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하나님의 경륜의 신비-하나님은 사람을 왜 죄인이 되도록 허용 했는가?

올더스조에 2016. 11. 2. 23:44

하나님의 경륜의 신비-하나님은 사람을 왜 죄인이 되게 허용 했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왜 사람을 죄인이 되도록 허용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또 이런 생각을 우리도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 들여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어서 사람이 죄를 짓게 해서 죽게 만들었는가? 우리가 죄인이 안됬으면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었을 텐데 라며 아담을 원망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우리의 일반적 상식적 수준일 수 있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믿지 않는 자들의 이러한 질문에 마땅한 답을 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단지 누군가 물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어찌 알겠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답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도 훌륭한 답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주가 말하노라.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55:8~9)

 

하나님은 그렇게 단순한 분이 아니다. 전능하신 분이 아무 필요도 없이 우리 인간들의 상식수준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했겠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죄인이 되게한 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람을 죄인되게 하신 것은 아니지만 미리 죄인 될 것을 아시고 모든 대책을 수립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죄인이 되어야만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모를리 없다. 아담이 타락할 것을 미리 아셨고 그에 대한 대책을 창세전에 이미 세우셨다.(고전2:7~8)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7~8)

 

비록 사탄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것을 미리 아셨지만 사탄이 방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 강화된 대책을 내놓으신 것이다. 어찌 피조물이 창조자의 지혜를 따라 갈 수 있겠는가? 사탄의 타락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더 드러내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하나님의 경륜의 신비를 알아보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먼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사람에게 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몸이 없으시기에 그분의 절대적 갈망은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형상-몸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라.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그를 창조하고 그를 지었으며 참으로 내가 그를 만들었느니라.’(43:7)

 

그런데 몸이 없으신 하나님을 사람이 합당하게 표현하려면 사람은 하나님과 한 마음, 곧 한 생명이어야 한다. 그런데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사람은 씨-하나님 앞에서 흙-사람의 위치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씨-생명을 이식 받아 다시 태어나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자였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즉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3:22)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결과 됨으로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단지 죽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 자신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발전소와 전등의 관계와 같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려면 발전소에 전선이 연결이 되어야 전등에 불이 들어와 전등이 전기의 형상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지 않으면 영생이라는 잘 못된 관념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천사는 비록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아니기 때문에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위해 흙으로 지어진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육적인 몸에서 부활의 영적인 몸으로 바뀌어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 15:46)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살과 피를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영적인 몸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죄만 없으면 영생할 거로 착각한다. 그러나 죄가 없다고 영생하는 것이 아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도 육신의 몸을 입고 죽고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있든 없든 한 번은 죽고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졌다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24:15)

 

사람은 창조될 때 선하지 악하지도 않은 흙과 상태로 창조되었다. 흙에는 씨가 뿌려지는 대로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사탄의 씨를 받으면 사탄의 아들로, 하나님의 씨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농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수확된 첫 열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씨-하나님께서 흙-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럴려면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고 영적인 부활의 몸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생명의 연합의 신비가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자신의 생명을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으면 그렇게 하셨지 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겠는가?

 

지금까지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예수님도 오셔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다고 하셨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죄와 관계없이 생명을 다시 취하기 위해 죽으신다고 하셨다.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10:17)

 

예수님의 죽음에는 크게 두 가지 방면이 있다. 하나는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서의 역할과 생명을 주시기 위한 헌물로서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두 제물의 공통점은 희생물도 죽어야 하지만, 헌물도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죄인이다 하니까 오직 예수님의 죽음을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 정도로만 아는데 그렇지 않다. 어찌보면 희생물보다는 헌물로서의 죽음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죄란 단지 하나님의 경륜을 향해 나아가는데 사탄이 설치해 놓은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지 죄만 해결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죄 문제만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지뢰지대를 통과했다고 목표를 탈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죄라는 문제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데 사소한 부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의 원리

 

그러니까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 받으려면 영-하나님과 육-사람이 연합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영과 육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기 때문에 저절로 연합이 안된다는 것이다. 생명은 항상 낮은 생명에서 높은 생명 쪽으로 열려 있다. 이 생명의 연합의 원리에 대해서는 클라렌스 라킨의 글을 인용해 보자.

 

자연적으로 생명이 출생하는 것은 없다. 모든 생명은 앞서 존재한 생명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죽은 돌은 스스로 무기적 상태에서 유기적 상태로 전환될 수 없다. 두 세계 사이에는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유기적 상태 쪽으로 열려 있다. 돌은 스스로 문을 열수 없는 반면 식물은 그 문을 열 수 있다. 식물은 그 뿌리를 흙 속으로 밀어 넣어 돌을 부술 수 있으며 돌의 화학적 요소들을 취하여 식물의 생명으로 전환되게 한다. 이와 같이 식물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도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이 문은 동물의 세계 쪽으로 열려 있다. 식물은 스스로 육이 될 수 없으나 동물은 식물을 먹음으로 식물적 생명을 동물적 생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에도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이 문은 육 쪽에서 열 수가 없다. 영의 세계 쪽으로 문이 열려 있다.’

 

그러니까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의 음식이 됨으로서 높은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유일하게 죄와 관계없이 드려지는 헌물이 음식헌물(소제)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음식헌물의 위치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54절에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문제를 해결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우리 육체가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음식헌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레위기에 나오는 모든 제물은 드리는 자와 받는 자의 음식이다. 이 제물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예표한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 것을 성경은 죽음을 '맛본다'라고 하는 것이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라.'(16:28)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는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8;52)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그리고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13:8) 이라는 말이 있다. 단지 죄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 말씀은 이해가 힘들다. 왜냐하면 사람은 창세로부터 죄인이 아니었는데도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영적인 말씀을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고 해석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으로서 드려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겠다는 말은 내가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람도 영생을 얻기 위해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도 사람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예수님은 오셔서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6:54)  하셨다. 사람도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음식헌물로 창조되었지만 예수님도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음식헌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이것은 육적원리나 영적원리나 같은 이치다.

 

어떤이는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 무슨 말인가 할 수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을 위해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영-하나님과 육-사람은 본질적으로 너무 이질적이기 때문에 두 존재간에 연합이 되려면 상호 죽음이라는 공통지점 안에서만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다른 지점에서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오직 죽음이라는 지점 안에서만 하나, 곧 연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번제단이다. 사람들은 이 번제단을 단지 죄에 대한 심판으로만 알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피만 뿌리면 된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17:11)

 

 

대속의 문제는 법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번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유기적 생명의 연합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두 번의 죽음이 필요하다.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서 한 번. 그리고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로서 한 번, 총 두 번이다. 그런데 사람의 육신은 두 번 죽을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셨는가? 희생물(sacrifice)과 헌물(offering)의 공통점은 죽음이다. 희생물만 죽는 것이 아니고 헌물도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위해 헌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단 주위에 피를 뿌리고 난 희생물을 번제단에서 다시 불로 태움으로서 번제헌물이 되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희생물과 헌물은 같이 따라 다닌다.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헌물이니라.’(1:13, 17)

 

성경에서 불은 영을 상징하고 하나님을 상징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니라.(12:29)

 

-하나님, 곧 불-하나님은 용광로 같은 분이시다.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지 않을 쇠는 없다. 좋은 쇠든 녹슨 쇠든 어떠한 쇠도 용광로에 들어가면 다 녹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멸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나 죽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을 만나서 죽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사람은 첫 번째로 육에 속한 몸을 입은 다음 영에 속한 몸을 입도록 정해져 있었다.(고전15:45) 그래서 사람은 어차피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한 번은 죽도록 창조되었다. 육은 무엇을 해도 육이지 육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을 운명(mortal)으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생명에 삼켜져서 죽지 않을 운명(immotality)으로 바뀌어져 한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지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고전15:54)

 

그러니까 번제단에서 헌물-사람이 불-하나님께 태워지는 그림이 사람과 하나님의 생명의 연합의 과정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나와 번제단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은 지성소에서 나와 번제단으로 가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지성소에서 나와 번제단으로 나오신 분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세상에서 나와 번제단으로 가신 분이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니까 사람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죽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이분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켜주시는 중재자, 곧 생명의 연결자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 2:5)

 

만물은 다 이런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다. 원자도 양전자와 음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을 중성자가 연결시켜 주고 있다. 저절로 연결되는 것은 없다. 물과 기름도 저절로 중화되지 않고 중화제가 있어야 서로 섞인다. 사람의 생명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이 생명에 세포가 연결되어 있으면 살고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생명의 연결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많은 방법도 있을 것인데 왜 하필 번제단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렇게 밖에는 할 수없는 깊은 생명의 연합의 원리가 있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시기에 만이 영원한 생명이다. 사람이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곧 부활의 영적인 몸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반드시 번제단에서 불-하나님께 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 진리를 이해하기 힘들다. 죄가 없음에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사람은 번제단으로 가야한다는 깊은 진리를 어떻게 초보자들이 받아 들이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를 이용하여 율법을 주셨고 율법을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비록 사탄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였지만 이 방해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들보다 강하니라.’(고전 1:24~25)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죄가 없더라도 번제단에서 번제헌물로 드려져야 한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져야 한다.(고후 5:4) 그런데 아담이 이것을 거부했다. 사탄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3:4~5) 라는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탄이 죽지 않는 신-천사가 된다고 하니까 타락한 것이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죄가 없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육신을 가진 존재는 모두 죽는다.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육이고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보다 차이가 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도 오직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연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다른 지점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없다. 물위로 걸어간 지점에서, 죽은 자를 살린 지점에서 사람과 그리스도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오직 상호 죽음 안에서만 하나가 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오셔서 죽지 않으시면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오셔서 죽으심을 통해 ''이 되어야만 사람에게 영-생명을 주실 수 있는 것이다. (고전 15:45)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위 말씀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죽으셔야 하는 것으로 받아 드린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오셔서 육체로 계시면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죽으심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번제단, 곧 그리스도께로 가야한다.

 

그런데 예를 들어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번제단, 곧 십자가로 갈 필요성을 느끼겠는가?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아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가 없더라도 오직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생명의 연결자인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연결하려면 중화제, 곧 중재자로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이것도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상호 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차피 죄가 있으나 없으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하나님과 연합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고전2:7~8) 어찌보면 하나님은 사탄의 반역을 통해 아담을 범죄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율법을 주고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께도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사람이 거부감없이 받아 드릴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계시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라는 말이 있다.(3;24) 거꾸로 말하면 율법이 없다면 우리가 죄를 깨닫지 못함으로 이 죄로부터 구원할 그리스도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어떻게 주어졌는가?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3:19)

 

율법은 아담의 범죄함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비록 율법이 범죄함으로 더해진 것이지만 이것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곧 아담의 범죄가 율법을 가져왔고 이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 되었다는 의미다. 아이러니 하게도 아담의 범죄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달성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차피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율법이 없다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찾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비록 아담이 범죄함으로 율법이 들어왔지만 율법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5:20)

 

어차피 사람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생명의 연결자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한데 죄가 들어옴으로서 율법이 들어왔고 이 율법은 모든 사람들을 죄 아래 가두었고(3:19)

 

'이제 우리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율법이 말하는 것들은 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입을 막아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3:19)

 

여기서 자신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찾게 하였다는 것이다. (3:24)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3:24)

 

그래서 우선적으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대속한 다음 하나님의 최종목표인 생명까지 사람에게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임으로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죄인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 죽을 명분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위해서는  어차피 자신은 사람들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어야 했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죄인이 안되었다면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명분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을 통해 사람을 극단적인 절망적 상태로 빠지게 하여 여기서 자신들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고,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생명을 이식함으로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달성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