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사탄의 유혹에 의해 선악과를 먹었다. 나 같으면 먹지 않았을 텐데 왜 먹었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다. 대장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먹었다는 것은 아담의 후손이라면, 즉 사람이라면 다 먹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선악과를 먹었을까? 하는 것이 의문이다. 어떤 이는 선악과를 사과. 또는 포도라고 하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까지 이 선악과에 대한 해석이 불분명하다. 어떤 사고가 일어났으면 그 사고 원인을 명확히 분석해서 대책을 세워야 같은 사고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상태는 어떤가? 여기에 대한 사고 원인 분석이 명확하지 않으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방황할 수 밖에 없다.
1. 성경에서 나무는 일반적 비유로 사람을 말함
성경에서 나무는 일반적으로 생명의 존재, 곧 사람을 말한다. 성경은 올리브나무를 이스라엘, 포도나무를 예수님으로 비유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생명나무는 예수님 자신이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곧 선악의 지식나무(the tree of knowedge)는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핵심이다. 곧 어떤 존재의 생명인가가 핵심이다.
2. 신들은 천사들을 말함. 또한 선악을 분간하는 능력은 천사의 본성임
사탄은 아담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리라’(창3:5) 성경에 의하면 신들이란 천사들을 말한다. 즉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천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증명하는 구절이 사무엘하 14:17에 나온다. ‘이에 왕의 여종이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이제 위로가 되리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천사와 같으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간하시기 때문니이다. 그러므로 주 왕의 하나님께서 왕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삼하14:17)
위 말씀에서도 선악을 분간하는 것을 천사의 본성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어떠함을 대표하는 피조물에는 사람과 천사가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피조물이고, 천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격으로, 천사는 아버지와 아들을 섬기는 종의 격으로 창조되었다. 사람과 천사는 운명에 있어서 격이 틀린 존재다. 왕국의 예를 든다면 사람은 세자로, 천사는 정사들, 권능들로서 판서, 정승들로 창조되었다. 천사들은 섬기는 일을 하는 존재이기에 능력이 필요한 존재다. 그래서 선악을 분간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보좌를 덮는 그룹으로서 천사와 같은 영적피조물로서 창조되었다. 사탄은 천사장의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타락한 천사의 생명, 곧 사탄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3. 위치를 이탈한 자는 또 다른 위치를 이탈한 자를 만듦
노름꾼은 노름꾼을 만든다. 도둑놈은 도둑놈을 만든다. 사탄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자다. 그래서 아담으로 하여금 위치를 이탈하도록 만든 것이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일부 천사들중에도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사람이 되려고 하다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타락한 천사가 있다.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으니’(유6)
피조물의 운명은 변경할 수 없음에도 모두 남이 떡이 커 보여 타락한 것이다.
4. 아담은 왜 선악과를 먹었을까?
그러면 왜 아담이 생명나무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을까? 즉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지 않고 천사의 생명을 취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왜 아담이 보기에 선악의 지식나무가 생명나무보다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보였을까? 여기서 우리는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낮게 창조되었다(시8:5).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였지만 천사에 비해 육신이 약하고, 한번은 죽어야하는 단점과 능력 면에서 조금 낮게 창조되었다. 그래서 아담은 천사가 부러웠던 것이다. 아들이 종을 부러워 한 것이다. 세자가 정승의 위치를 부러워 한 것이다. 그래서 선악의 지식나무를 열매를 먹은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종의 신분을 가진 천사의 신분으로 전환하려 한 것이다. 피조물의 운명은 정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바꾸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소가 개가 되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과 목적과 영광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것은 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목표로 창조하셨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한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의 위치(신분)을 이탈했고 하나님의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간 것을 성경은 죄라고 한다. 히브리어로 과녁을 빗나가다, 목표를 이탈했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의 목적에 이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아담에게 하나님은 네가 무엇을 했느냐 묻지 않으시고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3:9)’라고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네 신분이 아들인데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사탄에 속은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지만 신도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현재 사람은 하나님보시기에 사람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것이다.
5. 위치(신분)를 이탈한 사람에게는 복이 없음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떤 나라에서는 배불러 죽는데 소말리아같은 나라에서 왜 사람들이 말라 죽느냐고 말한다. 피조물은 각자의 격을 지킬 때 정해진 복이 온다. 과장에 줄 봉급이 따로 있는데 과장이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면 봉급을 줄 수 없는 거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줄 복이 정해져 있는데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이탈했으므로 복을 줄래야 줄 수 없는 것이다.
6. 아담은 왜 생명나무를 먹지 않았을까?
히브리어로 생명나무는 ‘크세논’으로 목재, 즉 살아있는 나무가 아니라 죽은 나무라고 한다. 십자가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상호 접점은 죽음 밖에 없다. 높은 생명과 낮은 생명이 만나는 지점은 죽음 밖에 없다. 만물의 생명의 법칙이 그러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이 만나는 접점이다.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도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창세로부터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보기에 생명나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에 비해 보암직도 하지 않고, 먹음직도 하지 않고, 지혜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또 아담은 천사에 비해 약한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였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7. 우주안의 두 전쟁
우주안에는 두 전쟁이 있었다. 첫 번째 전쟁에서 아담은 사탄에게 패하였다. 그러나 둘째사람, 곧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셨다. 우리는 마태복음 4장에 나와 있는 예수님과 사탄과의 전쟁에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마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말로 예수님을 유혹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거든 이 돌들로 빵이 되게 하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봐라.’ ‘네가 나에게 경배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만국의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탄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하는 말은 아담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네가 신이거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하고 하시면서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을 물리쳤다. 또 사람은 세상영광을 취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이 사람이다’하고 하시면서 사람의 위치를 지키셨다. 그러자 마귀는 물러갔다. 마귀는 소리를 지른다거나 기도를 해서 물러가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암송해서 물러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각 피조물에 정해주신 격을 지킬 때 마귀는 물러가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지킬 때 물러가는 것이다. 마귀는 속이는 자이기 때문에 진실 앞에서 물러가는 것이다. ‘마귀가 물러가자 천사들이 와서 섬기더라‘는 말이 있다.(마4:11) 곧 우주 질서가 바로 잡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주 안에서 사람이 제 위치를 지키지 못했을 때 천사들이 대신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했는데 둘째 사람인 예수님이 인생의 위치를 회복하시자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격대로 천사들이 와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우주 안의 첫 번째 전쟁에서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여 자신의 위치를 이탈했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마귀를 물리치신 것이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능력을 키워 마귀를 물리치겠다고 하는가? 능력으로 사람은 마귀를 물리칠 수 없다. 나는 사람이다라고 할 때 마귀는 물러가는 것이다. 소가 마귀를 물리치려고 하는가? 개가 마귀를 물리치려고 하는가? 개와 소는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가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마귀는 자신의 격을 이탈한 자에게만 영향력을 끼친다.
8. 사람의 위치는 십자가에서 회복됨
사람의 위치는 십자가에서 회복되었다. 구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쓰실 수 있는 사람은 창세기 2장의 흙 밖에 없다.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는 그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그 위치는 사람은 단지 흙이고 빈그릇이고 벌거숭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속하셨다. 그 자리만을 하나님은 받으신다. 그 자리만이 인생의 진실이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은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이탈한 사람들은 사탄에게 속아 자신이 사람인 줄 알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의 신분을 이탈한 사람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인것이다. 아담안에서 우리는 속이는 자 아래 있다. 무언가 되는 줄 안다. 자신의 지위, 명예, 재산등이 인격인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속이는 자아래서 속고 것이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진실 만을 받으 신다. 예수님만이 진실하신분(요일5:20)이고, 그분의 이름이 진실(계19:11)이다. 사탄과 싸움은 거짓 대 진실의 싸움이다. 진실은 우리 인생이 단지 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인격을 발견하였다. 속이는 자아래서, 곧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의 슬로건은 높이 오르자, 이름을 내자, 뭉치자이다. 큰 바벨론을 건설하자이다. 개인적으로 왕이 되는 것이 모든 이의 꿈이다. 그러나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인생의 진실된 운명은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낮은 자이고 섬기는 자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인생은 단지 흙이고 벌거숭이고 빈그릇이라는 인생의 진실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이 진실만을 받으신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안에서 모든 이는 이 진실에서 빗나갔다.
9. 하나님께 대하여 악도 버려야 하지만 선도 버려야 함
하나님은 이 타락한 사람을 개선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완전히 없애고 새롭게 창조하셨다. 용광로와 같은 것이다. 좋고 나쁨에 관계 없이 모든 고철을 녹여 새로운 철을 만드는 것이다. 선과 악 중에서 선은 좋은 것이지만 뿌리는 다 한 뿌리다. 다 한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아들은 생명의 관계지 선악의 지식의 관계가 아니다. 회사에서도 회장과 아들은 생명의 관계지만 종업원은 지식의 관계, 곧 계약관계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생명 관계로 회복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 희생, 봉사 등으로 이해한다. 물로 그것도 맞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십자가는 끝냄과 시작이다. 옛창조의 종결과 새창조의 시작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는 악도 끝내야 하지만 선도 끝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 되신 것이다.
사람들은 선하냐, 악하냐를 가지고 판단한다. 이것은 세상의 기준이고 종교의 기준이고 율법의 기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냐 악하냐 묻지 않으시고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선과 악은 다 한 뿌리에서 나왔다. 선악과가 왜 안좋은가를 보면 교회생활을 통해 보면 알 수 있다. 교회생활은 생명의 관점에서 보아야지 선악과를 먹은 세상의 기준으로 형제 자매를 판단하면 늘 분란만 일어난다. 선악과 이것은 사탄의 생명이고 이것의 열매는 세상이고, 종교고 최종적으로 큰 바벨론으로 열매를 맺는다. 세상과 교회는 정반대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 안의 사람 안에는 천사가 되고자하는 모든 욕망이 있다. 세상의 모든 책과 드라마를 보라. 다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종교안을 들여다 보라. 모두들 천사들을 숭배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천사들을 숭배해야 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장차 천사를 다스려하고 천사로부터 섬김을 받을 대상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했다. 사람이 신이 되려고 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역하는 것이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는가? 이것은 지극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10.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구원
‘또한 너희가 탈취물이 되리라 하던 너희의 어린것들과 그 날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 어린 자녀들은 거기에 들어가리니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줄 것이요,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리라’(신1:39)
위 말씀에서도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다. 곧 구원 받을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죽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또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사탄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우리의 구원은 사탄의 생명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이냐하는 관점이다. 사탄의 생명을 가진 자는 사탄이 거주할 지옥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간다.
11. 선악의 지식나무(능력) Vs 생명나무(인격)
선악과를 먹은 세상과 생명나무를 먹은 교회, 곧 능력 대 인격의 대결이다. 천사의 생명을 먹은 세상의 끝은 큰 바벨론이고 생명나무의 결말은 인격의 세계 새예루살렘이다.
선악과는 천사의 생명이기에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 곧 세상과 종교안에는 천사와 같은 선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 천사와 같이 능력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선한 행동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율법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침례요한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어린아이가 침례요한 보다 크다고 하셨다.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교안에서 가장 선한 사람이었다. 지금으로는 김수한 추기경 수준이었다. 종교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도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올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종교 안에서 아무리 선하더라도 하나님의 왕국은 올 수가 없는 곳으로 차원이 틀리다는 것이다. 물고기의 세계와 독수리의 세계는 틀리다. 독수리는 공중에서는 왕이지만 물 속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차원이 틀린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악과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기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대책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는 사는 것이다. 악도 죽어야 하지만 선도 죽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끝마침'(롬10:4)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 되셨다고 한다. 이것은 아담안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질서를 끝냈다는 의미다. 첫 사람 아담이 만든 세상과 질서로는 하나님의 왕국의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아담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든 고쳐서 쓰려고 한다. 이것이 종교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될 수 없다. 사실 그 왕국은 그 생명이다. 동물의 생명을 가지면 동물의 왕국에 들어가고, 사람의 생명을 가지면 사람의 왕국에 들어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담의 생명은 아담의 왕국이지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아담의 생명을 가진 우리는 설령 죄가 없다 하더라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전 15:50) 그래서 아담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죽은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요 3:3-6)
그런데도 우리의 관념은 여전히 이미 십자가에서 사라진 선악과의 세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