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그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7)

올더스조에 2014. 5. 28. 23:07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뿌리가 잘 못되면 열매도 잘 못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씨-생명으로 근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근원이 없는 믿음은 뿌리 없는 믿음과 같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1. 그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7)

만물의 생명의 법칙은 죽음을 통해 연결된다. 생태계의 먹이 사슬구조에 따른 생명의 법칙을 보라. 예를 들어 낮은 생명의 풀과 높은 생명의 소가 있다고 하자. 풀이 소가 되려면 풀은 죽어서 소가 먹어야 하고, 소가 풀이 되려면 소는 죽어서 풀의 거름이 되어야 한다. 이렇듯 높은 생명과 낮은 생명의 공통지점은 죽음밖에 없다. 고로 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는 지점이며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경에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다'(고전2:2)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생하도록 창조했는데 아담의 죄 때문에 육체적 죽음이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그 날(the day)에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 날에(the day)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성경이 말하는 죄, 거룩, 생명, 죽음 등은 모두 세상의 관념과 다르다.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하고 있다. 죄의 의미도 ‘과녁을 빗나가다’인데 이는 곧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한 것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죽음도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한다.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니까 실재는 영이신 하나님이고 사람은 형상이라는 것이다. 실재와 형상, 곧 씨와 열매의 관계이다. 씨와 열매가 하나의 관계를 이루고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은 발전소이고 사람은 전구와 같은 것이다. 전구에 불이 들어오려면 전선이 발전소에 연결되어야 한다. 사람도 완성이 되려면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 곧 연합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 관계가 단절된 것이 죽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17절의 죽음이 육체적 죽음이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만약에 이 말씀이 아담의 육체적 죽음이 포함된 것이이라면 성경은 틀린 것이 되고 만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바로 그 날(the day)에 반드시 육체가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그날에 육체가 죽지 않고 930살을 살다가 죽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육신의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하다. 너무도 단순한 말씀이다. 혹자들이 말하는 대로 아담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어서 살려주었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어디에도 아담을 930살까지 살려주겠다는 성경적 근거는 없다. 살려주시려면 영원히 살려주시지 왜 930살까지 살게 했는가? 다 육체가 죽는 것이 싫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나온 생각이다. 사실 아담도 이게 싫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다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창조하신 것이다.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드리면 된다. 성경에서의 생명과 죽음은 하나님과 관계에 있다. 생명은 연결된 것이고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과 끊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죽은 것이라고 한다.(엡2:1, 골2:13)
또 어떤 사람들은 아담의 육체가 처음부터 죽도록 창조했다는 성경 말씀이 없지 않느냐하고 반문한다. 물론 없다. 그러나 성경은 유추하여 충분히 해석이 가능하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갔다 왔다고 했다.(고후12:2) 그러면 하늘은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이라는 단어가 없어도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안다. 또 성경에 둘째 사망(계20:6, 14)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첫째 사망이라는 말은 없지만 첫째 사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단순히 받아 드리면 된다. 선악과를 먹는 바로 그 날에 반드시 죽으리라 했지만 아담의 육체는 바로 죽지 않고 930년을 살다가 죽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고 육체의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육체는 처음 창조될 때부터 죽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다.

2.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생명(life)이자 하나님의 삶(life)이다.
⓶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생명이다.
③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다.
* 피조된 사람에게는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 있을 수 없다.
④ 거룩한 생명이다.
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란 아들 자신(요일 5:12)이자, 하나님 자신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영적 피조물인 천사는 죽지 않지만 영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탄도 죽지 않지만 영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삶이자 하나님 자신이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연결)됨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삶(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⑥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적 생명이다.

3. 앞서도 언급했지만 사람은 피조물이다. 육신을 가진 피조물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의미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적인 피조물은 시작과 끝이 있고 생로병사가 있다. 사람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사람만이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육체를 가진 모든 생명체는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창6:17,욥12:10, 전3:21) 대부분의 짐승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오장육부를 가지고 눈, 코, 입, 귀를 가지고 있다. 모든 육체를 가진 생명체는 숨 쉬고 산다. 사람만이 특별하지 않다. 사람이 특별하다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을 섬긴다는데 있다. 사람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창3:22)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창 3:22b)
그러므로 사람은 처음 창조될 때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육적 피조물인 사람은 무엇을 먹어야만 사는 존재다. 만물이 그렇지 않은가? 만일 사람이 영생하는 존재였다면 먹지 않아도 살아야 한다. 천사처럼 물에 들어가도 죽지 않아야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외부에서의 공급없이는 살 수 없는 제한된 육신을 가진 피조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먹을 것을 두셨던 것이다. 창세기와 천년왕국에서 사람의 수명으로 보았을 때 사람은 기본적으로 천 년을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을 것이다.(사65:20~22)
그렇다면 어떤 이는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 도 있을 것이다. 만일 사람의 육신이 한번은 죽도록 창조되었다면 생명과든 선악과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살아있는 혼이란 흙과 같은 존재고 빈그릇과 같은 존재다. 빈그릇에는 무언가 담아지게 되어 있다. 빈그릇에는 공기라도 들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선악과든 생명과든 무엇을 먹어야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기에 무엇을 받아들여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든 생명과든 둘 중의 하나를 먹지 않는 일은 없었다. 또 먹지 않으면 육신은 죽게 되어 있다.

4. 성경에서 사망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말한다. 육체적으로 살아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분리되어 있다면 죽은 자이다.
또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다른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먼저 내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허락 하옵소서,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또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라, 하시니라 (마:21-22)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의 육체적 죽음에 대해 ‘잔다’라고 표현하셨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마9:24)
성경에서 살았다. 죽었다함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냐? 아니면 산 자냐? 이것이 핵 심이다.
그분께서는 죽는 것을 통해 친히 죄에 대하여 단 한 번 죽으셨으나 살아 계심을 통해 친히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시나니 (롬6:10)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참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6:11)
내가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이라.(갈2:19)
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니 (요11:25-26)
위 말씀의 밑줄의 일반적 해석은 살아서 믿는 자는 주님이 재림하시면 휴거하여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된다고 억지로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관점은 사람의 육체적 삶과 죽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느냐, 살아 있느냐?에 있다.

5. 또한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육체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어 있는 상태로 표현한다.
또한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골2:13)
즉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아담 안에 있는 자)는 육신이 살아 있어도 죽은 자이다.


6.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사망은 기본적으로 둘째 사망(계 20:14, 21:4)을 말한다. 육체적으로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의 관점이다. 왜 성경이 육체적 사망에 대하여 첫째 사망이라는 말은 없어도 성경의 결론인 요한 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성경 스스로가 사망의 정의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멸망 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여기서 사망은 분명히 계시록 20장 14절과 21장 4절에 말씀하고 있는 둘째 사망이다. 최종적으로 사망과 지옥이 불 호수에 던져지기 때문이다.(계20:14)
'그분께서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딤후 1:10b)
위 말씀도 성도들의 둘째사망을 폐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의 둘째 사망은 폐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첫째 사망을 폐하시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이 첫째 사망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계시록 20:14절과 21장 4절에서 정의하고 있듯이 둘째 사망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첫째 사망을 언급하지 않고 둘째 사망만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폐하신 것은 둘째 사망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이 말씀도 1차적으로 영적사망이지만 2차적으로 둘째사망이다.

7. 사람은 누구든지 육신은 한번은 죽게 되어있다. 이 약점을 가지고 사탄은 아담을 유혹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 4장 6절에서 사탄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하였다. 이것은 다른 말로하면 ‘나는 신이기 때문에 뛰어내려도 안죽지만 너는 죽지 아니하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도 사실 사탄이 아담을 향하여 마태복음 4장과 같은 말로 아담을 유혹한 것이다. 이 때 아담은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과 죽음을 부끄러워하여 사탄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을 향하여 사람의 위치를 지켜 사탄에게 승리하였다.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시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죽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되는 것이 사람이다.’라고 사람의 위치를 정의하고 계신다. 이 시험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에게도 계속되었다.
“또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고 그분께 욕하며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네 자신이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막15:29-30)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마귀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 마귀에게 승리하신 것이다. 즉 마귀의 유혹에 아담은 사람의 위치, 곧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고 예수님은 끝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심으로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이 하나다.
단지 선악과가 실존하는 나무라고 한다면 지금도 사람들은 ‘나는 선악과를 안먹을 수 있었는데 왜 아담이 먹어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게 하였을까’라고 하면서 원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온 인류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을 사탄이 제시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만일 사람들에게 육신의 연약함에 대한 극복과 육신의 죽지 아니함을 조건으로 내건다면 그 누구도 거부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이는 사람이 천사에 비해 조금 낮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시8:5)

8. 사탄의 송사는 늘 ‘나는 죽지 않는 피조물인데 사람인 너희 육신은 죽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탄의 송사에 대해 아담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속박에 얽매여 사탄의 노예가 된 것이다. 즉, 아담은 사탄과 비교하여 자신의 위치를 부끄러워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첫 번째 사망) 뒤에 있는 사람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두려움을 가진 인간들을 위해 먼저 죽음을 당당히 맛보시고 이 죽음의 두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려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b)
'또 죽음을 두려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려 하심이라.'(히 2:15)
천사는 죽지 않은 것에 비해 사람의 육신이 죽는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 같다. ‘그래 사람의 육체가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운명이다.(히9:27) 육체가 한번 죽는 것이 천사에 비해 창피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더 큰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은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이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다. 결국 아담은 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 하셨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달고 기도하셨다.(마26:3) 또 이 육체적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구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히 5:7) 이를 통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과하신 것이다.
'조금 멀리 나아가사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그분께서 친히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 5:7)

9. 창세기 3장, 마태복음 4장, 십자가 앞에서 마귀는 천사와 비교하여 사람의 능력없음과 육신의 연약함(죽음)을 가진 사람의 약점을 가지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했다.
① 창세기 3장에서
-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
☞ 천사와 같이 능력있는 자, 죽지 않는 자가 될 것이다.
- 선악을 아는데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곧 왕이 될 것이다.
⓶ 마태복음 4장, 누가복음 4장에서
- 네가 신이거든 이 돌돌들로 빵을 만들어 봐라, 곧 능력을 보여 봐라
- 네가 신이거든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봐라.
☞ 곧 나는 안죽는데 너는 죽지 않느냐?
- 나한테 경배하면 세상영광을 주겠다. 곧 왕을 시켜주겠다.
③ 십자가에서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 네 자신이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곧 능력을 보여다오,
☞ 너는 죽지 않느냐, 너는 죽지 않는 내가 부럽지 않느냐?
- 네가 왕이냐?
사탄은 천사에 비해 조금 낮게 창조된 사람의 약점을 가지고 집요하게 사람의 위치를 벗어나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편8편5절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낮게 창조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면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부터 육신은 한번은 죽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해답이 나 올 것이다.
“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께서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셨사오니(시편8:5-6)
시편 8편은 일반적으로 아담이 죄를 짓기 전의 상태를 노래하고 있다 것에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한다.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도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음받았다는 것이다. 아담은 처음에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음 받았지만 만물의 머리로 지음 받았다. 천사는 영들로서 사람보다 뛰어난 피조물로 창조되었지만 사람의 종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천사보다 낮게 지음받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면 답이 나온다.
첫 번째로 사람은 천사에 비해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누구든지 동의한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을 영들로 삼으시고 자신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니라, 하시되'(히1:7)
두 번째로 천사는 죽지 않는 것에 비해 사람은 한번은 육신이 죽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답이 히브리서 2장 9절에 나온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시편 8편 5절에서는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낮게 창조되었는데 어느 수준까지 낮게 창조되었는지 기록이 안되어 있다. 그런데 히2:9에 보니까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고 했다.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음받았다는 의미가 사람은 한번은 육신이 죽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성경을 정확히 살펴보면 원래 아담은 한번 죽도록 지음 받았다. 바로 사탄은 자신에 비해 사람의 능력없음과 육신의 연약함의 약점을 가지고 아담을 유혹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마귀에 승리함으로써 육신의 죽음 뒤에 있는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맨 먼저 죽음을 맛보신 것이다.(히2:9)

10. 예수님의 예에서도 사람은 한번은 죽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아담의 표상이다. 마지막 아담이자 둘째 사람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처음 창조하신 아담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또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아야 하는 분인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가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죽음을 허락하셨다고 말한다. 즉 원래는 죽지 않을 분이신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셨기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예수님께서 눅4:28-30, 요8:59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해하려고 하자 그 자리를 피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진노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그분을 도시 밖으로 밀어내어 자기들의 도시가 세워진 산의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거꾸로 떨어뜨리려 하되 그분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 길로 가시니라'(눅4:28-30)
'그때에 그들이 돌을 들어 그분을 치려 하거늘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고 성전에서 나가시되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렇게 나가시니라'(요8:59)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그분을 해하려고 하니까 육체적 생명인 몸을 보호하기기 위해 자리를 피하신 것이다. 죄 없으신 그분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돌로 치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그 순간에만 예수님에게 죽음을 허락하셨고 그 이전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분은 죄 없으신 몸이었기에 죽으실 수 없었다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장하지도 피곤하지도 늙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고 유대인들의 생명의 위협에 자리를 피할 필요도 없다. 우리 육신은 원래 한번은 죽고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육신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었다(히9:27)
사람은 천사들과 같은 몸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부활을 통해 천사들과 같은 몸으로 변화될 때만이 더 이상 죽을 수 없다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있다. (눅20:35-36)

11. 처음 창조된 사람인 살아있는 혼(창2:7)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죄가 몸 안에 들어왔고 육신은 사망의 몸, 몸은 죄로 인죽었다.(롬 7:24, 롬8:10)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 성령은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리라'(롬8:10)
혹자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위 성경구절을 이용하여 몸이 사망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죄가 몸 안에 들어왔을 때 사망이 들어왔다면 아담은 그 때 당연히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죽지 않았다. 이것은 무죄했던 아담의 몸이 단순히 죄(둘째 사망)의 몸이 됬다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 7:24절과 로마서 8:10절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엡2:1) 여기서 몸이라고 했을 때는 단순히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신, 영적인 모든 면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둘째 사망을 가리킨다. 왜 성경은 첫째 사망이란 말씀을 하지 않고 둘째 사망이란 말씀만을 하셨을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망하면 첫 번째 사망을 두고 말하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사망의 정의에 대해 둘째 사망이라고 성경의 결론인 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정의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은 1차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말하고 2차적으로 둘째 사망을 가리킨다. 성경에 흐르는 일관된 경륜은 첫 번째 것을 폐하고 두 번째 것을 세우는 것이다.(히10:9) 두 번째가 해답이라는 것이다.
이 경륜은 긍정적인 것은 물론 부정인 것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가는 곳도 1차적으로 지옥이지만 최종적으로 불 호수다.(계20:14)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생명도 첫 번째 사람의 육신적 생명이 아니라 두 번째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생명을 말하듯이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첫 번째 사망이 아니고 둘째 사망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먹는 그날에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했을 때 이 사망은 둘째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것을 첫 번째 사망에 결부시키면 구원받지 못하고 첫 번째 죽은 사람들은 계속 무덤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원래 영생하는 존재였는데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첫 번째 몸에 사망이 들어왔다면 왜 죄인들은 부활하는가? 그들은 영원히 무덤 속에 있어야 한다.
사람은 1차적으로 첫 번째 사망 뒤에 죄인이든 의인이든 관계없이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졌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은 1차적으로 이 우주적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우주적 원리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떤 자들이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느냐?’(고전15:12) 하면서 1차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삼라만상의 모든 식물들과 같이 가을에 열매를 맺어 씨를 뿌리면 죽음의 겨울을 지나 봄에 부활한다는 우주적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부활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였으면 너희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들 가운데 있으며’(고전15:17) 라고 했다. 이 말씀이 의인에게만 적용된다면 죄인들은 어떠한 부활로도 일으켜지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죄인들도 나중에 멸망의 부활로 일으켜지지 않는가? 바울은 먼저 우주적 원리를 말한 다음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부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과 사탄 안에서의 부활이 있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바울은 또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고전15;36) 여기서도 우리에게 죄가 들어와서 첫 번째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씨를 뿌리지 아니하면, 곧 죽지 아니하면 부활이 없다는 우주적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사망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정해진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 생명의 부활로, 사탄의 씨가 들어가면 멸망의 부활이 되도록 운명지어졌다. 사람은 단지 흙과 같기 때문에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한다.
처음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로 무죄상태였다. 아담이 그 때 생명과를 먹었으면 생명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육신이 안죽는 것이 아니다. 영화로운 육체로 변화되는 순간 옛 육체는 죽는다고 봐야 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육신적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육신적으로 죽은 뒤에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다(마22:32). 왜냐하면 영생이란 육신의 죽고 삶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적 생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런 말씀도 있다.
'누구든지 살아서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요11:26)
이 사람은 육신이 안죽는가? 육신은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1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최종상태는 현재의 육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에서 보듯이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하여 부활한 영광스런 몸이다. 물론 어떤 이는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죽지 않고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유지하였을 것이라고 아래 말씀을 근거로 이야기 할 지도 모른다.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그러나 위 말씀에서 우리의 육체는 부활체라고 볼 수 있다. 자 그러면 생각해보자, 현재의 육체가 아니라 부활체로 변화되는 순간, 나의 옛 육체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죽는다고 밖에 할 수가 없다. 엄연히 예수 그리스도도 죽고 다시 사셨다. 새사람(새인류)의 첫열매(조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신 다음 부활의 몸을 입으셨다. 그러할 진대 어떻게 우리의 현재의 육체가 죽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새사람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같이 모두 죽은 다음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 인류의 조상이 아담인 것과 같이 새 인류의 조상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새인류의 조상으로서 죽으셨는데 나는 안죽겠다고 하면 거듭남이 없는 것이다. 새인류는 모두 예수님과 같은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없으면 새인류가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은 것이 아니고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롬6:5) 이것이 실제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영광스런 몸으로 된 것은 죽고 다시 산 몸이다.(빌3:21). 거듭난 생명, 부활생명은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새사람이 된 것이다(롬6:5) 이것이 예수님이 오시면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물의 생명의 법칙은 죽음을 통해서만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된다. 데살로니가전서4장 17절에서 현재의 육신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휴거가 되면 그 사람의 몸은 부활체가 된다. 부활체란 지금의 우리의 썩을 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몸이다. 부활체란 새로운 몸으로의 완전한 전환이며 죽고 다시 산 몸이다. 영적으로 이루어 졌던 것이 가시적이고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옛 것을 끝내고 새로운 것으로의 전환이다. 현재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지금 바로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서 내가 죽지 않고 거듭나는 방법은 없다. 첫 번째 사망은 한번 정해진 것이다. 부활체란 죽고 다시 산 것이다. 현재의 썩을 몸과 부활체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옛사람이 죽고 다시 산 몸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이 지금 예수님이 오시면 휴거되어 부활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육체적 죽음을 자신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옛것을 죽음으로 끝내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로 보건대 최초에 아담이 생명나무를 먹고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되려면 아담의 육체는 그가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죽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흔히 죄 때문에 죽음이 온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 안에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을 너무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우리 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고 만유를 포함한 죽임이다. 죽음을 통해서만이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된다.
사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이유 중에 하나는 죽음 이후에 영화로운 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육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히2:15)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종적인 상태(부활체)에 이르려면 그는 죽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육체의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신 것이다.(히2:9) 사탄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신들과 같이 된다고 유혹했는데 신이란 천사이며 천사는 죽지 않는 영적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낮게 창조되었다(시8:5). 바로 아담은 천사의 죽지 아니함을 부러워해서 천사가 된다고 속이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13. 성경이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생명(씨)이고 사람은 흙(밭)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같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다. 여자는 씨가 없다. 사람은 씨로, 곧 영으로 창조되지 않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같이 사람은 단지 흙이다. 흙으로 하나님의 씨를 받아 그 씨를 발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들에 포함된 다섯 여자들을 통해 잘 표현되고 있다. 선하냐, 악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해야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씨가 없다.

14. 에덴동산의 회복은 천년왕국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사탄은 무저갱으로 들어가 갇히게 되고(계20:3)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왕좌를 둔 채 온 땅을 통치할 것이다.(단7:14, 계19:15) 이때에는 땅의 기능도 회복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다.(사35:1~2) 사람의 수명도 나무의 날수와 같이 거의 1000살에 이를 것이다.(사65:20)
천년왕국의 구성요원은 크게 두 부류로 구성된다. 구원을 받아 영화로운 부활체를 가지고 있는 이들과 환난기를 통과하여 육체를 가지고 들어온 이들로 구분된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아담도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나야 했듯이 천년왕국에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들과 이들로부터 태어난 사람들도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나야 한다. 사탄의 유혹이 없더라고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의 수명이 나무의 날수와 같다고 하였다.(사65:20) 결국은 죽는다는 것이다. 사탄이 무저갱에 갇힌 상태에서 죄 없이 1000살을 살더라고 결국 육신이 죽는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 이브는 교회의 예표로서 그리스도에게서 태어난 부활생명, 곧 거듭난 생명을 예표한다. 이브가 죄가 있어서 거듭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였는데 여기서도 죄 문제를 예수님은 언급하지 않으셨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혼적 생명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 뒤에 십자가의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요3:14) 물고기의 세계는 물고기의 생명이 필요하고 새의 세계는 새의 생명의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는 사람의 생명만 갖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14. 창세기 2장 7절의 살아있는 혼으로 만들어진 아담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면 구속과 구원의 교리에도 위배된다. 구속이란 원래의 뜻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하에 있는 원 위치로 돌아가다’라는 의미다. 즉 창세기 2장 7절의 아담이 무죄 상태였던 그 위치로 돌아간다는 의미고 구원이란 거듭남의 다른 말로서 무죄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넣어 주어 새롭게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구속(엡1:7, 골1:14)이고, 무덤으로부터의 부활이 거듭남이다.
성경은 구속이 먼저 있고 거듭남이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밭에 가라지가 심겨져 있기 때문에 이 가라지를 갈아엎은 것이 십자가로 곧 구속이다. 밭에 가라지가 뽑혔으니 이 갈아엎은 밭에 새로운 작물, 곧 알곡을 심어야 되는 것이다. 이 알곡이 난 것이 거듭남이다. 만일 창세기 2장 7절의 아담이 영생을 가졌다면 밭에 이미 알곡이 심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 되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으면 하나님 나라의 일원된 것이다. 그러면 사탄이 와서 아담을 훼방할 수도 없다.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아담을 사탄이 와서 훼방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가졌는데 누가 뺏어갈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영원한 생명은 뺏어 갈 수 없다(롬8:38) 아담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탄이 망가뜨릴 수 있지만 태어난 생명은 망가뜨릴 수가 없다.
그런데 만일 창세기 2장 7절의 아담이 영생을 가졌다면 우리의 구속의 위치는 어디인가? 성경은 구속과 구원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그 위치가 분명하다. 십자가의 죽음이 구속이고, 무덤에서 부활이 구원이다. 그런데 창세기 2장 7절의 아담이 영생을 가졌다면 구속과 구원의 위치가 동일하게 된다. 즉 십자가의 위치와 동굴속 무덤 부활의 위치가 동일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구속은 죽음이고 부활은 생명이다. 어떻게 죽음과 생명이 같을 수 있는가?

15.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지음 받았다. 만일 아담이 번식만하고 죽지 않도록 지음 받았다면 지구는 넘쳐서 사람들이 설 곳이 없을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정해진 것이다.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번식할 수 없다. 생산하는 대신에 죽게 했다. 안 죽고도 생산을 했다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번식하지 않는 천사는 죽지 않지만 번식하는 모든 피조물은 죽는다.
그래서 안 죽고도 영원히 사는 것은 생산을 못하고, 반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생산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치를 자세히 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주 잡혀 죽는 것은 더 많이 생산하도록 되어 있다. 사자나 이런 것은 적(敵)이 없다. 사자를 잡아먹을 놈이 없다. 그런데 번식이 많이 안 된다. 그런데 토끼나 산양이나 이런 것은 포식자들의 밥이다. 이것들은 새끼를 많이 낳는다. 그러니까 이치가 참 묘하게 되어 있다. 죽을 것에게는 빨리 생산을 많이 하도록 배려를 해 놓았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나서 한 번 죽는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지 않더라도 사람은 한 번 나서 한 번 죽는다.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만물이 다 그렇다.
한 알에 밀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정해진 것이다. 한 알에 밀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개인적으로 보면 죽는 것이 아까운 일이지만, 자손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자기가 유익한 일이다. 어차피 바꾸는 것이다. 우리 목숨은 다른 것으로 바꿔야하는 목숨이다. 이 안에서 보면 죽음은 새로운 번식의 경륜을 위해서 정해진 것이다.
어떤 벌레 같은 것을 보면 자기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 벌레들이 많다. 메뚜기 같은 것도 알을 까고 죽는다. 연어도 알을 까고 바로 죽는다. 죽는 것 보다 생산의 본능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어가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연어가 태평양을 오다가 생각을 바꿔가지고 “아니야, 난 죽으면 그만이야” 이러고 돌아가 버리면 지금 연어는 없을 것이다. 참 신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 하신일이 참 지혜로운 일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고 죽음 안에 있는 자들을 살려내어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하여 구속을 얻고, 새 생명의 번식을 위하여 부활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신 것이다.

16. 아담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등등 말을 하는데 근원적인 문제는 사탄에게 속았다는데 있다. 사탄의 본성은 무엇인가? 거짓으로 속이는 자다.(계19:20, 20:10) 예수님은 본성은 무엇인가? 그분은 진실하신 분이라는 것이다.(요일5:20, 계19:11) 그렇다면 아담은 무엇에 속았는가? 사탄이 선악과를 먹으면 신이 된다고 하였는데 신이 안되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무엇에 속았는지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너무 깊이 속아 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냥 아담으로 인해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한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았다. 무엇을 속았는가?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죽지 않는다고 하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죽지 않도록 창조했다고 우긴다. 이것은 속은 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속은 자리를 모르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도로 선악과를 먹은 자리로 가는 것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인생은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셨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분은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 또한 인생은 죽지 않는다는 거짓의 옷을 벗고 진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조금 깊게 들어가 보면 이 문제다.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이 문제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원래 육신이 영생하도록 지음 받았는데 창세기 3장에서 죄를 범함으로 몸의 영원성을 잃어버렸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1.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 날(the day)에 반드시 죽으리라’ 했는데 아담의 육신은 죽지 않았다. 이 말씀이 육신의 죽음에 관한 것이라면 아담은 바로 그날 죽어야했다. 그런데 육신은 죽지 않고 930살까지 살았다.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입혀줘서 살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2. 이것은 영원한 생명의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불거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천도복숭아처럼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영원한 생명이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이라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의 생명이자 하나님의 삶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적 생명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육신의 죽고 삶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의 차이다. 그러니까 발전소와 전구의 관계이다. 전구에 불이 들어오도록 선이 연결되어 있느냐, 안되어 있느냐의 관계다.

3. 사탄이 창세기 3장, 마태복음 4장, 십자가의 위치전쟁에서 끊임없이 송사하는 주 내용은 사람이 천사보다 낮게 지음받은 약점을 가지고 사람을 송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천사에 비교해서 능력없음과 육신의 연약함(죽음)이다.

4.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란 말이 있듯이 한번 영원한 생명은 끝까지 영원한 생명이다.
그런데 한번 영원한 생명을 가졌는데 죄를 지어 몸의 영원성을 잃어 버렸다면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란말도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5. 우리는 피조물로서 단지 살아있는 혼으로 지음받았다.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살아있는 혼이란 기능적 생명이다.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만일 우리가 영생을 가졌는데 영생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이방종교와 같은 것이다. 이방종교의 주요 핵심 사상은 사람 안에는 영생이 원래 있었는데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수련을 통해 찾는다는 것이다.

6.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밧데리에 전력을 충전하듯 영생을 넣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은 아들에게 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로봇을 만들었다고 하자. 그 로봇은 피조물로서 그 안에는 내 생명이 없다. 내 생명은 내 아들밖에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해야 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7. 생명은 연결(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의 법칙이 그렇다. 우리 사람 자체의 생명이란 것도 보이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생명에 세포와 세포가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포가 생명으로부터 끈어지면 사람은 죽는 것이다. 이렇듯 생명은 연결되는 것이다. 생명 덩어리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밥을 먹어 이 밥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은 중간에 여러 인체기관을 거쳐 생명이 된다. 바로 밥이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람의 인체기관은 밥과 우리의 생명을 연결시키는 고리이다. 만물의 법칙이 똑 같다. 어떤 화학적 물리적 작용도 중간 연결고리 없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하나님 마음대로 축구공에 바람넣듯이 사람에게 생명을 넣어 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터무니 없고 종교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보다 더 크다. 이질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보자, 연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으면 바로 생명을 넣어주시지 왜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사다리(요1:51), 중보자라는 것이다. 사람 자체에는 영생이 없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오지 못하느리라.”(요14:6)라는 말씀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불변하는 진리다.

8. 하나님은 왜 사람을 한 번은 죽도록 창조하셨을까?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람이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난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실패다. 그러나 인생은 한번은 죽고 부활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다. 생명노선 안에 있으면 생명의 부활로, 멸망노선 안에 있으면 멸망의 부활로 부활하는 것이다. 아담이 영원한 생명이 있었는데 선악과를 먹어 몸의 영원성을 잃었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덤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몸도 멸망이든 뭐든 그 몸이 부활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 안에 하나님의 모든 경륜이 비밀이 다 들어있다. 우리는 이것을 다 알지 못한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는지? 분명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 속에 이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모든 성경의 문제들이 술술 풀린다.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요10:17)
여기 보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생명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현재 있는 생명을 버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의 부활생명을 취하려고 현재의 육신의 생명을 버린다는 것이다. 죽지 않으면 부활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대속의 의미로서 우리의 죄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있다.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내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죄가 영생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대신이 아니고 함께다.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왜 함께 죽어야 하는가?
십자가가 곧 번제단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물론 1차적으로 죄에 대한 속죄이다. 무죄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의 1차적 위치지 무죄가 영원한 생명은 아니다. 그래서 무죄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넣어 주어야 한다. 그 자리가 십자가, 곧 번제단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이다. 죽음이란 자리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사람으로서 지성소에서 나와 번제단으로 오신분이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번제단으로 가서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대신이 아니고 함께 죽고 함께 산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 홀로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죽음이 없다면 영원한 생명도 없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으심 안에는 우리의 죄문제 뿐만 아니라 육신의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신 것이다. 번제단은 대속의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생명의 접촉점이다. 우리의 죽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이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죽음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의 비밀이다.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활생명, 곧 교회를 예표한다. 이브는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만들어졌는데 그때 그리스도의 예표인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뽑았다. 깊이 잠든다는 말은 죽음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마9:24) 이것을 교회, 곧 부활생명을 산출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일반적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창세기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단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 안에서 부활생명(교회)를 산출하기 위해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심판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산출을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죄와 관계없이 창조 안에서 정해진 것이다.(요12:24) 아담은 또한 그리스도와 인류 두 가지 모두를 예표한다.
그리스도가 그리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이브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담이 이브를 낳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죄 없었던 아담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부활생명을 산출, 곧 거듭나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깊은 잠에 빠지는 거와 같은 피 흘림이 없는 죽음이 필요하지만 죄가 들어 온 후에는 피 흘림의 죽음이 없으면 죄사함(구속)이 없는 것이다.(히9:22)
우리가 왜 인생은 원래 육신이 한번은 죽도록 창조되었나를 알아야 하는가?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뿌리가 잘못되면 열매가 잘 못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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