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십자가의 도

올더스조에 2014. 5. 28. 23:09

2. 십자가의 도

십자가 - 마귀에 대한 승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세상 상식으로 보면 완전한 패배고 허무한 죽음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마귀에 대한 승리인가? 성경에 쓰여 있으니까 승리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믿으라는 것은 곤란하다. 십자가의 승리는 사람에게 정해진 죽음이란 위치를 가지고 설명하지 않으면 해석이 안된다.
죄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천사는 천사대로 그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 각각의 피조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하여 자신이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고,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려고 했다. 그러므로 죄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라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순종하셨다고 했다.(빌2:8) 왜 순종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몸이 없는 영시기 때문에 몸을 가진 사람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으로 창조했지 천사로 창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만을 필요로 하신다. 사람은 사탄이 와서 아무리 유혹해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운명을 이탈해서는 안된다. 인생이 그 운명을 이탈해버리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전쟁은 사람이라는 위치를 지키는 전쟁이다. 이것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신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느냐, 아니면 신도 아니면서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하나님의 목적 밖으로 이탈하느냐, 이 싸움이다. 이 위치전쟁에서 아담은 사탄에게 패했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신 것이다. 하나님 정해주신 인생의 운명에 담담히 순종하신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참사람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사람을 창조하시고 예정하신 코스대로 살리신 것이다.

십자가- 생명의 접촉점(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히 우리에 죄에 대한 보상만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이식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농부가 밭에 어떤 곡식의 씨를 심었다고 하자, 그런데 이 밭에서 난 곡식이 병이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농부는 그 밭을 갈아엎고 새로운 곡식을 심을 것이다. 자 여기서 갈아엎는 것이 십자가다. 번제단에서 제물이 불살라졌다는 것은 완전히 갈아엎어 씨를 뿌리기에 알맞은 흙(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곡식의 씨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그런데 이 곡식의 씨가 흙과 만나 발아하려면 곡식의 씨도 땅에 들어가 죽어야 하지만 흙도 생흙은 안되고 번제단의 재와 같이 죽은 흙이라야 그 씨를 발아 시킬 수 있다. 씨도 죽어야 하지만 흙도 죽어야 한다. 상호 죽음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십자가란 씨-하나님과 흙-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번제단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물론 씨(생명)이시지만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겉모습은 흙(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의 씨를 받아 부활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로 명실상부하게 태어나려면 사람-예수님도 죽어야하고 하나님-예수님도 죽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만나 곳이 십자가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단지 죄에 대한 심판만이 아니라 생명의 접촉점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씨를 받아 부활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셨다.(롬1:4)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성소로부터 번제단으로 나왔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번제단으로 가야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십자가 - 심판
이제 심판에 대한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므로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수님이 곧 신과 같은 사람으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심지어 물위로 걸어가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하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때 사람들은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데 이런 일을 행하는가? 하면서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참으로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되고 싶었던 모든 사람의 로망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따라 다녔다. 그분이 십자가로 끌려갈 때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허무하게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능력 정도면 충분히 십자가에서 탈출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성경에도 마지막 때에 모세와 같은 대언자가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당연히 그들은 모세와 같은 메시아를 믿었던 것이다.(신18:15, 행3:22)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모세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구원자라면 예수님은 전 인류의 구원자였던 것이다. 인류가 이렇게 된 것은 근원적으로 사탄에게 속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했으나 인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또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해보았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오신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된 사람이다. 이 신들과 같은 사람이 심판받아야만 인류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이다.
지금 소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신들과 같이 된 사람이 심판받아야 한다는 이런 문제 의식 자체가 없다. 그래서 근원이 없기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도 없고 그분 자체의 존재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흙과 같고 재와 같은 사람이다. 이 사람을 하나님은 의로 여겼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에 있는 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 안에만 하나님은 씨-생명을 심으실 수 있다.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은 구별은 간단하다. 세상 사람은 신들과 같은 사람이고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이 정해주신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빌3:9) 그러니까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십자가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가? 우리 인간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매달리니 죽더라는 것이다. 그분이 죽지 않았다면 그분은 신이다. 그분은 거기서 완전한 사람으로 죽으셨다. 어떠한 사람도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라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아담은 속았다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다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되 신적인 예수님만을 믿고 그런 것들만을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죽기 싫어서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되고 싶은 사람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경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천사숭배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도로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남성이고 사람은 여성이다. 남성과 여성이 결혼하지 남성과 남성이 결혼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은 동성애자와 같은 것이다. 신격은 인격을 원한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마7:23)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하지 천사들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속자다.(히1:5)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 않느냐?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 피조물인 인생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상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따르고 추구할 것은 사람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 타락의 근원을 모르니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천사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의 예수님, 신적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위대하고 강하신 예수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열심히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숭배를 하면 하면 할수록 그분과 우리는 멀어진다. 종교란 신을 숭배케 하여 신과 사람을 분리시킨다. 우리가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니 그분 안에서 내가 발견된다.(빌3:9) 그분과 내가 한 운명이다. 숭배하지 않지만 그분과 내가 하나가 된다. 그분도 거기서 흙이고 나도 흙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옛적에 강력하고 명성있는 크고 위대한 모든 것이 다 없어졌다. 선악과를 먹고 신들 같았던 아담은 죽고 연약한 어린양의 인격만 남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여기셨다. 참사람이라고 인정하시고 살리셨다. 거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안에 있게 된다.(요14:20)
그분이 오신 것은 종교적인 경배를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생명이란 그분 자신이다. 우리가 그분 자신을 살라고 하는 것이다.(갈2:20) 정상적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샘플로 보여 주시고 또 그분 자신이 우리의 씨가 되고 우리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 사람으로서 자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 자리가 어디인가, 십자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단순히 심판만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 대한 승리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이식되는 생명의 접촉점이다. 그래서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죽음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죽음 안에 있는 경륜의 비밀이다. 죽음이 없으면 영생(거듭남, 부활생명)이 없다. 이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과정이다.

십자가 –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고 가서 예수님에게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했으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서 마귀에게 승리하셨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마귀에게 빼앗긴 사람의 위치(인격)를 되찾아 오셨다. 이것이 구속이다. 사람의 빼앗긴 위치가 원위치 된 것이다. 원 위치된 사람, 곧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이것이 구속,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한 가지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속과 마귀에 대한 승리와 아담이 부끄럽게 여기던 사람의 육신에 대한 죽음을 부활생명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다.(고전1:24)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 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그리스도인이란 신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이 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판의 의미로만 생각지 말라, 단순히 우리 인생들만을 위한 혜택으로도 생각지 말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다(고전1:24) 우주 안에 모든 비밀이 거기에 다 들어 있다. 어떻게 그것이 심판이고, 어떻게 그것이 승리고, 어떻게 그것이 생명인가? 어떻게 그것이 우주적인 대 전환점인가?
인생의 죽음은 창조 안에 정해진 것이고 이 과정이 없으면 영생이 없었다. 이게 싫어서 아담은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담의 재료는 흙이다. 부숴지기 쉽다는 것이다. 연약하다는 것이다. 아담은 천사보다 낮게 지음받았다.(시8:5) 그래서 본디 사람은 하나님께 의존해야 되고 순종하도록 지음 받았다. 거역하는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라면 하나님께 의존할 필요가 없다. 사탄은 그래서 처음부터 반역한 것이다. 아담은 스스로 반역한 것이 아니고 사탄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반역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그 책임을 1차적으로 사탄에 묻고 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다는 것이다.(마13:28)
그래서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다. 유혹자가 있기 때문에 구원자가 있다는 것이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천사와 비교한 것이다. 천사는 죽지 않는데 나는 왜 죽는가? 여기에 불만이 있었다. 만약에 사람이 죽지 않는 천사를 보지 않았다면 사람은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란 자신이 본 것의 범위를 벗어 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오지에 문명과 차단된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어봤자 그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왜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이고 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가? 죽지 않는 어떤 존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존재를 보지 않았다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창세기 6장에서 천사들과 결합한 옛적에 강력한자, 명성있는 자들도 천사들을 부러워하여 나온 산물이다. 지금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사실 근원을 살펴보면 모두 천사를 사모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천사적 요소인 능력과 죽지 아니함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능력으로 구성된 나라가 아니라 어린양의 인격으로 구성된 나라다.
사람들은 크고 위대한 것을 좋아하지만 성경은 크고 위대한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위대한 것은 바벨로 간다. 또 큰 것일수록 제한이 있다. 바위덩어리는 크지만 제한이 있다. 태양도 아무리 크지만 제한이 있다. 그러나 공기는 아주 작은 보이지 않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무한하다. 영생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죽음이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영생이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단지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과 혜택으로만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과 지혜로 인간이 그토록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육신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의 대적인 사탄을 물리치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과 지혜로 죽음과 심판이라는 부정적인 상황을 생명과 승리의 긍정인 상황으로 바꾸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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