 재로 태워졌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제사의식에서 제물은 나 자신을 의미하고 불은 하나님을 예표한다.
이제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왕상 18:38~39)
이제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희생물들을 태워버렸고 주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였더라.(대하 7:1)
이 불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불이다. 그리고 이 불로 제물을 핥아간다고 하였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려면 하나님께로 삼켜져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죄 있는 희생물만 태워진 것이 아니라 죄없는 헌물도 태워졌다. 모두 하나님의 불에 삼켜져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어떻게 하면 하늘에 올라가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혼자 제자리에서 뛰어봤자 몇 미터 못 올라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불로 태워져 재가 되고 연기가 되서 향기로운 냄새가 될 때 하나님께서 흠향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불로 태워진 헌물을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짐승을 태운 냄새가 뭐가 그리 향기롭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불로 태운 짐승이 재가 돼서 연기되어 올라가는 것을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은 흙이고 피조물이라는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위치에 있을 때만 하나님과의 생명이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명확한 그림이다. 흙-사람은 하나님께 죽음으로 삼켜져야 내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삼켜져서 높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육신은 죄가 있건 없건 태워져서 재가 되고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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