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창세기 3장 15절( 최초 계시된 복음)

올더스조에 2023. 12. 21. 15:41

 

 

순 서

 

1. 들어가는 말

2. 몇 가지 용어에 대한 개념

3.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사람의 운명

4. 두 씨

5. 결 론(창세기 315절에 대한 해석)

 

 

1. 들어가는 말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it shall bruise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GEN 3:15)

 

창세기 3장 15절은 일반적으로 기독교계에서 원시복음이라고 한다. 나도 약 40여전에 처음 복음을 접하고 당시 목사님과 몇 명이 모여 성경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이 구절을 원시복음이라고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 그 당시 이 말씀에 대해 왜 복음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듣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잘 알지 못했다. 아마 지금도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 중에도 이 말씀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자 예언이며, 이후 이 말씀의 성취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2. 몇 가지 용어에 대한 개념

 

뱀(The serpent)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은 계시록 12장에서 옛 뱀으로 등장하는 사탄이자 마귀이다.

 

‘그 큰 용 즉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가 내쫓기더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 12:9)

 

 

여자(The woman)

여자는 성경에서 몇 가지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이브(하와) :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곧 부활생명의 예표

첫 번째는 당연히 아담의 아내 이브이다. 그런데 이브는 아담이 범죄하기 전인 창세기 2장에서 이미 교회의 예표로 계시된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1-23)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아담과 이브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를 그리스도와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것은 큰 신비니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바울은 여기서 아담과 이브, 곧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이 그저 육체로 남녀로 태어났으니 본성적으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그리스도와 교회를 예표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는 아담이 죽음을 통해 신부 이브를 산출하였듯이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 신부 교회를 산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브는 교회의 예표로서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부활생명을 상징한다.

 

-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의 위치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기본적으로 여자의 위치에 있다. 사람은 창조 시에 영생을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로 창조되었다.(창3:22) 즉 씨를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로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아내로 삼기위해 창조했다. 현재 형제와 자매로 구성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혼인잔치를 통해 아내가 된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릴지니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이르렀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도다.’(계 19:7)

 

하나님은 사람을 아내로 삼기위해 창조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남편으로 두지 않는 사람들을 성경은  음녀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남자라고 한다면 그는 동성애자가 된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이며, 자신이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는 자이다. 그래서 율법은 동성애자에게 사형에 처하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서 살인자는 용서받은 사례가 있으나 동성애자는 용서받은 사례가 없다. 소돔과 고모라의 주된 심판의 원인이 동성애였듯이 마지막 때 심판의 주된 원인도 타락한 인류의 동성애이다. 아담의 주된 타락원인은 한번 죽을 수밖에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타락했다. 이는 영적으로 여자-사람이 남자-신이 되겠다는 의미로 동성애자가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되면 사탄이 뿌린 씨가 열매를 맺어 세상에 동성애가 창궐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남자-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여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자’라고 인정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성경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여자는 남자의 형상이라고 말한다.(고전 11:7)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대표한다. 그래서 여자는 사람을 대표하여 머리를 길러 덮음으로 자신의 머리가 없음을 표현해야 한다. 이는 사람의 머리는 하나님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여자는 신약에 와서 동정녀 마리아임이 밝혀졌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마 1:23)

 

 

3.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사람의 운명

 

우선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

 

영이신 하나님은 몸이 없기에 하나님 자신을 표현할 몸을 필요로 하신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화할 목적으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이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생명-씨를 이식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려면 하나님과 마음(생명)이 같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고 이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씨를 이식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창조될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었고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몸의 영원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아담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이 없었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였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창 3:22)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요 1:12-13, 요일 5:1) 만일 영원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두 분이 되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에 처음에 아담이 영생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의 부족에서 오는 오류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흙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 곧 씨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사람의 운명은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영에 속한 몸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흙으로 창조된 사람은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반드시 한 번 죽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육체의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다. 전선이 연결되어 전기 들어오면 살았다 하고 전기가 끊어져 전기가 안 들어오면 죽었다고 하듯이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하나님과의 연결과 단절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육체의 사망이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 17절에서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the day)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육체의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창세기 2장 17절의 ‘죽으리라’는 의미가 육체의 사망을 의미한다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바로 먹은 ‘그 날(the day)’에 둘 다 죽어야 했지만 죽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한 바로 그 날에 창세기 3장 15절에서 미래 어느 날에 ‘여자의 씨’ 출현을 약속하는데 이는 아담이 죽지 않고 종족을 보존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체로 창조된 사람을 한 번 죽고 부활하도록 운명 지었다. 그래서 흙 사람은 어떤 씨를 심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 즉 부활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씨를 심는 자는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심는 자는 불의한 자의 부활로 열매를 맺는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3. 두 씨(하나님의 씨와 사탄의 씨)

 

여자의 씨

 

성경은 사실 두 씨, 곧 하나님의 씨와 사탄의 씨 사이의 대립에 관한 책이다. 영(靈)은 씨라는 의미로 흙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도 영이고, 사탄도 영으로 둘 다 형상-몸을 필요로 한다. 성경은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과 사탄이 흙 사람을 사이에 두고 서로 차지하려는 전쟁에 관한 책이다. 하나님도 자신의 씨를 흙 사람에 심어 하나님의 아들들을 얻는 것이 목표이고 사탄도 자신의 씨를 흙 사람에게 심어 사탄의 아들들을 얻는 것이 목표다.

 

영원한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지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부터 흙 사람에게 씨를 주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씨를 주시기 전에 아담이 먼저 타락했다. 장애물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하는 지휘관이 앞에 장애물이 나타났고 해서 목표가 바뀌지 않듯이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타락했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아담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씨 곧 ‘그녀의 씨( her seed, 단수)’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씨’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씨를 주시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이신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너무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씨를 주시지는 못하고 하나님의 씨를 가진 누군가 와서 사람에게 씨를 주어야 한다. 사람에게 씨를 심으려면 사람이 심어야 한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인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한 방법은 여자에게 그 씨(성령)을 이식하여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를 출생시킨 것이다.

 

‘그가 이 일들을 생각할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너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 안에 수태된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았느니라.’(마 1:20)

 

그러므로 달걀의 예를 든다면 아담은 씨가 없는 무정란이었다면, 예수님은 씨가 있는 유정란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무정란인 아담이 아니라 유정란인 예수님에게 있다. 그래서 아담은 설령 죄가 없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롬 5:14)

 

모형이란 실재가 아니란 의미다. 모형은 모델하우스와 같은 개념으로 실재 집이 지어지면 그 역할은 끝나고 해체된다. 마찬가지로 모형인 아담은 실재이신 예수님이 오면 그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아담이 죄를 지어서 사망이 왔다고 알고 있지만 바울이 로마서 5장 14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담은 범죄 유무와 관계없이 씨가 없기 때문에 사망이 군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해야만 영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운명 지어진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요 16:9)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를 짓도록 허용하셨을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위해 죄와 관계없이 죽어야만 했다.(고전 2:7) 그리고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해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죄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죄를 허용하고 죄(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죄로 인해 율법이 들어왔는데 이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갈 3:24)

 

성경에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은 사실 ‘씨-생명’에 대한 약속이다. 이 씨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씨로 처음 계시되었고, 이후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창 12:7, 13:15-16, 17:8) 이 씨는 결국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하나님은 몸이 없는 영이시고 우리는 몸을 가진 피조물이라는데서 늘 괴리가 발생한다. 그래서 몸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몸을 가진 우리에게 씨-생명을 주시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통상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저 하늘에서 앉아서 금 나와라 뚝딱하면 다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면 왜 굳이 예수님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창조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 곧 하나님의 아들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고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의 씨를 이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식하는 지점도 다른 곳에서는 안 되고 반드시 번제단, 곧 십자가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영이신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로서 하나님 자신이 번제단, 곧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자신의 씨를 흙 사람에게 이식하려면 반드시 이 씨는 사람으로 와서 하나님께서 정한 운명대로 죽고 다시 살아야 한다. 이는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부활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씨와 열매는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가 잠든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 곧 씨가 되심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씨를 주시겠다는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첫 열매를 수확함으로서 이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새로운 종자 씨를 가지게 되었고, 이 씨를 통해 많은 열매를 수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는 씨가 될 수 없었고 부활하신 후에 열매가 되심으로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씨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육체로 계실 때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없었고 부활 이후에야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성령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결국 씨라는 의미이다.

 

사람 농사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목표는 육체가 아니고 열매, 곧 부활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되 육체로 계시는 동안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만을 믿어서는 구원이 없다.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가 나고 호박씨를 호박이 나듯이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이 육체로 와서 죽고 다시 사신 영(인격)-씨를 심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같은 씨를 통해 같은 과정을 거쳐 같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육체로 와서 죽고 다시 사심으로 첫 열매가 되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으로 인류에게 영생을 주는 씨가 되셨다는 의미다.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은 인류에게 바로 씨를 주실 수 없고 중재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실 수 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육체로 오셔서 죽고 다시 사신 과정을 거쳐 인류에게 심을 수 있는 일종의 개량된 씨를 산출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산출해 낸 ‘그 씨’를 심어야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사람 농사의 과정, 곧 예수님과 같은 과정을 거쳐 예수님과 같은 종류의 부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모양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첫 열매 종류가 된다는 의미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 중의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 1:18)

 

 

사탄의 씨

 

여자의 씨가 그리스도라면 사탄의 씨는 적그리스도다. 하나님이 육체로 오신 분이 그리스도라면 적그리스도는 사탄이 육화된 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대적 사탄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하루 하루가 영적전쟁이다.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듯이 전쟁을 하는 군인은 적을 알아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위태롭지 않다. 하나님께서도 사탄의 깊은 곳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책망하는 말씀이 있듯이 우리는 사탄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와 두아디라에 있는 남은 자들 곧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하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사탄의 깊은 곳을 알지 아니한 모든 자들에게 말하노니 내가 어떤 다른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리라.'(계 2:24)

 

창세기3:15에서 하나님께서는 뱀(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여자의 씨는 그리스도이며, 뱀의 씨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성경은 적그리스도를 가롯 유다라고 계시한다. 그러면 그 이유를 살펴보자.

 

- 멸망의 아들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을 때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내가 지켰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의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성경 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니이다.’(요 17:12)

 

예수님은 유다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바울도 예수님과 같이 적그리스도를 ‘멸망의 아들’이라 부르고 있다.(살후 2:3)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살후 2:3)

 

예수님은 유다를 '멸망의 아들'로 불렀고, 바울은 적그리스도를 '멸망의 아들'로 불렀다. 이로 보건데 유다는 사탄이 육화된 적그리스도임을  일단 유추해 볼 수 있다.

 

 - 바닥없는 구덩이

그렇다면 만약 유다와 적그리스도가 둘 다 '멸망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다면 그들은 동일한 인물인가?, 아니면 다른 두 명의 '멸망의 아들들'인가? 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 문제를 같이 살펴보자. 요한계시록11:7에서 보면 두 증인을 죽인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온 ‘짐승’이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증언을 마칠 때에 바닥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을 대적하며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이리니'(계 11:7)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구덩이’에 가게 되었는가? 만약 유다와 적그리스도가 하나의 동일한 인물이고 유일한 한 명의 ‘멸망의 아들’이라면 그는 사도행전1:25에서 처럼 유다는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갔다고 했을 때, 그 거처는 ‘구덩이’를 말한 것일 것이다.

 

‘그가 이 사역과 사도직을 맡게 하옵소서. 유다는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가려고 범법함으로 그 직분에서 떨어져 나갔나이다, 하고’(행 1:25)

 

성경은 유다가 ‘자기 자신의 처소’로 갔다 라는 구절을 어떤 다른 사람에게 쓰여진 적이 없다. 다시 계시록17:8에서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앞으로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라.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세상의 창건 이후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여전히 있는 그 짐승을 보고 놀라리라.’ 고 말씀하신다. 이 '짐승'은 '두 증인'을 죽인 인물로서 그는 적그리스도이다. 지금 여기에서 그에 관한 네 가지 언급이 있다. 첫째 그는 전에는 '있었고',  둘째 그는 지금은 '없으며', 셋째 앞으로 그는‘ 바닥없는 구덩이’로부터 나올 것이며, 넷째로 '멸망으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살았던 당시에는 짐승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에는 지상에 있었으며 앞으로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다시 올라 온 뒤에 다시 내려갈 것이다. 이것은 적그리스도가 전에는 지상에 있었으며, 미래에 다시 '구덩이'에서 올라올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과거의 어느 시기에 있었느냐?'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만일 유다와 적그리스도 동일 인물이라면 이 질문은 쉽게 해결된다. 유다가 땅에 있었을 때 그는 있었으며, 유다가 '자기 자신의 처소(his own place)'(행1:25)로 갔을 때 지상에 그도 없었다. 유다, 즉 적그리스도가 다시 앞으로 '바닥없는 구덩이'이로부터 나타날 것이다.

 

 

5. 결론(창세기 3장 15절에 대한 해석)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 너와 여자 사이에

문자적으로 보면 ‘사탄과 이브 사이에, 또는 ‘여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을 예표하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산출된 교회라고 할 수도 있다.  

 

-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앞서 살펴 본대로 ‘네 씨와 그녀의 씨’는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가리킴으로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사이에 적개심으로 두리니’라고 볼 수 있다.

 

-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그리스도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사탄은 잔머리를 굴려 세상을 속이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속였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 3:4-5)

 

그러나 이것은 아담과 이브가 속은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어차피 한번은 죽고 부활하도록 운명지어 졌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운명, 즉,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사람 농사과정을 회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하셨는데 이는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육체가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너의 운명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차피 한번은 죽을 수 밖에 없다. 아담아 너는 속았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사람으로 창조했는데 아담은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타락했다.  그래서 아담은 신도 아니면서 신인척 하는 유교병처럼 부풀려진 신과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무교병으로 창조하였는데 위치를 이탈하여 유교병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과 같이 된 사람은 심판의 대상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신과 같은 아담을 대신하여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것을 확증하였다. 예수님은 인류 유사이래 가장 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 등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었던 아담이 소망하는 그 사람이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탄의 말이 맞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지 시험을 맞게 되었다. 만일 인류 유사이래 가장 신과 같았던 1등 인간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2등 이하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확증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는다면 사탄의 말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반사람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죽으셨다. 이로써 사탄의 말은 거짓으로 폭로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임이 입증되었다. 마귀와의 싸움은 '진실 대 거짓'의 싸움이다. 인류 유사 이래 가장 신과 같았던 예수님마저도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이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확증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사람은 죽지 않는 신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증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운명 지어준 인간의 진실을 가지고 사탄의 거짓을 폭로함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人格), 곧 죽음을 가지고 사탄을 이기신 것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점이라면 아담은 죽지 않는 신이 부러워 하나님이 정해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네가 신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마귀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하나님이 정해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 오르신 분이다. 성경에서 죄란 하나님께서 정해준 피조물의 ‘위치를 이탈하다’라는 의미고 의(義)는 ‘정 위치에 있다’라는 의미다.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에게 각자의 격(格)을 부여하였다. 개는 개의 위치를 지켜야 하고, 소는 소의 위치를 지켜하고, 천사는 천사의 위치를 지켜야 하듯이 사람은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의(義)다. 만물이 각자의 격을 지킬 때 우주질서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다.

 

마귀는 잔머리를 써서 온 세상을 속이는 자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마귀의 거짓이 폭로됨으로서 속이는 자 마귀의 머리가 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요한일서 3장 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요일 3:8b)

 

이에 대한 예표가 구약에서는 다윗이 돌 한 개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죽이는 장면이다.

‘손을 자루에 넣어 거기서 돌을 꺼내어 돌팔매 기구로 던져 불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그 돌이 그의 이마에 박혀 그가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지니라.’(삼상 17:49)

 

돌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한다.(단 2:45, 벧전 2:4) 이것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상징인 골리앗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진실을 가지고 마귀의 거짓을 폭로함으로 승리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흙으로 창조된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사람은 흙이지 씨가 아니다’라는 것이 확증된 것이다. 이로써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고 잔머리를 굴려 사람을 속인 사탄의 머리가 상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다윗이 사탄을 상징하는 골리앗을 돌로 머리를 쳐 죽이는  장면은 바로 잔머리를 굴려 아담을 속인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에게 승리함으로서 '마귀의 일들을 멸한 것' 은  마귀의 속임수를 폭로한 것이지  마귀 자체를 멸망시킨 것은 아니다. 마귀는 영적인 피조물로서 죽지 않는 피조물이다. 마귀의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파멸은 계시록에서 가서 달성된다.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계 20:10)

 

 

-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의 머리를 상하게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의미다. 전쟁은 어느 일방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사례는 없다. 아무리 약한 상대와의 전쟁이라도 아군은 피해가 있게 마련이다. 이 전쟁은 우주 안에서 1인자와 2인자의 싸움이다.

 

우리는 앞에서 유다가 사탄이 육화된 적그리스도와 동일 인물임을 살펴보았다. 성경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도 주의 천사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모든 고난 속에서 친히 고난당하시고 그분의 현현의 천사로(the angel of his presence) 나타나 그들을 구원하시며 친히 사랑하고 동정하사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의 모든 날에 그들을 품으시며 이끄셨느니라.’(사 63:9)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는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문자적인 나무가 아니다. 특히 창세기 3장에서는 사탄을 뱀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문자적인 뱀이 아니라 사탄을 다르게 표현한 것임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사탄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타나 중요한 사역을 할 때마다 적그리스도로 나타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였다. 이미 에덴동산과 갈보리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였고, 그리고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할 것이다.

예수님이 육체로 계시는 동안 적그리스도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서른 개에 팔아 넘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였다. 물론 마귀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몰은 이유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게 하여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수포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마귀를 대신하여 지나가던 자들이 아래와 같이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회피하도록 조롱하였다.

 

‘지나가던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고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네 자신이나 구원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수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그분을 조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들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 것이라.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니 그분께서 그를 원하시면 이제 그를 건져 내실 것이라. 그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같은 말로 그분을 욕하더라.(마 27:39-44)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신)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마귀 조롱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인류에게 영생을 주는 씨가 되신 것이다. 마귀가 ‘네가 만일 신이거든’ 하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도할때 예수님은 ‘나는 사람이다’ 라고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대응하셨다. 예수님은 줄곧 자신을 향해 '사람의 아들(인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사람의 운명, 즉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과정을 처음 걸어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피조물의 모양과 위치에서 창조자의 뜻에 순응하신 것이다. 그래야만 씨-하나님은 흙-사람에게 '씨'를 이식함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조롱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서 이 우주적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오르신 것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우주적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으로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씨, 곧 영이 되신 것이다.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동일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된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이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얻게 된 것이다. 아무튼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시편 22편 6절의 성취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싸며 사악한 자들의 무리가 나를 둘러싸고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시 22:6)

 

그런데 시편 22편 6절은 손과 발 두 군데를 언급하지만 창세기 3장 15절은 발꿈치만의 상처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양손과 양발이 못에 박히셨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셨다. 다섯군데 상처를 입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주적 전쟁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손과 발, 옆구리에 전상을 입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영광의 상처는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였으나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분의 두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분 옆구리에 넣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 그 뒤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시니’ (요 20:24-25, 27)

 

창세기 3장 15절의 '발꿈치의 상처'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섯군데의 상처'는  아무래도 매치가 안된다. 그래서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라는 말씀의 의미는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영광의 상처 다섯군데를 모두 가리키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마귀의 의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회피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수포로 돌리는 것이었다.  마귀는 문자적으로 예수님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회피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회피할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베자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잡는 자들은 다 칼로 망하리라.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마 26:52-53)

 

그러나 만일 당시에 예수님이 위 말씀에 나오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십자가를 회피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영원한 목적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리되면, 반드시 이렇게 되리라, 한 성경 기록들이 어떻게 성취되겠느냐? 하시더라.'(마 26:54)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마귀의 의도를 분쇄하고 승리하셨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어야만 마귀에게 승리가 가능한 구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사람에게 씨를 주는 것인데 예수님이 죽지 않으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씨가 될 수 없고, 죽음을 통과해야만 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와의 우주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부활하셨지만 인류구원을 위한 우주적 전쟁에서 영광의 상처는 남은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신 상이 용사이다. 예수님은 손과 발, 옆구리에 상처를 가지고 계시지만 하나님 보실 때 이것은 발꿈치를 상하게(bruise his heel) 하는 정도의 상처로 보시는 것 같다.  

 

또한 발꿈치는 사람의 육체의 힘을 상징한다. 그래서 고대에는 죄인이나 포로에게 형벌로 발뒤꿈치나 아킬레스 건을 자르는 형벌을 가하곤 했다. 과거에는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면 회복할 수 없었다.  이 형벌을 당한 사람은 힘을 쓸 수 없어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다.  그래서 발꿈치가 상한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육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로 인해 십자가 형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것은 사망이 아니고  새로운 생명인 부활로 가는 과정이다. 마귀의 고소로 인해 예수님의 발꿈치(육체의 생명)에 상처를 입었으나 예수님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더 이상 해를 입지 않는 부활생명을 얻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와 우주적 전쟁에서 마귀의  공격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여 하나님의 최종목표를 탈취하신 것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