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redemption)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엡1:7)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개인적으로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핵심 단어는 구속이란 용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사탄에 팔렸던 우리 인생을 예수님의 피값으로 되물려 사셨다라는 의미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이는 많지가 않다. 구속이란 말은 기독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이다. 타 종교에는 구속이란 말이 없다. 모든 종교와 철학, 도덕은 현재의 사람을 개선시켜서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구속 없이도 얼마든지 교양으로 성경을 읽고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구속이 없는 한 성경은 교양과 도덕 책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구속이다. 구속이란 인생의 원 위치, 곧 원래의 출발점을 말한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죽고 다시 산다.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이다(고후5:17)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하시면서 위치를 물으셨다. 이것은 아담이 자신의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위치란 곧 인생의 신분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창조되었다(눅3:37).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 네가 신들(천사들)과 같이 될 것(창3:5)이란 사탄의 유혹으로 인해 선악과, 곧 타락한 천사인 사탄의 생명을 먹고 자신의 위치(신분)을 이탈하였다. 곧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격으로 창조된 천사의 위치로 신분전환을 꾀하였다. 위치를 이탈한 것,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한다.
인생은 원래 흙으로 지어지고 여기에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와 살아있는 혼으로 창조되었고 이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인생의 출발점에서 반대방향으로 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을 죄라고 한다. 죄란 목표에서 빗나가다. 이탈하다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된 것이다(롬3:23). 예를 들어 군대에서 행군을 한다고 하자. 그러면 츨발점이 있고 목표지점이 있다. 그런데 반대방향으로 왔다는 것이다. 원래의 목표지점에 도달하려면 출발점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이것이 구속이고, 회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의 위치를 회복하면 죄가 없는 것이다. 내가 다시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면 죄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는 죄가 없더라도 친구에게는 죄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하에 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본래의 신분을 회복하면 죄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죄는 없더라도 감옥에 갈 수도 있고 주변사람들에게 죄를 지을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의 구속, 곧 원 위치를 위해서다. 구속 곧 하나님 앞에서 이탈되었던 우리의 위치가 회복되면 죄가 없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구속은 인생의 원 위치를 말한다.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인생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창세기 2장 7절이다. 이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다라고 하셨다. 죄란 바로 이 인생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기 때문에 이 위치로 돌아가면 죄가 없는 것이다. 이 위치가 인생의 출발점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을 만큼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후에 동산에서 추방한 다음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였다(창3:27) 불타는 칼, 이것은 번제단이고 십자가다. 우리가 다시 생명나무에 이르려면 십자가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타락한 아담을 개선해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종결하고 다시 시작해서 그분의 창조목적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헌집을 고쳐서 사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헐고 새로 지으시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출발점 이것이 구속이다. 이 구속의 지점이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우리는 구속하신 지점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지점도 아니고 물위를 걸어가신 지점도 아닌 십자가다. 십자가란 곧 창세기 2장 7절에서 인생은 흙이고 빈그릇이고 벌거숭이인 지점(원위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벌거벗긴채 죽으셨다. 이 지점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다라는 지점이다. 이 지점이 인격의 진실이다. 이것만이 인생의 진실이고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위치를 이탈하여 다 속이는 자 아래 있었다. 그래서 사람의 진실이 가려져 있었다. 세상의 명예, 권력, 부, 이런 것이 인격인 줄 알았다. 속이는 자 아래서 우리는 다 위치를 이탈하여 진짜 사람이 없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사람의 진실을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사람으로 오셨다. 그분은 진실하신 분이다(요일5:20). 가짜만 있을 때 우리는 진짜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짜를 보면 가짜를 구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속이는 자 대 진실하신 분, 가짜 대 진실, 사탄의 능력 대 예수의 인격의 싸움이다. 능력의 세계에서 인격의 세계로 옮겨 온것이다. 세상과 종교에서 교회, 곧 인격의 세계로 옮겨 온 것이다.
아담은 육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여 죽지 않는 천사를 부러워하여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한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마귀를 이기셨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참 사람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사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이 사람이다하면서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마귀를 물리치쳤다.
그러나 인생의 위치를 극명하게 보여 준 것은 십자가였다. 인생은 누구든지 십자가에 매달면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십자가에 보여주셨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 안에 있는 인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였다.(창2:17) 구약의 관념에 의하면 하나님은 의인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 곧 죄 있는 아담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렇기에 아담 안에서 100점짜리인 예수님 마저 하나님은 십자가에 매달았다. 모든 아담은 죽은 자로 보신 것이다. 그러므로 100점짜리인 예수님도 십자가로 갔기에 99점이하는 볼 것도 없이 다 십자가로 가야한다. 할말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은 십자가로 가야 한다. 이곳이 우리의 인생의 출발점이다. 인생은 단지 흙이고 빈그릇이고 벌거숭이다.
선악과, 선과 악은 다 한 뿌리다. 한 나무다. 한 나무에 선도 열리고 악도 열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이것을 다 버려야 한다. 십자가에서 다 없애 버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관계로 새롭게 태어 나야한다. 선악과를 먹은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그동안 지식관계, 종교관계로 대하였다. 종업원의 관계였다. 그러나 원래 인생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관계, 생명의 관계다. 세상과 종교는 선악의 지식나무를 먹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교회는 생명나무를 먹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교회는 극과 극의 관계이다. 선악과가 왜 안 좋은지를 알려면 교회생활을 보면 안다. 교회에서는 선악을 가지고 형제자매를 판단하면 늘 분란만 일어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한 생명의 연합체다.
우리가 흔히 회개한다는 말을 한다. 회개한다는 말은 돌아 간다는 말인데 어디로 돌아 간다는 말인가? 곧 구속의 지점, 인생의 원래의 위치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네가 어디있느냐‘ 물으신다. 그때 우리는 나는 흙입니다. 빈그릇입니다. 벌거숭이입니다.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여기가 우리의 구속지점이다.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야 (회개) 할 위치다. 십자가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창세기 2장 7절의 살아있는 혼으로 창조된 아담 보다 강화된 위치에 와 있다. 창세기 2:7절의 사람은 사탄에게 유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더 이상 사탄이 유린하지 못하도록 씨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
만들어진 아담은 사탄이 유린하였지만 새로운 씨에 의해 태어난 둘째 사람은 사탄이 더이상 방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만들어진 사람과 태어난 사람의 차이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다. (고후5:17). 새롭게 창조되기 위해 인생은 구속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타락한 인생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다시 부르시는 방법은 구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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