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대신(for)이 아니고 함께(together, with)

올더스조에 2016. 11. 1. 23:16

대신(for)이 아니고 함께(together, with)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대신’이라는 말은 신약에 한 번 나오고 대부분 ‘함께’ 죽었다 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려 하심이라.'(벧전 3:18)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롬 6:4)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 6:6)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 2:20)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딤후 2:11)
     
그래서 사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대속’이란 말보다 ‘구속’이란 용어를 대부분 사용한다. 그것도 대속이란 단어는 없고  ‘대속물(ransom)’ 3번, ‘희생물(sacrifice)’이란 용어가 딱 1번 나오고 그 외는 모두 ‘구속(redemp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마20:2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막10:45)
‘그분께서 정하신 때에 증언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ransom)로 자신을 주셨느니라.’(딤전 2:6)
‘그러므로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sacrifice)이 되셨느니라.’(고전 5:7)
     
     
그리고 속죄(atonement) 라는 용어도 신약에서 딱 1번 사용되는데 이것의 의미도 그리스도와 하나(at + one + ment)가 된다는 의미로 ‘함께’라는 연합의 의미다. 
‘그러할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속죄(atonement)를 받았으며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또한 기뻐하느니라.’(롬5:11)
     
그렇다면 왜 함께 죽지도 않았는데 함께 죽었고, 이것이 우리를 위한 대속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종교적으로 쉽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에 대한 분명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담의 타락의 원인을 알아야한다. 사탄은 아담에게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창3:4~5) 하였다. 즉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것이라는 말로 아담을 유혹했고 아담은 여기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즉, 신이 되고 싶어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사람의 존재적 위치를 물으신 것이다. 아담은 사람으로서 사람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데 죽지 않는 신이 부러워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근원적인 죄는 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은 거짓말이다. 여기에서 아담은 속은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자 하나님은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흙이지 신-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누구에게서 확증되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확증되었다. 
     
아담은 사탄의 말에 속아 선악과를 먹고 신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다운 사람을 원하지 신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이다. 그래서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 받아야한다. 바로 예수님은 신과 같은 사람을 대신해서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요 19:5)
민수기 21장에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의 생활에 불평불만을 표출하자 불 뱀들이 나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를 위해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시니라.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보면 살더라.’(민 21:8~9) 라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사건과 연관지어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 14~15) 하셨다. 그렇다면 지금도 이 사람을 쳐다보면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본질적 의미는 ‘이 사람을 보라’(요19:5)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을 쳐다보면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죄인이 아님에도 죄인의 모습으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렇게 단순하게 받아드린다. 물론 그것도 훌륭한 믿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릴 때는 우리가 이렇게 받아드려도 되지만 좀 더 성숙하게 받아 드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선 민수기를 살펴보면 불 뱀이 나오는데 창세기 3장에서도 뱀은 사탄을 상징한다. 특히 킹제임스 성경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뱀을 표현할 때 일반적인 뱀인 snak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serpent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민수기에서도 21장에서도 뱀을 serpent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이것은 사탄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사탄을 예표하는 불 뱀(fiery serpent)에게 물린 자다.  불 뱀의 독이 아담 안으로 들어 온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불 뱀은 생물이기 때문에 만들 수가 없다. 불 뱀을 만들려면 놋으로 밖에 만들 수 없는데 이는 불 뱀의 색깔과 놋 뱀의 색깔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불 뱀을 놋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불 뱀이 장대에 달려하는데 대신 놋 뱀이 달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놋 뱀(the serpent of brass)은 예수님을 예표한다. 놋 뱀은 독이 없는 불 뱀의 모형이다. 예수님은 죄는 없지만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성경에서 놋 쇠는 살균기능이 있는 철이다. 그래서 성막 기둥 받침대도 놋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놋 뱀은 불 뱀에 물린 자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쳐다보면 산다는 것인데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형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모형이 아닌 실재를 살펴보자. 어떻게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면 사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아담은 왜 사탄-불 뱀에게 물렸는가? 즉 아담은 왜 사탄에게 속았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이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의(義)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즉 바른 위치에 오면 의(義)롭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의 의와 하나님 나라의 의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아담은 아들의 위치에서 신(천사)-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을 죄라고 하고 다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로 원위치하면 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는 씨-하나님 앞에서 흙의 위치에 있다. 그런데 사탄이 신, 곧 씨가 될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분의 피를 통해 우리를 구속했다고 하는데 이 의미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간의 원래의 위치, 곧 흙이라는 위치를 찾아 주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원 위치해주신 것을 구속이라고 하고, 사람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인간의 원 위치를 발견하고 돌아가는 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쳐다보면 어떻게 살게되고 이것이 인간의 원래의 위치, 곧 구속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인류의 소망은 무엇인가? 죽지 않는 신이 되는 것이다.(창3:5)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있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어야지 신과 같은 사람은 창조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유사이래 가장 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물 위를 걸어가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은 자를 살리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는 등 참으로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소망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래서 드디어 예수님대에 이르러 인류도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이 실현되는 것 같았다. 아마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설마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능력으로 보아 어떤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 십자가에서 내려 올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제 불 뱀을 대신해서 놋 뱀이 장대위에 달리었듯이 예수님은 신과 같은 사람-아담을 대신해서 심판받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죽지 않았다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창3:4) 라는 사탄의 말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저버린채 십자가에서 일반사람과 다름없이 너무도 평범하게 죽었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신 말씀이 완전히 확증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며 유사 이래 가장 신과 같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꼼짝 못하고 죽음으로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은 거짓으로 완전히 확증 된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1등 짜리 인생도 죽었기 때문에 2등 이하는 보나마나 다 죽는다는 것이다. 나는 혹시 십자가에 매달리면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가 죽지 않았음에도 함께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곧 예수님의 복음은 노력을 통한 것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 안에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인 것이다. 공자나 석가모니 같은 사람이 되려면 인류 중에 과연 몇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복음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가지고 인류를 구원한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과 같은 인간의 운명을 인정하면 나는 구속 받은 사람인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갈 필요도 없다. 1등짜리 인생도 죽었기 때문에 2등이하는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죽은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원래의 위치로 회복, 곧 구속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류는 그 누구도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됨으로서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이 만천하 폭로 된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운명, 곧 사람의 진실로서 사탄의 거짓이 폭로 된 것이다. 진실로서 거짓을 이긴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의 승리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승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승리다. 죽음이라는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란 이 사람을 보고 인간의 정체성-하나님이 정해 주신 흙이라는 인간의 위치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의 환상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사람은 흙이지 결코 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창3:19)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여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탄에게 패하였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에게 승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십작가에서 죽었다. 그런데 무슨 사람이 영원히 살게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신이 죽게 되었다는 황당한 소리를하는지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살아났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그래서 부활했다면 그것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서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만 특별히 적용되는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희안한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에게 적용되었던 것이 나에게도 적용되어야 복음이지 예수님 한 사람에게만 특별히 적용되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육체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도록 만든 운명을 맞이했다. 아담은 이 운명을 거부하고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승리한 것이다. 사람 예수가 신- 사탄을 이긴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승리고 하나님의 승리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리는 힘쓰고 노력할 필요없다. 예수님도 죽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매달으면 사람은 죽도록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이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승리다. 그래서 복음이다. 내가 노력해서 얻어으면 복음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인간의 운명을 가지고 승리했기 때문에 복음인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인간의 죽음이라는 운명을 인정하면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6:8)


  내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인간의 운명을 인정하면 된다.

 

 아!  예수님의 복음은 얼마나 쉽고,  얼마나 가벼운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마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