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을 수 없는 분이시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죄가 되게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
반대론자들의 일반적 주장은 사람의 육신이 영원히 살게 되어 있는데 선악과를 먹어 죄가 들어와 육신에 죽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반대론자의 논리라면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죄가 되게 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는 것이다.(고후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함이라.’(고후 5:21)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의 모습, 곧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지 본질은 죄인은 아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4:15)
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죄인은 아니지만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면 이것은 큰 모순이다. 예를 들어 그런 논리라면 예수님의 신분이 왕자인데 거지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논리다. 본질이 죽을 수 없으면 죽지 말아야지 본질과 관계없는 옷을 갈아입었다고 어떻게 본질이 바뀌어 죽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또 반대론자들은 말이 막히면 무조건 하나님의 전능성을 들고 나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대단히 큰 믿음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마22:29) 분명히 예수님도 사람은 부활을 통해 천사와 같은 영적인 몸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다고 하셨다.(눅20:36) 사람은 흙-육신으로 지음 받았지 씨-영으로 지음받지 않았다. 이 말씀은 육신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의 육신이 아니고 부활한 영적인 몸이다. 부활한 영적인 몸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단순히 우리의 죄만을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육신에서 영화로운 몸을 얻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서도 죽으신 것이다.(요 10:17)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요10:17)
반대론자들의 논리라면 예수님이 무엇하러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셨겠는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달성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앞서도 밝혔듯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고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만 이식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 기록된 특별계시인 성경말씀만이 성경이 아니고 자연계시도 성경이다. 만물은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우리가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첫 번째로 그분이 하신 일을 아는 것이고 두 번째로 그분이 하시는 일의 원리를 아는 것이다. 즉 창조된 만물을 통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고 또 만물의 생명의 원리를 통해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원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롬1:20) 그럼에도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기록도 알지 못하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기 전까지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해도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라면 예수님은 피곤하지도 않아야하고 늙지도 않아야 하고 먹지도 않아도 죽지 않기 때문에 시장하지도 않아야 한다. 또 십자가로 가기 전까지 유대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에도 피하실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사시는 동안 우리와 동일하게 피곤하셔서 주무셨고, 목마르셨고, 시장해 하셨고, 다른 사람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셨다.(요8:57)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해하려고 하자 그 자리를 피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진노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그분을 도시 밖으로 밀어내어 자기들의 도시가 세워진 산의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거꾸로 떨어뜨리려 하되 그분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 길로 가시니라.(눅4:28-30)
그때에 그들이 돌을 들어 그분을 치려 하거늘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고 성전에서 나가시되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렇게 나가시니라.(요8:59)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그분을 해하려고 하니까 육체적 생명인 몸을 보호하기기 위해 자리를 피하신 것이다. 죄 없으신 그분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돌로 치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그 순간에만 예수님에게 죽음을 허락하셨고 그 이전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분은 죄 없으신 몸이었기에 죽으실 수 없었다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장하지도 피곤하지도 늙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고 유대인들의 생명의 위협에 자리를 피할 필요도 없다. 우리 육신은 원래 한번은 죽고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고후5:4) 흙-육신은 씨-생명이 아니다. 흙-육신이 씨-생명과 연합하여 열매를 산출하려면 한번은 죽도록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정해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다고 하니까 육체적 죽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죽지 않고 잔다’ 라고 표현하셨다.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만일 예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인데 예외적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허락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면 우리 인생들은 절망이다. 그것은 어느 특별한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고 보편적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전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그분이 육신이 한 번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똑 같은 운명 안에서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했기 때문에 그분에게 적용되었던 부활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이 다르다면 우리는 절망이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십자가에 달린 이 사람을 보라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누구든지 십자가에 매달면 죽는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인생은 흙이지 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쉬운 진리를 사람들은 외면하고 어려운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타락한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지식을 통해 쉬운 것보다는 어려운 길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은혜를 통해 얻는 구원보다는 행위를 통한 종교를, 창조론보다는 진화론을 택하고,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지식을 통해 생명을 만들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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