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전쟁
Where art thou?(Gen 3:9)
인용된 성경구절은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 예수안에 刊)입니다.
순 서
서 언---------------------------------- |
1 |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 |
14 |
3. 하나님과 사람 -------------------------- |
17 |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
22 |
5. 사람의 위치----------------------------- |
34 |
6. 죄란 무엇인가?-------------------------- |
41 |
7.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
45 |
8. 희생물과 헌물--------------------------- |
61 |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
68 |
10. 우주안의 3대 위치전쟁------------------- |
76 |
11. 예수님의 침례-------------------------- |
92 |
12. 십자가의 도---------------------------- |
97 |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
103 |
14. 이기는 자----------------------------- |
109 |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
113 |
16. 거짓 Vs 진실 -------------------------- |
120 |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
123 |
18. 선악의 지식세계 생명의 세계-------------- |
129 |
19. 반론에 답하여 ------------------------- |
140 |
20. 맺음말-------------------------------- |
198 |
1. 서 언
인류의 문제는 무엇인가? 속이는 자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속이는 자 아래 있으면서도 너무 깊게 오래 동안 속아 있기 때문에 무엇에 속아 있는지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소위 기독교인들조차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속아 있는가? 인간이 신(神)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있다.(창3:5)
사탄에게 속아 있는 인류는 깊은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항상 죽지 않는 신(神)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이 죽는 것을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면서 늘 육신적으로 죽지 않은 것을 소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계에서는 본래 사람은 하나님께서 죽지 않도록 창조했는데 아담이 죄를 지어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죽도록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창조했지 불완전하게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창조물은 없다. 피조물은 각각의 창조 목적 안에서 완전하게 지음 받았다. 독수리는 날아다니고 뱀은 기어 다닌다. 그렇다고 뱀이 불완전한가? 천사는 죽지 않고 사람은 죽는다고 해서 사람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피조물은 그 창조목적 안에서 모두 완전하다. 사람은 사람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하루살이는 하루살이로서 완전하다. 모든 피조물은 그 창조 목적 안에서 완전하게 지어졌다.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이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분을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만 그들의 생각 밖에서 죽으시고 말았다. 아마도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 죽으시고 말았다.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하고 운명하셨다. 누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죽으셨다. 그러자 모든 제자들이 떠나갔다. 죽는 데도 같이 가고 옥에도 같이 가겠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만일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신으로 나타났다면 죽어도 같이 갔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고기 잡으러 갔던 것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사탄은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속였다. 그래서 지금도 타락한 인류의 소망은 무엇인가? 신이 되는 것이다. 종교 안에서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되는 것이다. 다 같은 말이다. 근원은 하나다. 우리의 구원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인생의 진실을 알고 이 거짓아래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이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피조물이 있고 땅에 속한 피조물이 있다. 하늘에 속한 피조물은 영이기 때문에 시작은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그러나 땅에 속한 피조물은 물질이기 때문에 끝이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부여한 본질적인 임무가 있는데 그것은 ‘동산을 가꾸고 지키라’는 것이다.(창2:15) 그러면 동산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소유주가 하나님이시다. 이 동산은 성막-성전-교회-천년왕국-새예루살렘으로 발전된다. 그러니까 이 동산은 교회의 원형이다. 사람들은 이 동산을 물질적인 곳으로 생각하여 지금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있지만 교회가 물질적인 곳이 아닌 영적이고 인격적이 듯이 동산도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은 뒤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님은 영시기에 사람 안에, 곧 인격 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거하시듯이 동산이 하나님의 거처다. 그러므로 이 동산은 오늘날의 교회인 동시에 곧 나 자신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이 곧 동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질적인 임무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다. 이 인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이것을 이탈하면 사망이다. 그러므로 영적전쟁의 핵심은 사탄과 사람간의 인격 쟁탈 전쟁이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사람의 위치, 곧 인격의 본질은 흙이라는 것이다.(창2:7) 하나님은 씨-생명이고 사람은 흙-육신이며 육신은 연약하고 생명이 없다. 씨의 절대적 소망은 밭에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흙이라는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형상이란 실제, 곧 생명이 아니라는 의미다. 전기와 전등의 관계에서 전등 자체로는 빛이 없다. 전등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전기가 연결될 때 전기의 빛을 발한다. 그래서 전등은 보이지 아니하는 전기의 형상이다. 형상이란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을 받아서 표현하는 존재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체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서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서 죽게 된 것이 아니고 어차피 사람은 한 번은 죽게 되어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이것은 진리다.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죽음이 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고전1:24)인지 왜 승리인지, 왜 우주의 중심점인지 잘 모른다.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 만 생각하고 단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법리적인 혜택 정도로만 생각한다.
레위기에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희생물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제물이고 헌물이란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통을 위한 제물이다. 그러니까 희생물은 법리적인 것이라면 헌물은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유기적 것이다. 즉 헌물이란 죄와 관계없이 드리는 제물이다. 우리 인생은 원래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주는 계시는 희생물만 죽는 것이 아니고 헌물도 죽음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다. 모든 헌물은 살아있는 채로 드려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희생물과 헌물은 동일시 되었다.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니라.’(레 1:17) 단지 희생물이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질 필요가 없다.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레17:11) 이것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아니고 법리적인 죄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희생물을 하나님의 불로 태우고 이것을 헌물과 동일시하고 있는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그런 것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희생물이 태워짐으로 번제헌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항상 태우는 희생물은 헌물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아담이 죄를 지어 희생물이 필요했지만 어차피 사람은 헌물로 지어져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생명이 연합이 필요했는데 이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 되고 있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보면 희생물로서 피 흘림의 죽음과 헌물로서의 죽음, 두 번 죽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희생물과 헌물의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법리적인 희생물 안에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을 포함시켜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라는 것이다.(고전1: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이다.(레1:9, 17) 또 희생물과 헌물은 우리 자신이다. 인생은 죄로 인해 희생물로서도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했지만 죄 이전에도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 곧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하나님을 만나서 태워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모든 헌물은 모두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진다. 그래서 헌물의 총체와 기초는 번제헌물이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다른 4가지 헌물 - 음식헌물, 화평헌물, 죄헌물, 범법헌물 - 은 번제헌물의 발전이고 번제헌물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헌물이 불에 태워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물이 법리적인 것이라면 헌물은 유기적인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들의 명칭은 우리의 죄로 인해 ‘희생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희생물이라 하지 않고 ‘헌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신다. 왜 명칭이 희생물이 아니고 헌물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번제헌물, 곧 흙으로 창조되었다. 흙이란 생명을 받을 위치지 자체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사람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람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창세기 1,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하나님의 원계시다. 바로 그 원계시도 이 진리를 증언한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고 갈비뼈를 뽑아서 이브를 만들었다. 여기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이브는 부활생명-교회를 예표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아니고 이브다. 곧 교회다. 이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은 거듭나야 했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진리다. 여기서 아담은 인류와 그리스도 둘을 모두 예표한다.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을 의미한다. 죽지 않으면 이브라는 부활생명을 산출할 수 없다. 또 예수님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죽지 않고 잔다’(마9:24) 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를 ‘잔다’ 라고 표현함으로써 아담 안에서 죽은 자와 분명히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듯이 생명의 길 안에서의 부활과 사망의 길 안에서의 부활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행24:15)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다. 생명의 길 안에서 부활과 사망의 길 안에서 부활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조건 육체적 죽음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실 리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는 것을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지만 조금 더 들어 가보면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풍성한 계시는 닫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점, 출발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진다. 내가 영생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믿은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이방종교의 근원은 여기서 출발한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서 영원한 생명이 없었다. 영-씨로 지어졌다면 죽지 않지만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그 생명은 그 왕국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생명원리는 만물이 똑 같다.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왕국이다. 하나님은 왜 이 우주를 창조했는가? 생명의 왕국을 목표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자연계시는 무엇을 계시하는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만물은 바로 그 생명을 계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다.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라는 생명의 원리를 알 수 있다. 특수계시든 자연계시든 하나님의 모든 목표는 하나님-생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람만이 이 생명의 원리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만약에 생명이 만드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실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생을 가진 자로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의 첫 열매로서 하나님의 왕국의 씨-조상이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이 없는 것은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만드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성에 손상을 입히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음을 통해 아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장 5절에 ‘그분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가운데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셨느냐?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창세기 6장과 욥기에서 천사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향해 ‘내가 언제 너희들을 아들이라고 했느냐, 언제 내가 너희들을 낳았느냐?’ 반문하시면서 ‘천사인 너희들은 내 아들이 아니고 내가 낳은 사람이 내 아들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사는 단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형상-아들이지 생명을 이어받은 아들이 아니고 사람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의 아담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눅3:38) 만들어진 아들이었지 낳음 받은 아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은 근원적으로 거듭나야 했던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낮과 밤이 있다. 성경에서 밤은 죽음을 예표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부활을 예표한다. 그러나 죽음이 없는 새예루살렘에는 밤이 없다. 창세기 1장의 밤과 낮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창세기 1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른 육지를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0)
예표적으로 땅은 생명을 예표하고 바다는 사망을 예표한다. 그래서 새예루살렘에 가면 바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더라.’(계21:1)
창세기 1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육신이 한 번은 죽어야 된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은 죄 이전에도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모든 피조물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한 생명의 길이 있다. 정해 놓은 생명의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씨는 땅에 뿌려져서 죽어야 싹을 낸다. 흙도 마찬가지다. 생흙은 씨를 발아 할 수 없고 죽은 흙이라야 그 씨를 발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흙이다. 이 원리는 사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탄도 영이기 때문에 씨다. 그래서 사탄도 흙-사람과 연합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동일한 과정을 격어야 한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씨도 자신의 열매를 산출하려면 동일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생명의 길 안에 있는 것이고, 사망이란 사망의 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려면 그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열매를 맺느냐? 사탄의 자식으로 사탄의 열매를 맺느냐? 이 차이다. 어떤 씨도 흙을 만나서 열매를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열매’(고전15:20) 가 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씨로서 새인류의 조상이 되셨다는 의미다. 우리는 같은 열매(씨)를 소유한 자들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롬8:23~24)
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씨를 가진 자로서 같은 열매 종류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열매가 되고 마귀의 씨를 가진 마귀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 씨-생명이다. 핵심은 영-씨가 생명이라는 것이다. 씨와 열매, 생명은 한 개념이다. 사람은 흙-육으로서 씨-열매가 아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육적인 몸은 생명이 아니라 영이 씨-생명이기 때문에 영적인 몸이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첫열매 종류가 된다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영생을 가진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지옥으로 가도록 창조하지 않았다. 지옥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마25:41) 그런데 왜 사람이 그곳으로 가는가? 사람은 단지 흙으로서 그 씨를 받아들여 그 열매를 맺는 피조물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씨의 왕국으로 가는 것이다. 그 생명은 그 나라다. 우리가 흔히 동물의 왕국, 식물의 왕국 하는데 그 왕국에 들어가려면 그 생명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가? 사람의 생명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의 왕국에 들어 갈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라야 그 왕국이 될 수 있다. 개의 생명을 가지면 자동적으로 개의 왕국이 되고, 소의 생명을 가지면 소의 왕국이 일원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왕국은 볼 수 있게 임하지 아니하며 또 그들이 이르기를 여기를 보라, 혹은 저기를 보라! 하지도 못하리니 보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b~21) 하셨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고 그 왕국을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과정은 동일하다. 사람만이 특별하지 않다. 성경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곳곳에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고, 부활을 밀과 보리에 비유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도 식물의 ‘열매’(고전15:23, 약1:18)로 비유하고 있다.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왕국이다. 또 예수님과 연합되어 죽는 것을 땅에 식물이 심기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심겼으면(planted) 또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6:5)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지으시는 농부시다.(고전3:9) 그러니까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씨를 심는 것이고 부활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린 다음 최종적으로 열매를 수확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덤에 묻히는 것은 부활의 열매가 되기 위해 심겨지는 것이다.
또 성경은 거듭난 사람을 살아 있는 돌(벧전1:5)이라고 한다. 그러나 돌은 영원하지 않다. 돌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보석이 되어야 영원하다.(계21:11) 우리의 변화과정은 흙-돌-보석 순인데 이 말씀은 우리의 변화과정을 물리적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생명의 과정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 농사의 정상적인 과정은 흙-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면 이 사람은 영적으로 거듭나게 된다. 영적인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입장에서 씨를 뿌리고 새로운 생명이 싹이 튼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거듭났다 하더라도 부활한 영적인 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최종 목표로 하는 열매는 아니다.
그래서 육신적 몸이 영광스런 부활의 열매(몸)이 되려면 이 사람은 인생으로서 최종적인 인격의 열매(씨)를 땅에 뿌려야 한다. 이것이 죽음이다. 이를 통해 실제적이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좋은 열매를 거두신 것이다. 육종 사업을 통해 좋은 씨를 얻으려면 여러 번의 씨 뿌리는 과정을 통해 좋은 씨를 얻는 거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땅에 뿌려져 부활의 열매가 된다는 것은 처음에 사람은 흙이었지만 씨가 된다는 것이다. 열매 안에는 씨가 있기 때문에 씨와 열매는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다. 씨란 생명이고 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생명은 이렇게 씨 뿌리는 과정을 통해 생명이 연결되고 또 생명이 더욱 강화된다. 이 원리는 우주 만물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이다. 부정적인 면으로 보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죽으셨지만 긍정적인 면으로 보면 죽으심을 통해 예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살려주는 영(고전15:45)-씨가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체로 계시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없다. 영-씨가 되셔야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히 대속이라는 법리적인 면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법리적인 면만이 아니라 유기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 아담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법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유기적으로 선악과를 먹었다는데 문제가 더 있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어겼다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다. 법리적 것은 외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해결은 단순히 용서해주면 해결된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유기적으로 사탄의 씨가 아담의 육신 안에 심어져 사망의 열매를 맺는 길로 갔다는데 문제가 더 있는 것이다. 사람은 밭이다. 그 밭에는 원래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야 한다. 그런데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 있다면 이 사람은 식물로 치면 아직 열매를 맺기 전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부활이 열매이다. 왜냐하면 씨의 소망은 열매인데 열매란 씨와 같은 것으로 생명이다. 그러나 밭에는 생명이 없다. 밭은 씨를 받아드려 열매를 생산하는 것이지 자체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다. 농부는 밭에서 열매를 거두지 밭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밭이란 여자와 같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할 운명이다. 스스로 씨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내 안에 성령-씨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열매가 아니다.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하였지만(롬8:23) 몸 자체가 열매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몸도 영적으로 변화되어야만 완전한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하였다 하더라도 육신은 죽어서 땅에 뿌려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흙-몸이 영-몸으로의 전환, 곧 부활의 열매로 변화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열매-씨는 한번 결정되면 고칠 수 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아담 안에서 죽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사탄의 열매를 뿌려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기 전에 밭을 갈아엎고 새로운 씨를 뿌리면 된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갈아엎는 게 십자가 사건이다. 이 새로운 밭의 씨가 누구인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육체로 있으면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다. 육체는 흙이지 씨가 아니다. 영이 생명으로 씨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고전15:45)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복이다. 만일 천사처럼 영-씨로 지어졌다면 거듭남이 없다. 사람은 흙이기 때문에 다시 부수고 재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갈아엎고 새로운 씨를 뿌리면 되는 것이다.
일반 기독교인들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만 특별하다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죄를 사해 주면 되지 무엇 하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겠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만을 위해 죽으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낮은 수준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의 씨가 되시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생명을 주시려고 한다. 그런데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과정을 거쳐 오셨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라는 것이다. 보통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 영원한 생명으로 창조하였다면 사람이 타락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방법으로 죄를 사해주고 다시 영생을 주시면 되지 않겠는가? 무엇하러 예수님이 이런 생명의 과정을 거쳐 오시겠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단 번에 전능하신 능력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겠는가?
굳이 왜 아브라함을 부르고 여러 세대를 거쳐 예수님이 태어났는가? 이것은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고 과정을 거쳐 강화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육종사업과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씨를 불러 여러 세대를 거쳐 예수님께 이르러 하나님 나라에 딱 맞는 예수님이라는 한 씨를 산출하신 것이다. 우리의 거듭난 생명-부활생명도 그렇다. 아담은 1차적으로 만들어진 아들이다. 만들어진 아들(흙)은 하나님의 씨가 들어왔다 하더라도 여전히 흙으로서 그 열매는 연약하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영은 거듭났지만 육신은 그대로다.
로마서 8장 16절에 보면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인 것을 증언하나니’ 라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에 들어와 우리의 영과 연합된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그러나 육체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 영적인 몸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은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리라.’(고전15:50) 라고 한다. 살과 피라는 말은 육체라는 말이다.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육체가 아니라 죄가 없을 때도 육체로 지음 받았다.(창2:24) 사람이 육체라는 것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체이다. 우리가 천사처럼 영-씨로 지음 받았다면 죽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흙으로 지음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세계다. 영적인 세계는 그 세계에 합당한 영적인 몸을 입어야 한다. 그래서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왕국에 살려면 그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썩을 육체가 썩지 않는 영적인 몸으로 변화하려면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에도 희생물로도 죽어야 하지만 죄가 없더라도 사람은 헌물로서 죽어야한다는 것이다. 육체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니다.(요6:63)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려면, 즉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려면 어떤 공통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의 간격은 하늘과 땅의 간격보다 크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래서 그분이 육신으로 오셨다. 그럼에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수준에 맞출 수가 없다. 예수님을 우리가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위를 걸어가신 예수님과 내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는가? 하나 될 수 없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무 멀리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분의 죽으심을 보니까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연합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육신으로 오셔서 사람에게 생명을 직접 줄 수가 없다. 육체로 오셨기에 육체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육은 생명이 아니고 영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영과 영으로 만나야 생명이 연합되지 육과 육으로 만나면 생명의 연합이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심을 통해 살려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고전15:45)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없어진다는 것이니까 영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도 죽어야 하고 하나님-사람으로 오신 예수님도 죽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 하나님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이 만나는 지점이 죽음이다. 사람들은 모두 큰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큰 것은 아무리 커도 제한이 있다. 태양은 아무리 커도 제한이 있다. 그러나 공기는 제한이 없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니까 공기와 같고 영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제한이 없다. 여기에 영생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실질적으로 이식받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생명이다. 부활생명의 예표인 이브는 아담의 죽음을 통해 산출되었다.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이 산출되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에 만들어 존재이기에 사탄이 훼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1차적인 흙-육신에서 더 이상 사탄이 훼방할 수 없는 2차적인 생명의 출생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부활생명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이다. 물질세계인 지구상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은 영-씨로 창조되지 않았고 흙-육신으로 창조되었다. 흙에게는 씨가 없다. 씨가 흙에 들어와 죽어야 하듯이 흙도 씨를 발아하려면 죽어야 한다. 그래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은 반드시 한번은 죽게 되어 있다. 피조물에게 이것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이탈하면 사망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경 전체를 조망해 볼 때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사람에게 정하신 생명의 길은 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남 - ② 육체적 죽음(잠듦, 천국) – ③ 의로운 자의 부활- ④ 새예루살렘으로 최종 완성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들어온 사망의 길은 ① 선악과를 먹고 사탄의 자식으로 거듭남(아담 안에서 영적인 죽음) - ② 육체적 죽음(지옥) - ③ 불의한 자의 부활 – ④ 둘째사망(불 호수) 이다.
위 과정은 열차의 정류장과 같은 것이다. 그 노선 안에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람이 한 번은 죽도록 만들었을까? 상세한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하나님께서 정한 우주만물의 생명의 원리가 그렇다는 것을 만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씨-생명을 흙에 뿌리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씨가 발아되어 열매를 맺는 것이다. 생태계는 상호 죽음을 통해 생명이 연결된다. 또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한다. 이 두 가지는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이것은 생명노선 뿐만 아니라 사망노선 마찬가지다. 사탄도 영으로서 일종의 생명이기 때문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 성경은 사망노선 안에 있는 사망, 곧 영적인 사망, 첫 번째 사망, 둘째 사망이라는 세 가지 사망에 대해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예수님은 생명노선에 있는 자들의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는 ‘죽지 않았고 잔다’(마:9:24, 막5:39, 눅8:52) 라고 하시면서 사망노선 안에 있는 자들의 죽음과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잠 잔다’ 로 구별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52절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한 구약성도들의 죽음을 잠든 성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마27:52)
또한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왕들의 죽음을 조상들과 함께 ‘잠들다’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다윗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의 도시에 잠들었더라.’(왕상2:10)
생명의 노선 안에서의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 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이것은 대단히 큰 차이다. 그러면 왜 사망노선 안에서는 육체적 죽음을 다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어차피 사망노선 안에서는 어떤 과정에 있든지 하나님과 관계가 분리되어 있으며, 종착역이 불 호수이기 때문이다. 생명노선 안에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라는 열차를 타고 있다면 사망노선 안에 있는 자들은 사탄이라는 열차를 타고 있는 것이다. 노선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었건, 첫 번째 육체적 사망이건, 불의한 자의 부활이건, 둘째 사망이건 매 한가지라는 것이다. 그 노선 안에 있으면 어차피 과정만 다를 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된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위 과정은 그 노선 안에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정류장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단 사망노선 안에서는 첫 번째 정류장에서만 생명노선으로 가는 열차를 갈아 탈 수 있고 한 번 출발하면 돌아 올 수 없는 길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하여 모두 사망 열차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사망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그리스도라는 생명열차로 갈아 탄 것이다.
창세기 2장 17절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in the day, 그 날 안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하셨다. 그러나 아담의 육신은 그날 죽지 않고 930살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히 육신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단순히 육체적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세기 2장 17절은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 날 안에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끊어지리라’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육신이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은 여전히 창세기 2장 17절의 말씀을 단순하게 육체적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단순히 육체적 생존과 죽음에 있지 않다. 어떤 종류의 씨건 땅에 뿌려져 열매를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 그래서 흙-사람에게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던지, 사탄의 씨가 뿌려지던지 표면적으로는 육체적 죽음과 부활이라는 동일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이란 생명의 과정과 사망의 과정이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어떤 이는 ‘구원 받는 데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알아도 문제가 없지 않느냐?’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이 타락한 근원의 문제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에게 처방을 한다고 했을 때 병의 근원을 모르고 처방하면 어떻게 될까? 단지 현상만 보고 처방을 한다면 그 병이 온전히 치료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기점이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모든 종교가 인간이 어디선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는 다 동의한다. 그러나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또한 아담의 타락 원인에 대해 분명하게 제시하시 못하고 있다. 더구나 인간은 원래 영생하도록 육체가 창조되었는데 타락함으로서 육체가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 같지만 실상은 사람 안에는 불성-영생이 있다고 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현상만을 놓고 본다면 불교의 가르침이 더 타당할 수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왜 변절하여 종교통합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거기에 참여하는 모두가 근원이 같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왜 타락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사고가 났으면 사고원인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것 아니겠는가? 사고 원인을 모르고 대책을 세우면 그 대책이 정확한 대책이 될 수가 없다. 현상도 중요하지만 근원은 더 중요하다. 근원이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세상에서도 구멍가게를 해도 목표가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목적을 가지고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목적을 모르면 나는 좋은데 하나님은 안 좋아하실 수가 있다. 직장이나 군대에서도 지휘관 의도를 모르면 열심히 하지만 인정을 받지 못하고 괜히 힘만 쓰게 된다. 하나님 나라도 똑 같다.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그분의 목적에 합당하게 갈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구원받고 하늘에만 가면 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사람들은 하늘에 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땅으로 오셨다. 사람들은 신-하나님이 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의 최종목표인 새예루살렘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계21:3) 어떤 이는 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땅’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땅이 아니라고 하지만 땅으로 내려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늘-하나님과 땅-사람이다.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 하늘에서 내려오면 당연히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지 공중으로 내려오겠는가? 하나님이 내려오시면 사람한테 오시지 어디로 가시겠는가? 계시록 21장에서 요한은 지금 땅에서 서서 하늘에 내려오고 있는 새예루살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새예루살렘은 땅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영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자신을 표현할 형상을 가지시는 것이다. 쉬운 말로하면 몸이 없으신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할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도 그 이유다. 그런데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하려면 자신의 생명을 가져한다. 남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서 표현해 주겠는가? 내 생명, 곧 내 마음과 똑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대신해서 나를 표현해 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 곧 자기 자신을 사람에게 분배해서 그 사람이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신격은 인격의 내용이 되고 인격은 신격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골2:9) 이것을 성경은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벧후1:4b) 라고 표현했다. 경륜이라는 말을 영어로 dispensation(분배)라고 하는데 결국 하나님의 ‘생명의 분배’를 말하는 것이다. 이 생명의 분배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는 예수님이 중보자다. 예수님이 생명의 중보자, 연결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임무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라면 사람은 하나님과 만유 사이의 중보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은 사람은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할 책임을 위임 받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유를 ‘정복하고 지배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세상적인 통치가 아니라 바로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라는 의미다. 로마서 8장 19절에 ’피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라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은 창조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창조할 수 있다. 천사도 창조할 수 있고 우주 만물도 다 창조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창조할 수 없지는 않은가? 내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 아들한테 밖에는 없다. 그래서 창조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몸을 필요로 하신다. 영이란 마음은 있는데 몸이 없는 거와 같다. 내가 만일 손으로 무엇을 잡고 싶은데 손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지금 하나님께서 그렇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무슨 불경스러운 태도인가 할 수 있는데 사실이다. 성경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갈망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절대적으로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성막 안에 보면 증거판과 증거궤가 있다. 증거판을 위해서 증거궤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궤짝이 반드시 필요한데 사람들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관념이다. 모든 것이 육신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육신을 벗어나보고자 하는 것이 종교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정작 사람은 육신을 벗어버리고 신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동양의 신선사상, 종교 안에서 육신을 학대하는 사상은 모두 육신이 죽지 않고 신이 되고 싶은 타락한 아담의 속성과 관계가 있다. 모든 종교와 세상의 목표는 무엇인가? 죽지 않는 신이 되는 것이다. 근원은 하나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 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아담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이브는 사람을 예표한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배필로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배필이 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배필은 한 몸이다.(창2:24)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그런데 이러한 경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생명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 곧 결혼을 통해 배필이 되고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과 한 몸이 되어 같이 살자는 것이다. 그런데 같이 살려면 생명이 같아야 함께 살지 생명이 틀리면 같이 살 수 없다. 인간세계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이질적이지만 같은 생명이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배필이 되려면 같은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명은 무엇인가? 이브로 예표된 부활생명이다.(창2:21~22)
이 부활생명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부활생명이란 말 그대로 거듭난 생명이고 하나님의 생명이다. 죽고 다시 산 생명이다. 죽지 않으면 거듭난 생명이 없다. 창세기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이다. 성경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은 거듭나야 한다고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가? 우리는 피조된 생명을 가지고 있었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락하기 전이나 타락한 후에도 여전히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사람이 가야 할 운명이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어차피 바꾸어져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이지 육이 영이 아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다.’(요3:6)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 영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육신은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15:50)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부활생명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왕국이다. 이것은 예수님이라는 씨로 이루어진 나라다. 사실 그 생명은 그 나라다. 예를 들어 동물의 왕국은 동물의 생명을 가져야 되고, 식물의 왕국은 식물의 생명을 가져야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생명이 그 왕국을 결정한다. 죄가 없더라도 사람의 생래적 생명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창세기 2장에서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연합에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위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신격이 인격의 내용이 되고 인격은 신격의 표현이 되는 것이 다.(골2:9)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은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새예루살렘에서 달성된다. 이때 하늘과 땅도 연합되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육적인 몸도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됨으로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하늘과 땅도 불-하나님께 태워짐으로 영원한 환경이 될 것이다. 이 연합이 성경의 최종완성이다.
3. 하나님과 사람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근원을 모르면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다. 출발이 잘 못되면 목적지가 잘 못되기 때문이다. 우주의 대표는 하나님과 사람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의 머리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근원적 관계를 아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근원적 관계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숭배한다. 하나님은 사람과 결혼을 해서 같이 살자고 하는데 열심히 숭배만 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남편은 부부가 함께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데 부인은 남편을 숭배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종교는 신과 사람을 분리시켜 신을 숭배하게 하지만 생명은 연합하여 함께 살게한다.
하늘과 땅 - 씨와 땅
하늘과 땅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스도와 교회를 예표 한다. 하늘은 무한하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되었고 땅은 유한하기 때문에 단수로 표현되었다. 이 하늘은 무한한 영의 세계이고 땅은 유한한 물질의 세계이다. 하나님은 영시고 영이 생명-씨다.(요6:63) 그래서 영이 아닌 것은 생명이 없고 유한하다. 영-씨는 하나님이고 육-땅은 사람이다. 모든 씨는 하나님-생명을 예표한다. 그래서 씨앗은 외부적인 충격이 없다면 상하지 않는다. 수천 년 전의 씨앗을 현대에 와서 발견하여 심어도 싹이 난다. 또 씨는 보통 자신보다 20만배나 더 무거운 흙의 무게를 뚫고 나와 싹을 낸다고 한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다.
물질세계인 이 땅의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만들어진 재료는 흙이다. 사람은 피조물의 머리로서 사람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다른 모든 피조물도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늘은 영적세계이기 때문에 하늘에 존재하는 피조물인 천사들은 영으로 창조되었다. 영이란 씨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고, 천사는 씨로 창조되었다. 이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늘과 땅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각의 세계에 적합하도록 피조물에게 고유한 몸을 주셨다.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고전15:40)
하나님은 영이시고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영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피조물의 영이 하나님의 영은 아니다. 피조물의 영은 피조된 영이고 하나님의 영은 피조된 영이 아니다. 천사는 영적세계에 살도록 영-씨로 창조되었기에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천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다. 사람은 육체-흙으로 창조되었기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
성경의 주제는 씨-하나님과 땅-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땅은 변개할 수 없는 인격을 예표한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땅-인격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씨-하나님이 땅-사람을 회복하고 회복한 땅-사람에게 씨를 심어 열매를 추수하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땅을 잃어버리자 하나님은 씨를 뿌릴 땅이 없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씨와 땅을 약속하셨다.(창13:15~16)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씨-하나님과 땅-사람으로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아담이 잃어버린 땅-인격을 회복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영-씨가 되셨다.(고전15:45, 갈3:16)
씨 -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다른 종교는 사람을 어떻게 개선해 보겠다든지 가르친다든지 하는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데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씨란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피조되지 않은 생명으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란 ①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고, ②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③ 신성하고 거룩한 생명이고 ④ 하나님의 생명이자 삶이고 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 자신이다. 이 조건에 하나라도 위배되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씀은 딱 한번 나온다.(엡4:18) 하나님과 생명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의롭고 빛이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등등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속성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랑은 하나님이다’라고 할 수 없다. ‘빛은 하나님이다’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같은 단어는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고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이시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시요,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5:20)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말할 때 헬라어로 조에(ZO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반드시 하나님께만 사용되고 피조물의 생명을 말할 때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연합(연결)됨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조물의 입장에서 ⑥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적 생명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입장에서 영원한 생명 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영원한 생명 덩어리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통 ‘영생을 얻었다, 너희 안에 영생이 있다’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중보자 곧 연결자에 의해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라는 의미다. 전등은 전기의 형상이다. 그런데 전등은 전기와 연결되지 않으면 형상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전등에 전기가 연결되어야만 보이지 아니하는 전기를 표현한다. 형상이란 이런 개념이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지만 그 생명에 몸의 세포가 연결되어 있어 육신이 사는 것이다. 세포가 연결되어 있으면 살고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손가락의 어느 부분이 잘라지던지 연결되지 못하게 끈으로 묶어 놓으면 연결이 단절되기 때문에 그 부분은 죽은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별도의 생명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우리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내가 연결됨으로서 형상인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공급을 받고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재(實在)와 형상(形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실재와 형상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생명으로서 실재(實在)고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늘 괴리가 발생한다.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에 안보이시고 사람은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재와 형상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참, 진리, 본체이고 사람은 단지 형상으로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재와 형상이 하나가 되는 나라를 목표로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물이 다 하나님의 이런 의도를 표현하고 있다. 나무의 실재는 씨-뿌리이고 지상으로 드러난 나무는 그 씨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고 보이는 것은 형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행한다고 하면 그것의 실재는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이 먼저 있고 마음에서 명령을 내리면 형상인 내 몸이 실행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영과 혼은 보이지 않고 육체만 보인다. 영과 혼이 실재라면 몸은 형상이다. 만물은 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실재와 피조물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형상뿐이니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형상인 피조물에 의해 규정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바로 실재와 형상이 하나 되는 나라를 목표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경륜의 의도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씨다. 씨의 소망은 무엇인가? 열매다. 그런데 열매 안에는 씨가 있다. 이것이 바로 씨와 열매가 하나 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최종적인 모습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TV와 라디오도 마찬가지다. TV에서 영상이 나오면 영상은 실재가 아니고 형상이다. 실재는 영상이 나오도록 전해주는 전파라는 것이다. 라디오도 소리는 형상이고 실재는 전파다. 내가 말을 하는 것도 내 마음이 실재고 목소리는 형상이다. 만물의 원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이런 원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도 여기서 근거하는 것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실재고 보이는 것은 단지 형상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말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고후4:18)
그래서 우리가 실재를 보지 못하고 형상을 섬기면 그것도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상과 형상이라는 단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십계명의 첫 번째 항목을 우리는 흔히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알고 있으나 성경은 ‘너는 나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20:4a) 라고 하면서 우상이라는 말대신 형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 레위기나 신명기에서는 우상과 형상을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해 우상들이나 새긴 형상을 만들지 말고 서 있는 형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를 위해 너희 땅에 돌로 된 형상을 세우고 그것에 절하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레26:1)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너희를 위해 새긴 우상, 곧 어떤 형상의 모습이든지, 남자나 여자의 모습이든지 땅 위의 어떤 짐승의 모습이든지, ..... 어떤 물고기의 모습이든지 만들까 염려하노라.’(신4:16~18)
이 의미는 우리가 실재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형상을 섬기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는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은 영으로 영이 실재고 생명이므로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생명이고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 곧 인격을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겉모습을 섬긴다면 그것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카톨릭과 같이 어떤 그림을 걸어놓고 예수님의 인격이 아닌 어떤 형상을 추구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왜 핍박했는가? 실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도 실재를 모르고 형상만을 추구한다면 예수님이 오셔도 모르는 것이다. 자기들이 기대하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려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행하신 외적인 일만을 가지고 그것이 예수님의 전부인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외적인 일이 예수님 자신, 곧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외적인 일은 오늘은 할 수 있지만 내일은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했다고 내일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되 그분의 마음, 곧 생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인격적인 존재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다. 외부적인 능력적인 면과 내부적인 인격적인 면이다. 예를 들어 가수가 노래를 잘한다고 해서 그 노래가 그 사람 자신은 아니다. 그 사람 자신은 그 사람 마음이다.
성경은 실재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였다.(요17:3)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도 그분의 외양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생명의 연합이 될 것 아닌가?
성경기록도 마찬가지다 기록된 말씀을 표면적이고 문자적으로 알 것이 아니고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고전2:16) 하나님의 목표는 형상에 있지 않고 영-생명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본성-혼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이다.(고전2:15)
좌우간 사람은 처음 창조될 때 실재-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래서 영생이 없었다. 물론 차후에 우리가 실재와 형상, 곧 하나님과 사람이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연합되는 세계, 육의 세계가 영의 세계로 흡수 통일되는 세계가 와야만 이 사람은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사람은 왜 흙-육신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흙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사처럼 씨-영으로 만들어서 죽지 않게 만들지 흙-육신으로 만들어서 죽게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을 창조하고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분배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신격은 인격의 내용이 되는 것이고 인격은 신격의 표현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와서 성취되었다. 골로새서 2장 9절에서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 라는 말씀이 이 말이다.
그런데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창조물은 모두 1차적 창조로 끝나지만 사람만은 2차적 창조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다. 씨-하나님께서 자신의 씨를 뿌리려면 그 재료는 반드시 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씨로 창조되지 않았고 흙으로 창조되었다.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흙-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여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창조물들은 영원한 생명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1차적 창조로 완성이 된다. 천사도 죽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은 아니기에 1차적 창조로 완성이 되고 거듭남이 없다. 씨는 잘 못되면 버려야 되는 것이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사는 비록 영원한 생명은 아니지만 죽지 않기에 타락하더라도 사형선고를 안 내린다. 사람에게는 왜 사형선고를 내리는가? 육신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천사에게는 사형선고를 안 내린다. 타락한 마귀와 그의 천사들이 가는 곳은 지옥이고 최종적으로 불호수다.
죽지 않는 영적 피조물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의 육신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사람이 영생을 가졌다면 어떻게 사형선고를 내리는가?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죽는가?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영원한 생명은 말 그대로 영원한 것이지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가다가 단절되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란 말도 의미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논리가 부족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논리를 가지고 나온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비생명적인 것은 창조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처음부터 영생을 가진 존재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한 것이다. 즉 씨는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한 것이다. 씨를 공중에 뿌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은 흙-육신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 이전에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계시는 죄 이전에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흙-육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한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15:50)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사람이 육신으로 만들어 진 것은 죄와 관계없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흙-육신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는 것이다. 육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고 영이 하나님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육이 열매가 아니고 영이 열매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기 전의 창세기 2장 21절이 주는 계시도 분명히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 데려오시니”
여기서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아니고 이브다. 아담의 거듭남을 통해 산출된 부활생명, 곧 이브-교회가 하나님의 최종 목표다. 사람이 거듭나야 되는 것은 죄 이전에 흙-육신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이 진리를 확증하신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요3:3)하셨다. 이것을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죄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어서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5~6) 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1차적으로 물-육신으로 태어난 다음 2차적으로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라고 정의해 주고 계시는 것이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6) 라는 의미는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흙은 무엇을 해도 흙이지 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흙에 씨가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육에서 난 것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고 영에서 난 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죄인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이 없다. 우리가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죽고 다시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한번은 죽고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인생의 본질적인 목적을 언급하신 다음 요한복음 3장에서 14절에 와서 사람의 죄 문제를 언급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요3:14)
그러니까 사람은 본질적으로 흙-육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거듭나야하는데 먼저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로 인해 심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창세기 2장까지는 무죄한 육신이었고, 타락한 창세기 3장 이후로는 죄 된 육신이 된 것이다. 무죄한 육신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즉 씨-하나님이 흙-사람에게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라는 것이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은 육이지 영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고 죄가 들어옴으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헌물과 희생물의 공통점은 죽음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인 것이고 헌물은 유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법리적인 희생물 안에 유기적인 헌물을 포함시켜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고전1:24) 라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한 번은 죽을 밖에 없는 흙-육신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훼손되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경륜의 목적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람의 탁월성이 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영생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끝났지만 사람만은 1차적 창조에서 2차적인 생명의 전환-거듭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담은 흙으로 창조된 살아 있는 혼이지 생명이 아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15:45~46)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아담은 흙-육체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몸-생명이라는 것이다. 육체는 흙으로서 씨가 없고 영이 씨-생명이다. 아담은 살아 있는 혼, 육체에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해야할 존재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담은 영-생명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은 생명이 없는 존재고 마지막 아담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너무도 분명하게 나와 있다. 하나님의 씨가 본성에 속한 흙-사람에게 먼저 뿌려져 그 뒤에 영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 말씀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 사람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첫 사람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다. 우리는 첫 사람 아담-살아 있는 혼으로 창조되어 마지막 아담–영적인 몸으로 거듭나야 될 운명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이어서 고린도 전서 15장 48절, 4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땅에 속한 자들은 또한 땅에 속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과 같으니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니라.(고전15:48~49)
이 말씀도 분명히 아담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별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땅에 속한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땅에 속한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땅에 속한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 것이다. 씨-하나님께서 땅-사람에게 씨를 뿌려 사람에게서 부활의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이 경륜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에게서 처음부터 씨-생명이 없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 했다. 이 말은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이 실재라면 생명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모형이란 생명이 아니고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의미다. 아담이 죄를 져서 모형이 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모형이라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실제적인 집이 완성되면 없어지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실재를 위해 잠시 지어진 것이다.
만일 영원한 생명이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도 만들 수 있는 것이고 언제든지 행위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낳음 받은 자다. 만들어진 것은 사탄이 훼손할 수 있지만 낳음 받은 영원한 생명은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훼손할 수 없기에 우리의 구원이 영원한 것이다.(롬8:38~39) 여기서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아담이 죄를 져서 죽게 되었다면 현재 우리의 구원도 언제든지 훼손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완성되지만 사람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단지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창2:21~23) 아담은 창조 시에 원래 죄가 없었다. 그렇다고 영생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존재였다.(창3:22)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무죄를 영생으로 생각하는데 무죄는 단지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일 뿐이다. 죄인을 다시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의 위치로의 회복, 이것을 구속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5)
우리가 흔히 ‘구속’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구속은 죄들의 용서를 받은 사람의 위치로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구속이 거듭남이 아니다. 죄란 쉽게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이 씨를 뿌려야 할 밭인데 거기에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이란 사탄의 밭이었던 사람을 갈아엎으시고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이 거듭남이 아니다. 거듭남은 생명의 문제다. 사탄이 씨를 뿌려놓은 밭을 갈아엎은 다음 그 밭에 하나님께서 씨를 뿌려야 거듭남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구속이고, 부활이 거듭남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예수님을 믿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 받았다고 해서 구원-거듭남이 아니다. 무죄는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지 거듭남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창조된 사람-흙에게 자신의 생명-씨를 심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이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기 전의 창세기 1, 2장의 원 계시에 의하면 처음에 사람은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창2:21~23) 그런데 사탄이 이 경륜을 방해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경륜이 방해를 받는가?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의 지혜를 어찌 피조물이 따라 올 수 있는가?
하나님은 농부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농사다.(고전3:9)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시다. 흙-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인격의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열매의 완성은 육체가 아니고 영적인 몸-부활생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농부는 밭에 씨를 뿌려 흙을 거두는 것이 아니고 열매를 거둔다. 하나님도 똑 같다. 씨-하나님도 흙-사람에게 씨를 뿌려 육체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씨-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한 영적인 몸이 하나님께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열매와 씨, 영은 하나로 생명이다. 육체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몸-부활의 열매가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영이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씨가 사람-흙에게 뿌려졌을 때 사람-흙은 영적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의 육체는 죽음을 통해 땅에 뿌려지면 장차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부활생명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 3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또 네가 뿌리는 것으로 말하건데 네가 앞으로 있을 그 몸을 뿌리지 아니하고 밀이든 곡식이든 다만 알갱이를 뿌리되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에게 고유의 몸을 주시며 또 모든 씨에게 그것의 고유의 몸을 주시느니라.(고전 15:36~38)
여기서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을 씨 뿌리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처음에 흙으로 지음 받아서 우리 안에는 씨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씨든 사탄의 씨든 둘 중에 하나는 무조건 사람 안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그 씨가 열매를 맺으려면 땅에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육체적 죽음이다. 육체-흙이란 씨가 들어와 발아할 때까지 그 씨가 발아 할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토대이지 자체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자기 스스로 아들-생명을 낳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씨를 뿌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사탄의 씨가 들어 있는 사람은 사탄의 아들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를 범한 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이 영생하게 되었는데 저주로 인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질이 흙임에도 불구하고 신(영)-씨가 되려고 한 아담에게 사람은 결코 신-씨가 될 수 없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흙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선악과를 먹었지만 결국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으면 거듭남이 없는 것이다. 거듭남, 부활은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정해진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 말씀은 아담에 대한 저주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저주마저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고 아담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해서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산물이었다. 주 내용은 죄를 범한 인간을 다시 회복시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돌이키시겠다는 하나님의 대책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도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아들로 완성이 되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 열매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롬1:3~4)
여기서 보면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셨다고 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부활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가?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농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육적인 몸이 최종완성이 아니라 영적인 몸이 열매로서 최종완성이라는 말이다. 사람 농사를 지으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의 육적인 몸이 열매가 아니라 부활한 영적인 몸이 열매다. 육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전환은 다른 생명으로의 거듭남이다. 거듭남이란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 창조될 때 육체로 창조되었지 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육체로 창조되었지 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와 관계없이 거듭나야 했다.
육체는 열매가 아니고 단지 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밭인 사람에게 사탄이 자기 씨를 뿌렸지만 하나님은 그 밭을 갈아엎고 다시 씨를 뿌리면 되는 것이다. 갈아엎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이렇게 사탄이 방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은 더 강화되는 것이다. 흙은 그대로 있는 것보다 많은 과정을 겪어야 더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탄의 방해로 흙-사람은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그 시련이 많을수록 더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했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사탄이 방해하면 할수록 더 좋은 강화된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가 더 넘치게 된 것이다. 아담이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셔야 했지만 이제 죄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의 경륜을 바꾸지 않으니 얼마나 더 은혜가 넘치겠는가? 그래서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이다.(롬5:20) 사탄이 방해했지만 하나님께서 더 강화된 생명을 주신 것이다.
온 우주 안에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피조된 생명이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무엇인가?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만들어진 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주어서 사람에게서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로마서 1장 20절을 살펴보자.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
이 말씀은 단순히 만물을 보고 ‘창조주 하나님은 계시는 구나’라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만물은 생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생명에 있다. 생명이 아닌 것은 다 거짓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만물을 통해 생명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만물은 하나님 자신-생명을 계시하고 있다. 특수계시만이 성경이 아니고 일반계시도 성경이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의 초점은 생명이다.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라는 것을 만물 통해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는 만들어졌지만 다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리다. 죄가 있기 때문에도 거듭나야 하지만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크게 외적인면과 내적인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외적인면은 그분이 하신 일과 일하시는 원리를 아는 것이고 내적인 것은 개인적으로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란 생명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는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명의 원리를 모르고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 영생이 있었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말이 안 되면 무조건 하나님의 전능성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뭐든지 다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그것을 믿는 것을 대단히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다 창조할 수 있어도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식으로 생명이 아닌 모든 것은 다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도 모기 한 마리도 지식을 통해 만들 수 없다. 너무도 간단한 진리를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고 한다. 아담 이래 너무 오랫동안 지식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결과이다. 사람은 원래 생명의 세계에 있어야 하는데 사탄으로 인해 지식의 세계에 와 있는 것이다. 사탄은 속이는 자로서 지식으로 생명을 모조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거짓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지식으로 생명을 대체하고 생명을 지식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세상과 종교다. 선악의 지식나무 열매를 먹은 세상과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하나님 나라의 차이는 무엇인가? 지식 대 생명의 차이다. 세상은 지식으로 세워진 세계라면 교회는 생명으로 세워진 세계다. 지식은 분열을 가져오고 생명은 한 덩어리로서 연합된다. 그러므로 세상은 지식의 세계로서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끝없이 분열한다. 사탄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지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모조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소위 말하는 유전공학, 생명공학이 다 이런 거다. 사탄은 속이는 자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지식으로 생명의 연합을 모조하고, 장차에는 사람의 몸속에 어떤 장치를 넣어 생명의 연합을 모조할 것이다.(계13:16~19)
다시 한 번 말하면 생명은 지식을 통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가 끼어들 틈이 없고 은혜라는 것이다. 지식은 행위로서 실재-생명이 아니고 형상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을 영생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창세기 2장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또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피조물인 사탄이 영원한 생명을 훼손할 수 있는가? 한번 영원하면 끝까지 영원해야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중간에 끊어지는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그날에 반드시 죽으리라’ 한 것은 ‘그날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의미다. 또한 사람은 처음부터 영생이 없었고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 것이다. 천사는 비록 영원한 생명은 아니지만 죽지 않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안 내린다. 죽을 수 있는 존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죽지 않는 존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하신 생명을 사람에게 주었는데 사탄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었다면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훼손하는 것이다. 사람은 단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래서 사탄이 훼손할 수 있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은 훼손할 수 있지만 낳음 받음 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훼손할 수 없다. 또 사람이 원래 영원한 생명을 가졌는데 하나님께서 ‘죽으리라’ 했기 때문에 죽었다면 지금 소위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도 늘 불안한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고 유한한 생명이다.
사람은 살아 있는 혼으로 창조되었다. 살아 있는 혼은 피조된 사람의 생명이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사람의 만들어진 재료는 흙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혼이란 흙과 같다. 타락했기 때문에 흙이 아니고 본질이 흙이다. 흙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그런데 씨와 땅은 절대적으로 상호 필요한 관계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다.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여 아들을 생산할 여자의 운명이지 자체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체 씨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불교나 이방종교의 주장과 같다. 불교의 주장이 무엇인가? 사람 안에 불성이 있는데 깨닫지 못해서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아서 찾겠다는 것이 불교다. 사람 안에 영생이 있었다면 내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나도 깨달아서 잃어버린 것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각각의 세계에는 거기 맞는 몸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 했다. 하늘에 속한 몸이 있고 땅에 속한 몸이 있는데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땅에 속한 몸은 영-씨가 아니다. 하늘에 속한 몸은 영으로 씨다. 하늘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예표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피조물은 소멸되지 않는다. 영이란 하나님을 대표하고 생명을 대표하기 때문에 영적인 것은 피조 되었다 하더라도 소멸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의 영과 혼도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소멸되지 않는다. 사람의 구성체인 영, 혼, 몸 중에 영과 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구성체이다. 그래서 비록 창조되었지만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육체는 흙으로 창조되었기에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천사는 몸 자체가 영으로 창조되었다. 천사가 영으로 창조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될 수 있는 것이고 거듭남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탄은 영이기 때문에 하나의 씨로서 흙-사람과 연합하여 자기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그래서 마귀는 씨로서 흙-사람과 연합하여 마귀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요8:44a)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리니....’(요일3:10)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분의 씨를 흙-사람에게 뿌려 하나님의 자녀를 생산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다. 거기서 사람을 길가의 땅, 돌밭의 땅, 가시나무 사이의 땅, 좋은 땅 등 네 종류의 땅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계신다.(마13:18~23) 사람은 땅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좋은 열매를 맺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왕국의 자녀들이로되, 가라지는 저 사악한 자의 자녀들이니라.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마13:38~39a)
밭은 세상이라는 말은 밭이 사람이라는 의미다. 사람은 밭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그 아들을 생산해야 할 운명이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본질이 흙이다. 자동차의 본질은 쇠다. 쇠를 가지고 어떤 기능이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무를 가지고 어떤 기능이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나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탄은 영으로 만들어졌다. 타락했다고 영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흙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살아 있는 혼이라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뿌리는 대로 거둔다는 말도 진리고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도 진리다. 어떤 존재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다. 위치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이다. 자동차의 주인이 바뀌는 것은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동차의 기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바뀌었다고 해서 기능이 바뀐 것이 아니다. 위치가 바뀌었다고 기능까지 바뀐다면 우리의 거듭남도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위치가 바뀌었지만 말씀을 받아드리는 기능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먹고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단지 흙이고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밭에 사탄의 씨가 뿌려지면 사탄의 자녀가 태어나고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면 하나님의 자녀가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그래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는 원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을 이루어 나가시는 대원칙이다. 하나님의 씨를 받은 사람은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받은 사람은 불의한 자의 부활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 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나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24:15)
씨의 소망은 열매다. 영과 씨와 열매는 생명으로서 하나다. 사람은 육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해야 영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가진 사람을 열매라고 하시는 것이다.(고전15:20)
성경은 또 사람을 그릇으로 표현하고 있다.(롬9:21~24) 고린도후서에서는 우리가 질그릇 안에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나니.....’(고후 4:7)
성막 안에는 증거판을 보관하는 증거궤가 있었다. 여기서 증거판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증거궤는 육신을 예표한다. 사람은 무엇을 담는 궤짝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타락하기 전부터 흙이고 그릇이다. 사람은 흙과 같고 그릇과 같이 무엇을 받아드릴 자였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씨를 받을 자였지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가 아니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 창조되었다. 여자는 씨가 없는 그릇이다. 우리는 이 관념이 명확해야 한다.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여자가 아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부터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아니고 이브다. 그래서 아담은 죽음을 통해 이브로 거듭나야 했다.(창2:21~23) 이브는 부활생명의 예표인 교회로서 하나님의 최종 목표다. 지구상에 어떤 존재도 영-씨로 창조되지 않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육체-흙으로 창조되었다. 살과 피는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전15:50) 사람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얻은 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창3:22)
위 성경구절에 의하면 분명히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으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 일부 주장처럼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 들여 거듭날 자였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은 흔히들 사람이 거듭나야 되는 이유를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거듭나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최종목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무죄하였지만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다. 무죄는 단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죄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데 하나의 장애물이지 죄를 용서받는 것이 최종목적이 아니다. 인생은 살과 피로 지음받았고 근원적으로 거듭나야할 존재다.
5. 사람의 위치(格)
사람의 위치는 무엇인가? 곧 격이란 무엇인가? 피조물의 위치이고 기점이다. 기점이 없는 인생은 늘 흔들리게 되고 어디고 갈지 모른다. 창조자는 피조물에게 각자의 위치-격(格)을 부여한다. 이 위치가 피조물에게는 생명의 근원이다.
성경에서 위치 곧 '자리(seat)'는 히브리어 베텐(beten)에서 기원한 태(womb)라는 의미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리, 곧 위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위치를 떠나면 사망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할 나무가 뿌리가 뽑혀 위치를 떠나면 사망이다. 물고기도 물속을 떠나 자기 위치를 이탈하면 사망이다.
그러나 사람의 위치는 이런 장소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실재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첫 번째로 피조물로서 흙-여자의 위치에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씨로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아들의 위치에 있고, 세 번째로 이 아들이 자라서 결혼할 위치에 오면 신부가 되고 아내가 되는 위치에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실제적 위치는 우리가 부활한 후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공통적으로 사람은 흙으로서 씨가 아니고 씨를 받을 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위치에 있는 아담은 만들어졌다.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아담은 만들어진 위치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위치에 있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은 사탄이 훼방할 수 있으나 거듭난 생명은 사탄이 훼방할 수 없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인데 어떤 피조물이라도 훼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주장처럼 사람이 처음에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한다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사탄의 훼방에 의하여 훼손될 수 있겠는가?
사람은 흙-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 지음받았다. 그러나 영으로 지음받은 천사는 제한을 받지 않는 존재다. 타락도 사람이 먼저가 아니고 사탄과 그의 천사가 먼저고, 사람의 타락도 사람 스스로가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보는 관점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타락했다면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없다. 우리 스스로 헤치고 나오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마13:28)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그래서 구원자 있는 것이다.
사람은 천사처럼 영이라는 제한을 갖지 않은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고 흙-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존재로 천사보다 낮게 창조되었다.(히2:9) 흙-육신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고 씨-영원한 생명이 뿌려져야할 위치다. 이 위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지켜할 위치다. 왜냐하면 씨의 절대적 소망은 흙에게만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위치(人格)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고정된 것이고 변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인격으로 창조되었다. 세상이 말하는 인격과 성경이 말하는 인격은 다르다. 세상은 거짓아래 있다. 타락한 사람은 신도 아니면서 신처럼 부풀려져 있다. 하나님이 처음 정해주신 격대로 있어야 하는데 부풀려져 있다는 것이다. 무교병으로 있어야 하는데 유교병으로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바로 이것이 죄다.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거짓아래 있다는 것이다. 무교병으로 지음 받았는데 유교병처럼 과대 포장하여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신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이 말하는 인격은 도덕, 명예, 학식 등 사람 자신이 쌓은 것으로 부풀려져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격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할 때에 정해 주신 것으로 변개할 수 없는 위치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이고 고정된 것이다.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복-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이 위치에 있는 사람만을 찾으신다. 우리는 무엇을 하던지 내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이 우주 안에서 나의 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주 안에서 하나님과 인생의 관계에서 인생의 위치를 알아야 흔들리지 않는다. 기점이 없는 인생은 늘 흔들리게 된다. 지금 세상에서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무엇인가? 각자에게 주어진 위치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이 계시하는 인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생의 존재적 위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에게 ‘그것을 가꾸고 지키라.(창 2:15) 하셨다. 동산이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한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표는 동산 – 성막 – 성전 – 교회 – 천년왕국 - 새예루살렘 이렇게 발전이 된다. 그러므로 이 동산은 현재의 교회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이것을 물질적 곳으로 생각해서 찾아 헤매고 다닌다. 그런데 이 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소유주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분은 사람 안에 거하시는 분이다. 인격 안에 거하시는 분이지 물질 안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아담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 동산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이 막고 계시는데 어찌 인간이 찾을 수 있는가? 불타는 칼은 번제단, 곧 십자가를 상징하고 그룹들은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가로 막았던 휘장을 예표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자 그룹들이 그려져 있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마27:51)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동산을 막았던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이 제거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았던 장애물이 없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형상에 있지 않고 영-생명에 있기 때문에 성경기록도 표면적이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중점을 두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동산은 물질적인 곳이 아닌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으로 결국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임무는 인격을 가꾸고 지키라는 것이다.(창2:15) 그런데 아담은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치를 이탈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위치를 이탈한 인생의 일상은 어느 때는 신을, 어느 때는 짐승의 위치를 왔다 갔다 한다. 정위치를 잃은 인간의 당연한 결과다. 위치를 이탈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신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과거 왕들은 자칭 신이라 불렀다. 중국의 천자, 일본의 천황, 로마시대의 황제들도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짐승이라 불렀다.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해 바산의 황소, 돼지들, 개들, 여우, 독사들, 짐승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현세상의 문화는 무엇인가? 바로 이 신과 짐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갈등 구조이다. 문학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 이 갈등 구조를 교묘히 이용하면 인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과의 영적전쟁의 핵심은 위치전쟁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흙-인생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씨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흙-인생의 위치를 지킨 자에게만 씨를 심을 수 있다. 위치를 이탈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고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이 차이다.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숭배할 신을 찾던지 조롱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신과 같은 기적을 행하자 많은 사람이 추종했지만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십자가 앞에서 서시자 모든 사람이 외면하고 조롱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다. 왜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는가? 아담이 사람의 위치에서 신의 위치로 이탈했기 때문에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이런 문제의식이 없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사람을 보라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물위를 걸어가도 결국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으니 꼼짝 못하는 흙-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거기서 뛰어내렸다면 그분은 사람이 아니다. 아마 제자들도 그런 예수님을 기대하며 십자가까지 따라갔을 것이다. 자기들도 언젠가는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된다는 것을 소망하면서 따라갔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능력 정도면 그분은 거기서 분명히 어떤 신적인 능력을 통해 십자가에서 내려 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그 당시 그랬다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숭배했을 것이고 지금도 예수님은 엄청난 종교적 숭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소망을 모두 저버린 채 일반 사람들과 똑 같이 죽고 말았다. 그러자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음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두 자기 일터로 돌아갔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따랐던 예수님을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인데 자기들이 소망했던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그 사람은 아니구나, 우리가 사람을 잘 못 보았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죽으시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두 흩어져 자신의 일터로 돌아간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십자가가란 무엇인가? 여기서 인생의 정체성이 드러난 자리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이라 칭함으로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매달으니 꼼짝 못하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신과 같은 능력은 다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이 정해주신 존재적 위치만 남았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격만 남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이 되고 싶은 인생이 끝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인생은 흙이고 코에 숨이 붙은 것이 인생이다. 그 자리가 인생의 원래의 위치- 곧 구속의 자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의롭다고 하셨다. 십자가에 있는 인생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일 죽을 수 없는 존재라면 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흙-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위치를 찾아 주신 것이다. 인격을 회복하신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큼 한이 많고 억울한 인생도 없다. 그런데 그분은 거기서 인생으로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죽으셨다. 오히려 성경은 그것을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빌2:7~8) 라고 한다. 또 요한 복음에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요12:23) 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대속사역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라고 아주 단순하게 기계적으로 생각한다. 왜 이것을 죽기까지 순종이라고 하는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 정해 주신 격은 피조물의 처지와 관계없이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씨의 절대적 소망은 열매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씨가 열매를 얻으려면 흙과 연합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피조물의 목적과 창조자의 목적이 부딪친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오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 하셨다. 이 의미는 피조물은 창조자의 더 큰 목적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자의 목적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에만 복을 주실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몸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무엇인가?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곧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목적은 없고 이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갈망은 없다. 그런데 우리 피조물은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니 내가 죽지 않는 신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우리의 목적만을 생각하는데 피조물이란 의미는 자기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니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다. 목표와 방향을 모르니 대부분 구원받고 기화묘초 만발한 하늘에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이방종교에도 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한 인격에 있다. 환경이 아니다. 이 인격의 완성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씨가 뿌려지려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흙-사람이라는 위치를 지켜야한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목적아래 자신의 처지와 관계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바로 이 차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생의 격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수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왜 유독 예수님만 부활하셨는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시고 죄가 없기 때문에 부활하셨다. 또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대답한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그래서 부활했다면 우리에게는 절망이다. 우리 같은 보통 인간에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걸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인류에 모두에게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만을 인정하셨는가? 성경은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하나님이 저주하는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생명의 길 안에서 죽은 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노선 안에 있는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격을 무시하는 것은 창조자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끝내신 다음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창1:31)하시고 안식하셨다. 만족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자기의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좋다고 하는데 자기는 싫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한 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한 것이다. 핑계없는 무덤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정한 죽음이라는 인생의 격을 무시하고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자를 무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생명의 길을 벗어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일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를 찾아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인격(人格), 곧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위치(人格)는 피조물, 아들, 아내의 위치에 있다. 하나님은 씨-생명이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흙-여자의 위치에 있다. 사람은 자체 씨가 있는 피조물이 아니다.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에 흙이 아니고 타락하기 전부터 흙이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외부의 생명공급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다. 살아 있는 혼이란 흙으로서 혼적 기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씨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 영어를 받아 드리면 영어를 하고 한국어를 받아 드리면 한국말을 한다. 여자는 백인과 결혼하면 백인을 낳고, 다시 이혼하고 흑인과 결혼하면 흑인을 낳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마귀의 씨를 받아드리면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요일3:10)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므로...’(요8:44)하는 말씀도 그와 같은 이유다.
어떤 존재에게는 항상 두 가지 면이 있다. 외부적인 위치적인 면과 내부적인 기능적인 면이다. 흙의 위치에 있지만 흙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치는 변동될 수 있지만 기능은 바뀌지 않는다. 자동차의 예를 들어보자, 자동차의 주인이 바뀌면 자동차의 위치는 바뀌지만 기능은 변화가 없다. 사람도 이와 같다. 내가 위치를 이탈하여 마귀의 자식이 되었더라도 기능은 그대로 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이다. 씨는 땅을 필요로 하고 땅은 씨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사람의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인격의 속성은 천사에 비해 연약하고, 능력이 없고, 육체적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님은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이 운명적 위치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 좋은 열매를 생산해야할 밭이 되어야할 운명이지 스스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흙이 자체 씨가 있는가? 사람이 이 위치를 벗어나 다른 씨가 심겨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격에서 누릴 수 있는 사람의 권리를 인권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인격을 원하신다. 그래야만 그분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핵심 내용은 사탄과 사람의 위치전쟁이다. 또 이 전쟁은 사탄에게 속느냐, 속지 않느냐의 싸움이고, 사탄의 거짓 대 사람의 진실의 싸움이다. 무교병 대 유교병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정격 인격에만 복을 주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치를 이탈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인생은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위치를 이탈한 인생은 자신이 없는 것을 가지고 사탄을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서 원래 주신 것을 가지고 승리하길 원하신다. 이 길은 너무도 쉽고 가벼운 길이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마11:30)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거부하고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위치를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죽기까지 지킴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이것이 곧 생명의 길이다.
6. 죄란 무엇인가?
죄 – 위치(格) 이탈
성경이 말하는 근원적인 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인 죄가 아니다. 죄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다’라는 의미다. 이것은 다른 말로하면 ‘그 격을 이탈하다. 그 위치를 이탈하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각각의 피조물마다 목적을 두고 창조하셨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그 목적 안에 있어야 하고 천사는 천사로서 그 목적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달성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피조물에 대한 목적은 그 피조물의 격이라 할 수 있고,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개는 개로 있어야 하고 소는 소로 있어야 되고 나무는 나무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피조물은 자신의 격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그런데 그 격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 한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사망이다. 왜냐하면 창조물이 그 목적에 이탈하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바벨의 세계를 성경은 혼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탄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고, 일부 천사들 중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죄를 범한 천사들이 있다.(유6)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으니(유:6)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남의 떡이 커 보임으로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아담의 타락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였다.(창3:5) 즉 사람의 관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천사로 옮겨 간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in the day) 너희 눈이 열리고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창3:5)
그러나 아담은 그 날 안에(in the day) 신이 되지 못했다. 사람이 신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아담은 흙-사람이면서 영-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지만 신이 되지 않고 사탄의 아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할 자가 사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사탄이라는 이탈자가 또 다른 이탈자를 만든 것이다. 신-천사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종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고 사랑의 관계다. 그러나 주인과 종의 관계는 율법의 관계다.
아담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결과 하나님은 자신의 씨를 뿌릴 흙-사람이 필요한데 이미 마귀의 씨가 뿌려진 흙-사람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의 위치로 이탈해 버렸으니 하나님이 보실 때 이 땅에는 자신의 씨-생명을 줄 흙-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제고 사람의 문제다.
위치를 이탈한 사람의 결과
하나님이 정해놓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을 죄(sin, 단수)라고 하고 위치를 이탈한 사람의 외부적인 행위를 죄들(sins, 복수)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군인이 자기 위치를 이탈하여 탈영했다고 하면 그것이 죄고 그 군인이 하는 행위는 자동적으로 죄들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군인으로서 합당한 일을 해야 적법한 것인데 탈영을 하면 자신하는 모든 행위는 불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류의 문제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왕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였으나 성경은 그들을 짐승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 사람들이 신들이 되고 싶어 하고 사람이 죽는 것을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사탄에게 속아 있다는 것이다. 너무도 깊게 속아 있기 때문에 무엇에 속아 있는지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무엇에 속아있는가?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에게 만 씨를 뿌릴 수 있다. 그런데 흙에 다른 씨가 뿌려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씨를 뿌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씨가 뿌려져 있는 밭-사람은 갈아 엎어져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아담 안에서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갈아 엎어져 심판을 받았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은혜로, 우리에 대한 혜택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것은 너무 낮은 수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라고 하였다(고전1:24)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모든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세상은 악도 죽어야 하지만 선도 죽어야 한다. 선과 악은 한 뿌리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가정과 같은 곳이다. 왜 이혼을 하는가? 선악과 때문이다. 왜 싸우는가? 선악과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선과 악의 대결이다. 예수님은 이 세계를 종결하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열어 놓으셨다. 아담이 옛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여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죽음을 통한 경륜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이 들어 있다.
좌우간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치로 창조되었고, 천사는 종의 위치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죄란 아담이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전락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타락한 아담에 이 질문을 하시는가? 이 말씀에서 우리는 강한 빛을 받아야한다. 이 질문에 대한 영적 빛 비침이 없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가련하게도 하나님의 이 질문에 아무런 빛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죄가 무엇인지, 인류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뿌리 없는 믿음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죄를 말하지만 죄가 무엇인지, 구속을 말하지만 구속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에게 하시는 영원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치, 곧 격을 묻고 계시는 것이다. 격을 이탈한 인생, 곧 아버지와 아들의 노선에서 종의 노선으로 이탈한 인생들의 속성은 항상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으리이까?’(마19:16, 막10:17, 눅18:18, 행16:30) 하면서 행위적 관점에서 하나님께 접근한다. 선악과를 먹은 인생의 속성은 종의 근성, 노예 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야 할 자가 사탄의 아들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종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노예 여자에게서 난 자와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갈4:22) 이 말은 선악의 지식 세계와 생명의 세계를 대별하고 있다. 생명의 세계와 선악의 지식세계, 곧 율법의 세계는 서로 차원이 다른 세계다.
선악과를 먹은 세상은 늘 모든 문제를 옳으냐, 그르냐, 또는 선하냐, 악하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다른 차원의 세계다. 독수리와 물고기가 있다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능력이 있고 힘이 세서 더 우월하고 어느 한 쪽은 낮은 이런 차원이 아니라 두 세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 창조된 흙-사람은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을 심으면 심는 대로 그것을 발아하여 열매를 맺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흙-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거듭나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생명의 세계를 목표로 이 세상을 창조했는데 사탄으로 말미암아 흙-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선악의 지식의 세계라면 교회는 생명의 세계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침례자 요한보다 크다’(눅7:28)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 라는 말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 악의 대표인 가인과 선의 대표인 아벨을 낳았다는 의미다. 가인 따로 아벨 따로가 아니고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가인과 아벨의 대결의 역사이다. 어떤 때는 아벨이 승리하고 어떤 때는 가인이 승리하지만 결국 한 뿌리이기 때문에 결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의 세계, 즉 가인과 아벨의 선악의 세계가 완전히 없어져하는데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세상의 문제다. 왜냐하면 선이 악을 이기더라도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선도 없어져야 하는데 어느 한 쪽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해결의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 세상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당과 야당도 타락한 아담의 대표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런 세계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을 종결하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여시려고 오신 것이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곧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에서의 이탈을 죄라고 한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천당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데 구원의 정확한 개념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 온 것이다.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창조자의 목적 안으로 들어 온 것이 구원이다.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성경의 관점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없이 믿으면 구원이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선악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성경은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고 생명 노선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생명의 관계에서는 선악과, 곧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명의 세계를 율법적인 관점에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고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결국은 나를 얽어매는 법은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율법보다 상위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세계, 곧 생명의 세계에 와 있다.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서는 다섯 여자가 나온다. 이 여자들은 율법의 관점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할 대상이다. 그런데 생명의 관점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렇다고 악을 행하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더 중요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사람의 근본은 먹어야 사는 존재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은 외부의 공급없이 살 수가 없다.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에서 살아있는 피조물의 근본이다. 지구 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도 육적이든 영적이든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또 안 먹어도 죽지만 먹지 말아야할 것을 먹어도 죽는다. 이렇게 되어 있다. 만물이 다 그렇다.
사람의 양식은 육신적 생명을 위한 양식과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구분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라는 말씀도 사람에게는 육적인 양식과 영적인 양식이 있으며 사람은 육적이든 영적이든 외부의 공급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육적으로는 빵을 먹어야 살고 영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산다는 것이다. 영생하는 존재라면 먹을 필요가 없다. 즉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우선 육신적 양식을 주신 다음 영적 양식을 주셨다. 사람은 육신으로 창조되었다.(창2:24) 그래서 성경의 원칙은 항상 육이 먼저고 영이 나중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15:45) 그러니까 사람은 먼저 육에 속한 몸을 입은 다음 영에 속한 몸을 입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한 번은 바뀌어져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육이 먼저고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 오는 것이 아니라 죄와 관계없이 육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바꾸어지도록 창조 안에서 정해진 것이다. 흙에 씨가 뿌려져 열매를 맺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다. 흙이란 육에 속한 것이고 나중에 육이 죽고 부활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열매로 영에 속한 것이 된다.
그러면 왜 사람을 처음부터 천사처럼 영으로 창조하시지 않고 흙-육신으로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사람 안에 하나님 자신 곧 생명을 넣어주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흙으로 먼저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 단순히 죽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도 죽지 않는 천사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죽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흙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간절히 원하신다. 흙-사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가 달성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흙-육신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창세기 1장29절에서 육의 양식을 정해 주셨다.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속에 씨 맺는 나무의 열매를 가진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었노니 그것이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창1:29)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은 육신의 생존을 위해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처음부터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육신의 생존을 위한 양식을 주시겠는가? 또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죄가 들어온 후 육신적 죽음이 왔다면 죄가 들어 온 이후에 육신의 생명의 연장을 위해 육신적 양식을 주시지 왜 처음부터 육신적 양식을 주시겠는가?
그리고 영적생명의 양식으로는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열매와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셨다. 이 양식은 분명히 영적인 생명을 위한 양식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서 제시하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육신의 생존을 위한 양식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선악과를 먹어 육신적 죽음이 왔더라도 육신적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후에도 여전히 육신적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 채소를 먹으라고 하셨다.(창3:18) 그러므로 창세기 2장에서 제시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는 영적생명을 위한 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악과를 먹은 것과 육신적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선악과를 먹어 육신적 죽음이 왔다면 성경말씀대로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바로 ‘그 날 안에(in the day)’ 죽어야 했다. 그런데 육신은 죽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육신적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단순하게 알 수 있다. 분명히 창세기 2장 17절에서 ‘그 날 안에(in the day)’ 라고 하나님께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그 날로 부터’ 육신적 죽음이 왔다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도 단순하고 쉬운 하나님의 말씀을 작위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고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은 아담의 속성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그날에 육체의 생명이 죽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의미다. 지구위에 모든 생물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과 나는 연합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도 예수님을 종교적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도 성경은 believe in him, 또는 believe on him 이라 하면서 예수님을 목적격 사용하지 않고 그분 앞에 전치사 in 또는 on을 사용하면서 연합을 나타내고 있다. 생명의 원칙은 먹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요6:54) 하신 것이다. 우리는 통상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니까 예수님을 종교적 대상으로 믿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종교적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먹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당시에 예수님의 예표인 유월절 어린양을 먹었고(출12:11) 광야에서는 예수님의 예표인 만나와 반석의 물을 먹었다. 율법의 제사의식에서도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제사장과 드린 자가 함께 먹었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먹었다는 의미다. 사람은 육적이든 영적이든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또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어도 죽는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은 먹어야 사는 존재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이것은 대자연의 진리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과 생명의 원리를 계시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만이 이 대자연의 생명의 원리에 벗어나 원래 영생하게 되어 있었는데 선악과를 먹어 육체의 죽음이 왔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피조물이며 하나님과 관계없는 피조물이 된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은 씨를 땅에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련의 과정이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 사망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육체적 생명과 사망이 아니다. 생명이란 씨와 사망이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련의 과정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개념이다. 즉 씨-하나님이 흙-사람에게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탄도 영이기 때문에 씨다. 그래서 자신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자신의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생명의 원칙은 만유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사람만이 특별하지 않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원칙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사탄과 사람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이 씨를 뿌리고 열매를 추수하는 과정 안에 있으면 생명 노선 안에 있는 것이고 사탄이 씨를 뿌리고 열매를 추수하는 과정 안에 있으면 사망 노선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단순히 육신이 살고 죽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생명의 과정과 사망의 과정이라는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두 과정 안에서 일부 과정을 생명이다, 사망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 노선 안에서는 모든 과정이 생명이고 사망 노선 안에서는 모든 과정이 사망이다. 예를 들어 생명 노선 안에서는 육신이 죽더라도 생명이고 사망 노선 안에서는 부활하더라도 사망이다. 사망 노선 안에서는 어차피 모든 과정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부활도 의로운 자의 부활이 있고 불의한 자의 부활이 있듯이 육체적 죽음도 의로운 자의 죽음과 불의한 자의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4장 26~29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것 같으니 그가 밤낮으로 자고 깨고 할 때에 그 씨가 돋아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 그가 알지 못하느니라. 이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니 처음에는 잎사귀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뒤에는 이삭 안의 알찬 곡식이라. 그러나 열매가 맺히면 그가 즉시 낫을 대나니 이는 수확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라.(막4:26~29)
곧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씨가 뿌려질 토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을 씨에 비유하고 사람을 흙-밭으로 비유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13:1~9, 막4:1~9, 눅8:4~8) 등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왕국을 씨와 땅, 열매의 개념으로 비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씨란 땅속에 들어가 썩어져야 생명을 발아한다. 죽음을 통해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씨-생명의 신비다. 죽음이 없으면 열매-부활이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죄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씨는 흙속에 들어가서 썩어져야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죽으면 썩어서 한줌의 재로 돌아가지만 유독 씨만은 썩을 지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나온다. 오히려 썩은 한 알의 씨앗은 더욱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요12:24) 이것이 씨가 가지는 특성이며 하나님의 왕국의 비밀이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이 말씀은 단지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대속을 위한 희생물과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이라 부분이다.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나이다.’(히10:5)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다. 구약에서 희생물과 헌물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모형이다. 신약에 와서 희생물과 헌물의 실재이신 예수님이 오셨기에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사람은 원래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희생물이 법리적인 것이라면 헌물은 생명의 연합을 위해 유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근원적으로 헌물로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에 태워지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부활이 없는 것이다. 단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이라면 제단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외부적인 것이고 법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는데 죄로 인해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다. 이 장애물 제거를 위해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 수학적으로 두 번의 죽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희생물과 헌물의 공통점은 죽음이다. 희생물은 피흘림의 죽음이 필요하고(레17:11) 헌물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놓으신 대책이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희생물 안에 헌물을 포함시킨 것이다. 희생물로만 드려진다면 불로 태울 필요가 없지만 헌물이 되기 위해서는 희생물도 태워져져야 한다. 그래서 ‘태우는 희생물 곧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레1:9) 이라고 하면서 항상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는 것이다.(고전1:24)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헌물로도 죽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 근원적으로 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고 사탄에게 속아 신들과 같이 되려고 했다. 흙이 씨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흙은 결코 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십자가다. 인생의 진실이 드러난 자리가 십자가다. 예수님은 거기서 신과 같은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이 사람을 보고 흙-인생은 결코 씨-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십자가란 사탄의 밭이었던 아담이 하나님의 밭이 되도록 갈아엎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도록 원래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흙으로서 하나님의 씨가 심겨질 수 있도록 갈아엎어져야 한다. 살과 피는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 15:50). 하나님의 목표는 육이 아니고 영이다. 영이 생명이고 열매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흙으로 지어졌기에 죄가 없어도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거듭나야 되는 것이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무죄는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아담은 무죄하였지만 사탄에게 속아 사탄의 밭이 되었다.
고린전서 15장 36절에서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이 말은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다. 죄 문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자연과 하나다. 자연도 피조물이고 사람도 피조물이다. 생명의 원리는 똑 같다. 근원적으로 인생은 죽지 아니하면 부활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사탄의 밭에서 하나님의 밭으로 갈아엎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거듭난 것이다. 우리가 죄가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거듭날 수 있는가? 우리가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이 죄 때문에 죽는다는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다.
누가 무슨 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고소하리요? 의롭다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오,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롬8:33~3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흙-육신 안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거듭났다. 흙은 자체는 생명이 없지만 씨가 들어와 한 몸이 된다. 이것이 흙의 신비다. 그런데 흙-육신 안에 들어온 씨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에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뿌려져야 한다.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을 말하건데 네가 앞으로 있을 그 몸을 뿌리지 아니하고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알갱이를 뿌리되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에게 몸을 주시며 또 모든 씨에게 그것의 고유의 몸을 주시느니라.(고전15:36~38)
여기서 보면 몸을 뿌리지 아니하고 씨를 뿌린다고 되어 있다. 씨를 뿌려야만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뿌려보았자 씨가 아니기 때문에 열매가 없다. 그러면 우리 몸은 씨가 아닌데 씨를 뿌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거듭난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씨를 뿌린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씨지 열매가 아니다. 그래서 이 씨를 뿌리면 하나님께서 그 씨에 맞는 영적인 부활의 몸-열매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몸은 안 뿌리는가? 아니다. 결국 우리 몸도 뿌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흙과 씨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흙-육신도 씨와 한 몸이 되어 땅에 실질적으로 심겨져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심겼으면(planted)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6:5)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근원적으로 죄가 없더라도 땅에 심겨져야한다. 땅에 심겨지지 않으면 부활이 없다. 육신이 영생하게 되어있는데 죄가 들어와 육신이 죽게 된 것이 아니고 육신은 어차피 씨와 한 몸이 되서 열매를 산출하기 위해 어차피 심겨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자 맨 먼저 창세기 3:15절에서 여자의 씨, 곧 하나님의 씨를 약속하셨고 하나님 씨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인생의 근원적 문제는 씨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씨를 받아야할 자가 사탄의 씨를 받았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땅이지만 땅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씨와 땅을 약속하셨고 이 씨와 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땅으로 오셔서 씨-하나님 앞에 땅위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씨가 되신 것이다.(고전 15:45) 예수님은 우리의 잃어버린 위치-땅을 찾아 주셨고 그리고 씨-생명을 주셨다. 우리 인생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씨의 상징은 한편에서는 죽음을 한편에서는 생명을 상징한다. 씨는 반드시 땅속에 들어가서 죽어야만 생명-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래서 흙-육신으로 창조된 사람은 스스로는 생명이 없고 반드시 씨와 함께 한 몸이 되서 죽고 씨와 함께 한 몸이 되서 살아나야 한다.(롬6:8)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모든 생명은 상호 죽음을 통해 연합된다.
육체적 죽음이 죄 때문에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는 의로운 자의 부활과 불의한 자의 부활은 구분하면서 사람의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는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육체적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연합은 상호 죽음을 통해 연결된다. 인생에게 육체적 죽음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도 없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헌물로서 불-하나님께 태워져 번제헌물이 됨으로서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거부하고 죽지 않는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이다.
왜 생명의 연합은 죽음을 통해 연결되는가? 생물과 생물간의 생명의 연합은 다른 한 생물이 일방에게 먹힘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소와 사람은 어떻게 생명의 연합이 되는가? 소가 사람에게 먹힘으로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먹힌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우리도 하나님께 먹혀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단지 죄 때문에 육체적 죽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불에 의해 제물이 태워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제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번제헌물과 희생물들을 태워버렸고 주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였더라.’(대하7:1)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제헌물이 됨으로서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 들은 죄 문제만 해결되면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법리적인 문제지만 생명은 유기적인 문제다. 무죄가 영생은 아니다. 무죄는 단지 씨-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흙-사람의 위치다. 이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율법아래서의 제사 의식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법리적으로 피 흘림의 희생물이 필요했지만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사람은 하나님께 헌물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모든 헌물은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지는 것은 없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법리적인 희생물인 동시에 유기적인 헌물이 된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우리 인생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물에만 국한되고 하나님 앞에 헌물이 될 수 없었다면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은 없는 것이다. 즉 부활은 없는 것이다. 단지 무죄 상태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리적인 희생물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유기적인 헌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여 ‘태우는 희생물, 곧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레1:9)이라고 하면서 희생물이 나올 때 마다 헌물이 따라다닌다. 헌물은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향해 고린도전서에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고전1:24)라고 하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제단주위에 희생물의 피 뿌림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 헌물은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졌다. 사람은 성전 바깥뜰에서 들어와 번제단으로 가고 하나님은 지성소로부터 나와 번제단에서 사람을 만난다. 상호 생명의 연합이 번제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단지 인생의 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한 희생물로만 생각한다면 이것은 반 만 아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은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의 연합은 상호 죽음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죄 이전에 하나님 앞에 근원적으로 번제헌물로 창조된 것이다. 생명노선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은 창조 안에서 정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 노선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죽지 않았고 잔다’(마:9:24, 막5:39, 눅8:52)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 생명의 길인가? 하는 문제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으신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생명이다 이렇게 알면 종교가 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을 분인데 우리의 죄를 위해 단순히 죽으셨다 이렇게 알아도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계셨지만 죄 없으신 분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덕적인 죄의 관념을 가지고 죄라는 의미를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죄의 관념과 다르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느냐, 이탈하지 않았느냐의 차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아담의 차이는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이란 끝까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있는 것이고 사망의 길이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흙-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심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 흙-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 보았지만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사람은 성전 바깥뜰에서 번제단으로 가서 하나님께 번제헌물로 드려져야 하고 하나님도 지성소로부터 나와 번제단으로 가서 사람과 연합되어야 한다. 번제단은 태워지는 곳이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 사람도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도 죽음을 통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사람인 예수님에게서 증명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성전 바깥뜰에서 번제단으로 가서 죄를 위한 희생물인 동시에 번제헌물로서 드려지셨으며, 하나님으로서 지성소로부터 나와 번제단으로 오셨다. 바로 번제단, 곧 십자가에서 생명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단지 예수님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만이 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근본적 위치는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 곧 재-흙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흙은 생명이 없다. 헌물은 죽음으로서 드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위치다.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씨를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던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신성한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창3:6) 즉 사람이 천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고 아들이 종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두려워 숨자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인간의 근본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를 가진 아들이 되어야 할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사망의 길이다.
사망이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9절에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라는 말씀도 사람이 저주를 받아 육체적 죽음 이 온 것이 아니라 ‘너는 흙이면서 어찌하여 흙의 위치를 이탈하려고 하느냐, 네가 아무리 흙의 위치를 이탈하려고 하지만 결국 네 본질은 흙이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해야 사람이 사탄의 자식을 생산하는 자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흙이라는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흙은 흙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이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정해주신 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그 길을 이탈하면 사망의 길이다.
육은 생명이 아니고 영이 생명이다.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라는 육신으로 창조되었지 영적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의 몸은 육신적 몸이지 천사처럼 영적인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 했다. 하늘에 속한 몸이 있고 땅에 속한 몸이 있다. 사람은 1차적으로 땅에 속한 몸을 입고 2차적으로 천사와 같이 하늘에 속한 몸을 입어야 할 존재다.(눅20:36) 살과 피는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15:50) 육은 생명이 아니고 영이 생명이다. 그래서 육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육-땅에서 속한 것에 있지 않고 영-하늘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은 첫째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는 것이다.(히10:9) 첫째 것은 아무리 좋아도 육이지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은 모형이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롬5:14) 하나님의 목표는 옛 언약에 있지 않고 새언약에 있다. 첫째 것은 육에 속한 것이고 둘째 것은 영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목표가 아니고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고 말한다(행2:26) 예수님은 물론 영원 전부터 주와 그리스도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명실상부하게 그분은 죽으심과 살으심을 통해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육에서 난 것은 어차피 육이고 성령에게 난 것이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요3:6) 우리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은 연결(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사람이 썩어 없어질 육신에서 영-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육은 하나님-영 안으로 삼켜져야 한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신이다. 이 차이는 기름과 물의 차이보다 크고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크다. 그래서 중간 연결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관계적 생명이다. 생명 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생명은 연합, 곧 연결을 통해 이어진다는 것이다. 만물이 다 이렇게 되어있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거기서 주는 영양공급을 받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영양공급이 바로 그 식물의 생명이 되지 않는다. 뿌리를 통해 들어가서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그 식물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동물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밥이 바로 내 생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밥을 먹어 소화기관이라는 중간과정을 거쳐 내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사람도 자신의 생명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도 우리의 보이지 않는 생명에 세포가 연결되어 있으면 사는 것이고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어떤 화학적 물리적 작용도 가만히 있는데 일어나지 않고 중간 연결체가 있어야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 음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양성자와 음전자는 스스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성자를 통해 양성자와 음전자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결자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 하셨다.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은 무엇인가? 바로 생명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을 안다는 것은 생명을 안다는 것이다. 생명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안다는 것이고 그분의 경륜을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것은 그분의 경륜의 원리와 목표이다. 그분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생명이다. 그분 자신 곧 생명을 알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어떠함을 알리시는 수단은 단지 성경이라는 특수계시만이 계시가 아니다. 만물을 통한 자연계시도 하나님의 계시다. 자연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똑 같다. 사람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사람이 특별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의 가능성이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생명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구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으로 오신 것이고 새인류의 씨-조상으로 오신 것이다. 생명은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분 자신이 일하시는 원리 곧 생명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만물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를 통해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신격과 권능을 알라는 것이다. 그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은 존재하고 하나님은 단지 종교적으로 전능하시다는 것을 알리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 만물은 이렇게 하나님의 작품으로 생명이신 하나님의 어떠함을 표현하고 있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만일 사람만이 이 대자연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피조물이며 하나님과 관계없는 피조물이 된다. 그분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을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 자신-곧 생명을 사람에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계시를 통해 생명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해서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생명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이면 무엇하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겠는가? 전능하신 능력으로 죄를 사해 주면 되지 않겠는가? 지금 불신자들이 말하는 왜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아담이 죄를 짓게 만들었느냐 하는 논리와 같다. 그러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피조물로서 흙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생명의 책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생명은 지식을 통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 불변의 법칙이다. 생명이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도 행위 구원이 된다. 사탄의 마지막 궤계는 무엇인가? 지식을 통해 생명을 모조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이 그렇게 가고 있다.
아담은 처음에 만들어진 존재지 낳음 받은 존재가 아니다.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존재였지 처음부터 영생이 있던 존재가 아니었다.(창3:22) 그래서 만들어진 사람은 자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흙은 자체로는 생명이 없지만 씨가 들어와 흙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 이것이 흙-사람의 신비다. 흙은 생명이 없지만 생명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다. 여기에 사람의 탁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흙-사람은 무엇을 받아드리는 존재다. 받아들여 생명을 산출하는 존재지 스스로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믿으라’ 는 말은 거의 없고 ‘먹으라’ 는 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음식의 형태로 계시되고 있다. 구약에서는 생명나무의 열매, 생명의 만나, 반석의 물, 제물 등으로 계시되었고, 신약에 와서는 생명의 빵, 생명수로 계시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한 인격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격만을 하나님께서 접수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인격에게만 하나님의 씨-생명을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은 땅이지 씨가 아니다. 그런데 아담이 단지 땅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사람이기 때문에 씨와 땅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창세기 1,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하나님의 원 계시이다. 여기서도 사람은 분명 한번은 죽고 부활하도록 예표되어 있다. 이것이 명확한 진리다.
창세기 2장 21절에서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 데려오시니”라는 말씀이 있다. 아담은 여기서 인류의 대표로서 부활생명의 예표인 이브를 죽음을 통해 산출하고 있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누구인가? ‘이브’로 곧 교회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은 한번은 죽고 부활생명을 산출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은 첫 번째 창조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것으로 완성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 자신을 사람에게 주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에 완성이 안 되는 것이다.
아담은 만들어진 위치에서 낳음 받은 위치로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천사는 영적인 몸으로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피조물이 아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창6:2, 욥1:6) 또 아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눅3:38)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아들에 대해서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에게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다.(막3:17) 이것은 야고보가 진짜로 천둥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의 목소리가 천둥을 표현한다고 해서 붙여준 이름이다. ‘어둠의 아들’, ‘빛의 아들’ 할 때도 그것의 표현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아들’이라는 말은 ‘~의 표현’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천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낳아진 아들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사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표현,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그분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가운데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셨느냐?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5) 했다.
구약에서는 분명히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천사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너는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천사는 낳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으로 낳은 아들이 참 아들이지 만들어진 아들은 참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천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에는 영생, 곧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하나님께서 낳은 아들만이 참 아들이라는 것이다. 천사는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피조물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 아담은 만들어진 아들의 위치에서 낳은 받은 아들의 위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죽음은 창조 안에서 정해진 경륜이다. 왜냐하면 옛 것을 끝내고 새로운 생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잠자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해 ‘잠잔다’로 표현하고 있다.(마9:24, 마27:52, 막5:39, 눅8:52, 요11:11, 고전11:30, 15:18, 20, 살전4:13, 14, 15, 5:7) 창세기 2장 21절에서의 아담은 인류와 그리스도 모두를 예표한다. 이브가 예표하는 부활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아담은 부활생명을 산출하기 위해 죽음이 필요했다. 이것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번은 죽고 부활생명을 산출해야 하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은 죽고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였지 영원한 생명이 없었다. 죄가 있을 때는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하지만 죄가 없을 때는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왜 죽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이 연합하려면 너무도 차이가 크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공통지점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생명이 연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접촉점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성소에 나와 번제단으로 나아가고 사람도 세상에서 번제단으로 가야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사람의 죄 문제 뿐만 아니라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신 것이다. 성경 전체를 조망해 볼 때 하나님의 정하신 생명의 길은 다음과 같다.
생명노선은
① 죄가 들어오기 전
씨-하나님께서 흙-사람에게 씨를 뿌리면 사람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
죄가 들어 온 후
사탄의 씨가 뿌려진 흙-사람은 갈아엎어진 다음 하나님의 씨가 다시 뿌려져야 함, 즉,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삶으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롬6:5)
② 육체적 죽음, 흙-육신은 흙으로 돌아감, 이것을 예수님은 ‘죽지 않고 잔다’로 표현하심, 사람의 영과 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혼이 천국으로 감
③ 하나님께서 열매를 거두심, 이것을 의로운 자의 부활이라고 함, 사람의 육신은 영적인 몸으로 변화됨, 흙-육신이 아니고 영적인 몸-생명으로 변화됨
④ 최종적으로 새예루살렘으로 가서 영원히 삶
사망노선은
① 씨-사탄이 흙-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림, 마귀의 자식으로 거듭남
② 육체적 죽음, 흙-육신은 흙으로 돌아감, 영은 하나님께로 가고 혼은 지옥으로 감
③ 사탄이 열매를 거둠, 이것을 불의한 자의 부활이라고 함, 이 몸도 영적인 몸으로 죽을 수 없는 것임
④ 최종적으로 둘째사망(불호수)으로 감
하나님의 씨를 받아 드리면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고 사탄의 씨를 받아 드리면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씨도 흙과 만나 발아하려면 그 씨는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한다. 죽음 안에서 생명의 접촉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노선 안에서도 육체적 죽음이 있는 것이고 사망노선 안에서도 육체적 죽음이 있는 것이다. 또 농부이신 하나님은 씨를 흙에 뿌려 열매를 거두지 흙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망이란 말을 단순히 사망 노선 안에 있는 어떤 특정 지점을 한정해서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최종적으로 둘째 사망을 말하지만 사망열차를 타고 둘째사망이라는 종착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사망,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란 말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열차를 타고 있으면 영적사망, 첫째 사망, 불의한의 자의 부활이라는 정거장을 거쳐 자동적으로 둘째 사망이라는 종착역으로 가기 때문이다.
8. 희생물과 헌물
희생물과 헌물은 동일시 됨
구약의 제사의식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크게 희생물(sacrifice)과 헌물(offering)로 구분된다. 희생물은 죄에 대한 값을 치루기 위한 제물이고 헌물은 하나님과 교통을 위한 제물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인 것이라면 헌물은 생명의 교통을 위한 것으로 유기적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희생물이고 그분과 사귐을 가져야 할 자로서 헌물이다. 그래서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말이 꼭 같이 따라다니고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생의 근본적 위치는 하나님께 헌물로 지음 받았으나 죄로 인해 희생물이 추가된 것이다. 희생물은 반드시 피를 제단의 주위에 뿌렸다. 이것은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니라.(레1:17) 하면서 한 가지 제물을 향해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인생은 원래 죄 이전에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으나 죄가 들어옴으로 희생물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희생물과 헌물은 하나의 모형이고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다.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나이다.’(히10:5) 라는 말씀은 희생물과 헌물의 실재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모형은 필요 없다는 의미다.
인생의 근본적 위치는 번제헌물임
우리의 상식과 통념으로는 인생은 죄인이기 때문에 맨 먼저 죄로 인한 희생물을 드리는 것이 우선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성경은 번제헌물이 맨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이 음식헌물, 화평헌물, 죄 헌물, 범법헌물 순이다. 이 순서가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는 순서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생의 생각은 다르다. 인생은 늘 죄인이라 관념 때문에 인생은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다섯 가지 제물의 명칭이 ‘~헌물’이 아니고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인생의 근본은 헌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원래 희생물로 창조하지 않고 헌물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헌물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모두 태워졌다. 헌물의 종류는 다섯 종류지만 모두 번제의 형태로 드려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헌물 중 번제헌물이 모든 헌물의 기본이고 총체이다. 다른 네 가지 헌물은 이 번제헌물의 발전이고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 헌물이다. 레위기 나오는 모든 헌물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곧 이 헌물은 곧 나 자신을 의미한다. 이 헌물의 대표는 번제헌물이다. 결국 인생의 근본은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서 재, 곧 흙이다. 이것은 인생은 흙이라는 것을 예표하고, 생명이 없다는 것을 예표한다.
왜 모든 제물은 불로 태워졌나?
성경에서 태양은 하나님을 예표한다.(말4:2) ‘화덕같이 불태우는 날’(말4:1), 불 호수(계21:14)와 같이 큰 불은 심판을 상징하고 번제단과 같이 작은 불은 생명을 예표한다. 결국 불은 하나님을 예표한다. 모든 희생물과 헌물은 결국 불로 태워져 재가 되었다. 이 불은 하나님의 불이다. 창세기 3장 24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자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레위기에서는 모세와 아론이 성막에서 번제헌물을 드리자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위의 번제헌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와 갔다가 나와서 백성을 축복하매 주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고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위의 번제헌물과 기름을 사르매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대고 엎드렸더라.’(레9:23~24)
열왕기상 18장에서도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희생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왕상18:38~39)
하나님의 불이 핥아갔다는 것은 결국 그 불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는 뜻이다. 소멸할 뿐만 아니라 삼켜 버렸는데, 그 삼켜버렸다는 말은 먹었다는 의미로 연합이 됐다는 뜻이다. 불로 삼켜져 버렸다는 것은 또한 ‘받아졌다’는 의미다.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로 삼을 지니라’(레1:17) 한 것은 ‘받아졌다.’는 말이다. ‘받아졌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재가 된다’는 말이 그 어원이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이 ‘기름으로 받는다’는 뜻이다. 기름으로 받는다는 말은 향기롭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기름을 드린다는 것은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기 위한 것이다. 내가 헌물로서 재가 되고 향기로운 냄새가 되면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것인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받아졌다’ 하는 것이 단지 누구한테 물건을 주었더니 받았다 하는 뜻이면 아주 피상적인 것인데,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드렸다, 그 제물을 받아드렸다.’ 하는 뜻은 재가 된다는 뜻이다. 결국 사람의 근본적 위치는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서 재가 되어야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된다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마치고 하나님께 번제헌물과 희생물을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번제헌물과 희생물들을 태워버렸고 주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였더라.’(대하7:1)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신4:24, 히12:29)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불의 혀 같다’(행2:3)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육과 영의 연합, 곧 흙-사람이 불-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인생이 태워져야 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재, 번제헌물이 되어야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죄로 인한 희생물만 생각하고 죄 이전에 근원적으로 인생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단지 죄 때문에 인생에게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계시는 사람은 흙-사람으로서 불-하나님께 태워져 재가 됨으로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연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죄 이전에도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하셨다.
자고로 어떤 헌물도 살아 있는 채로 헌물로 드려지지 않았고 죽음으로서 드려진다. 아담은 왜 죄를 지었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 곧 번제헌물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희생물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 희생물 안에 헌물을 포함시켜 놓으신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고전1:24) 만약에 예수님이 단지 희생물에만 그친다면 우리에게 영생이 없다. 희생물은 단지 죄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또 단지 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한 희생물이라면 불에 의해 태워질 필요가 없다.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되기 때문이다. 이게 구속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그런데 죄들의 용서, 곧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이라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희생물은 다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재가 됨으로서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향기로운 헌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희생물이 태워짐으로 번제헌물이 된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이 한 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불로 태우는 희생물, 곧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레1:9)이라고 하면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희생물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헌물이 됨으로서 하나님께 삼켜지는 것이다. 풀은 소가 되기 위해 소에게 삼켜져야 한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삼켜짐으로 높은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죄 이전에도 하나님 앞에 헌물로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재가 되어야만 영생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흙-육신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 번제헌물로 드려짐으로 영생을 얻을 자였다.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곧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려면 스스로 뛰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연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39) 하나님은 인생이 죄가 있기 때문에 소멸시키시는 불이 아니라 죄가 있기 전에도 소멸시키는 불이다. 불-하나님과 만나서 태워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불-하나님은 용광로와 같다. 용광로 안에서는 쓸모 있는 쇠든 쓸모 없는 쇠든 모두 재창조되기 위해 녹여져야한다. 번제헌물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이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보통 결혼이란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상대적 만남이므로 번제헌물 없이도 그냥 서로 적당하게 어느 선까지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서 결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내가 결혼하려면, 서로가 이해하고 양보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 절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좀 양보하고 내가 좀 양보하고, 이래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는 절대적인 관계이다. 내가 이기든가, 그분이 이기든가 둘 중에 하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가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합, 그것은 먹고 먹힘의 관계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했다. 신약에서 와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표현하셨고, 자신을 먹으라고 하셨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희생물과 헌물이 되심으로 하나님에게도 먹히시고 우리에게도 먹히심으로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 연합되려면 먹히는 과정, 곧 번제헌물로서 반드시 하나님의 불에 반드시 태워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완전한 죽음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죄 이전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희생물과 번제헌물, 이 두 제물의 공통점은 죽음이다. 희생물도 죽어야 하고 헌물도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여 받으시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십자가의 권능과 지혜라는 것이다.(고전1:24)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물이라면 이것은 법리적인 것에 그치고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이 되셨기에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하신 것이다.
대속(代贖), 구속(九屬)과 회개(悔改), 의(義)
대속이란 법리적인 것으로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았다는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켜야 하는데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하는데, 이 죄에 대한 법리적 희생 대가를 대속(ransom)이라 한다. 그러나 법리적 대가를 치렀다고 해서 유기적 생명으로 원 위치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죄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이식하여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인생의 원래 위치, 곧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원 위치로 사람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구속(redemption)이라 하고,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정해주신 사람의 격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하고 돌아가는 것을 회개(repent)라고 한다. 의(義)란 무엇인가? 의(義)의 어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위치에 있다’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시에 피조물의 바른 위치를 정해 주셨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에 있는 사람의 위치를 의(義)라고 한다. 구속이 되면 의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속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의 올바른 위치는 십자가(죽음, 흙, 재)라는 것이다.
신약에 보면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대속물(ransom)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마20:28, 막10:45, 딤전2:6) 이것은 구약의 희생물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대속하셨다면 우리의 생명의 연합은 없다. 대속은 법리적인 것으로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속(redemp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구속이란 인생의 원위치란 의미다. 이 위치가 유기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연합될 수 있는 위치다. 인생의 원래의 위치는 흙, 번제헌물이다. 씨가 뿌려질 수 있는 위치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사람을 구속, 곧 인생의 원래의 위치를 찾아 주셨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 되었듯이 신약에서도 대속과 구속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이 법리적인 대속(희생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가능한 인생의 원래의 위치, 곧 인생은 하나님 앞에 헌물이라는 위치를 찾아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대속의 의미도 있지만 구속, 곧 인생의 원래의 위치라는 것이다. 어떻게 죽음이 인생의 원래의 위치인가? 이해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는 혼이니까 살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영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람은 단지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로서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혼은 생명이 없는 흙으로서 십자가의 위치 곧 흙, 재의 위치, 번제헌물의 위치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원래의 위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살아 있는 혼이나, 십자가 못박혀 있는 사람이나 생명이 없는 것은 매 한가지라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거부하고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키심으로 다시 인생의 위치를 찾아 주셨다는 것이다.(골1:14) 이 위치에 있는 자만을 하나님은 오직 찾으신다. 이 위치에 있는 자만이 생명의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헌물이 하나님의 불에 태워짐으로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있었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재가 됨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법리적인 대속이 유기적인 구속을 이룬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희생물이 헌물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구약의 희생물은 신약의 대속물이고 구약의 번제헌물은 신약의 구속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희생물과 헌물이 하나이듯이 대속과 구속이 하나이다. 법리적인 면과 유기적인 면이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단순히 법리적인 대속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인생의 원래의 위치, 번제헌물을 통해 생명의 연합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모두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인생의 원래 위치는 생명이 없는 번제헌물로서 흙, 재의 위치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담은 이 위치를 이탈하여 신이 되고자 하였으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인생의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흙 – 돌 – 보석으로의 변화
사람은 흙이고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흙-사람과 불-하나님이 연합되면 흙-사람은 살아 있는 돌이 된다.(벧전2:5) 그러나 돌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돌도 불을 가하면 다른 차원의 물질로 변한다. 오직 보석만이 외부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보석은 영생이신 성령 하나님을 상징한다. 살아 있는 돌-사람은 불-하나님에 의해 태워져 보석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 목표는 흙-사람이 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석-사람이 되는 것이다.(고전3:11, 계21:11) 이것이 생명의 연합의 실제적인 과정이다. 흙에 불을 가하면 흙은 돌이 된다. 다시 돌에 불을 가하면 돌은 보석이 된다. 이 원리가 똑 같이 적용된다. 육이 영 안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흙-사람이 불-하나님께 태워져 보석이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지 보석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적 피조물인 사탄의 모습은 보석이 그를 덮고 있다.
‘네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더니 모든 보석과 홍보석과 황옥과 다이아몬드와 녹주석과 줄마노와 벽옥과 사파이어와 에메랄드와 석류석과 금이 너를 덮었으며 네가 창조되던 날에 네 안에서 네 작은북과 네 피리의 작품이 예비되었도다.’(겔28:13)
이 말씀은 사람은 흙-육신으로 창조되었고 영적으로 사탄은 보석-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석이 영원하듯이 영적인 피조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흙이라는 위치는 씨-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필요한 위치다. 그래야만 씨-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영생하는 존재였다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지 않고 씨-영으로 창조되었다는 모순이 생긴다.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 영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본적인 창조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사람이 영생하는 존재였다면 끝까지 영생해야지 가다가 어떻게 영생이 끊어질 수 있는가? 영생이란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도 보석과 같이 본질이 변함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영생하는 존재였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은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없이 죽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에게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고 마지막에 불 호수에 가두는 것이다.(계21:10)
타락한 현 세상은 율법이 작용하는 세계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법이 작용하는 세계다. 우리는 율법이 작용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용하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옮겨왔다.(롬8:2) 종의 세계에서 아들의 세계로 옮겨 온 것이다. 노예여자에게서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자로 옮겨 온 것이다.(갈4:22) 그럼에도 여전히 복음을 생명의 유기적 관점보다는 단순히 법리적 관점에서만 봄으로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그러니 믿어야 한다.’ 이렇게 단순하게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화가가 설악산을 갔다 와서 그 화가가 설악산을 그린다면 그 화가와 설악산의 만남은 그 작품 속에서 만난다. 그 화가가 설악산을 작품으로 그리고자 한다면 설악산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겉만 보고서는 작품세계를 그릴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그분의 인격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한다.(요17:3) 그러므로 단순히 법리적인 희생물로서의 예수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기적인 헌물로서의 인격적인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를 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의 비밀은 감추어져 왔고 여러 이단들이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문제를 일으켜 왔기 때문에 기독교계에서는 이곳을 건드리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도 사탄의 작전일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근원이 잘 못되면 열매가 잘 못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제공하고 있는 정보를 통해 이에 대해 최대한 알아보기로 하자.
성경은 선악의 지식노선과 생명노선이라는 두 줄기가 있다는 것을 계시해 주고 있다. 우주 안에서는 어디를 가도 이 두 노선이 존재한다. 교회와 가정은 생명노선이지만 세상과 직장은 선악의 지식노선이다. 생명노선은 아들의 노선이고 지식 노선은 종의 노선이다. 회사 안에서도 사장과 종업원은 종의 노선이지만 사장과 사장의 아들은 생명노선 안에 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모든 법을 뛰어 넘는 생명 관계다. 원래 하나님은 사람을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 관계를 목표로 창조하였는데 사람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 인류의 문제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와 세상에서 말하는 죄의 의미는 차이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선하냐, 악하냐 이런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느냐, 이탈하지 않았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의 기준도 사람이 선하냐 악하냐, 위대하냐 위대하지 않느냐? 이런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했느냐, 이탈하지 않았느냐?의 기준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타락한 현 세상은 선악의 지식 노선, 즉 선악이라는 도덕과 지식이라는 능력이 가치 기준이 되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율법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세계에서 선악의 지식 세계로 위치를 이탈한 인류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그 씨를 뿌린 필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피조물의 머리로 창조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생명의 세계에서 인격 중심의 우주를 경영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다.
그래서 성경은 대부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의 지식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는 다섯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도덕적인 세상기준으로 보았을 때 지탄받아 마땅할 여자들이었지만 이들은 생명노선에 있던 여자들이었다. 이들 다섯 여자들은 인류를 대표한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세 가지 위치 하에 있다. 첫 번째는 피조물, 그리고 아들의 위치와 더불어 하나님의 아내가 될 위치에 있다.(계21:9) 이 위치를 벗어나면 사망의 길이고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 하에도 이 운명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에서 가장 의구심이 있는 단어가 ‘나무’라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나무’는 종종 인격적인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구약에서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올리브나무는 종교적 특권을, 무화과나무는 민족적 특권을 상징한다. 마태복음 13장 32절에서는 나무가 마귀를 상징하고, 에스겔서 31장에서는 적그리스도를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에스겔서 31장 8절은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도 아름다움에 그와 같지 못하였도다.’ 하였고 에스겔서 31장 18절은 이처럼 영광과 위대함에서 네가 에덴의 나무들 중에 누구와 같으냐? ... 이것은 파라오(적그리스도 상징)와 그의 모든 무리니라. 하면서 나무를 적그리스도에 비유하고 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그분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잡고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아가사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그가 무엇을 보는지 그에게 물으시니 그가 쳐다보고 이르되, 사람들이 나무처럼 걷는 것을 내가 보나이다. 하거늘(막8:23~24)
사악한 자가 큰 권능을 가진 것을 내가 본즉 스스로 푸른 월계수같이 뻗어 나갔으되(시37:35)
그들이 짓되 다른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심되 다른 사람이 먹지 아니하리니 내 백성의 날수는 나무의 날수와 같으며 나의 선택된 자는 자기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리리라.(사65:22)
그들이 푸른 나무 안에서 이런 일을 행할진대 마른 것 안에서는 무슨 일을 행하리요? 하시니라(눅23:31)
그리고 다니엘서 4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나무에 대한 꿈을 꾸었는데 한 가운데 있는 나무가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다니엘이 해석을 하였다.
왕이 보신 나무는 자라서 강하게 되어 그것의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아 그것의 모습이 온 땅에 이르렀으며....... 오 왕이여 그것 즉 자라서 강하게 된 것은 왕이시니 왕의 크신 위엄은 자라나서 하늘에까지 닿으며 왕의 통지는 땅 끝까지 이르나이다.(단4:20~21)
사람과 나무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세포가 있고, 순환기가 있고, 숨을 쉬고, 손뼉을 치고, 노래를 한다. (사44:23, 55:12) 모든 생물은 실재와 형상, 즉 씨와 형상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무는 그 나무의 뿌리, 곧 생명-씨의 표현-형상이다. 그리고 그 나무의 열매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이다.(창1:29) 예를 들어 감나무는 땅속에 있는 감 씨-생명의 표현이고, 감나무의 최종 산물은 감이라는 열매다. 사람은 나무를 먹지 않고 열매를 양식으로 취한다. 이 원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씨이시고 피조물은 그분의 어떠함을 표현하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아버지와 아들, 곧 씨와 열매, 실재와 형상의 관계로 창조하셨다. 하나님도 씨를 뿌려 사람 농사를 지으시고 인격이라는 열매를 거두신다. 그래서 만물 안에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있도록 그분의 권능과 신격이 보인다는 것이다.(롬1:20).
선악의 지식나무
먼저 선악의 지식나무에 대한 성경의 정보를 살펴보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 여자가 본즉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창 3:5-6a)
여기서 창세기 3장 5절의 ‘신들’이란 성경에 의하면 타락한 천사를 말한다. 사무엘하 14장 17절에 보면 ‘내 주왕께서 하나님의 천사와 같으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간하시기 때문이니이다.’ 라는 말씀이 있듯이 분명히 선악을 분간하는 것은 천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겔서 28장 12절에 사탄을 묘사하는 말이 있는데 ‘너는 지혜가 충만하며 아름다움이 완전하여 모든 것을 봉인하는 자로다.’ 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가 ‘지혜’와 ‘아름다움’인데 창세기 3장 6절에서도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가 ‘지혜’와 ‘아름다움’으로 동일하다. 그런데 사탄은 이 충만한 ‘지혜’와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타락했다.
네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네 마음이 높아졌으며 네 광채로 인하여 네가 네 지혜를 부패시켰은즉 내가 너를 땅에 던지고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이 너를 바라보게 하리라.(겔28:17)
아담과 이브는 바로 사탄의 이런 면을 부러워하여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가 본즉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창 3:5-6a)
이 말을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는 ‘육신의 정욕(먹기에 좋고), 안목의 정욕(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인생의 자랑(사람을 지혜롭게함)’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요일2:16)
이것은 다시 육신의 정욕-빵, 안목의 정욕-종교, 인생의 자랑-정치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빵과 종교와 정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정치를 대표하는 그리스인(이방인)은 지혜를 구한다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결국 근원은 다 하나다. 계시록 20장 3절에 옛 뱀은 창세기 3장에서 뱀으로 표현되었던 사탄이다. 그러니까 사탄이 에덴동산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성경이 계시하는 정보를 종합해 보면 선악의 지식나무는 사탄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나무
생명나무는 성경에서 창세기, 잠언, 계시록에 등장한다. 많이 나온다고 해서 중요하고 덜 나온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근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그 나무는 그 씨-생명의 표현이다. 그 생명이 그 나무로 표현된 것이다. 나무의 생명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살아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다고 한다.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결과만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어디 계신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무를 보면 그 생명을 본 것이다(요14:9). 생명나무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표현이다.
생명나무에 관하여는 창세기에 나타났으나 아담이 버리고 간 이후 일체 나타나지 않다가 계시록 2장 7절에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 되었고 22장 2절에 생명수의 강과 함께 다시 나타난다. 그동안 이 나무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었던 것(계2:7)으로 표현 된 것을 보면 없어졌던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다가 나타날 때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감추어졌던 것은 그 나무와 관계된 인간이 없었기 때문이고 다시 나타난 것은 받을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생명나무는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동산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해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산에 있으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나무’란 어떤 인격적 존재를 말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그 나무의 씨-생명의 표현이므로 생명나무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을 포도나무(요15:1)로 비유하였고,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 14:6)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생명은 아들이신 예수님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생명나무가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나무라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두 분이 되는 모순이 생기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성경 말씀과도 배치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오셔서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5:39)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긍정적인 모든 것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예표지만 신약은 예표되었던 그리스도가 실재로 오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의 생명나무는 죄가 들어오기 전의 상황이므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이지 불교나 이방종교의 설화에서 나오는 천도복숭아와 같은 개념으로 하나님과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은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관념을 분명히 가져한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종교와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들이 논리가 부족하면 무조건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하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 왜 사람이 죄인이 되게 했느냐, 전능자라면서 무엇하러 예수 그리스도가 오느냐,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늘에서 죄를 사해주면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축구공에 바람 넣듯이 생명을 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 곧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물이 다 이런 원리로 어떤 작용이 일어난다. 교선질작(交宣迭作)은 우주 안의 진리다. 서로 베풀어지며 교차되어 만물을 만들어낸다. 가만히 있는데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없다. 중재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자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 인식하에서 만물의 작용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사람만이 특별하지 않다. 사람이 밥을 먹어 이 밥이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도 밥이 바로 생명이 되지 않고 소화기관이라는 중재자를 거쳐 피와 살이 되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피조물은 없다. 그러므로 생명은 연합, 연결되는 것이지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예표인 아담을 창조하시고 사람의 예표인 이브와 더불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되라고 했지 이브 혼자 독립적으로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생명의 연합, 연결을 보여주고 있는 예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했고, 그 사람 안에 생명을 넣어주는 책임은 하나님의 생명을 유일하게 가진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생명나무란 생명이신 하나님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사람은 바로 나무를 먹을 수 없기에 그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란 곧 예수님의 인생에서 최종산물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사람의 근본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고, 무엇을 먹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음식의 한 형태로서 에덴동산에서는 생명나무와 열매로, 출애굽을 한 후 광야에서는 생명의 만나로,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구약시대 초반에도 주의 천사로(사63:9) 나타나서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고 사역을 수행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사탄을 상징하는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는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3:6) 모습이었지만,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 53:2)라고 말하고 있다.
즉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예수님과 비교했을 때 아담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죽지도 않고,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고(마 4:3) 날아다닐 수 있는 능력 있었다.(계 8:13) 그래서 아담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사탄은 천사와 같은 동류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피조물인데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인격(예수님)을 선택하지 않고 능력(사탄)을 선택하였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결국 성경은 종의 노선에 있는 능력 대 아들의 노선에 있는 인격의 싸움이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결국 인격을 선택하지 않고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인 타락한 천사 사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천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종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천사숭배를 금지하고 있고, 사람이 천사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골 2:18a)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물며 이 세상 삶에 속한 일들은 얼마나 더 많이 판단하겠느냐?(고전 6:3)
그분께서 천사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게 되신 것은 상속을 통해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라(히 1:5)
그분께서는 다가오는 세상 곧 우리가 말하는 그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시키지 아니하셨느니라.(히 2:5)
좌우간 사람은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하며 이 문제가 인류의 유일한 해결과제이다.
능력과 인격
어떤 존재에게는 항상 두 가지 면이 있다. 외부적인 능력적인 면과 내부적인 인격적인 면이다. 예를 들어 어떤 가수가 있다고 하자. 그 가수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해서 그 노래가 그 자신은 아니다. 가수가 노래를 잘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지만 인격은 아니다. 세상에서도 이름난 연예인들이나 운동선수들이 있는데 결혼을 하면 못 살겠다고 이혼하는 사례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도 두 가지 면이 있다. 능력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이다. 천사는 성경에 보면 날아다닐 수 있고, 죽지도 않고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천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과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해 섬기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다.(히1:14) 반면에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벧전1:4) 곧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을 피조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경륜이라는 말이 영어로 dispensation(분배)라고 하는데 바로 이 의미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분배하겠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에서 사람은 세자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고, 천사들은 왕좌들, 통치들, 정사들, 권능들이라는 신하들로 창조되었다.(골1:16)
선악과는 왜 만들었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악과라는 양식은 천사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섬기는 자들로서 일군이다. 신하들은 일을 하려면 선악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회사에서도 종업원들은 선악의 지식이 있어야 일을 잘 할 수 있는 거와 똑 같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아담이 범죄하게 만들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사해 주시는가? 이것은 병 주고 약 주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좋고 나쁨의 차원이 아니라 피조물들이 먹어야할 양식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도 어떤 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하고 어떤 차는 디젤을 넣어야 한다. 그에 맞지 않는 기름을 넣으면 자동차는 고장난다. 휘발유를 넣어야할 차가 디젤을 넣으면 사망이다. 이것은 디젤이 나빠서가 아니다. 그 차에 합당한 기름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악과와 생명과도 마찬가지다. ‘선악과는 나쁘고 생명과는 좋은 것이다.’ 이런 차원이 아니다. 그 피조물에 합당한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사람은 생명과를 먹어야하고 천사는 선악과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사들은 섬기는 자들로서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잘 판단해야 한다. 신하들이 마땅히 가져할 조건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이 선악의 지식을 가지면 사람은 하나님 마저도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로 가정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정과 같다하더라도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누가 옳으니 그르니 하면 늘 분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는 것에서 입증된다. 가정에서도 부부가 왜 이혼을 하는가?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가정과 교회는 선악의 지식이 작용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다. 생명의 세계와 율법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중력이 작용되는 세계와 무중력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인생은 선악의 지식세계가 아닌 생명의 세계에서 살도록 운명 지어졌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생명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생명의 노선이다.
우리 인생은 원래 하나님의 생명의 법 아래서 살도록 지음 받았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율법의 세계로 간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죄와 사망의 법이다. 땅에 살도록 되어 있는 피조물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사망이다. 같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 안으로 옮겨 온 것이다.(롬 8:2) 그러므로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는 근원에 관한 문제다.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가 씨를 뿌려 큰 바벨론으로 열매를 맺고,(계17, 18장) 생명나무의 열매가 씨를 뿌려 새예루살렘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이 성경이 주는 계시다.(계21, 22장)
10. 우주 안의 3대 위치 전쟁
성경은 우리의 삶을 사탄과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과의 전쟁에서 사탄에게 승리하는 무기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 전쟁은 여러 가지가 있다. 경제전쟁, 지식전쟁, 군사전쟁 등이 있다. 세상은 선악의 지식의 세계임으로 능력 대 능력의 전쟁이다. 능력이 큰 진영이 승리한다. 그러면 영적전쟁의 무기는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말씀을 인용함으로, 또는 기도로 승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탄보다 더 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이다. 사탄은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 때문에 교만하여 타락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사탄을 능력으로 이길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 다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도 쉽게 사탄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승리하길 원치 않으시고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이미 창조하셨다.
우주 안에는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사탄과의 3번의 영적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의 핵심은 지금까지 살펴 본바와 같이 위치(格) 전쟁이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피조물로서 흙-여자의 위치에 있다. 바로 이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도 영-씨지만 사탄도 영으로서 씨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심어 자신의 아들들을 생산하여 이 땅을 사탄중심으로 경영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 인격중심으로 우주를 경영하시겠다는 의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길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생명의 길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사망의 길은 신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어찌하든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정상적인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근본적 임무는 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창 2:15) 그런데 이 동산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곧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 되어야지 신과 같이 되어서는 사망이라는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런데 아담은 인생의 길을 벗어나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사망의 길로 갔다.(창 3:5~6)
그러므로 영적 전쟁의 핵심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 곧 인격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탄과의 영적 전쟁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고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전쟁이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정한 각자의 생명의 길이 있다. 우리는 너무도 단순하게 ‘죄 사함 받으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에서 이탈한 것이고 예수님은 그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이다. 이 차이다. 생명의 길이란 무엇인가?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으시니까 부활하셨다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으시다. 그러나 단지 그분이 그렇다고 해서 부활하셨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절망이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에게만 특수하게 적용되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스스로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이 복음인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놓은 죽음이라는 길이 너무 싫어서 신들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위치를 지킴으로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아무리 억울해도 십자가에 매달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드렸다. 자신의 처지인 인생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담은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인생의 위치를 이탈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으로서 운명을 원망했다.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나를 왜 이렇게 약하게 만들었습니까?’ 만드신 이의 깊은 뜻을 모르고 이렇게 원망한 것이다. 피조물이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것은 창조자를 원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인생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하는데 자기는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망이다.
십계명을 보면 다른 계명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죽이라는 말씀이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과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든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모두 창조하시고 ‘보라, 매우 좋았더라’(창1:29)하셨고, ‘상쾌하다’(출31:16)고 하셨다. 만족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에 관계없이 무조건 좋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피조물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는 것은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고 만드신 이를 원망하는 것이다. 창조자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죽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완전하게 지음 받았다. 불완전한 피조물은 없다. 각각의 피조물은 그 목적 안에서 완전하다.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컵은 컵대로 그 목적 안에서 완전하다. 수저는 수저대로 그 목적 안에서 완전하다. 수저가 포크레인처럼 흙을 많이 담을 수 없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천사는 죽지 않는데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완전하게 지음받았다. 사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데 완전하게 지음 받았다.
성경에 의하면 세상은 종교와 정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종교와 정치의 근원도 아담의 타락으로 기인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위임하신 3중 직분이 있다. 존재적 생존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하는 대언자의 직분이 있고 이 말씀을 먹고 외부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직분과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직분이 주어졌다. 이 직분은 모두 영적인 직분이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 근원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생명은 영적인 것에 있다.
그런데 위치를 이탈한 아담의 세계는 대언자의 직분을 포기함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 대신 육신적 양식에 몰두하였고, 제사장과 왕이라는 직분이 오도되어 세상의 종교와 정치가 되었다. 세상은 한마디로 빵과 종교와 정치라 할 수 있고 타락한 현 세상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양분하게 된 것이다.(계17,18장) 그래서 현 세상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통합되면 무소불위가 된다. 창세기 11장의 바벨론과 고대 국가는 거의 모두가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국가로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에는 로마 카톨릭이 그랬고 현대에 와서는 중동의 일부국가와 북한이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국가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간단하다. 종교와 정치이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한 후 맨 먼저 종교를 만들었고, 그 이후 도시를 만들었는데 이는 사회로서 정치이다.
1차 위치 전쟁 (에덴동산) : 아담이 인격(생명의 길)을 이탈함
첫 번째 전쟁에서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길을 부끄러워하여 사탄에게 패배하므로 사람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하게 되었다. 첫 번째로 사탄이 유혹한 말은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창3:5) 했는데 ‘신들과 같이 되어’ 라는 말의 의미에는 천사들의 ‘능력’을 추구한다는 말이고, ‘선악을 안다’ 는 것은 지혜를 말한다. 이것은 종교-신과 정치-지혜를 대표하는 말이다.(고전1:22) 즉, 종교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된다’라는 의미이다. 성경에 의하면 신들은 천사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다.(창 6:2, 욥 1:6) 또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선악을 아는데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의미는 하나님은 재판장으로서 만왕의 왕이니까 정치 안에서 왕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원래 사람은 사람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왕이 되어야할 존재인데 종인 천사의 위치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왕이 될 수 있다고 사탄이 유혹한 것이다. 사람의 위치에서가 아닌 천사의 위치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아담을 속인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결과 사람의 목표는 종교 안에서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되는 것인데 이는 표현만 다를 뿐 둘 다 같은 의미이다.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국가에서 왕이 곧 신이었듯이 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목표는 똑 같다는 것이다.
이 세계를 성경은 바벨(세상)이라고 하는데 종교 안에서는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는 왕이 되는 것이 타락한 인류의 꿈이다. 모두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타락한 인류의 소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선악과를 먹고 신이 되기 위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세상에는 사람이 없다고 보신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궤도를 이탈한 기차가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혼동이듯이 세상을 바벨, 곧 혼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세상 왕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짐승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사람 이상인 신이 되고자 했으나 결코 사람은 신이 될 수 없고 사람이하인 짐승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목표는 사람 이상인 신이 되고자 하던지 사람 이하인 짐승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 성경의 계시이다. 또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속성은 숭배할 신(神)을 찾던지 조롱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사람인 예수님이 나타나자 어떤 이는 신으로 숭배했고, 또 어떤 이는 조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사람인 예수님을 믿어야지, 신인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같이 되고자 한다면 헛된 믿음이다.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세상은 예수님을 믿되 참사람으로서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신인 예수님만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빗나간 것이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들어왔나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런 자가 속이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라(요이 : 7)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인격적인 예수님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어떤 면을 추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람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정상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정상적인 사람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2차 위치 전쟁(광야) : 예수님의 인격회복(구속)의 전초전
사람의 위치를 잃은 사람에게 우주 안에서 가장 큰 비밀이 있다면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의 원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잃어버린 사람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이다. 영적전쟁의 핵심은 위치(格) 전쟁이다. 우주 안의 두 번째 전쟁에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위치를 당당히 지켜 사탄과의 최초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을 보고 알게 된다. 창세기 3장과 마태복음 4장, 누가복음 4장의 내용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속은 것이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을 되찾기 위해 아군의 장수로서 적장인 사탄과 마주하게 되었다. 본디 사람과 땅은 하나이기에 인격을 되찾으면 땅도 되찾는 것이다. 이 전쟁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전쟁과 같은 것이다. 최초진지를 돌파해서 교두보를 확보해야 이를 발판으로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예수님은 사탄에게 빼앗긴 인간의 영광을 되찾아 와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①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느냐? 하나님 말씀으로 사느냐?
그 시험하는 자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령하여 이 돌들이 빵이 되게하라, 하거늘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3~4)
첫 번째로 돌로 빵을 만들어 먹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인가? 이 전쟁이다.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는 것은 능력이다.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는 능력은 사람에게 아직도 없다. 무기물이 유기물 되는 법은 아직도 없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 비유를 들어 계시를 하고 있을까? 이것은 사람 속에는 돌로 빵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계속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아담이 사탄에게 유혹 받을 때, 이 능력 때문에 유혹 받았다. 돌로 빵을 만든다는 것은 능력이다. 능력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인가? 이 문제이다. 이 문제에서 아담은 실패했고 예수님은 이 문제에서 승리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인격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 연합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인격이다. 인격은 돌로 빵을 만들어 먹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격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그것이 인격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다.”라고 사람의 위치를 보여주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위임하신 대언자로서의 직분의 위치를 지키신 것이다.
② 세상의 영광이냐? 하나님께 경배 하느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심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그분께 보여주며 마귀가 그분께 이르되, 이 모든 권능과 그 왕국들의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그것이 내게 넘겨졌으므로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리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경배하면 네 것이 되리라,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4: 5-8)
두 번째, 사탄은 세상왕국의 영광을 보이고 이르되 내게 절하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들에게 주겠노라고 했다. 세상의 영광이냐?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냐? 이것이다. 세상의 영광이 인생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인생의 몫이냐? 그것이다. 세상의 영광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람이다. 사탄은 항상 사람이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신이라는 말이다. 네가 신이라면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는 말이다. 네가 하나님이라면 내게 절해봐라. 그러면 세상 영광을 내가 주겠다. 이렇게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영광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 경배할 것인가? 이 문제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입장을 취했다. “나는 사람이 되겠다. 나는 사람으로 살겠다.” 이렇게 답했다. 세상의 영광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이 두 가지를 놓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택하자 마귀가 물러갔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심으로 신인 마귀에게 승리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제사장의 직분을 지키신 것이다.
③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냐?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냐?
그가 또 그분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그분을 세우고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대한 책무를 주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매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4: 9-12)
세 번째 시험은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에게 순종할 것이냐? 이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너희를 보호해줄 것이다. 네가 ‘사람이라면’ 이라고 말하지 않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마귀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는 영적존재이니 여기서 뛰어내려도 안 죽는다. 너는 육신을 가진 약한 존재이니 뛰어내려보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죽는 존재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면 내가 성전 꼭대기에서 던져지더라도 내가 하나님만 표현 한다면 천사들이 와서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십자가에 달렸다. 그래도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만 표현하면 천사들이 항상 보호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은 ‘주 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였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죽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자기가 받은 대로 살고 명령대로 순종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나를 인생으로 지어놓았으면 그대로 살아야 되고, 내가 떨어져 죽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대로 순종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질문했는데, 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부끄러워서 아담은 사탄에게 졌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내놓고 승리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인격)으로서 신인 마귀를 이겼다. 이 위치전쟁에서 예수님의 승리로 아담이 잃었던 인격을 회복하자 마귀는 물러갔고 천사들이 와서 섬겼다.
이에 마귀가 그분을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니라(마4:11)
이것은 무엇인가? 우주 안에서 사람의 위치가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만물의 머리로 창조된 사람이 제 위치를 찾으면 우주질서가 제 위치를 찾는 것이다. 본래 천사는 사람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 사람이 제 위치를 찾자 천사가 와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섬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진실을 보여주셨다. 사람은 돌로 빵을 만들 수 없는 것이 사람이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죽는 것이 사람이며, 사람은 하나님만을 경배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격이다. 이 격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가 질문한 핵심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이것이 결국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했던 질문이라는 것이다. 사탄이 ‘이 돌들로 빵을 만들어 봐라.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봐라’. 이것은 ‘사탄인 나는 능력이 있어서 돌로 빵을 만들 수 있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안 죽는데, 사람인 너는 할 수 없지 않느냐, 사람인 너는 신인 내가 부럽지 않느냐?’ 하면서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사람이신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이 될 것이다’ 라는 창세기 3장 5절의 사탄의 유혹과 같은 말이다. 또 ‘내게 경배하면 이 세상영광을 주겠다.’ 이 말은 이 세상 왕을 시켜주겠다. 이런 의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의 사탄의 유혹이나, 마태복은 4장의 사탄의 유혹이나 같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한 3중 대위 직분은 대언자, 제사장, 왕의 직분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말씀을 먹고 사는 대언자 직분,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 세상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영광으로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는 왕의 직분을 위임 받았다. 사탄은 이 3중 직분을 버리도록 아담을 유혹해서 성공했지만 예수님은 이 3중 직분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끝까지 계신 것이다. 아담은 인생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할 대언자의 직분을 빵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인생의 약점을 파고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육신의 정욕과 바꾸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직분을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리면 죽지 않는 사탄의 능력이 부러워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으로써 종교적인 능력인 안목의 정욕과 바꾸었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왕의 직분을 사탄이 제시하는 세상영광이 부러워 그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정치적인 인생의 자랑으로 바꾸어 놓았다.
창세기 3장 6절에서도 선악의 지식나무를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라고 한다. 이 말씀이 결국은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한 말과 같은 말이다. 먹기에 좋다는 말은 빵의 문제로 생존의 문제이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다는 말은 능력의 종교의 문제다. 지혜롭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가 지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정치를 대표하는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한다.(고전1:22) 지혜만 있다면 세상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탄이 유혹하는 이 말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빵, 능력의 종교, 세상영광의 정치를 가지고 유혹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3중 직분인 대언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으로 바꾸었다.(요일2:16) 그러므로 사탄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사람의 3중 직분을 회복하는 것이 인생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계에서는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에서 예수님이 승리한 이유를 예수님이 ‘말씀’을 암송(인용)해서 이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탄과의 전쟁 무기가 말씀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 없이 말씀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승리하면 되지 않았겠는가? 또 우리가 마귀에게 승리하려면 성경을 다 외워야 하는가? 만약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외워야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그것은 보편적인 사람에게는 복음이 아니고 저주이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이 없이 예수님이 이 땅 오셔서 마태복음 4장과 같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때도 말씀을 인용해서 마귀에게 이겼다고 하겠는가? 만약에 지금처럼 말씀을 인용해서 이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방종교의 부적과 같고 주문과 개념이다. 그렇다고 말씀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존재자체로 마귀에게 승리하기를 원한다. 말씀이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이다. 곧 예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지라고 주신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 말씀을 암송하고 인용했더라도 그 말씀이 내 생명이 되지 않았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말씀은 어떤 원리가 아니다. 컴퓨터에 입력하면 기계적으로 그것이 똑 같이 반응하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콩을 먹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이 소화가 안 되어 그대로 똥으로 나왔다고 하면 그것은 내 생명이 안 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안 된 것이다. 말씀이란 우리가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목표는 예수님이 말씀과 한 덩어리, 곧 말씀이 육신이 되었듯이, 말씀이 생명이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되라는 것이다. 기계적인 것이 아닌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똑 같은 반응을 한다. 그러나 인격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을 인용해서 마귀를 이겼으니 우리도 우리의 어떠함에 관계없이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와 전쟁하면 마귀가 물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말씀 따로 그 사람 따로 있으면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소화해서 내 생명이 되면, 내가 그 인격이 되면 자동적으로 마귀를 이기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어떤 기계적 원리가 아니다. 잘 못 오해하면 기록된 말씀은 변개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찌 보면 율법과도 같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거짓말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어떤 상황 하에서도 자기 자녀에게 아주 정직한 부모가 된다고 하면 그 부모는 아주 무서운 부모가 되는 것이다. 또 그런 자녀가 된다면 무서운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인격은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인격적인 분이다. 성경은 어떤 곳에는 결혼하라고 되어 있고, 어떤 곳에는 결혼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곳에는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어떤 곳에는 시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과를 먹는 그날에 반드시 죽으리라했다.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인생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죄들을 보고 한탄하시고 다시는 백성을 보시지 않겠다고 하시지만 또 다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섬기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건져내지 아니하리라.’(삿10:13)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분의 혼이 이스라엘의 고통으로 인하여 괴로워 하니라’(삿10:16)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으로부터 건져내시지 않았는가? 건져내셨다. 구약성경은 이런 과정의 반복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것을 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 이것을 기계적으로 인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말씀과 사람이 분리되어 말씀을 주문처럼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다. 우리도 말씀을 기계적으로 인용하면 안된다. 성경에 이렇게 기도해서 응답받았으니 우리도 이렇게 하면 응답받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기계는 입력한데로 출력되지만 인격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우리도 다르지 않은가? 자녀들이 요구한다고 다 주는가? 요구해도 안 줄 때도 있고 요구하지 않아도 줄 때도 있는 것이다.
영적전쟁의 핵심은 위치전쟁이다. 예수님은 말씀이라는 수단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인격이 된 존재 자체로 승리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마귀에게 승리하길 원치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승리하길 원하신다. 우리 존재 자체로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다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인 사람을 그렇게 어렵게 살도록 만들지 않았다. 쉽게, 땀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3차 위치 전쟁(십자가) : 예수님이 인격회복(구속)을 완성하심
마태복음 4장의 위치전쟁은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이 땅을 정복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 전쟁이었다면 이제 최종적으로 사탄을 멸하고 이 땅에서 사탄을 멸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이 십자가에서의 최종 위치전쟁이다. 이 전쟁은 다른 말로 하면 진실 Vs 거짓의 싸움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고 예수님은 진실이시기 때문이다. 위치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진실을 보여주자 거짓의 아비 마귀가 물러갔다. 마귀는 우리가 소리 지른다고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사람의 진실을 보여주면 물러가는 것이다. 거짓은 진실 앞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사탄과 예수님의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전쟁에서 예수님이 승리했지만 아직 인격을 완전히 회복(구속)하지 못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정해 준 인격은 천사와 비교했을 때 사람의 운명은 능력 없음과 육신의 연약함, 그리고 죽음이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인격의 일부분인 사람의 능력 없음과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인생의 위치-운명은 회복하였지만 인생이라면 모두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위치-운명은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마귀와의 최초전쟁은 교두보 확보 전쟁과 같은 개념이다. 예를 들어 6.25 전쟁 시에 북한군은 남침을 개시하여 낙동강 방어선까지 쳐들어 왔다. 이때 유엔군은 빼앗긴 땅을 수복하기 위해 인천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빼앗긴 나머지 땅을 회복하였듯이 예수님도 최초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교두보를 확보해야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디 사람과 땅은 하나다.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이 회복되면 땅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 18절에 보면 예수님이 마귀와의 최초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하늘 왕국을 선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8)
누가복음 4장 13절에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마치고 한동안 그분을 떠나니라.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대적 마귀가 멸망하지 않고 잠시 물러간 것이다. 최초진지에서 패하여 다음 방어선으로 후퇴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님과 적장인 사탄과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위치전쟁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인격 중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인 죽음을 회복(구속)하지 않았다. 아담은 최종적으로 자신에 주어진 운명인 ‘죽음’을 두려워하여 마귀와 전쟁에서 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인생의 최종적 운명(인격)을 완전히 회복(구속)하기 위해 죽음의 권능을 가지고 사람을 송사하는 자 마귀와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놓고 일전을 벌일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전쟁이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과 정치를 대표하는 빌라도 앞에서 심사를 받았다.
이에 그들이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라고 너희가 말하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직접 그의 입에서 들었은즉 어찌 우리에게 증인이 더 필요하리요? 하더라(눅22:70-71)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 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곧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하노라.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그가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로 나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노라. 하더라.(요18:37-38)
여기서 보면 핵심 질문은 3가지이다. 예수님을 앞에 두고 세상 종교의 대표자인 유대인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렇게 물었고, 세상 정치를 대표하는 빌라도는 ‘네가 왕이냐?’ 그리고 ‘진리가 무엇이냐?’ 이렇게 물었다. 이 질문은 아담 안에 있는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목표는 종교 안에서는 신(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는 왕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같은 의미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아담에게 했던 질문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람의 진실-위치를 잃어버린 인류의 궁극적 질문은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린 인생의 최종 운명인 죽음을 되찾아 오시기 위해 십자가 앞에 섰다. 이 전쟁이 결국 인류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최종 전쟁이다. 여기서도 사탄은 여전히 유대인과 빌라도를 이용해 자신이 에덴동산과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에게 했던 질문을 또 다시 하면서 사람이신 예수님에게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마태복음 27장 40절에서는 마귀를 대신하여 지나가던 자들이 다음과 같이 조롱하고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 27:40)
즉 지나가던 자들이 마귀를 대신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말은 네가 신이거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이 조롱을 못 견디고 인간의 위치를 이탈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길을 벗어나 다 자기 길로 갔기 때문에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롬 3:10~12)
이제 십자가 앞에 선 예수님은 유대인과 빌라도, 그리고 조롱하는 자들의 얼굴에서 사람을 조롱하는 마귀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럴수록 예수님은 인류를 하나님이 처음 창조할 때의 정해주신 격으로 회복-구속시켜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목적대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셨을 것이다.
오직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고 그 격에만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은 흙이고 벌거숭이고, 빈 그릇으로 창조되어 그 격에서만 하나님의 생명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빗나간 인생에게 씨-생명을 뿌리고 싶지만 다른 씨가 뿌려져 있기에 씨를 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어 주신 격으로 돌아와야 될 절대적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몸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이고 온 인류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하나님이 처음 만들어 주신 격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목표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위치를 이탈하여 사탄의 밭이 되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운명에 만족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빌2:8) 인생의 격을 지켜 마귀와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아담이 빼앗긴 사람의 격(人格)을 되찾아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이 빼앗긴 사람의 위치를 다 찾아오셨기에 즉 구속의 범위를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러므로 이것이 완전한 승리이다. 예수님의 승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의 운명적 위치를 가지고 승리한 것이기에 인류 보편적 승리이다. 그래서 그분은 전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위치전쟁
신약만 위치전쟁인가? 아니다 구약도 위치전쟁이란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아담은 위치를 잃어버리자 땅도 잃어 버렸다. 성경에서 땅과 사람은 하나다. 사람이 없으면 땅도 필요 없다. 땅은 변개할 수 없는 인격을 예표 한다. 그래서 인격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유이듯이 성경은 땅은 영원히 팔수 없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한다.(레 25:23)
땅을 영원히 팔 수 없나니 땅은 내 것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요, 나와 함께 머무는 자니라.(레25:23)
잠언에서도 땅의 위치를 옮기지 말라고 한다.
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landmark)를 옮기지 말라.(잠22:28)
구약은 실재가 아니고 모형이고 그림자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이라는 위치를 정해주셨다. 가나안 땅은 무엇인가? 우리가 변개할 수 인생의 위치를 예표한다. 이 위치를 떠났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환난을 당했다. 아브라함은 기근으로 인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자기 아내 사라가 파라오의 집으로 데려감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였다.(창12:15) 이와 같은 일은 또 다시 반복된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나 그랄에 머물 때 블레셋 왕 아비멜렉 앞으로 아내 사라가 불려가는 수모를 당한다.(창20:1) 또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와 같이 가나안 남방 그랄로 내려갔다.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아비멜렉에 의해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사라와 같은 처지를 당할 뻔하였다. 하나님은 이 세 번의 위기에서 사라와 리브가가 더렵혀지지 않도록 모두 구해주셨다. 이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이삭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두 여인들은 교회의 예표이자 인류를 예표한다. 곧 인격을 예표한다. 사람의 위치는 하나님께 대하여 아들의 위치와 궁극적으로 아내의 위치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의 씨만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라와 리브가의 위치를 섭리적으로 지켜주신 것이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 다섯 여자들의 위치도 하나님의 아내로서 인류를 예표한다. 이 여인들의 행위는 선악과를 먹은 도덕적인 관점을 가진 세상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할 여인들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 여인들의 운명은 자신들의 어떠한 처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의 씨-생명을 받아 아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46장에서 야곱의 일가 일흔 명은 기근이 들자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갔다. 결국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었지만 노예가 되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15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 경고한 말씀이었다.
그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확실히 알지니 네 씨가 자기들의 소유가 아닌 땅에서 나그네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년 동안 네 씨를 괴롭히리라.(창15:13)
이스라엘은 이 위치를 떠나면 항상 환란이 왔다. 결국 구약의 역사는 무엇인가? 이 위치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노예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위치를 찾아주시기 위해 모세를 내세워 출애굽을 통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가나안 수복전쟁에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러니까 성경은 세상의 도덕적인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한 생명의 관점에서 보아야 이해가 된다. 하나님과 인생의 세계는 율법의 세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세계는 선악의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내 목적을 버리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정해 주신 인격 안에만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왜 그토록 자기들의 영토회복을 위해 노력해왔는가? 여기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이 있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탈출 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래 정해주신 위치, 곧 가나안 땅으로 복귀시키고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셨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왕국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바벨론에게 정복 당하고 3차례에 걸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일어났다.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배역함으로 하나님께서 주변 강국을 통해 징벌하신 것이지만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위치를 이탈한 결과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정복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귀환시키심으로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인격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2천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영토, 곧 위치를 회복하는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인격은 절대적으로 변개할 수 없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인격은 땅과 같다. 땅은 씨가 아니다. 땅은 씨가 필요하고 씨는 땅이 필요하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세상의 다른 모든 나라는 고대로부터 자신들의 영토를 변동없이 그대로 가지고 있는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만은 변동이 없는가? 이것은 그들의 땅의 위치가 변개할 수 없는 사람의 위치, 곧 인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씨-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흙-사람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인격은 변개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떠한 상황과 조건 하에서도 인생으로 지켜할 위치라는 것이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뜻을 접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신 것이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11.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침례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마3:13-17) 우리는 통상 침례는 죄인에게 행하는 십자가의 심판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데 왜 이 땅에 오셔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을까? 여기에 대한 해석이 없다. 있더라 하더라도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데 죄인의 모습으로, 곧 아담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침례를 받았다고 해석한다. 또 요한은 왜 침례를 행했는가? 성경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마3:13) 하셨다. 그분이 침례를 받자 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가?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첫 번째 죽음은 창조 안에서 사람에게 정해준 운명이고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이것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된 사람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신들과 같이 되어 인생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담은 인생은 근원적으로 육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하나님의 경륜을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참 사람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인생에게 하나님이 정해 놓은 죽음의 경륜을 인정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라는 진실을 인정하신 것이다.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골1:15)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주신 운명을 인정하신 것이다(시39:4)
주여 나로 하여금 내 종말과 내 날들의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시39:4)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을 선포한 자를 기뻐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이래로 그토록 고대하던 사람이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시기 전에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마3:15) 하셨다. 사람들은 의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렇게’란 인생은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의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의란 하나님이 창조 안에서 정해주신 바른 인생의 위치(인격)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의도 나타나는 것이다. 의가 있다면 의가 나타나는 것이며 의가 없다면 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태양은 있기 때문에 매일 나타난다. 달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생명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의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의는 나타나는 것이다. 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의가 있는 사람은 의가 나타나고 불의가 있는 사람은 불의가 나타난다. 아담은 의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불의뿐이다. 소나무에는 송진이 있다. 그러므로 찌르면 송진이 나온다. 소나무에는 향기가 있다. 그러므로 건드리면 소나무 향기가 나는 것이다. 만드는 것은 모두 가짜다. 나타나는 것만이 진실이며 진짜다.
죄를 씻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를 나타내려고 요단강에 나왔다. 죄를 씻어도 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의가 있는 자만이 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죄는 사람에게 묻어 있는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 사람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씻어지지 않는다. 씻을수록 더욱 죄가 드러날 뿐이다. 돌을 씻으면 돌이 더욱 드러날 뿐이다. 사람은 씻을수록 오히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것만 드러났을 뿐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을 표현하면서 의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흙이며, 숨이 코에 붙어 있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 인생은 죄와 관계없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이것만이 영원한 진실이다. 천지는 변해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부인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며 이것을 숨기는 모든 것이 불의다. 죄가 없다고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지질 않을 피조물은 없다. 사탄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줌으로써 이 불변의 진실을 은폐시켜 사람으로 교만에 빠지게 하였다. 이것이 불의다. 주 예수님은 이것을 폭로하였다. 죽음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하나님 앞에 인생은 번제헌물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예수님의 의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생의 바른 위치, 곧 의를 발표했을 뿐이다. 우리도 우리의 진실하게 발표하면 의가 나타날 것이다. 소나무가 소나무를 발표하면 향기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주 예수님 안에서 고치지 말고 만들려고 하지 말고 진실하게 발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의 의다. 아담은 가짜이고 속은 자이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발표한 것은 가짜다. 그는 자기를 발표할수록 불의해지기 때문에 은폐하고 씻고 고치며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불의가 드러날 뿐이다. 주 예수님 안에서 숨이 코에 붙은 인생임을, 피조물임을, 번제헌물임을 발표하면 그 위치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의다.
요단강에 나온 모든 사람은 씻고 고치고 만들려고 나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씻고 고치고 만들어 보려고 교회에 가고 절에 간다. 그럴수록 그러려고 하는 마음만 드러날 것이며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려는 마음이 불의를 증거한다. 우리에게는 의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발표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이끌고 요단강에 나와서 십자가의 심판 이전에 죽음을 발표하셨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대표한 것이다. 무엇이 묻은 줄 알고, 무엇이 좀 잘못된 줄 알고 씻고 고치려고 나온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은 죽음을 발표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유대인의 선생이며 공회원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다. 니고데모는 무엇을 좀 더하려고 예수님께로 왔던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을 더할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옛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생이 죽는 것은 죄 이전에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의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절대적인 관계다. 내가 죽지 않고는 그분 안으로 연합될 수 없다. 아담은 여기서 속았다. 죽지 않고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은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죽음을 발표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잃어버린 위치를 찾아야 한다. 의는 위치의 문제며 생명의 문제다. 죽음은 우리에게 있으며 생명은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는 죽음을 발표하고 하나님은 생명을 발표한다. 우리가 죽음을 발표하면 그것이 의이고 하나님은 생명을 발표한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대표하여 죽음을 발표했고 하나님은 생명을 발표하는 표시로 비둘기를 보냈다.(마3:16) 아담은 하나님의 깊고 높은 죽음의 경륜을 거부하고 사탄에게 속아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의 근원적 위치를 선포하고 계신다. 이 위치가 하나님과 사람의 바른 관계다. 하나님은 이것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생명은 사람-흙을 찾아간다. 죽음을 발표한 자는 의롭고 생명을 발표한 자는 은혜롭다. 발표된 죽음 앞에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다. 진노의 하나님은 비둘기 하나님이 되어 아들 위에 임하셨다. 지금도 그러하고 전에도 그러했고 장차도 그러하실 하나님은 참되시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인류를 대표한 죽음을 발표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마3:17) 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아들로 인정되어야 하고 사탄에게 이겨서 만유를 다스리고 지배할 하나님의 대리자로 높임을 받아야 한다. 아담이 이 지위와 권세를 빼앗겼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 우주적 회복의 선두에 서야 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두주자이신 주님이시다.(히6:20)
‘그 때에’(마4:1) 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죽음을 발표한 침례로서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심을 보면서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 이란 말씀을 들었을 때다. 주님께서 의를 이루심으로 진노의 하나님은 비둘기 같은 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드러나셨다.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들로 살리시고 아버지가 되신다. 이것이 우리 존재의 회복이다. 주 예수님은 침례로 사람의 존재를 회복시키셨다. 그리고 승리로 권위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가셨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유를 다스리고 지배해야 한다. 아담은 존재적 위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권위도 상실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멸망 - 존재와 권위의 상실에 이르렀다. 아담은 사탄에게 실패하므로 온 인류를 천사의 수하에 들어가게 했다. 인류는 천사의 수하에서 하나님을 경배했고 도처에서 종교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고 새 인류의 머리가 되기 위하여 아담을 속였던 이 시험하는 자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하나님은 이 우주적 대결을 위하여 그 아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셨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갔다. 첫 사람 아담은 이 시험에 실패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 아담은 이 시험에서 이겼다. 이 시험에 이기는 자가 마지막 사람 아담이 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에 불과했지만 마지막 사람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 첫 사람 아담은 사망을 주었지만 마지막 사람 아담은 생명을 주었다. 이는 그분이 이 시험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전쟁에서 인생은 한 번 죽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창조 안에서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셨다. 그러자 마귀가 물러가고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수종 들었다. 사람이신 예수님이 신인 마귀를 이긴 것이다.
우리는 신-천사들과 같은 자가 될 자가 아니고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승해야 하고 육체로서 아버지를 나타내야 할 자다. 하나님께 육체를 가지시게 해야 할 자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을 산 희생물로 드려야 한다. 뒤집혀진 우주의 질서를 바꾸어 천사들로 사람에게 수종들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진실에 달려 있다. 주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죽음을 확인하고 발표하자! 이것만이 진실이다. 우리가 이것을 감추어 두고 다른 진실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곧 가증한 종교다. 교리나 조직이나 무슨 행위나 실행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희생물과 헌물이 아닌 상한 영이라고 했다. 죽음이 아닌 모든 것들은 희생물과 헌물이다. 주 예수님은 희생물과 헌물로 나아가지 않으셨다. 교리나 조직이나 무슨 지식으로 나아가지 않으셨다.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을 뿐이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발표했다.
사실상 모든 헌물은 죽음을 발표하는 것이다. 산 채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한 헌물 대신에 어떤 교리나 지식도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다. 헌물을 드리기 위하여 기록된 모든 율법이 있고 또 옳을지라도 결국 드려지는 것은 헌물뿐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과 교리와 교훈은 참된 헌물을 드리기 위한 것이며 이 헌물은 우리 자신이며 합당한 우리 자신은 죽음을 발표한 자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죄 때문에 첫 번째 죽음이 왔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죄의 결과 죽음은 두 번째 사망이다.(계20:14) 첫 번째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정해진 것이다. 이 첫 번째 죽음이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을 수 없다. 아담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첫 번째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죄와 관계없이 내 죽음을 발표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상 생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죽음을 발표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서, 사람으로서 합당한 위치를 인정하는 것이다.(시39:4)
주여 나로 하여금 내 종말과 내 날들의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시39:4)
이것이 우리의 진실을 가지고 거짓의 아비인 사탄을 이기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의 합당한 관계로서 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발표하고 의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된 우리의 영은 사탄의 모든 계교를 능히 물리치고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고 나라와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정통적 교리나 이단적 교리나 죽음이 없는 것은 모두 무효다. 우리가 무엇을 믿든지 죽음이 발표되지 않는다면 모두 무효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우주적 회복에 참예할 수 없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죽음을 발표하고 광야에서 사탄과 싸우셨다. 사탄의 시험을 통과하고 난 후에 천사들에게 수종을 받으셨다. 죽음만이 사탄을 정복하고 인권을 회복하며 나라와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유일한 길이다. 아멘
12. 십자가의 도
십자가 - 마귀에 대한 승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세상 상식으로 보면 완전한 패배고 허무한 죽음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마귀에 대한 승리인가? 성경에 쓰여 있으니까 승리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믿으라는 것은 곤란하다. 십자가의 승리는 사람에게 정해진 죽음이란 위치를 가지고 설명하지 않으면 해석이 되지 않는다.
죄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천사는 천사대로 그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 각각의 피조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하여 자신이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고,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려고 했다. 그러므로 죄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라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순종하셨다고 했다.(빌2:8) 왜 순종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몸이 없는 영시기 때문에 몸을 가진 사람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으로 창조했지 천사로 창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만을 필요로 하신다. 사람은 사탄이 와서 아무리 유혹해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이라는 위치를 이탈해서는 안된다. 인생이 그 위치를 이탈해버리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전쟁은 사람이라는 위치를 지키는 전쟁이다. 이것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신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느냐, 아니면 신도 아니면서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하나님의 목적 밖으로 이탈하느냐, 이 싸움이다. 이 위치전쟁에서 아담은 사탄에게 패했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신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대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참사람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사람을 창조하시고 예정하신 코스대로 살리신 것이다. 사람에게 정해 놓으신 생명의 노선 안에서 살리신 것이다.
십자가- 생명의 접촉점(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히 우리에 죄에 대한 보상만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이식된다는 것이다. 번제단에서 우리는 헌물로서 하나님의 불로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 되어야 한다.(레1:9, 17) 죄가 있으나 없으나 불-하나님을 만나 소멸되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번제단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번제단에서 생명의 연합이 있는 것이다. 죄가 있기 때문에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희생물로서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레17:11)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는 절대적 관계다. 절대적 관계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 연합되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에서도 어떤 이에게 내가 순종하려면 나를 완전히 내놓아야 한다. 하물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사람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지성소로부터 나와 번제단으로 가셨고 사람으로서는 바깥뜰에서 번제단으로 가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상호 죽음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십자가란 심판의 의미도 있지만 씨-하나님과 흙-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예수님이 물론 씨-생명이시지만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겉모습은 흙-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의 씨를 받아 부활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로 명실상부하게 태어나려면 사람-예수님도 죽어야하고 하나님-예수님도 죽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만나 곳이 십자가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단지 죄에 대한 심판만이 아니라 생명의 접촉점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씨를 받아 부활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셨다.(롬1:4)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성소로부터 번제단으로 나왔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번제단으로 가야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십자가 –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
이제 심판에 대한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므로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수님이 곧 신과 같은 사람으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심지어 물위로 걸어가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하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때 사람들은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데 이런 일을 행하는가? 하면서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참으로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되고 싶었던 모든 사람의 로망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따라 다녔다. 그분이 십자가로 끌려갈 때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허무하게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능력 정도면 충분히 십자가에서 탈출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성경에도 마지막 때에 모세와 같은 대언자가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당연히 그들은 모세와 같은 메시아를 믿었던 것이다.(신18:15, 행3:22)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모세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구원자라면 예수님은 전 인류의 구원자였던 것이다. 인류가 이렇게 된 것은 근원적으로 사탄에게 속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했으나 인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또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해보았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오신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된 사람이다. 이 신들과 같은 사람이 심판받아야만 인류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이다.
지금 소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신들과 같이 된 사람이 심판받아야 한다는 이런 문제 의식 자체가 없다. 그래서 근원이 없기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도 없고 그분 자체의 존재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흙과 같고 재와 같은 사람이다. 이 사람을 하나님은 의(義)로 여겼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에 있는 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 안에만 하나님은 씨-생명을 심으실 수 있다.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은 구별은 간단하다. 세상 사람은 신들과 같은 사람이고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이 정해주신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빌3:9) 그러니까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십자가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가? 우리 인간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매달리니 죽더라는 것이다. 그분이 죽지 않았다면 그분은 신이다. 그분은 거기서 완전한 사람으로 죽으셨다. 어떠한 사람도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라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아담은 속았다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다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되 신적인 예수님만을 믿고 그런 것들만을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죽기 싫어서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되고 싶은 사람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경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천사숭배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도로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남성이고 사람은 여성이다. 남성과 여성이 결혼하지 남성과 남성이 결혼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은 동성애자와 같은 것이다. 신격은 인격을 원한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마7:23)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하지 천사들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속자다.(히1:5)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 않느냐?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 피조물인 인생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상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따르고 추구할 것은 사람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 타락의 근원을 모르니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천사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의 예수님, 신적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위대하고 강하신 예수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열심히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숭배를 하면 하면 할수록 그분과 우리는 멀어진다. 종교란 신을 숭배케 하여 신과 사람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우리의 경배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니 그분 안에서 내가 발견된다.(빌3:9) 그분과 내가 한 운명이다. 숭배하지 않지만 그분과 내가 하나가 된다. 그분도 거기서 흙이고 나도 흙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옛적에 강력하고 명성있는 크고 위대한 모든 것이 다 없어졌다. 선악과를 먹고 신들 같았던 아담은 죽고 연약한 어린양의 인격만 남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여기셨다. 참사람이라고 인정하시고 살리셨다. 거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안에 있게 된다.(요14:20)
그분이 오신 것은 종교적인 경배를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생명이란 그분 자신이다. 우리가 그분 자신을 살라고 하는 것이다.(갈2:20) 정상적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샘플로 보여 주시고 또 그분 자신이 우리의 씨가 되고 우리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 사람으로서 자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 자리가 어디인가, 십자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단순히 심판만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 대한 승리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이식되는 생명의 접촉점이다. 그래서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죽음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죽음 안에 있는 경륜의 비밀이다. 죽음이 없으면 영생(거듭남, 부활생명)이 없다. 이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과정이다.
십자가 –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고 가서 예수님에게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했으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서 마귀에게 승리하셨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격을 지킴으로 생명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것이다.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자 그 안에 있는 씨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분 스스로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고 말한다. 씨가 땅에 뿌려지면 생명이 발아하여 열매를 맺듯이 씨-하나님과 흙-사람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마귀에게 빼앗긴 사람의 위치(인격)를 되찾아 오셨다. 이것이 구속이다. 사람의 빼앗긴 위치가 원위치 된 것이다. 원 위치된 사람, 곧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이것이 구속,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한 가지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속과 마귀에 대한 승리와 아담이 부끄럽게 여기던 사람의 육신에 대한 죽음을 부활생명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다.(고전1:24)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 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그리스도인이란 신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이 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판의 의미로만 생각지 말라, 단순히 우리 인생들만을 위한 혜택으로도 생각지 말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다(고전1:24) 우주 안에 모든 비밀이 거기에 다 들어 있다. 어떻게 그것이 심판이고, 어떻게 그것이 승리고, 어떻게 그것이 생명인가? 어떻게 그것이 우주적인 대 전환점인가?
인생의 죽음은 창조 안에 정해진 것이고 이 과정이 없으면 영생이 없었다. 이게 싫어서 아담은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담의 재료는 흙이다. 부서지기 쉽다는 것이다. 연약하다는 것이다. 아담은 천사보다 낮게 지음 받았다.(시8:5) 그래서 본디 사람은 하나님께 의존해야 되고 순종하도록 지음 받았다. 거역하는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부터 죽지 않는 존재라면 하나님께 의존할 필요가 없다. 사탄은 그래서 처음부터 반역한 것이다. 아담은 스스로 반역한 것이 아니고 사탄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반역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그 책임을 1차적으로 사탄에 묻고 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다는 것이다.(마13:28)
그래서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다. 유혹자가 있기 때문에 구원자가 있다는 것이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천사와 비교한 것이다. 천사는 죽지 않는데 나는 왜 죽는가? 여기에 불만이 있었다. 만약에 사람이 죽지 않는 천사를 보지 않았다면 사람은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란 자신이 본 것의 범위를 벗어 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오지에 문명과 차단된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어 봤자 그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왜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이고 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가? 죽지 않는 어떤 존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존재를 보지 않았다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창세기 6장에서 천사들과 결합한 옛적에 강력한자, 명성있는 자들도 천사들을 부러워하여 나온 산물이다. 지금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사실 근원을 살펴보면 모두 천사를 사모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천사적 요소인 능력과 죽지 아니함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능력으로 구성된 나라가 아니라 어린양의 인격으로 구성된 나라다.
사람들은 크고 위대한 것을 좋아하지만 성경은 크고 위대한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위대한 것은 바벨로 간다. 또 큰 것일수록 제한이 있다. 바위덩어리는 크지만 제한이 있다. 태양도 아무리 크지만 제한이 있다. 그러나 공기는 아주 작은 보이지 않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무한하다. 영생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죽음이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영생이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단지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과 혜택으로만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과 지혜로 인간이 그토록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육신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의 대적인 사탄을 물리치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과 지혜로 죽음과 심판이라는 부정적인 상황을 생명과 승리의 긍정인 상황으로 바꾸셨다.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위치전쟁을 통해 마귀로부터 획득한 전리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마귀는 최종적으로 아담이 생각하는 인생 최대의 약점인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가지고 송사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가지고 승리했기에 더 이상 마귀의 송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마귀와 전쟁에서 완전 승리했으므로 마귀를 멸하신 것이다. 사탄은 근본적으로 속이는 자로서 잔머리를 굴려 아담을 속이는데 성공했으나 이제는 예수님이 사람의 위치를 당당히 지킴으로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사탄의 속임수를 사람의 진실로서 승리하신 것이다. 더 이상 사탄의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 여자의 씨(예수님)가 네(사탄)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이것에 대한 예표가 다윗이 돌 한 개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죽이는 장면이다.
손을 자루에 넣어 거기서 돌을 꺼내어 돌팔매기구로 던져 불레셋 사람(골리앗)의 이마를 치매 그 돌이 그의 이마에 박혀 그가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지니라(삼상 17:49)
돌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한다.(단 2:45, 벧전 2:4) 이것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상징인 골리앗에게 승리한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린양이 호랑이를 이겼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어린 다윗이 전사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가? 그런데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위치전쟁으로 사탄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살펴보자.
①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기 위함(히 2:14)
마귀가 인간과 비교했을 때 최대의 강점은 무엇인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최대 약점인 육신의 죽음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나한테 경배하면 나와 같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하면서 사람을 속여 둘째 사망으로 인도하는 권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담은 마귀의 송사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고귀한 인격의 자리를 이탈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가 인간의 최대 약점으로 여기던 첫 번째 사망, 곧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최종적 운명인 육신의 죽음을 가지고 마귀와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마귀의 속임수가 사람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길을 사람이신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것이다. 첫 번째 주자로 예수님이 길을 열어 놓으셨기에 우리도 이제 승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적장인 마귀는 십자가의 위치전쟁에서 예수님에게 패배 당했으므로 멸망을 선고 받은 것이다.
...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려고(might destroy 미래)(히 2:14)
마귀를 멸한다는 말은 그를 없앤다는 말이 아니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로 죽지 않는다. 마귀는 본질적으로 속이는 자다. 요한일서 3장 8절에서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한다. 마귀의 일들을 멸하므로 우리를 마귀의 속임수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의미다. 마귀의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멸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계 20:10)
그러므로 지금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여전히 마귀의 자식으로 사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요 8:44)
피조물의 타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다. 사탄은 원래 천사의 수장으로서 하나님과 종의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자기의 위치를 이탈했는데 이것이 이미 사탄에게는 사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사탄이 타락하자 사형선고를 내렸고 종말에 불 호수에 들어갈 것을 예정하고 있는 것이다.
....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마 25:41)
마귀와 그 졸개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그들을 사람이 이길 때까지 마귀와 그의 졸개들에 대한 형 집행은 연기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탄의 자식들로 세상이 채워져 있지만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이 채워지면 그들은 설 곳이 없기에 밀리고 밀려서 불 호수에 들어가는 것이다.
②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을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심(히 2:15)
아담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최종적 운명인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은 한번은 죽는 것이 당연하고(히9:27) 그 뒤에는 부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서 사람을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건져내셨다. 사실 이것은 아담이 맨 먼저 맛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려 하심이라.(히2:15)
③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시고 정사들과 권능들을 이기심(골 2:14-15)
원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종의 관계가 아닌 생명관계이다. 그러나 아담이 아들의 위치를 이탈해서 종의 위치로 갔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지고 계약관계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은 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종인 천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씨(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갈 3:19)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사람이 종의 위치에서 아들의 위치를 회복했으므로 아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이 작용할 수 없고 폐기된 것이다.(엡2:15, 골2:14)
원수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엡2:15a)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던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서 못 박으시며(골2:14)
또 아담이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갔을 때는 사람이 천사도 아니면서 천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자 몸에 맞지도 않은 천사(정사들과 권능들)의 옷을 벗은 것이다.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 2:1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기 전까지 마귀의 졸개인 타락한 천사들은 사람을 조롱하고 있었다. 세자가 될 자가 종의 위치로 갔으니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므로서 우주질서가 회복되었고, 그동안 조롱하던 종(천사)들을 십자가에서 구경거리로 삼으신 것이다.
④ 구속 : 사람의 인격과 인권을 회복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의 결정체는 아담이 잃어버린 인격과 인권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부끄러워하여 타락한 천사인 신격을 선택함으로서 인격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영광, 곧 인권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사람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에 만족하시고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을 회복함으로서 사람의 인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구속이란 빗나간 사람의 위치(인격)을 원래의 위치로 회복한 것을 말한다.
⑤ 죄(Sin)의 제거와 죄들(Sins)이 용서됨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서 죄란 피조물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그러므로 위치를 이탈한 자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다’란 성경의 용어는 구속(redemp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죄(단수)란 근원적인 뿌리이고 죄들(복수)이란 외부적인 것으로 죄의 열매를 말한다. 그러니까 내부적인 죄의 뿌리는 제거되어야 하고, 죄의 결과 외부적인 행위인 죄들은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Sin)를 제거하셨느니라.(히9:26b)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Sins)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성경에서 피란 생명을 의미하지만 피 흘림이란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 인격을 회복함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이 바른 관계(위치)에 있으니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의(義)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라는 의미이다. 세상이 말하는 의인(義人)과 성경이 말하는 의인(義人)은 다른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보시는 위치는 십자가이다. 이 위치는 나는 피조물이고, 아들이며 최종적으로 흙이라는 위치(格)라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사람이 꾸민 거짓이다. 원래의 위치로 회복하다. 곧 구속(救贖, redemption)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빗나간 인생을 원위치로 회복시킨다는 의미고,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원위치를 깨닫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로 회개(悔改, repent)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위치에 있는 자를 하나님은 의(義)롭다고 보신다. 안타깝게도 이 용어를 정확히 아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요한복음 16장 10절에 주님께서 ‘의(義)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라는 말씀이 있다. 아들로서 당연히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의(義)라는 것이다. 아들이 마땅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하에 있는 것이 의(義)라는 것인데 이 위치가 십자가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에 세상의 많은 성인군자들은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예수님만은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였다.
⑥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심(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동일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물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주와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려면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분은 어떤 공적도 없이 낙하산 인사가 되어 주와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종교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한편으로 그분은 수많은 인류 중에 한 사람으로서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롬1:4) 아무런 명분도 없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친다면 누가 알아 주겠는가? 고대 전쟁에서는 왕자들 중에서 전쟁에 나가서 승리한 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서 하나님 아들의 명분을 확보하셨고 새로운 인류의 주(조상)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자란 의미이다. 대리자란 뜻이다.
⑦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시고 사망을 폐하고,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드러냄(딤후 1:10)
십자가에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사탄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인류를 구출하는 구원자가 되셨고(엡 4:8),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엡 4:8a)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둘째 사망 안에 있던 인류를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키심으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노선 안에 계셨다. 곧 예수님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시고 인류를 생명(거듭남, 부활생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탄으로 인해 들어온 사망을 폐하신 분이고 부활을 통해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드러내셨다.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딤후 1:10)
또 그분은 새로운 인류의 첫 열매 - 맏아들, 조상이 되셨다.(고전 15:20, 롬 8:29)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하심이니라.(롬 8:29)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너희가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9-10)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분과 같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주셨다.(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요일 3:2)
14. 이기는 자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영생을 얻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은 창세기 2장에서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성경전체에 흐는 일관된 진리다. 우리는 앞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하셨음을 살펴보았다. 사탄과 사람의 전쟁에서 전쟁의 수단은 총, 포가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사탄도 자신의 격을 이탈하여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고, 일부 천사들 중에도 자신의 격을 이탈하여 사람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다.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속아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길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 자신의 격을 지키는 것이고 이 격을 지켜 생명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도 그분 안에서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인격의 승리,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승리고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이사야 25장 8절과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서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지리라’는 말이 이 의미다. 성경이 말하는 승리는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첫 번째로 사망노선에 있던 인류를 예수님의 인격의 승리를 통해 생명노선으로 인도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는 어차피 우리 인생은 한번은 죽을 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하는 것이다.’(고전15:53) 그런데 아담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생명노선을 이탈하여 사망노선으로 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켜서 육신이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생명노선으로 가신 것이다. 죽을 몸(육신-사람)이 승리(생명-하나님) 가운데 삼킴을 당한 것이다. 흙-육신이 영-하나님께 삼킴을 당함으로서 부활의 몸이 되도록 하나님이 정한 생명노선을 가신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함이라.’(고후5:4)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죄 문제는 예수님께서 다 해결하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육신이 죽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죽을 육체가 죽지 않을 생명에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죽을 육체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죽지 않을 육체가 되는 것이다. 우주는 지금 죽을 것이 생명 안에 삼켜져 있다. 영-생명을 예표하는 공기 안에 지구를 비롯한 해와 달, 별들이 삼켜겨 있지 않은가? 죽을 것이 생명 안에 삼켜져 있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세계가 오면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 유한한 땅이 무한한 하늘에 삼켜져 영원한 세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세계를 성경은 새예루살렘이라고 한다. 이것을 고린도서전서 15장 54절과 고린도후서 5장 4절에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세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켜진다는 말은 죽는다는 것이고 생명의 연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동식물을 우리의 목구멍으로 삼켜서 생명의 연합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삼킴을 당하는 생물은 죽지 않을 것이 없다. 또 삼킴을 당하기 전에 죽여서 먹지 살아있는 채로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하나님께 삼킴을 당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우리도 하나님께 제단위에 죽음으로 드려져야 하나님께서 삼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원래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헌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노선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법리적인 대속의 은혜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희생물에만 국한 시키고 헌물의 의미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이지만 헌물은 유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십자가를 ‘법리적인 대속’의 의미로만 받아 들여 예수님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에 대한 계시가 가려져 있다. 모든 만물에는 생명의 과정이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법칙은 땅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신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에게만 이 법칙이 예외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우주 만물의 생명의 원리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만물은 거듭남이 없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끝난다. 천사도 씨-영으로 창조되어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그래서 1차적 창조로 끝난다. 사람만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씨-하나님으로부터 씨를 받아 다시 태어나야하기 때문에 흙-사람으로 창조된 것이다. 흙-사람의 위치, 이 위치에 있는 자를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시고 이 위치에 있는 자만이 생명의 길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담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었다면 아담은 이 길을 이탈했다는 것이다. 씨-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흙-사람의 위치를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자를 원망하는 것이고 창조자의 안식을 방해한 것이고 사망의 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늘 흙-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고 원망했다. 항상 흙-육신 때문에 안 된다고 했고, 어떻게 하면 이 육신을 벗어나고자 애썼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흙-육신이 이렇게 고귀하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인생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고 인생의 영광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인격을 찾은 것이다. 예수님은 아담이 버린 그 인격을 죽기까지 지킴으로 생명의 길 안에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오르셨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고 승리의 길이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을 지킴으로 이기는 자가 되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분의 인생의 최종열매, 곧 죽으심과 살으심이 생명나무의 열매다. 이 열매를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은 성경에 흐르는 일관된 진리다. 우리는 물위로 걸어가신 예수님도 먹을 수 없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도 먹을 수 없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을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그분은 우리가 먹을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이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십자가에 매달리면 누구든지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다른 것은 우리가 먹을 수 없다.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는 사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격을 지킴으로서 승리하셨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이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승리를 먹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사람으로 만드셨지 씨-신으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람이신 예수님은 신인 사탄에게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심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기는 자에 대해서 요한일서와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 승리는 바로 사람이신 예수님의 사탄에 대한 인격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요일 5:5)
‘...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에게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계2:11)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니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계21:17)
성경에서의 승리, 곧 이기는 자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흙이다. 씨의 소망은 무엇인가? 열매다. 씨가 열매를 얻으려면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하다. 그래서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원하고 있다. 흙이란 생명이 없다. 사람이 흙의 위치를 지켜야만 하나님께서 씨를 뿌려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한 이 진리를 외면하고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 예수님을 믿더라고 근원이 불분명하니 열매가 없고 가다가 언젠가는 다른 길로 갈 가능성이 있다. 사실 기독교인들 중에 종교통합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의 근원이 불분명한 것도 한 원인이다. 믿음의 근원이 불분명하니 타종교와도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의 근원이 흙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타종교는 대부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사람이 어리석어 잃어버렸다고 한다. 만일 사람이 원래 영생이 있었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영생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승리,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아담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사망의 길로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승리하시고 생명의 길을 회복하시자 사망의 권능을 가진 자 사탄을 조롱하면서 생명이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5:55~5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십자가의 의미에는 표면적으로는 아담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심판인데 내용적으로 보면 사탄에 대한 승리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사탄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인격의 승리라는 것이다. 아담은 인격을 이탈하여 신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인격을 지켰다. 죽음이라는 심판을 통해 생명의 길을 택하신 것이다. 겉모습은 아담으로 죽으셨지만 내용은 아담이 아니다. 아담이 인격을 이탈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격을 지키신 것이다. 인격을 이탈하면 사망이고 인격을 지키면 생명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사망이나 내용적으로 보면 생명이다. 그런데 아담은 원래 영생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의 죄만을 대속하여 죽으셨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승리가 되고, 어떻게 대속이 생명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믿으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속으로 인한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대속은 죄의 용서지 구원, 곧 생명의 거듭남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을 위한 희생물로 드려진 동시에 인생의 원래의 위치인 헌물로 드려진 것이다. 어떤 헌물도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지는 제물은 없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다. 이것을 거부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계시가 닫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죄가 없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혹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 문제를 한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까 한다. 성경에서 보리는 부활을 상징한다.(마6:13) 가을에 뿌려져 겨울을 지나 다음해 여름에 수확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피조물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운명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부활에 관해 말할 때 이 우주적 원리를 이용해 부활에 관해 말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고전 15:36)라고 말한다. 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하셨다.
보리와 밀의 입장에서는 이 길이 생명의 길이다. 피조물이란 입장에서 사람은 만물과 동일하다. 사람에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는 것이고 우주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 그래서 이 우주적 원리가 죄와 관계없이 동일하게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죄와 관계없이 정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생명의 길을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해놓은 운명대로 부활해서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살아있는 혼으로 창조된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육신적인 몸이 죽음을 통해 영화로운 몸으로 거듭나는 것이 정상적인 순서였다. 사람은 원래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였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다. 만일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받아들였다면 육신적인 몸이 영생을 가진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육신이 안 죽는가? 죽는다. 아담은 죽음을 통해 이브를 산출했다.(창2:21~23) 옛 것을 끝내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 갈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으로의 전환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옛 생명은 죽고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생명인 살아있는 혼에서 하나님의 생명인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화로운 몸으로 전환하려면 옛것은 죽음을 통해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그렇지 않은가? 가을에 열매를 맺었던 식물이 다음 해에 부활하려면 가을에 죽어 땅에 뿌려져야 한다. 춘생추살(春生秋殺)은 만고불면의 진리다. 바울은 고린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해 말할 때 이 우주적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또 네가 뿌리는 것으로 말하건데 네가 앞으로 있을 그 몸을 뿌리지 아니하고 밀이든 보리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알갱이를 뿌리되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데로 그것에게 몸을 주시며 또 모든 씨에게 그것의 고유의 몸을 주시니느리라.(고전 15:36~38)
위 말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사람의 육신에 죽음이 왔고 이후 예수님을 믿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피조물이란 관점에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법칙은 똑 같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만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도 부활한다. 한 부류는 생명의 부활로, 한 부류는 멸망의 부활로 마지막 때에 부활한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씨에게는 고유의 몸이 있고, 죽어서 몸의 씨가 뿌려지면 봄에 다시 새 싹이 나듯이 사람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씨가 뿌려진 몸은 생명의 부활로, 사탄의 씨가 뿌려진 몸은 사망의 부활로 나타는 것이다. 또 우리가 장차 부활할 때의 몸은 그 씨에 따라 하나님께서 고유의 몸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나와 같은 몸은 아니라는 것이다. 뿌려진 씨에 따라 그 몸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도 하나님께서 인격을 수확하는 가을이 있고 가을에 씨가 뿌려져 겨울을 지나 그 씨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봄이 있다는 것인데,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이 생명 노선을 이탈하여 육신이 죽지 않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사망노선을 가느냐, 생명과를 먹고 생명노선으로 가느냐 이 문제였다. 죽음과 생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십자가 앞은 죽음이었지만 뒤는 부활이 있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하지만 피 흘림은 죽음을 의미한다. ‘물’도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렇듯이 죽음은 생명으로 연결되는 다리이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영생이 없다. 생명의 원리가 그렇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하지만 큰 것은 제한이 있다. 태양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크기는 제한이 있고 영구하지 않다. 그러나 작을수록 제한이 없다. 공기는 수많은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공기는 태양보다 무한히 크고 영원하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공기와 같이 모든 것이 다 소멸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사람들은 육신은 원래부터 영생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생명이 아니고 영이 생명이다. 영이 되어야만 영생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영생의 원리가 있다. 우리가 죽어서 없어졌는데 영원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아담은 육체적 죽음 뒤에 있는 생명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고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사망노선으로 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거와 같다고 말씀하셨다.(막4:26) 사람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만유의 생명의 원리는 똑 같다는 것이다. 인생은 흙이지 씨가 아니다. 씨-하나님은 흙-사람만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흙-사람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씨를 받아드리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람들은 또 무죄가 영생인 것으로 착각한다. 무죄는 영생이 아니고 흙-사람에게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 할 자가 사탄의 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여 부활-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을 믿음의 선두주자라고 한다.(히6:20) 왜 선두주자인가? 생명의 길을 걸어가신 첫 번째 분이기 때문이다. 앞장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는 예수님의 인격의 최종열매인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씨와 흙은 상호 죽음이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것은 우주 안의 진리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추상적이고 종교적으로 알면 안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가 없으시고 그렇기 때문에 부활했다고 알면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체질을 가진 분인데 하나님이 정한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위치를 이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것이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5:15)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씨를 땅에 뿌리면 싹이 나서 열매를 맺는 거와 같이 씨-하나님 앞에서 흙-인생의 위치를 지키었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우리는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가신 것, 죽은 자를 살리신 것 등은 먹을 수가 없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나무가 아니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분의 인격의 최종열매로 우리도 먹을 수 있는 거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는 운명적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나무의 열매이시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담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결국 아담과 같이 선악과와 생명과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셔야 했던 것인데 예수님은 생명과를 잡수셨기에 처음 인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운명대로 육체적 인간에서 영광스런 부활체로 살아나신 것이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정해주신 인생이라는 위치, 곧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으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생이라는 위치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높이 올리셨다고 말씀하고 있다.(빌2:8~9) 그렇다면 지금까지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고 영화롭게 부활하지 못했을까? 그들은 사탄이 빼앗아간 인생의 위치를 회복시키지 못했고 여전히 선악과를 먹고 죽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장차 사탄의 열매로 부활하여 불 호수에 들어 갈 것이다.(계21:12~14)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거듭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것은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다.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거부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사탄을 이기시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셨다. 이기는 자에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진리다.(계2:7) 생명나무의 열매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주신 격이고 운명이다. 열매의 내용은 무엇인가,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고,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약하고 한번은 육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 안에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피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흙이라는 운명을 주었을까? 흙에만 하나님은 씨를 뿌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신이 되겠다고 하면 그것은 흙이 돌이 되겠다는 것으로 씨를 뿌릴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생에게 정해주신 격에 순응하셨다. 아담은 이것이 싫어 선악과를 먹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드리셨다.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꼭대기에 뛰어 내리라고 했을 때 사람은 뛰어 내리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하고 하셨다. 십자가에서도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운명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피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끝까지 순응하셨다.
그동안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격은 늘 원망의 대상이었고 불만의 대상이었다. ‘왜 우리 육신을 이렇게 약하고 능력없고 죽도록 만들어 놓았나?’ 늘 ‘이놈의 육신 때문에 안된다’고 하면서 창조자를 원망하였다. 이것은 사실 사탄의 속임수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인격을 지키심으로 인격의 고귀함과 영광을 보았다. 우리는 이 육신을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신들과 같이 되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오셔서 이 연약하고 능력없는 육신을 가지고 마귀에 승리하시고 생명의 부활을 통해 인생의 존귀와 영광을 드러내셨다. 인생이 영광스러우니 하나님도 영광스러워진 것이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는 늘 육신 때문에 안된다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안된다는 것은 우리 생각이다. 성막 안에는 말씀과 말씀을 넣어두는 증거궤가 있었다. 예표적으로 보면 말씀은 하나님이고 증거궤는 사람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궤짝이 필요한데 사람들은 궤짝 때문에 안된다고 하면 말씀을 보관할 장소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 실 곳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 안에만 거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의 승리자가 되길 원하신다. 인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예수님만큼 억울하고 한 많은 죽음도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예수님이 불쌍해서 살렸는가? 그렇지 않다. 왜 살렸는가? 그분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서 정해진 것이다. 아담은 이게 싫어서 선악과를 먹었지만 예수님은 내가 아무리 의인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그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자신의 목적이 없고 만드신 이의 목적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피조물의 모습으로 창조자의 목적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씨-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탈해서 죽지 않는 신과 같이 된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신과 같은 자에게는 생명을 넣어 줄 수 없다. 돌 위에는 씨를 뿌릴 수 없다. 흙에만 씨를 뿌릴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어떤 불만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의인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인생이 십자가에 매달면 죽도록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 운명을 담담히 받아드린 것이다. ‘나는 의롭게 살았는데 죽는 것이 억울하다’ 이러면서 죽은 것이 아니고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요23:46) 하시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마지막을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숨을 거두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나의 어떠한 상황과 관계없이 죽기까지 지키신 것이다. 내 목적보다 더 크신 이의 목적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는 것이다. 죽음은 더 좋은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늘 하나였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원이 예수님의 소원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하에서도 이 인생의 위치를 지켜야만 하나님의 씨를 받아 새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고, 또 인류에게 그 씨를 분배하여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실 때의 목적대로 인생이 생육하고 번성해서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씨로 새로 태어나 새인류의 첫열매(조상, 씨)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 안에서 정해진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열매의 핵심 내용물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를 믿되 생명나무의 열매의 내용물을 먹지 않고 껍데기만 먹고 있다. 껍데기는 사람 안에 들어와 생명이 되지 않는다. 열매의 내용물을 먹어야만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이 된다.
예수님은 새인류의 조상이고 첫 열매다.(골1:15) 첫 열매가 거친 과정을 후속 열매들이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추수에 이른다. 우리는 종교적이고 구름위에 떠다니는 실체가 없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은 영생하게 되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신이 죽게되었다고 아는 것은 생명의 원리를 모르는데 오는 오해다. 그러면 죄를 용서받은 우리는 왜 죽는가? 구원받은 우리가 죄 때문에 죽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헛것이 된다.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물은 예수님이 대속하셨다. 우리가 죽는 것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번제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생명의 노선을 걸으셨다. 하나님이 정하신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는 생명 노선을 걸으셨기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번제헌물이 되어야만 생명의 연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심으로 철저히 생명노선을 걸으셨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법리적인 희생물이 되셨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법리적인 길을 걸으신 것이 아니고 유기적인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예수님이 단순히 법리적으로 우리의 죄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부활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물로서 제단주위에 피를 뿌리셨다. 우리가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희생물로서 피를 뿌려 죽어야 한다는 논리가 생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희생물의 자격도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살아 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한다.(롬12:1) 그럼에도 우리는 헌물로서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죽음이 필요하다. 생명노선 안에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신과 같은 삶은 살고 완전한 인간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신 주신 운명(격)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에게 창조 안에서 육신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격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운명이고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와의 위치전쟁을 통해 인생에게 정해준 죽음이라는 운명(인격)을 철저히 인정하시고 지키셨다.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에게 창조 안에 정해진 죽음이라는 진실을 거부하면 자신이 알건 모르건 도로 선악과를 먹고 신들이 되고 싶은 상태로 돌아가는 형국이 된다.
그러므로 마귀와의 전쟁은 진실 대 거짓의 싸움이다. 죽도록 창조된 것이 인생의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마귀에게 속아 죽지 않는 신처럼 산다는 것이다. 거짓으로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는 그럴 것이다. 아니 사람들 중에 누가 자신이 영원토록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느냐? 지금까지 사람들은 다 죽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 안에 인생에게 정해 놓은 죽음이란 운명-위치안에서 죽었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모두가 핑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운명에 순응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좀 더 살았으면 하고 한을 가지고 죽었다는 것이다. 결국 천사를 사모하고 죽었다는 것인데 이는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은 자가 되어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자살을 하는 것도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도 인생이라는 위치를 원망해서 선악과를 먹은 거와 같이 자살이란 인생을 원망하는 것이다. 피조물인 내가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것은 창조자를 원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 안에서 정해 놓은 인생이라는 위치 안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정해 놓은 죽음이라는 운명을 보았다. 그분은 무고한 죽음 앞에서도 인생을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과 같이 어떤 핑계도 대지 않았다. 능력의 대표자이자 죽지 않는 자 사탄 앞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위치를 당당히 지킴으로 세상으로부터는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정해 놓은 코스대로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리신 것이다. 아담은 자신을 원망함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예수님은 그 위치를 당당히 지킴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분을 다시 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담은 죽지 않는 천사가 부러워 사람의 위치를 버렸지만 예수님은 육신이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천사보다 더 좋은 부활을 얻음으로 인생의 존귀와 영광을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아멘!
16. 거짓 Vs 진실
세상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 성경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은 개념에 차이가 있다. 세상은 지금 속이는 자 아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세상은 전체가 거짓체계 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오래 동안 깊게 속아 있기 때문에 내가 속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속은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먼저 진리, 곧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침묵한 한 가지 질문이 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 라고 물었다. 이 중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이 질문은 인간이 가진 궁극적인 물음이다. 우리는 진리라는 말을 쓸 때 참(true)과 거짓(false)이라는 헬라적 사고에 익숙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실재(實在)과 형상(形狀)에서 실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실재고 사람은 형상이라는 의미다. 실재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형상이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형상은 생명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사람으로 오셨다. 아담이 단지 형상이라면 예수님은 실재와 형상, 곧 씨와 땅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생명이라고도 하고(요 14:6)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도 하는 것이다.(고후 4:4)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생명이 없었다. 아담에게 영생이 있었다고 한다면 아담과 예수님은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말이 된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지 실재-생명이 아니다.(롬5:14)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그릇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우리는 앞에서 동산은 우리 자신, 곧 인격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동산이라는 자리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정해주신 위치로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인생의 근원적 임무는 동산, 곧 인격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다.(창2:15) 씨-하나님은 흙-인격 안에만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의 입장에서는 이 인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진실이다. 예수님은 실재인 동시에 형상으로 오셨지만 아담의 모습으로 오셔서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위치를 지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생명의 과정을 통해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인생이 결코 씨-실재가 될 수 없음에도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진실을 벗어나 비정상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씨도 아니면서 씨 인척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짓이고 사망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형상의 위치를 벗어나 실재처럼 된 것이 거짓이고 사망이다.
예수님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오셨다. 그러나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는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에서 이탈했다. 하나님의 목적, 곧 하나님이 정해주신 진실의 자리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치를 이탈한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은 ‘진리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결국 이 질문은 진실한 인격이 누구냐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인격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인격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태초에 정해주신 인생의 격이다.
아담은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을 이탈했다.(창3:5~6) 사탄에게 속은 사람은 신도 아니면서 신 인척 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신처럼 되어 있는 상태가 거짓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교병으로 만들었는데 거짓으로 부풀려져 유교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치를 이탈한 사람은 자신이 가짜인데도 가짜인지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 인생의 문제다. 죄란 바로 무교병이라는 진실의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 부풀려져 유교병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진실의 위치를 잃어버린 인생은 너무 오래 전에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잃어 버렸기에 진실이 무엇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 오셔서 볼품없는 무교병으로 참사람의 위치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잃어버린 인생의 진실-원 인격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셨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흙이고 벌거숭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지 씨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육으로 만들어졌지 영이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유교병이 되려고 한다. 사람이면서 죽지 않는 신이 되겠다는 것이다. 인생은 흙이고 무교병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진리고 진실이다. 그 외의 것은 거짓이다. 씨-하나님은 흙-인격에게만 씨를 뿌릴 수 있다. 무교병인 사람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 진실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심으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거짓 대 진실의 싸움이다. 곧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의 진실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이탈하면 사망이다.
사탄에 속은 사람들은 인생이 대단한 위치에 있는 줄 안다. 기독교인들은 인생은 원래 영생이 있었다고 믿고 불교인들은 인간 안에 불성이 있는데 어리석어 찾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까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씨가 아니고 흙이고 벌거숭이라고 드러난 자리가 십자가다. 인간의 정체성이 드러난 자리다. 인간의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자리다. 우리 주님은 진실로서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승리하셨다. 진실로서 거짓을 이기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을 믿느냐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와서 대속이라는 말은 3번 밖에 안 나오고 전부 구속이라는 말을 쓴다. 구속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속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원래의 위치라는 의미다. 아담은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의롭다고 하셨다. 의롭다고 하니까 이것을 세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의롭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위치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위치는 흙이고 번제헌물이고 벌거숭이라는 것이다. 이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구속이다.
죄란 무엇인가? 사람이 신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가 흙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구속받은 것이다.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다.’(엡 1:7, 골1:14) 신과 같은 사람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기 때문에 죄용서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자가 가출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지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신과 같은 사람을 소망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같은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 여기면 내가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은 것이다. 위치를 이탈했던 자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던 자가 목적 안으로 들어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죽지 않는 신들과 같은 사람이 참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거짓이 만천하에 폭로된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사람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거짓이 폭로되고 진실이 드러난 자리다. 예수님은 인생의 진실로서 거짓을 이기신 분이다.
또 하나님이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요일5:20)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는 예수님을 대단히 위대한 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통상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하면서 범접할 수 없는 분으로 숭배를 한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분이다.(딤전3:16) 그런데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지 숭배를 받으러 오셨다고 하지 않았다.(요10:10)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려함이라.(요10:10)
예수님이 오신 핵심 목적은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예수님은 희생물로서 인생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를 구속해야 했다. 그리고 그분은 구속받은 인생들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새 인류의 조상이 되어야 했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이다. 예수님은 새 사람, 곧 새 인류다.
원수 되게 하는 것 즉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화평을 이루려 하심이요,(엡2:15)
또 너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니 (엡4:24)
새 사람을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 (골3:10)
새 사람이란 옛 사람 아담과는 겉모습은 같지만 생명이 틀리다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생명이 없었다. 그러나 새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져서 새 인류의 첫 열매-조상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는데 이는 단지 그 상태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창조하셨다. 첫 사람 아담에게는 생명이 없었다. 단지 하나님의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 형상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야 하나님의 그리스도-위임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러 오셨지 경배를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경배는 하나님 한 분으로 족하다. 아들은 아버지를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한 생명으로 태어났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히2:11)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기를 원하신다.(갈2:20) 성경 어디에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했다는 말은 없다. 하나님은 경배해야 하고 예수님을 기뻐해야 한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니라.(빌3:3)
물론 우리는 주님의 구속과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만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된다. 모든 종교는 신과 사람을 분리시켜 사람으로 하여금 신을 경배하게 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경배하라고 하지 않고 한 생명으로서 살라고 한다. 예수님과 한 생명이 된 우리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배다. 씨의 소망은 열매다. 우리가 아들이 되면 참 경배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이르기를, 사람들이 마땅히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나이다, 하매 (요4:20)
이 말의 요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해야 할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해 할 장소가 교회당이냐, 성당이냐, 라고 묻는 거와 똑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에서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서도 경배하지 아니할 때가 이르느니라. (요4:21)
정작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경배란 장소적 개념도 아니고 어떤 의식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 (요4:23~24)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에 어떤 장소와 형식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씨의 절대적 소망은 열매-아들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절대적 갈망은 아들이다. 여기서 진리란 예수님이고 곧 아들이다. 영과 진리로 경배한다는 의미는 내가 아들이 되면 그것이 참된 경배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성전이라는 모형을 통해서 경배를 했다. 성전과 성전 안에서의 모든 기구들과 의식과 제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모형이었다. 그러나 성전의 실재이신 예수님이 오셨음으로 이제는 어떤 장소와 의식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이다. 실재가 있는데 그림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 그림과 실재 사과가 있다면 실재 사과를 먹을 수 있지 그림을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씨의 소망은 열매이듯이 아버지의 소망은 아들이다. 아들이 되면 참된 경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들이었다.(창6:2, 욥1:6)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라는 것이다.(히1:5)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깊은 빛을 받아야 한다.
오늘 날 우리는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님을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도 없고 인간의 존재만 남은 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위대한 능력의 신으로서 숭배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종교적으로 믿는다. 그래서 결국은 사탄이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창3:5) 라는 유혹의 말로 아담을 속였듯이 오늘 날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 물위로 걸어가신 예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신과 같은 예수를 믿는다. 신과 같은 예수를 믿고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한다. 도로 아담으로 가는 것이다. 여기에 사탄의 깊은 함정이 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경건한 자와 굳센 믿음을 가진 소위 빛을 남긴 사람들이 이 유혹에 넘어갔는지 모른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굳센 믿음의 소유자들일수록 이 속임수에 넘어간다. 우리 조상 아담이 맨 먼저 이 유혹에 속았고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명성있는 영적 거인들이 속아 넘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신들과 같은 위대한 영적 거인들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님을 너무도 당연히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하였다.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고전1:23)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유대인들의 관념에는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은 최소한 모세와 같은 지도자였다. 모세가 이집트의 노예된 상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했듯이 그들이 대망하는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메시아였다. 특히 신명기 18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세와 같은 대언자를 일으키겠다고 약속했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들을 그의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그가 그들에게 말하리라.(신18:18)
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신21:23) 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아닌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 있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겠지만 그들은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메시아의 고난을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자기들의 고난으로 해석하였다. 더구나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근본이념인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하였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이 오셔서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것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의 관념상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은 모세의 기적과 비교해서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 때문에 바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세보다 예수님이 뛰어나신 분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히3:1~6)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면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 유대인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예수님은 조선시대로 말하면 유교와 같은 유대인의 국가질서인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구약적 관념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간혹 우리는 목회자들이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장면을 기록한 성경 말씀을 보고 그들을 비난하는 설교를 하는데 과연 우리가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유대인들은 인류의 대표다. 유대인들이 그러했다는 것은 모든 인류가 그러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들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됨과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된 것이다.(롬11:25)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눅23:34)
그러니까 당시에 유대인들의 정상적인 관념으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하는 일을 가지고 저들이 알지 못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이 기도는 조만간 응답될 것이다. 지금 서서히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이방인을 대표하는 그리스인에게는 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고전1:23) 당시에 그리스인들의 관념으로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여겼고 지혜만 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지혜를 추구하는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한다는 말이 있다.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자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는 것이고 정치를 대표하는 이방인 그리스인의 입장에서는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3장 6절에서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보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했는데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는 말은 종교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지혜롭게 할 만큼’이라는 것이 세상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정치를 대표하는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천사와 같은 신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사53:2)
여기서 우리는 강한 빛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신적인 예수님을 믿고 신들과 같이 된다면 도로 아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능치 못할 일 없다고 하면서 신적인 능력을 쫓아가는 것은 속은 것이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라는 의미는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지 능력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적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신으로만 숭배만 하고 있다면 빗나간 것이다. 이것도 결국 신들과 같이 되고 싶은 타락한 아담의 속성인 것을 모르고 속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은 타락한 아담의 속성은 무엇인가? 신과 같은 사람을 숭배하고 정상적인 사람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정상적인 사람이신 예수님을 의로 여겼다.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지 않는 자는 참 사람이 아니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참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자리가 인생의 정 위치라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사람이신 예수님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사람으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알지 사람이 어떻게 신을 알겠는가? 우리가 추구할 것은 사람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들이 될 필요가 없다. 신들-천사들은 하늘에 이미 하나님이 원하는 만큼 다 있다. 우리가 신들과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과 같은 예수님을 믿고 신들과 같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힌 정상적인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고 정상적인 사람이 될 것인가? 이 갈림길에 있다. 지금도 사탄은 이 두 길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아담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 수 있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능력을 가진 천사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져서 그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였다. 이것이 죄고 멸망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거꾸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이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져서 그 열매를 먹어야 한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먹는 것이다.
18. 선악의 지식의 세계 Vs 생명의 세계
우주 안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선악의 지식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다. 하나님과 종의 관계에 있는 천사들은 선악의 지식의 세계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는 사람은 생명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세계를 목표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악의 지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선악의 지식의 세계란 선악이라는 도덕과 지식이라는 능력이 가치기준이 되는 현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세계와 같다.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위치를 이탈했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은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12장 4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 ‘지식이 증가하리라’라는 말씀이 있다. 결국 지식이 증가한다는 말은 결국 선악의 지식의 세계가 열매를 맺어 큰 바빌론으로 간다는 말이다.(계17, 18장)
그러나 사람은 원래 선악의 지식의 세계가 아닌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선악의 지식의 세계는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세계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용하는 세계로 원위치 한 것이다.(롬8:2) 이 두 세계에 대한 관념이 명확하지 않으면 혼란이 온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세계임에도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바라보기 때문이다.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중력의 세계를 중력의 세계로 바라보는 거와 같은 것이다.
근원과 현상
생명이란 근원적인 것이고 현상이란 근원에 대한 결과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하나님은 근원으로 실재고 사람은 단지 형상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은 영이 생명이고 실재다.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고 단지 형상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목표는 형상에 있지 않고 실재에 있다. 영은 생명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지 않고 영, 곧 인격에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라서 천국하면 계시록 21장과 22장에 나와 있는 보석들로 이루어진 어떤 환경을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그런 유치한 곳에 있지 않다. 그런 환경은 선악의 지식의 세계의 관점에 있는 사람의 필요지 하나님께서 무슨 그런 환경이 필요하시겠는가? 하나님은 그런 환경이 필요한 곳이 아니라 실재 곧 인격이 필요하신 것이다. 아내가 되어 같이 살 수 있는 인격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새예루살렘을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더라’(계21:2)라고 하는 것이다. 곧 새예루살렘이란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인격적인 세계의 최종완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은 영-실재에 대한 그림자로 구약의 복은 물질적인 것이었지만 신약의 복은 영적인 복이다.(엡1:3)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으니(엡1:3)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 곧 인격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실재를 보려고 해야 한다. 율법은 왜 실패했는가? 율법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실재, 곧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성경기록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하나님 마음을 기록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문자적인 현상에만 치중한다면 이것은 도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근원을 모르고 현상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어느 종교나 비슷하다. 어쩌면 불교의 진단과 대책이 더 심오할 수 있고 더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러면 현재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생명의 세계를 선악의 지식세계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세계와 생명의 세계가 혼재되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모르니 설교를 하더라도 어떤 구절을 들어 우리들의 생활에만 적용하는 생활설교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표가 있고 사람이 하나님의 목표에 동역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표를 모르니 자신들의 목표만 말하고 있는 가련한 수준이다.
성경은 법리적인 관점이 아닌 영-인격적인 관점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보면 안된다. 성경은 영생은 내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한다.(요17:3) 성경은 한 목표를 위해 기록되어 있다. 한 생명,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목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요5:39) 그럼에도 우리가 아는 예수는 얼마나 빈약한 수준인가?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수준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으니 믿어야 한다는 수준이다. 이것은 생명-인격을 아는 것이 아니고 지식의 관점에 아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표면적인 것만 아는 것이다. 지식의 세계는 한계가 있으나 인격의 세계는 한계가 없다. 이것은 그분의 인격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생명나무 열매라면 우리는 껍질만 먹고 있는 것이다. 우주보다 크신 그분의 인격을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르니 그분이 보실 때 얼마나 안타까우시겠는가?
우리는 왕가의 제사장들이다. 신분이 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총사령관이시라면 우리는 지역 사령관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한 자들로서 그 수준에 맞는 사고와 행동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어떻게 하면 달성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분에 합당하게 우리의 수준은 우주적이고 전략인 수준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수준을 우주적인 크기의 수준에서 알기를 원하신다.(엡3:18)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으로 모르고 내 목적을 위한 생활설교에 치중하다보니 이것은 사령관의 수준이 아니라 분대장 수준에서 성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 얼마나 가련한 수준인가? 이 또한 근원 곧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을 모르고 현상에만 치중하는 결과이다. 이것은 생명이 없는 지식으로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지식이 증가한다는 말도 결국 세상은 점점 갈수록 지식은 증가하나 영-인격의 세계는 피폐해 진다는 것이다. 두 세계가 공존하여 발전할 수 는 없다. 한쪽이 증가하면 한 쪽은 감소하는 것이다.
본성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3장 3절까지 말씀을 살펴보자.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였느냐?(고전2:12~3:3)
본성에 속한 사람, 육적인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이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 나와 있다. 세상은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들때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과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되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이인 육적인 사람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영에 속한 사람이다.
본성에 속한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든 다음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살아있는 혼이 된 사람과 같이 혼적인 사람이다. 혼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셨다(롬1:4)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원래부터 하나님 아들이었다는 것은 혹시 모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들로 밝히 드러나 확정되셨다, 인정되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교황이나 황제, 유명한 성자를 보고 그렇게 말한다면 이해가 될 수 있는 일이지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되느냐는 것이다.
혼적인 사람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정신적인 인간이다. 그 안에는 지식과 지혜를 갖추기 위한 지성이라는 것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것을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또 결정하고 실행하는 의지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이것을 지정의(知情意)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혼-정신 구조이다. 물고기는 밖의 세계를 모른다. 알 수 있는 기능이 없는 것이다. 그가 물 밖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죽음의 순간뿐이다. 이와 같이 혼적인 인간은 다른 세계에 있기 때문에 영적인 일을 알 수 없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라고 했다.(고전3:1) 아이들은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성숙하지 않기 때문에 넓고 깊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냥 근시안적이고 가까운데 밖에는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충성이 있다. 그런데 어린아이와 같이 소아적이고 표면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알지 못해서 교조적이고 교리적이고 표면적이고 문자적이고 기계적이다. 그래서 성경 한 구절을 가르쳐주면 그것을 문자대로 그대로 믿어버린다. 잘 믿는 것 같은데 깊이를 모른다. 믿기는 잘 믿는데 속-영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에 관한 것이고, 가장 깊은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표면만 알면 안된다.
성경은 표면과 이면이 있다. 표면은 영원하지 않고 이면은 영원하다. 예를 들어 ‘돼지 고기를 먹지 말라’는 말의 이면은 이방인과 함께 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돼지 고기를 먹지 말라는 표면적인 말은 유효하지 않지만 이방인과 함께 하지 말라는 이면은 영원하다. 또 ‘안식을 거룩히 지키라’는 의미는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의미다. 아담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긴 자는 죽이라고 한 것이다. 안식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표면이고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것은 이면이다. 안식일을 키라고 한 표면은 현대에 와서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이면은 오늘 날에도 영원한 것이다. ‘안식일 날 일하지 말아라’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알고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일하시니까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니까 ‘예수는 안식일을 범한 자다’ 고 해서 죽인 것이다.
또 계시록에 14장에 가면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정확히 사람의 수를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정통이든 이단이든 서로 해석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숫자는 항상 어떤 것을 상징한다. 삼은 하나님의 수, 사는 피조물의 수다. 삼 더하기 사는 칠로서 옛 창조의 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더하기에 있지 않고 연합에 있다. 더한 것은 불완전하지만 곱한 것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며 갈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열두 지파, 신약에 와서는 열두 사도가 나오고 하나님의 최종완성인 새예루살렘은 열두 문, 열두 기초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열둘은 하나님의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숫자다. 열둘 곱하기 열둘은 백사십사이고 백사십사에 만을 곱하면 십사만 사천이다. 성경에서 열은 더 이상의 수가 없다 라는 의미로 만수다. 열에 열을 곱하면 백, 백에 백을 곱하면 만이다. 더 이상의 수가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십사만 사천은 우리가 셀 수 없는 많은 사람의 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십사만 사천이라고 해석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지금 대부분 소위 근본주의 진영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격적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 인간이 되고 있다. 말로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도로 율법주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도 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죽음에 한정시켜 버린다.
그러니까 문자적인 사람들은 참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맞다고 할 수도 없고 맞기는 맞는데 속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답답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말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 중심!’이라고 한다. 성경을 열심히 읽지만 표면만 읽기 때문에 문자주의적이고 열심히 봉사하고 있지만 육적이기 때문에 편당을 만들고 분란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에 관한 것이고, 가장 깊은 본질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을 표면적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인 나라가 아닌 예수라는 인격의 연합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예수라는 인격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동산-성막-성전-예수-교회-천년왕국-새예루살렘으로 발전된다. 성막, 성전은 예수라는 인격을 건축물로 묘사한 것이다. 지금의 교회를 건축물의 형태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 동산, 천년왕국, 새예루살렘도 예수라는 인격을 동산으로, 천년왕국으로, 새예루살렘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영에 있지 물질에 있지 않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거처는 물질이 아니고 인격 안에 거하신다. 어떤 사람 안에 거하는가? 예수라는 인격 안에 거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니 천국이 무슨 순금 덩어리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고 예수의 인격과는 거리가 먼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다 보니 그러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영이신 하나님은 그런 물질들이 필요하지도 않으며 중요하지도 않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라는 인격에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지금 땅위의 교회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기록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하였다.(요5:39) 그러니까 구약에 기록된 모든 긍정적인 것은 예수라는 인격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나무, 어린양, 만나, 반석, 제물, 성막, 성전, 제사장 등은 모두 예수님의 인격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 문자주의적이고 표면적인 사람들은 교리를 진리라고 생각하고 교리를 지키는 것이 진리를 따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영-인격적인 것에 있는데 말씀을 기계적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에 기계적 인간이 됨으로서 분쟁을 일으키면서 정의를 수호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아니면 교회가 잘 못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영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니까 무슨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난 사람이다. 땅에 있지만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고 혼과 육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헷갈리게 된다. 죽고 다시 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어떻게 해도 모두 육이고 혼이다.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육신이 생명에 삼켜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는 것이다.(고후5:4)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먹힘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음식이 됨으로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음식-제물이 되려면 나는 그리스도의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인격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성령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영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새로운 영이다. 인간은 창조될 때 이미 영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영은 사람의 영이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창조된 영이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물고기는 물 밖의 일을 알 수 있는 기능이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모르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고전2:16)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기록된 말씀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마음을 아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 곧 마음이 생명이다.(잠4:23)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지 않고 영-인격에 있다. 그럼에도 이 목표를 모르니 천국이 무슨 기화묘초 만발한 곳이라든지, 또는 보석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와 아무 상관도 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다. 거듭난 사람만이 영에 속한 세계를 볼 수 있다. 영적인 사람은 신과 같은 성분이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거와는 상관이 없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산 사람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해 준 생명 안에 그리스도의 숨을 받은 것이다. 숨은 영이요 생명이다. 숨이 떨어지면 죽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8:9). 아담은 하나님께 받은 숨으로 살아 있는 혼이 되었고,(창2:7) 우리는 예수님께 받은 숨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요21:22)
법리적 율법의 세계 vs 유기적 생명의 세계
구약은 법리적 율법의 세계라 할 수 있고 신약은 유기적 생명-인격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지 잘 모른다. 그냥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독단적인 섭리로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법칙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예언도 점쟁이가 뭘 맞추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필연이다. 씨를 뿌리면 봄에 싹이 나고 여름이 되면 잎이 무성해질 것이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을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점쟁이라서 아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필연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법이 주어진 것이다. 처음에 이스라엘 민족은 이법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자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행하리이다.’(출24:3) 하면서 자신있게 하나님께 다짐하였다. 그러나 이법은 원래 사람을 위한 법이 아니었다.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서 23절에 따르면 율법은 종들에게 주어진 법이다. 아들은 종을 다스려야 할 자다. 율법은 생명의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할 법이지 율법이 생명의 법을 통제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율법은 아들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법리적 세계를 끝내시기 위해 마지막 아담-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희생물로서 법리적 심판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런데 그분께 단순히 법리적 심판만을 받았다면 부활이 없는 것이다. 유기적 헌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신 것이다. 번제헌물이 되셨기에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다. 법리적 선악의 지식세계를 종결하고 유기적 생명의 세계를 여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근본주의 진영은 헬라적 합리주의, 지식주의 영향으로 인해 근원을 알지 못하고 현상만을 말한다. 법리적인면 강조하다 보니 우주보다 크신 그분의 생명의 인격의 세계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또한 표면만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은 법리적인 세계로서 현상이라면 신약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세계에 있기 때문에 선이 악을 이겨 선이 지배하는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선이라는 것도 나는 좋지만 하나님은 안좋으실 수 가 있다. 하나님의 목표는 선악의 지식세계가 아니라 생명의 세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경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세계를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선악의 지식세계 있다보니 생명의 세계에 대한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들어낸 사건이 있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악의 관점에 노아가 술을 먹음으로 하체를 드러냈으니 술을 먹으면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하체를 드러낸 사건은 이외에도 몇 군데 더 나온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그 남자와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 라는 말이 나온다. 선악의 지식세계에서는 벌거벗은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나 부부간에는 생명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보면 술에 취에 하체를 드러낸 노아는 마땅히 비난받아야하고 그 하체를 본 노아의 아들 함에 대한 형벌이 지나치다고 생각된다. 단지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것이 저주를 받을 만한 일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노아가 잘 못했다는 말이 없고 아버지의 하체를 본 함에 대한 저주만 있다. 이것도 생명의 관점에 보아야 해석이 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부활의 세계, 곧 생명의 세계에 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생명을 예표한다. 노아가 포도주 취해 누워있다는 것은 노아는 홍수-죽음을 통과해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부활생명의 세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아의 아들 함은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아버지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종이 생명과를 먹은 아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의 세계를 업신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함은 저주를 받은 것이다. 결국 창세기 9장에서 함이 종이 된 것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종이 되고 생명과를 먹으면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지만 그 열매가 함이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마엘은 노예 여자에게서 육체를 따라 태어났으며 이삭은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약속-영을 따라 태어 난 자라고 말하고 있다.(갈4:23) 이삭은 죽고 다시 태어난 부활생명을 가진 자를 예표하고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 태어난 자를 예표한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마엘이 혈통적으로 적자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지 영-생명이 아니다.(요3:6) 그래서 사람은 흙-육신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다시 태어나야 한다.(요3:5) 이스마엘은 선악과를 먹고 종으로 태어난 자고 이삭은 생명과를 먹고 아들로 태어난 자라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는 말이 나온다.(창21:9) 즉 종이 아들을 희롱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부활생명을 업신 여긴 것이고 하나님을 업신 여긴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일로 인해 이스마엘과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쫒겨난다.
또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가 돌아올 때 기뻐서 아마 에봇을 입고 춤을 추었다. 춤을 추니까 몸이 다 보였는지 사울의 딸이었던 다윗의 아내 미갈이 그것을 보고 왕을 업신여겼다고 했다. 다윗이 돌아오자 ‘오늘 이스라엘 왕이 어찌나 영화로우시던지 오늘 자기 신하들의 계집종 들 눈에 마치 하잘 것 없는 자들 가운데 하나가 염치없이 몸을 드러낸 것처럼 드러내셨도다.’(삼하6:20) 하면서 조롱했다. 다윗은 ‘나는 주 앞에서 한 것이라.’(삼하6:21) 고 대답했다. 성경은 왕이 체통을 지키지 않고 몸이 드러날 정도로 춤을 춘 것이 전혀 문제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하6:23) 미갈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의 세계를 조롱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갈은 저주를 받고 자식-생명을 생산하지 못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 다섯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잘 못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모르면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생명의 세계를 조롱할 수가 있다. 또한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이방민족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이것도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생명의 세계를 예표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선악의 지식세계에 있지 않고 가나안 땅-생명의 세계에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흙-육신이 하나님의 씨를 받아 거듭나는 것이다.(요3:5) 행위에 있지 않고 생명에 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창3:22) 하였다. 선악과를 먹으면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어 하나님도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 안에서 보면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업신여겨 보이고 판단이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지식의 세계에서 보면 성경은 완전하다. 그래서 어쩌면 디지털처럼 완전하게 꼭 들어 맞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영-인격의 세계는 수학이 아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도 표면만 본다면 그것은 법리적인 세계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표면이 아닌 이면에 있는 영-마음에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데 과연 그분의 인격을 아는 것이냐는 것이다. 겨우 안다는 복음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이것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법리적이고 교리적으로 아는 것이다. 생명나무 열매의 알맹이를 먹어야 하는데 껍데기만 먹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구약적 경륜 안에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경륜의 핵심은 성육신이다. 예레미아 31장 33절에서 34절에서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 마음 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다시는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과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그들의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다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31:33-34)
구약경륜은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통해서 대리로 말씀하신 것이고 신약경륜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하늘에 있거나 대리자에게 있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말씀이 사람과 분리되지 않고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법이 돌비에 새겨진 것이라면 신약은 심비에 새겨진 것이다. 이것인 신약경륜의 핵심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것을 잃어버렸다. 예수님 한분에게만 한정시키기 때문에 사실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육신은 죄 때문에 안되고 또 죄로 인해 죽어야 하고 죽은 후에나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성경은 거짓말이 된다.
우리의 죄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 되심으로 다 해결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육신이 죄 때문에 죽는다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해결이 안된 것이다.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전 인격적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사도들을 보면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과 한 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쓴 편지가 성경이 된 것이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였기 때문에 항상 서두에 ‘주가 말하노라’라는 말씀을 앞에 붙였지만 신약은 사도들 자신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쓴 편지가 하나님 말씀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 된 것이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설교자들이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자신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제하여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게 해달고 기도를 하곤 한다. 일견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구약 경륜 안에서 기도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아무 책임도 없는 사람이 된다. 구약에서 대언자는 단순히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였다. 그러나 신약은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가 된 성육신의 개념이다. 결국 신약 경륜 안에서는 자기 자신이 말씀이 육신이 된 만큼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먹고 내 생명이 된 만큼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가 육신의 죄 때문에 죽는다면 내 육신 안에 죄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죄가 있는 곳에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 육신의 죽음 문제도 그렇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심판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는가?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육신의 죽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에 보면 육신의 죽음은 영생을 위해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육신-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져야 하기 때문이다.(고후5:4)
19. 반론에 답하여
1. 하나님은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람의 본질은 창세기 2장까지 완전성과 불멸성이다.
성경에서 완전이라는 의미는 세상에서 말하는 완전이라는 의미와 다르다. 또 완전한 것이 불멸성을 말하지 않는다. 각각의 피조물은 창조자의 목적 안에서 다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불완전한 피조물은 없다.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특히 성경에서 완전이라는 용어를 하나님과 사람 간에 적용할 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말한다. 그러니까 성경에서의 완전이라는 의미는 완성의 의미가 있다. 씨-하나님도 완전하시지만 흙-사람과 연합을 통해 완전해 지신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은 연합을 통해 살아간다. 어떤 존재도 독야청청 혼자 완성되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물질도 단독으로 반응하지 않고 서로 연합을 통해 작용하고 반응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경륜의 대원칙인 연합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연합의 원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 방법이다. 이것을 성경은 완전으로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당시에 노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합하지 않았고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 보면 신약성도를 향해 완전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려하심이라.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이르리니(엡4:12~13)
그러므로 우리 완전한 자들은 다 이같이 생각할 지니 만일 어떤 일에서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드러내시리라.(빌3:15)
우리가 그분을 선포하며 각 사람에게 경고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자로 드리고자 함이니라.(골1:28)
이외에도 골 4:12, 딤후 3:17 히 13:21 등이 있다.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기준으로 보면 사람은 누구나 흠이 있고 불완전하다. 땅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은 연합을 통해서 완전해지지만 영계에 있는 신들(천사들)은 연합하지 않는다. 스스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죽지 않는 신이 되어야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신약성경은 분명히 신약성도들을 완전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육신은 죽는다.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완전한 것이다.
신들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물고기의 세계와 독수리의 세계는 비교대상이 아니다. 아담은 여기에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적인 사람을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을 완전하다고 보신다. 불완전한 피조물은 없다. 개는 개대로, 하루살이는 하루살이대로 완전하다. 죽는다고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되고 싶었는가? 죽지 않는 신을 보았다는 것이다. 사람의 불행은 항상 남과 나를 비교하는데 있다. 사람의 인식은 보지 않은 것은 인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을 문명과 격리된 오지의 사람들에게 갖다 주어보았자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지금껏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는 것을 불완전하게 생각하는 것은 죽지 않는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죽지 않는 천사를 보지 못했다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생명 노선 안에서의 육신의 죽음을 주님은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죽지 않았고 잔다’(마:9:24, 막5:39, 눅8:52, 요11:11)’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생명의 열매를 맺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후 사망의 노선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종국적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기 때문에 이 죽음이 부정적인 것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시편에 8편 5절에 보면 ‘주께서 그를 천사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아담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낮게 창조된 것이 무엇인가? 시편에는 답이 없다. 그런데 그 답이 히브리서 2장 9절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히2:9)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낮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천사는 영으로 창조되어 죽지 않지만 사람은 육신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한번은 죽는다는 것이다. 즉 흙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씨를 발아하려면 선악과든 생명과든 먹으면 한번은 죽도록 되어 있다.
2. 사람의 영이 천사나 사탄, 하나님의 영과 같이 영원함으로 사람의 육신은 영생을 가졌다.
피조물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아주 잘 못된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오해에서 불거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조건은 ①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고, ②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③ 신성하고 거룩한 생명이고 ④ 하나님의 생명이자 삶이고 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 자신이다. ⑥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관계적 생명이다. 피조물의 영은 피조된 영이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사람들은 영생이 어떤 독립적으로 있는 생명 덩어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생은 어떤 덩어리가 아니다. 피조물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영생이신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만일 영원한 생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형선고는 죽을 수 있으니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가졌는데 사형선고를 내리는가? 비록 천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영적 존재이기에 죽지 않는다. 그래서 천사한테는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는다. 사람은 육체가 죽을 수 있으니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연합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사람도 자신의 생명은 보이지 않지만 내 육신은 내 생명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를 보더라도 보이지 않는 뿌리가 실재고 지상으로 보이는 나무는 그것의 형상이다. 지금 우주 만물이 다 이런 개념이다. 만물은 모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어떠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와 형상, 씨와 열매, 아버지와 아들의 나라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영이 천사나 사탄의 영과 같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면 이것은 큰 모순이다. 어떻게 사탄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질 수 있는가? 소멸되지 않는 영과 영원한 생명은 다르다. 소멸되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천사의 영이나 사람의 영은 피조된 영으로 만들어진 시점이 있으나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이기에 시작이 없다. 또 사탄의 영은 신성하고 거룩한 생명이 아니다. 사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동일시 하는 것은 사탄을 하나님과 동일시 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완성하셨다. 생명의 숨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피조된 영이 아니다. 생명의 숨이라는 말은 모든 피조물에게 다 사용된다. 생명의 숨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모든 피조물이 다 영생이 있다는 것이 된다. 노아의 홍수 때 콧구멍에 생명의 숨이 있는 모든 피조물은 방주 안에 있는 것을 제외하곤 다 죽었다.
마른 육지 위에 있던 모든 것 중에 콧구멍에 생명의 숨이 있던 모든 것이 죽었더라.(창7:22)
사람은 죄를 지어서 콧구멍에 생명의 숨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 때부터 숨이 코에 있는 것이 인생이다. 생명의 숨이란 단지 육신을 가진 피조물이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영은 그 생물의 생명이지 영원한 생명은 아니다. ‘생명의 숨’이란 그 생물의 영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은 우리 안에 영이 있기 때문에 숨을 쉬는 것이다. 영과 숨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영이 없는 육체는 숨을 안 쉰다. 각 피조물의 영은 그 피조물의 생명을 대표한다. 그래서 지구상에 있는 육체를 가진 피조물의 생명도 영-숨이 좌우한다. 영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약2:26)
성경이 말하는 세계는 크게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하늘과 땅이다. 하늘은 영에 속한 세계고 땅은 육에 속한 세계다. 두 세계는 차원이 다른 세계다. 그 세계에 살려면 그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한다. 영의 세계에서는 영적인 몸을, 육에 속한 세계에서는 육에 속한 몸을 입어야 한다. 지상에서도 물속에서 사는 물고기의 세계와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세계는 다르다. 그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거기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천사와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비교대상이 아니다. 아담이 왜 타락했는가? 비교대상이 아닌 것을 비교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이다. 천사는 하늘에 살도록 되어 있고 사람은 땅에 살도록 되어 있다. 천사는 영의 세계에 살기 때문에 자신을 대표하는 몸이 영적인 몸이고 사람은 땅에 살기 때문에 육신적 몸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영과 육의 세계가 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이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것은 큰 신비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바울은 아담과 이브의 연합에 대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아담과 이브가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되는 세계가 하나님의 최종완성이다. 그것이 실재적이고 가시적으로 완성된 곳이 새예루살렘이다.
3.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이 살아계신 하나님(Living God)과 동일한 Liv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불멸이기 때문에 사람의 육신은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
사람은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라는 것은 사람의 주체가 혼이라는 것이지 영원한 생명은 아니다. 육신은 장막과 같은 것이고 그 안에서 주관하는 것은 혼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혼이란 사람을 주관하는 기능이다. 물론 사람의 영과 혼은 불멸하지만 그 영과 혼이 사람의 육신을 영생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영은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다. 영은 혼을 살게 하고 육신을 살게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영은 그 피조물의 생명이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을 예표한다. 그렇다고 그 영이 하나님의 영은 아니다. 또 혼 단독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에는 어떤 기능들이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은 기름이 들어오지 않으면 죽은 거와 같다. 기름은 영과 같고 그 자동차의 생명의 근원이다. 만물이 다 이런 식으로 작동된다. 어떤 기능이 있는데 생명의 공급없이 혼자 움직이는 것은 없다. 또 사람만이 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은 다 혼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간의 호흡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
혼은 살아 있는 피조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관하는 기능이다. 그래서 자아라고 하는데 사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동물들도 어느 정도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만의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말씀이 육신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데 있다.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드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들의 언어는 창조 안에서 정해져 있다. 같은 동물들은 지구상에서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도 언어가 소통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고 그 말씀을 받아드리는 대로 말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의 말을 받아 드리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혼이란 흙과 같고 여자와 같은 빈 그릇이라는 것이다. 위치적으로는 혼은 영과 육신 사이에 있다. 그래서 육신은 단지 혼을 감싸고 있는 옷과 같고, 장막과 같고 집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오니(고후 5:2)
성경에서 ‘살아 있는(living)’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21, 24, 창2:19 창9:10, 12, 15절 등에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every living creature)’할 때 ‘살아 있는(liv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이 있는데 이는 단지 무생물과 생물, 또는 육신적 죽음과 생존을 대별해서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살아 있는(living)’라는 단어가 피조물에 적용한다고 해서 영생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이 영생이 있다는 논리가 생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혼’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살아 있는 혼’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흙으로 혼적 기능이 있는 인간을 만드시고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니까 그 혼의 기능이 작동되었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만들고 기름을 넣어 작동시키는 거와 똑 같다. 혼이 단독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에게는 외부적인 위치적인 면과 내부적인 기능적인 면이 있다. 위치는 변화될 수 있지만 기능은 변화되지 않는다. 자동차의 예를 들어보자, 주인이 바뀌는 것은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기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바뀌었다고 해서 기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혼은 우리의 내부적인 기능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영생은 아니다.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이자 하나님 자신이다. 살아 있는 혼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은 없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사도 죽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만은 거듭남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천사는 왜 거듭남이 없고 1차적 창조로 완성이 되는가? 그것은 천사는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끝난다. 또 천사는 씨로 창조되었기에 한번 타락하면 그것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씨는 잘 못되면 버려야지 다시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흙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부시고 그 재료를 가지고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죽을 운명으로 창조하셨다면 무덤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고전 15:55~57)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5~57)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구별하지 못한 오해이다. 인생은 흙- 육체이기 때문에 죄가 없더라도 원래부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번 죽도록 창조되었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가면 하나님의 아들로 사탄의 씨가 들어가면 사탄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어떤 씨도 흙에 들어가면 열매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의 열매가 되는 과정은 철저히 유기적인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어떤 법리적 요소도 들어 있지 않다. 씨와 흙이 만나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하는 유기적인 생명의 길을 철저히 걸으셨다. 이 길을 통해 부활의 열매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이 정해 놓은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두는 유기적 생명의 길을 걸으셨지만 우리 인생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우리에게는 법리적 대속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 흘릴 수도 없고 피 흘려 죽어보았자 대속물이 안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15장장 55~57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승리란 사탄이 뿌린 가라지 밭에서 하나님의 알곡이 가라지들을 이기고 첫 열매를 맺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가라지-사망을 이기고 알곡-생명이 나온 것이다. 예수님은 사망의 노선을 가고 있던 인류에게 생명의 노선을 제시하시고 첫 열매-선두 주자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생명의 과정을 통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죽음없이 어떻게 부활의 열매가 될 수 있는가? 부활이란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에서 사망이나 무덤은 같은 의미로 사탄으로 인해 들어온 사망노선을 말하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자기 씨를 뿌려 자신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해도 하나님의 씨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씨가 사탄의 씨를 이기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15:55) 에서 사망과 무덤은 의인화되어 있다. 사탄이 주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 말씀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탄(사망)아 네가 뿌린 씨가 어디 있느냐? 오 사탄(무덤)아 너의 열매(승리)가 어디 있느냐? 너는 결코 생명-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 비록 사탄(사망)아 네가 아담에게 씨를 뿌려 네 자식을 만들었고 또 율법을 통해 죄인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의 권능을 가진 자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셨다. 그래서 나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라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은혜라는 생명의 성령의 법안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위한 필 수 과정이다. 그러므로 위 질문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죽을 운명으로 창조하셨다고 해서 무덤이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에 대한 오해에서 불거진 주장이다.
법리적 차원에서만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낮은 수준이다. 죽음과 생명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통해 태어난다. 씨를 땅에 심으면 씨가 죽어야하고 땅도 죽어야 한다. 상호 죽음을 통해 생명이 발아된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 하필 사람의 죄를 죽음을 통해서만 사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저 단순하게 죄가 없어야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니다. 무죄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다.
아담의 육신이 만들어진 재료는 영-씨가 아니고 흙이다. 흙은 생명이 없고 씨와 연합하여 열매를 산출해야 할 운명이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거듭나야 했다.(창2:21~23) 아담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거듭나야 했다는 것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창세기 2장 21절의 거듭남의 예표는 사람의 육체는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육신은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과 피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 받지 못하는 것은 죄로 인한 타락으로도 상속받을 수 없지만 죄가 없더라도 원래부터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다.(고전15:50) 육신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어차피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영의 세계, 곧 영원한 왕국이다. 우리 몸이 영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이 한 번 죽는 것은 생명의 길 안에서나 사망이 길 안에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두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육체를 떠난 한 혼은 천국으로 한 혼은 지옥으로 가기 때문이다. 생명의 길 안에서 우리 육신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야 되어야 했다. 즉 우리 육신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안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영원한 생명이신 영-하나님께 연합됨으로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처음에는 흙으로 창조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를 살아 있는 돌(벧전2:5)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완성인 새예루살렘에 가면 변화된 성도들의 모습을 보석으로 표현하고 있다.(계21:18~20)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길 안에서 사람의 변화과정은 흙-돌-보석이다. 그래서 처음 창조된 사람은 흙으로서 부서지기 쉽고 연약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나면 돌이 되서 사탄이 훼방할 수 없다.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불-성령의 작용으로 2차적으로 영적인 돌이 된다. 그렇다고 흙이라는 성분이 돌이 되었다고 흙이라는 본질이 바뀐 것이 아니다. 돌도 본질은 흙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보석은 어떤 물리적,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도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돌이 보석이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강한 불을 통해 전혀 다른 새로운 성분인 보석으로 거듭나야 한다. 보석이란 외부의 영향에도 성분이 변화되지 않는 물질로서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성도를 예표한다. 이것이 성경이 계시하는 생명의 길 안에서의 사람의 변화과정이다. 살아 있는 돌인 성도들이 영이신 하나님께 흡수되면 최종적으로 영원한 보석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영-하나님을 불로 비유하고 있다.(출24:17, 대하 7:3, 사4:4))
이때에 주께서 심판하시는 영과 불태우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어 내시며 예루살렘의 한가운데로부터 그것의 피를 깨끗이 씻어 내리라.(사4:4)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 불로 태워졌는데 이 불은 하나님의 불이다. 불은 성경에서 성령의 변화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 이 불에 의해 살아 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우리 육신이 영적인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인 성령-불로 삼켜지는 것이다. 성령-불의 작용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물로서 대속했다. 우리는 희생물이 될 수도 없고 희생물로서 죽을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 희생물이 필요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우리가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하면 우리의 죄는 여전히 해결 안 된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길 안에서도 육신은 죽어 없어져야 한다. 육신은 흙이지 열매가 아니다. 영이 열매다. 사탄도 일종의 영이기 때문에 사망의 길 안에 있는 육신도 사탄의 영 안으로 삼킴을 당해 불의한 자의 부활로 나타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이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승리를 믿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사람으로 만드셨지 씨-신으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람이신 예수님은 신인 사탄에게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심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승리,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아담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사망의 길로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승리하시고 생명의 길을 회복하시자 사망의 권능을 가진 자 사탄을 조롱하면서 생명이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5.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생명이고 따르지 않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생명나무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생명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생명나무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열매로서 죽으심과 부활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음식에 비유하여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다.(요6:48) 사람의 근본은 먹는 것에 있기 때문에 구약에서도 예수님은 생명의 만나, 반석의 물, 헌물 등 음식의 형태로 비유되어 계시되고 있다. 사람의 근본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게 되어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창조가 끝난 다음 맨 처음으로 사람이 먹을 음식으로 씨 맺는 채소와 속에 씨 맺는 나무의 열매를 음식으로 주셨다.(창1:29)
아담이 사망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법리적인 면과 유기적인 면이 있다. 하나님 말씀만을 단순히 어겼다면 이것은 법리적인 것이고 외부적인 것이다. 그러나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데 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유기적인 것이고 내부적인 것이다. 그래서 몸에 죄가 들어와서 유기적인 죄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롬7:16) 단순히 아담의 몸에 죄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면 된다. 문제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몸이 죄의 몸, 곧 사탄의 자식이 되었다는데 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사건을 보면 단순히 법리적인 외부적인 면과 유기적인 내부적인 면을 분리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어느 곳에 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면 이것은 단순히 외부적이고 법리적인 문제만 발생한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먹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리적인 동시에 유기적인 문제가 동시에 발생한다.
사람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또 먹는 데로 그 몸이 형성된다. 술을 먹으면 술과 한 몸이 되고, 사탄의 말을 먹으면 사탄과 한 몸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과 한 몸이 된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 믿으라는 말은 거의 없고 전부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다’. ‘먹는다’, ‘믿는다’는 말은 사실 다 한 개념으로 연합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 믿는다는 의미는 구약적 표현으로 한다면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다(believe)할 때 예수님을 목적격으로 사용하지 않고 항상 believe in Jesus, 또는 believe on Jesus로 표현하고 있다. 신약의 사복음서에 와서 ‘믿으라’는 말씀이 주를 이루다가 복음서의 결론인 요한복음에 와서 예수님을 ‘먹으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요6:54)
성경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구약에서 음식의 형태로 표현된 예수님이 신약에 와서는 실재로 오셨는데 처음부터 예수님을 먹으라하면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믿으라-영접하라-먹으라,’ 라고 하나님의 계시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어떤 대상을 종교적으로 믿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민족도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고 집안에서 그 날 밤에 어린양을 급하게 먹었다.(출12:10~11) 우리는 통상 어린양의 피를 통한 구속만을 강조하고 그 뒤에 어린양을 먹었다는 진리를 잘 말하지 않는다. 구약의 제사예법도 보면 헌물을 드리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먹었다. 이 헌물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이 제사 예법을 우리 입장에서 굳이 법리적인 면과 유기적인 면을 구별한다면 피 흘림을 통한 대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해주신 것임으로 법리적인 것이고 먹는 것은 유기적인 면으로 생명의 연합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생명이고 따르지 않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 라는 주장은 완전한 주장이 아니다. 사람의 근본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의 여러 행적이 있지만 그분의 인격의 최종열매인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다른 외부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겨도 용서 받을 수 있고 회생의 기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이라는 그분의 인격의 최종열매를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창세기 3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하셨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영생한다고 분명하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또 계시록 2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 그 당시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더라도 아담의 육신이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은 죽어야 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아담은 이게 싫어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육신이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6.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의 말씀과 같이 아담이 타락으로 인해 육체적 사망이 왔다.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창세기 3장 19절의 후반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말씀의 의미는 사람은 원래 영생하도록 지어졌는데 아담이 범죄한 결과에 대한 저주이며 이것으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해석한다.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나 이것은 문맥 전체와 아담의 타락 원인에 대한 오해에서 불거진 일이다.
창세기 3장 17절부터 19절까지를 살펴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 또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네가 들의 채소를 먹으며 땅으로 돌아가기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이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여기서 문맥을 잘 보면 창세기 3장 17절과 19절 전반부까지 아담에 대한 저주와 형벌을 말하고 있다. 19절 전반부를 살펴보면 ‘땅으로 돌아가기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창3:19a) 여기서는 사람이 죄를 지어져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보다 사람은 원래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하나님이 정해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하였기 때문에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산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핵심은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했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기 까지’ 땀을 흘려야 먹고 산다는 것이다. 아담이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담은 사람-흙임에 불구하고 죽지 않는 신-영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담아 너는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지만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사람(흙)은 결국 사람(흙)이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없다. 너는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했기 때문에 이마에 땀을 흘려야하고 결국 원래대로 너는 흙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에서 생명노선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사망노선 안에 있는 육체적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육체가 죽는다는 것에서는 표면적으로 동일하다. 성경은 생명노선 안에 있는 육체적 죽음은 ‘잔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사망노선 안에 있는 육체적 죽음과 구별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어떤 노선 안에 있든지 육체는 한 번은 죽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있다고 하자. 그 자동차가 가야할 전용도로가 있다면 그 자동차는 평탄한 길을 갈 것이고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동차가 전용도로가 아닌 다른 도로로 간다면 그 자동차는 많은 시련을 격어야 하고 원하는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동차의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이치다. 사람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타락했다고 해서 흙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7.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도록 만드셨다면 사망은 원수가 될 수 없다.(고전15:26)
멸망을 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이것도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인 동시에 단지 사망을 육체적 죽음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또 씨-하나님께서 흙-사람에게 정해주신 위치 대한 오해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승리(이기는 자)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다른 노선에 있는 유사한 과정을 표면적인 것만 보고 동일하게 판단한 결과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사망’이라고 하지 않고 ‘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창2:21)
그들에게 이르시되, 물러가라.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분을 비웃더라. (마9:24)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마27:52)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 (막5 :39)
모든 사람이 슬피 울며 소녀로 인하여 가슴 아파하였으나 그분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 (눅8:52)
이것들을 말씀하시고 그 뒤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자는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하시니 (요11:11)
이는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세대를 섬기다가 잠들고 묻혀서 자기 조상들에게 이르러 썩음을 보았으나(행13:36)
이런 까닭에 너희 가운데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많도다. (고전11 :30)
그 뒤에 그분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한 번에 보이셨는데 그중의 대다수는 지금 이때까지 남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잠들었느니라. (고전15:6)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고전15:18)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0)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곧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결코 잠자는 자들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살전4:13~15)
고린전서 15장 26절에서 ‘멸망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 라는 의미도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인해 들어온 사망의 길 안에서의 사망을 말하는 것이다. 사망의 길 안에서는 어느 과정에 있건 그것은 사망이다. 첫 번째 사망도 사망이고 불의한 자의 부활도 사망이고 둘째 사망도 사망이다. 어차피 사망열차를 타고 둘째 사망의 종착역인 불호수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생명의 길 안에서 첫 번째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첫 번째 사망을 ‘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 안에 있으면 어느 과정에 있건 사망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느 과정에 있건 생명이다.
왜 성경의 결론인 계시록에서 사망을 둘째사망이라고 정의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사람에게 있어 첫째 사망은 창조 안에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둘째 사망이라고 성경의 결론인 계시록에서 정의해 주고 있는 것이다.
8.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 날에(in the day)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의 the day의 용법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그 날에는(the day)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왕상2:37)의 the day의 용법이 같다.
반대론자들은 왕상 2장 37절에서 다윗 왕이 반역하는 시므이에게 그 날에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시므이는 그날에 죽지 않고 후일 죽었다고 하면서 창세기 2장 17절의 the day의 말씀은 바로 그 날이 아니라 미래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작위적 해석이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고 왕상 2장 27절은 다윗이 한 말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다윗의 말의 무게 같을 수 있는가?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모든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사탄이 한 말도 있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내 뱉은 말이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는 사탄이 아담을 유혹할 때 말한 거짓말도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3장 5절에 보면 사탄이 아담을 유혹할 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in the day)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했다. 그렇다고 그 날에 아담이 신이 되었는가? 아담은 신이 되지 않았다. 속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한 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 말의 무게는 다르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다.
‘...참으로 하나님은 신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롬3:4a)
그러므로 창세기 2장 17절의 ‘the day’와 왕상 2장 37절의 ‘the day’를 비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또 최대한 양보해서 왕상 2장 37절에 있는 the day가 미래를 표현한다고 해도 창세기 2장 17절의 ‘the day’와 ‘in the day’는 분명히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논란을 없애기 위해 확실히 ‘the day’라고 하지 않고 ‘in the day(그날 안에)’라고 말씀하셨다. 먹는 그날 안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받아드리면 된다. 그날 안으로(in the day) 죽을 것이다 했는데 그날에 아담의 육체는 죽지 않고 930살까지 살다 죽었다. 그러니까 이 사망은 육신에 대한 것이 아니고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사망이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영-씨고 사탄도 영-씨다. 씨는 흙에 씨를 뿌려 열매를 맺는 것이 최대 소망이고 어떤 씨도 흙에 뿌려져 열매를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다. 외부의 공급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다. 사람은 두 가지 생명을 위한 생명양식이 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29절에서는 ‘씨 맺는 채소와 속에 씨 맺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하셨고 창세기 2장에서는 영의 양식을 위해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로 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하신 것이다. 예수님도 분명히 사람은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고 육적이든 영적이든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사람에게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먹어야 사는 존재가 아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람에게 양식을 주셨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독존하는 존재라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에게 양식을 주실 이유가 없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과와 생명과가 육신의 생존을 위해 관계된 양식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굳이 창세기 1장에서 육신을 위한 양식으로 열매를 먹으라고 하셨겠는가?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열매는 육신의 생존을 위한 양식이고 창세기 2장의 생명나무의 열매는 영적 생존을 위한 양식이다. 사람은 스스로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먹어야 사는 존재다.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사람은 천사처럼 영으로 지음받지 않았고 흙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육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육신의 양식을 먹어야 사는 존재고, 영생을 위해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는 존재다. 사람이 천사처럼 처음부터 죽지 않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면 육신의 생존을 위해 양식도 필요 없는 것이다.
9.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을 수 없는 분이시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죄가 되게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반대론자들의 일반적 주장은 사람의 육신이 영원히 살게 되어 있는데 선악과를 먹어 죄가 들어와 육신에 죽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반대론자의 논리라면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죄가 되게 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는 것이다.(고후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함이라.’(고후 5:21)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의 모습, 곧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지 본질은 죄인은 아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4:15)
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죄인은 아니지만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면 이것은 큰 모순이다. 예를 들어 그런 논리라면 예수님의 신분이 왕자인데 거지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논리다. 본질이 죽을 수 없으면 죽지 말아야지 본질과 관계없는 옷을 갈아입었다고 어떻게 본질이 바뀌어 죽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또 반대론자 들은 말이 막히면 무조건 하나님의 전능성을 들고 나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대단히 큰 믿음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마22:29) 분명히 예수님도 사람은 부활을 통해 천사와 같은 영적인 몸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다고 하셨다.(눅20:36) 사람은 흙-육신으로 지음 받았지 씨-영으로 지음받지 않았다. 이 말씀은 육신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의 육신이 아니고 부활한 영적인 몸이다. 부활한 영적인 몸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단순히 우리의 죄만을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육신에서 영화로운 몸을 얻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서도 죽으신 것이다.(요 10:17)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요10:17)
반대론자들의 논리라면 예수님이 무엇하러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셨겠는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달성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앞서도 밝혔듯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고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만 이식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 기록된 특별계시인 성경말씀만이 성경이 아니고 자연계시도 성경이다. 만물은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우리가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첫 번째로 그분이 하신 일을 아는 것이고 두 번째로 그분이 하시는 일의 원리를 아는 것이다. 즉 창조된 만물을 통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고 또 만물의 생명의 원리를 통해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원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롬1:20) 그럼에도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기록도 알지 못하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기 전까지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해도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라면 예수님은 피곤하지도 않아야하고 늙지도 않아야 하고 먹지도 않아도 죽지 않기 때문에 시장하지도 않아야 한다. 또 십자가로 가기 전까지 유대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에도 피하실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사시는 동안 우리와 동일하게 피곤하셔서 주무셨고, 목마르셨고, 시장해 하셨고, 다른 사람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셨다.(요8:57)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해하려고 하자 그 자리를 피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진노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그분을 도시 밖으로 밀어내어 자기들의 도시가 세워진 산의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거꾸로 떨어뜨리려 하되 그분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 길로 가시니라.(눅4:28-30)
그때에 그들이 돌을 들어 그분을 치려 하거늘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고 성전에서 나가시되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렇게 나가시니라.(요8:59)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그분을 해하려고 하니까 육체적 생명인 몸을 보호하기기 위해 자리를 피하신 것이다. 죄 없으신 그분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돌로 치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그 순간에만 예수님에게 죽음을 허락하셨고 그 이전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분은 죄 없으신 몸이었기에 죽으실 수 없었다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장하지도 피곤하지도 늙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고 유대인들의 생명의 위협에 자리를 피할 필요도 없다. 우리 육신은 원래 한번은 죽고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흙-육신은 씨-생명이 아니다. 흙-육신이 씨-생명과 연합하여 열매를 산출하려면 한번은 죽도록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정해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다고 하니까 육체적 죽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죽지 않고 잔다’ 라고 표현하셨다.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만일 예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인데 예외적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허락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면 우리 인생들은 절망이다. 그것은 어느 특별한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고 보편적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전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그분이 육신이 한 번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똑 같은 운명 안에서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했기 때문에 그분에게 적용되었던 부활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이 다르다면 우리는 절망이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십자가에 달린 이 사람을 보라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누구든지 십자가에 매달면 죽는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인생은 흙이지 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쉬운 진리를 사람들은 외면하고 어려운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타락한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지식을 통해 쉬운 것보다는 어려운 길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은혜를 통해 얻는 구원보다는 행위를 통한 종교를, 창조론보다는 진화론을 택하고,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지식을 통해 생명을 만들려 하고 있다.
10.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영생하더라도 지구상의 인구조절은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신이 되지 말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즉 상식이 통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고력을 주었다. 또 하나님은 만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를 계시하신다. 자연법칙도 하나의 진리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해서 자연법칙을 무시하시고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다. 자연법칙도 하나님의 행정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정을 무시하시고 아무렇게나 일을 하시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공장에서 기계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기계는 처음 만든 원리에 의해 그대로 작동되는 것이다.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되려면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 만물도 똑 같다. 우주는 사계절이 있고, 낮과 밤이 있도록 창조하셨고 번식하는 생물들은 죽도록 만드셨다. 이것은 진리다. 만일 번식하는 생물들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는 생물들로 넘쳐서 발 디딜 틈도 없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여호수아서 나오는 것처럼 일시적으로 해를 멈추게 하는 기적적인 일을 행하실 수 있다.(수10:13) 그러나 그러한 일은 하나님 말씀을 확증하거나 하나님의 경륜이 전환되는 시기에만 일시적으로 기적을 행하셨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난 기간은 성경 전체 역사에 걸쳐서 5%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법칙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진리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아울러 인생의 존재적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셨다.
마태복음 4장에서도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천사들에게 너의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6)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셨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사람은 상식적으로 성전 꼭대기에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이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식하는 생물들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이러한 생물들로 넘쳐 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고 자연법칙으로서 진리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합당한 논리가 아니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만일 현재의 자연법칙을 어기려면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사65:17) 그러한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영원한 세계다.(계21, 22장)
우리는 만유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또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롬1:20)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리면 죽도록 만들어졌고, 번식하는 생물들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는 생물들로 넘쳐서 발 디딜 곳이 없을 것이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는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육신의 제한을 뛰어넘는 신들의 세계가 아니라 육신의 제한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를 목표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예수님도 육신의 제한을 가진 분으로 오신 것이다. 사람은 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존재로서 땅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살도록 창조된 것이다.
만일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성’의 논리라면 믿지 않는 자들의 비아냥거림처럼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 사람을 죄인되게 했느냐?’는 물음과도 같은 것이다. 또 누차 말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방법으로 하늘에서 직접 죄를 사해주시면 되는 것이다.
남편 사별 후 일곱 번 결혼한 어떤 여인이 부활 후 하나님의 왕국에서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에 대한 논리로 예수님을 시험하던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을 얻기에 합당한 것으로 여겨질 자들은 장가도 가지 아니하고 시집도 가지 아니하고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부활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눅20:24~36)
위 말씀을 보면 분명히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을 간다. 즉 결혼을 통해 번식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활 후에는 천사들과 동등하며 더 이상 죽을 수도 없고 번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번식하는 육신은 죽을 수 밖에 없고 천사와 같은 몸이 되어야 더 이상 죽을 수도 없고 번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과 영적인 몸을 가진 사람의 차이를 명확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번식해야 했고 육신을 가진 제한이 있는 존재다.(창1:28) 지구상에 모든 육신을 가진 생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모두 연합을 통해 자신의 육신의 생명을 이어간다. 홀로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만들어질 때 홀로 영생하는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 즉 결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은 육이 영에 연합되는 것이다. 육이 영 안으로 삼켜져 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영적인 몸이 되어야 영생하는 것이지 육은 생명이 아니다. 흙-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생명이 아니다. 흙-육신은 씨와 연합하여 어차피 한 번은 바뀌어져할 대상이지 홀로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영생하는 존재라면 하나님이 내게 필요하지 않다. 나 홀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육이 영으로 전환됨으로서 영생을 얻도록 운명 지어졌다.
지구상에 번식하는 생물들이 죽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생긴다. 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온 세상을 덮을 것이다. 사람은 살아야 할 땅이 필요하고 먹어야 할 양식이 필요한 제한을 가진 존재다. 우리가 영으로 지음 받았다면 우리는 제한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흙-육신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고 연합을 통해 생명을 이어가고 거주할 공간이 필요하고 먹어야 사는 존재다.(창1:29) 육에서 난 것은 어차피 육이고 성령에게서 난 것이 영-생명이다.(요3:6)
11. 죄와 상관없이 육체가 죽을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의미없게 된다. 만약에 아담이 죽도록 창조되었다면 그가 죄를 지었을 때 육체는 아무 영향이 없었고 다만 영혼만 죽은 것이라면 왜 예수님의 성육신이 필요한가?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생명의 길이든 사망의 길이든 씨는 흙에 뿌려져 열매를 맺으려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한다. 죽음은 생명을 연결하는 접촉점이다. 또 성경이 말하는 죄란 각각의 피조물이 창조목적에 이탈한 것을 말한다. 모든 피조물의 죄는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것을 말한다. 아담의 죄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人格) 이탈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타락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는 흙-육신으로 생명이 없다. 만일 사람이 영생이 있었다고 하면 이것은 큰 오류이다. 하나님이 씨인데 사람도 씨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육체는 아무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흙-사람에게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 하는데 사탄의 씨가 들어와 사탄의 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밭은 갈아엎어져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밭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구속이다. 육체가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하는데 사탄의 씨가 들어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고 사탄의 씨가 들어오면 사탄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요일3:10) 이것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어 위치가 바뀌었다고 해서 흙-사람의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흙이기 때문에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흙-밭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비록 어제는 사탄이 그 밭의 주인이더라도 오늘 하나님께서 그 밭의 주인이 되시면 그 밭의 운명은 바뀌는 것이다. 밭에는 어떤 씨가 뿌려졌더라도 열매를 맺기 전에 갈아엎고 다른 씨를 뿌리면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타락한 사람의 상황이 이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씨로 지음 받았다면 희망이 없다. 씨는 고장나면 버려야 되는 것이지 다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문에서와 같이 영혼이 죽는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인 죽음도 없다. 아담이 생명의 길로 가야하는데 사망의 길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법리적인 수준에서 단순히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혜택 정도로 생각한다. 물론 혜택도 있지만 새로운 생명의 전환을 위해 필수 과정이라는 것은 잘 모른다. 구속의 위치, 곧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다. 무죄했던 아담은 흙으로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지 거기서 그냥 끝나는 자리가 아니다. 어차피 아담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되는 운명이었다.(창2:21~23)
십자가는 분명히 고통의 자리고 부정적인 자리다. 그런데 거기에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사탄에 대한 승리와 생명의 접촉점이라는 것이다. 옛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다.(고후5:17) 그래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고전 1:24) 하나님께서 최악의 부정적인 상황을 최상의 긍정적인 상황으로 바꾼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란 말이 나온다.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고 헌물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것이다. 만약 사람이 죄가 없었다면 헌물만 드렸다는 것이다. 성경은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인 것이다. 희생물은 불에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었다. 헌물도 죽음으로서 드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불은 하나님의 불을 의미하고 동시에 생명의 연합을 예표한다.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이해하면 낮은 수준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도 불살라졌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부정적인과 것과 긍정적인 모든 것이 들어있는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서의 의미와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로서의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히10:5)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성육신 필요한가?
첫 번째,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람이 이 죄를 갚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피조물은 죄를 대신 갚을 수가 엎다. 자기가 지은 죄는 자신이 갚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창조했지 두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다. 모든 물고기가 물고기이듯이 모든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신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아담이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
두 번째,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서 하나님이 쓰셔야 할 흙-사람의 위치(人格)를 사탄에게 빼앗겼다. 그래서 누군가 와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인격을 되찾아 와야 한다. 이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사도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도 직접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승리자 자신이 씨-하나님의 밭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씨-하나님은 자신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절대적으로 흙-사람이 필요다. 아담은 흙-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므로 누군가 와서 흙-사람의 위치를 되찾아 와야 한다. 그래야만 씨-하나님께서 그에게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과의 전쟁은 바로 인생의 위치를 놓고 벌이는 전쟁이다. 씨-하나님의 밭이 될 것인가? 아니면 씨-사탄의 밭이 될 것인가? 하는 전쟁이다. 아담은 속아서 사탄의 밭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흙-육신으로 오셔서 이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밭이 되셨고 하나님의 씨-생명을 받아 죽은 자들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열매-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세 번째, 새인류의 조상이 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의 구성원은 영이 아니고 육신을 가신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사람으로 와서 하나님의 왕국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아담은 실패했나? 씨가 잘 못됐기 때문이다. 아담이라는 밭에 사탄의 씨가 뿌려졌기 때문이다. 흙-아담은 사탄의 씨와 연합되어 마귀의 자식이 되어 사탄의 왕국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이 땅에 와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인류-하나님의 왕국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왕국의 씨-조상으로서 오신 것이다. 아담이 실패한 옛인류의 조상이라면 새인류의 조상은 사람이신 예수님이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대속물로서만 오신 것이 아니고 새인류의 조상으로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을 되찾아 왔고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심으로 새인류의 조상-씨가 되신 것이다.(고전15:45)
12. 또 몸의 죽음은 인간의 죄와 상관없고 창조의 산물이라면 왜 죄인들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씻겨져야 할까?(히10:19, 22)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인들의 악한 마음에도 뿌려졌고 죄로 더러워진 몸에도 뿌려진 것이다.(히10: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으로 얻었나니(히10:19)
우리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모든 것이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의 죽음이 우리의 죄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한 죽음은 우리의 죄에 대한 법리적 대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죄 용서가 아니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죄 이전에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고 어떤 헌물도 산채로 드려지는 것은 없다.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야 했다.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는 것이다. 죄로 인해 수학적으로 희생물로서 한 번, 헌물로서 한번 두 번 죽어야 했다. 그러나 희생물과 헌물이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피 흘림을 통한 희생물이 법리적이고 외부적인 것이라면 헌물로 인한 생명의 연합은 유기적인 것이다. 유기적으로 생명의 연합을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법리적인 희생물에만 국한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위 질문처럼 죄인들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진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 없다. 죄인의 몸은 죽어야 하는 것이지 씻겨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들의 용서, 즉 구속이 중심적 요소다.(골1:14) 히브리서 10장 19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신자의 몸을 씻는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죽음을 통해 거듭나서 새롭고도 산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2절에서도 몸에 피를 뿌린다는 말은 없다. 히브리서 10장 22절의 ‘마음에 뿌림을 받아’에서 마음은 영적인 것이지 육신이 아니다. 또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생명의 연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할 때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구원은 받은 신자가 말씀을 통해 성화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신자들이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인정함으로서 점점 더 성화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 된 육신의 몸을 씻는다면 이것은 큰 오류다. 왜냐하면 돌은 아무리 씻어도 돌인 것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란 본질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씻어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들(sins)은 내 몸을 떠나 외부적으로 이미 행하여 진 것이므로 씻는 것이 아니고 피 값으로 용서받아야 하고 죄(sin)된 육신은 본질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씻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죽음을 통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몸은 무죄한 몸이 있고 죄 된 몸이 있다. 처음 아담은 무죄한 육체였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무죄한 육체는 영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위치다. 즉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밭이어야만 씨-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죄 된 육체란 무엇인가? 밭인 사람에게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잡초가 무성한 밭에 씨를 뿌리려면 갈아엎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고 구속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공로다. 나는 사탄의 밭이 된 자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갈아엎어져야 할 밭이라고 인정하면 전적으로 나는 구속받은 것이다.(골1:14) 구속이란 씨-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지 구원이 아니다. 구속받아 죄가 없더라도 씨와 흙이 연합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한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다. 구속받은 위치는 창세기 2장 7절의 아담의 위치다. 그 당시 아담은 죄가 없었다. 그러나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죽고 다시 태어나야 했다.(창2:21~23) 아담은 완성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영생이 있었다고 하면 그는 완성품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진 재료는 흙으로서 생명이 아니다. 죄가 있으나 없으나 본질은 흙으로서 똑 같다. 살과 피는 영적인 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자들이나 사탄의 씨가 들어와 사탄의 자식이 된 자들이나 모두 육신은 죽어야 한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 온자는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가 들어온 자는 불의한 자의 부활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생명의 길, 사망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를 보면 흙에 씨가 뿌려지면 흙은 씨와 한 몸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흙은 자체로 생명이 없고 씨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됨으로서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 흙에 씨를 뿌린 농부는 무엇을 거두는가? 열매를 거두지 흙을 거두지 않는다. 그래서 부활한 영적인 몸을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고전15:20)육신은 씨가 아니고 흙임으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창3:19) 흙-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고전15:50) 이것이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만유를 통해 계시하는 우주적 진리다.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진리를 거부하면 성경의 계시는 영원히 닫혀 있는 것이다.
씨-하나님께서 흙-사람에게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는 바뀌지 않았다. 비록 사탄이 들어와 흙-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자신의 열매를 거두려 하였지만 어찌 감히 한 낱 피조물인 사탄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당할 수 있겠는가?(고전1:24) 사람이 만들어진 재료는 흙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시고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천사처럼 씨로 창조되었다면 거듭남이 없다. 그러나 흙으로 창조되었기에 잘못되었더라도 다시 재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로 사람을 재창조하신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재창조되어 내 안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거듭났다 하더라도 육은 죄가 있건 없건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육은 땅에 속한 몸이지 하늘에 속한 몸이 아니다. 각각의 세계에 맞는 몸을 입어야 그 세계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땅에 속한 자들은 또한 땅에 속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과 같으니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니라.’(고전15:48~49)
우리가 땅에 속한 몸을 지닌 것은 죄 때문에 땅에 속한 몸을 가진 것이 아니다. 죄 이전에 땅에 속한 몸을 가졌다. 땅에 속한 몸으로는 죄가 있건 없건 하늘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영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까지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하늘에 속한 영적인 몸으로 거듭나려면 우리의 육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은 씨-하나님을 예표하고 땅은 사람을 예표한다. 하늘은 공기와 같고 무한하다. 그래서 하늘은 하늘들로 복수이고 땅은 단수이다. 이 의미는 하늘 안에 땅이 삼켜져 있다는 것이다. 현재 땅은 공기와 같은 영안에 삼켜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 곧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땅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제한이 있다. 그러면 제한을 가진 땅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영원한 영의 세계 안으로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삼켜진다는 것은 삼킴을 당한 대상이 없어지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이다. 육의 세계가 영의 세계 안으로 흡수통일 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의식에서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 있다. 희생물은 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고 헌물은 하나님과 교통을 의미한다. 사람이 죄가 없을 때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헌물만 드리면 된다. 그러나 죄로 인해 희생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들어온 이후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희생물과 헌물이 동시에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레위기를 보면 번제헌물, 음식헌물, 화평헌물, 죄헌물, 범법헌물 이 다섯 가지 헌물의 명칭이 모두 헌물로 끝나지만 그 안의 내용을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용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은 하나라는 것이다. 또 이 희생물과 헌물은 결국 그리스도의 한 인격을 예표한다. 다섯 가지 헌물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여러 방향에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 오면 이 희생물과 헌물은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으로 통일되었다. 구약에서 모형으로 나타난 것이 신약에 와서 실재로 나타난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10:5)
이 말은 희생물과 헌물은 실재가 아니고 모형이기 때문에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로 예표되었던 희생물과 헌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희생물과 헌물은 모두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졌다. 이것은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번제헌물만이 태워진 것이 아니라 모든 헌물은 번제단에 향기로운 헌물이 되기 위해 불에 의해 재로 태워졌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제사의식에서 제물은 나 자신을 의미하고 불은 하나님을 예표한다.
이제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왕상 18:38~39)
이제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희생물들을 태워버렸고 주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였더라.(대하 7:1)
이 불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불이다. 그리고 이 불로 제물을 핥아간다고 하였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려면 하나님께로 삼켜져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죄 있는 희생물만 태워진 것이 아니라 죄없는 헌물도 태워졌다. 모두 하나님의 불에 삼켜져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어떻게 하면 하늘에 올라가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혼자 제자리에서 뛰어봤자 몇 미터 못 올라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불로 태워져 재가 되고 연기가 되서 향기로운 냄새가 될 때 하나님께서 흠향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불로 태워진 헌물을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짐승을 태운 냄새가 뭐가 그리 향기롭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불로 태운 짐승이 재가 돼서 연기되어 올라가는 것을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은 흙이고 피조물이라는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위치에 있을 때만 하나님과의 생명이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명확한 그림이다. 흙-사람은 하나님께 죽음으로 삼켜져야 내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삼켜져서 높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육신은 죄가 있건 없건 태워져서 재가 되고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3.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요구하신 것은 육체의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처음부터 죽을 운명으로 창조하셨다면 예수님께서 몸을 내어 놓으신 육체의 죽음은 아무 의미없는 일일 될 것이다.
이것도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같은 것으로 보는 오해에서 불거진 일이다. 죄가 없더라도 인생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동참하려면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과 같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가 그 사람에게 삼켜져야 한다. 같은 이치다.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왜 침례를 받았는가?(마3:16) 인생은 죄가 없더라도 헌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고 죄가 없더라도 죽음 발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씨가 아니라 흙이고 인생은 하나님 앞에 피조물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이러한 인생의 위치를 이탈했다. 아담 이래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 고귀한 인생의 위치를 지킨 자가 없었다. 인생은 흙임에 불구하고 씨처럼 살았다. 그러므로 씨-하나님은 씨를 뿌릴 밭이 없었으니 얼마나 곤고 하셨겠는가? 하나님은 인생을 창조하신 이래 수천 년 동안 자신의 복을 주시기 위한 참 인생을 기다려왔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죽음을 선포하셨다. 이것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사람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시겠는가?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들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마3:17)
하나님은 예수님께 왜 육체의 죽음을 요구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길을 피해갔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도 죽었지만 그 사람들의 죽음은 생명의 길 안에서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는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모두 죽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인생의 운명을 원망하며 죽었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피조물이 창조자를 원망한다는 의미다. ‘왜 나를 천사처럼 죽지 않게 만들지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큰 뜻이 있어서 이렇게 만들었는데 피조물이 이 뜻을 모르고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끝마친 후 안식하시고 기뻐하셨다. 그런데 피조물이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는 것은 창조자의 창조사역을 원망하는 것이고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죽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피조물이란 자신의 목적이 없고 창조자의 목적만 있다는 의미다. 창조자가 만들어 준 운명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주어진 위치를 이탈했다. 아담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이탈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고 안식일을 어긴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의 길로 간 것이다.
십자가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심판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승리가 있고,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단지 심판만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대표하여 심판받았지만 성경은 또 사탄도 심판받았다고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사탄의 함정에 의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사탄에 대한 심판이고 승리인가? 라는 것이다.
아담은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이 정해 주신 흙-사람의 위치, 곧 생명의 길을 이탈해서 신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는 사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시고 죽으셨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이것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예수님의 승리고 사탄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사탄은 잔머리를 굴려 아담을 유혹했고 아담은 인생의 위치를 이탈함으로 이 전쟁에서 패했다. 그런데 여자의 씨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죽기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빌2:8)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오르신 것이다. 이제 여자의 씨-예수님으로 인해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음에도 신이 될 수 있다고 속인 사탄의 속임수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니 그의 머리가 상하게 된 것이다.(창3:15)
14. 만일 아담의 죄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혼만의 죽음이라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으실 수 없고 또 죽으셔도 안된다.
이것도 기본적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 대한 오해와 죄에 대한 오해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사망의 노선 안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지 단순하게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길이건 사망의 길이건 표면적으로 똑 같은 과정을 겪는다. 어떤 씨든 땅에 뿌려지면 똑 같은 과정을 겪는 것이다.
육체가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이후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만일 죄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오는 것이라면 죄인들은 왜 부활하는가? 죄인들의 몸은 부활하지 않고 불호수로 직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였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라고 하고 있다. 이 말씀대로라면 죄인들의 몸은 부활하지 말고 여전히 땅속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자들은 의로운 자의 부활이건 불의한 자의 부활이건 모두 부활한다고 말한다.(행24:15) 이 말씀의 의미는 생명의 노선 안에 있는 의로운 자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에 있건 사망의 길에 있건 표면적으로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도덕적인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의 위치 이탈,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담은 신이 된다고 하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흙-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사망 노선으로 간 것이고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생명의 노선 안에 계신 것이다. 흙-사람은 생명이 아니다.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죽음을 부정적인 것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의 지식의 부요하심을 우리가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히 대속적 죽음에 그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악의 부정적 상황을 최상의 긍정적 상황으로 바꾸셨다는데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는 표면적으로 심판이라는 부정적인 내용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희생물의 의미도 있지만 헌물의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대속, 곧 죄가 없으면 영생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무죄는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다. 단순히 법리적으로 죄만 사하면 영생이라고 아는 것은 낮은 수준이다. 영생은 법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유기적인 문제다. 하나님은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처음에 흙-육신으로 오셨고 부활을 통해 씨가 되셨다. 하나님의 왕국의 씨-조상이 되셨다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살려주는 영은 씨라는 의미다. 영-씨가 되려면 육신은 죽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해야 한다. 흙-사람으로는 흙-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영-씨가 되어야만 흙-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흙으로 오신 동시에 씨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라면 사탄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는 것을 방해했겠는가?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으로 유도한 후에 갑자기 십자가를 회피하도록 유혹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 하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했다. 물론 예수님도 그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달고 기도하셨지만 끝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셨다. 즉 흙-사람의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만일 거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훨훨 날아 내려오셨다면 그분은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그것은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아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씨-하나님의 창조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씨를 뿌릴 흙-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이전까지 아담 안에서 있던 사람들은 열심히만 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살았다. 마음 깊은 내면에는 늘 죽지 않는 천사를 부러워하면서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다. 아담도 사실 이 열등감 때문에 흙-사람의 위치를 버리고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흙-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면서 만족하시고 안식하셨다. 성경도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낮게 창조되었으나 위치적으로는 천사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다.(히1:14)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도 늘 죽지 않는 천사를 부러워 하면서 한 번 죽는 것이 불완전하고 생각한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창조 목적이 있는 것이고 천사는 천사로서의 창조 목적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늘 천사와 비교한다. 그래서 원래는 죽지 않는 존재인데 죄 때문에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위치를 원망하며 그 위치를 이탈했다. 이것은 피조물이 창조자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고 안식을 방해한 것이다. 이것이 아담에게는 사망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이 버린 인생의 위치를 십자가 앞에서 담담히 받아 드렸다. 거기서 인생의 위치를 원망하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진실을 담담히 받아드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신 것이다.
또 구약의 역사를 보면 의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받지 않는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구원을 받았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용광로에서 구원을 받았다. 구약의 관념으로는 예수님은 최소한 그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게 당연하였다. 제자들도 그런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따라다녔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름없이 죽었다. 그분도 십자가에서는 꼼짝 못하고 죽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매달린 그 사람을 보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인간의 정체성이 폭로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을 보고 인간의 원형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흙이지 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도 허무하게 죽었는데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 하나님 왕좌 오른편에 앉히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과 기대 밖에서 죽었는데 그분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교리적으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살아났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살아났다,’ 이렇게 알면 이것은 나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분과 내가 똑 같은데 그분이 살아나야 나도 살 수 있는 것이지 그분과 내가 다르다면 그분을 경배는 할 수 있지만 그분과 내가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분과 우리가 똑 같은데 그분이 살아나야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 그분만이 특별하다면 그분은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은 흙이지 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기다려왔는데 바로 이 사람을 기다려 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고 이 안에는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의 의미도 있지만 이 죽음 안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거듭나야하는 생명의 연합이라는 긍정적인 부분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표면적으로는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다.(고후5:21) 그러나 이면적으로 그분은 죄인이 아니다.(히4:15)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죽으셨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 위한 과정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하나님의 불을 만나 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은 용광로와 같은 것이다. 그 안에는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용광로 안에는 폐품도 들어가지만 좋은 것도 들어간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용해되는 것은 매 한가지다. 오직 새로운 창조를 위해 불에 의해 녹여지는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은 한 불에 의해 태워져 재가 되고 하나님이 흠향하는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다.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니라.’(레1:17)
흙-사람은 씨-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있는 돌이 되고(벧전2:5)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보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흙이 돌이 되고 돌이 보석이 되는 것이 생명의 연합을 통해 흙-사람이 변화되는 정상적인 생명의 길이다.
15. 사람은 본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수많은 성경 가르침을 훼손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고귀한 교리인 주님의 대속과 속죄의 진리를 파괴한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도 아니하시고 죄와 상관없는 분이다. 다만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이다.(고후5:21) 만약 아담의 죄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인 죽음이라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수도 없고 또 죽으셔도 안된다.
사람이 본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결코 성경의 대속과 속죄의 진리를 파괴하지 않고 더 풍성하게 한다. 이 진리가 가려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을 단순히 법리적인 측면에서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는 유기적인 것이지 법리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죽지 않는 천사에게는 사형선고를 안내린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육체적 죽음을 통해 거듭나야 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다.(창2:21~23) 이것은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필연적 과정이다. 그래서 흙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죄가 없다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서 이에 대한 대가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단순히 영적인 죽음이 들어왔다는 것은 맞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영적인 죽음이라는 말은 없다. 아담으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은 사람은 흙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들여 열매를 맺어야 할 운명인데 사탄의 씨를 받아들여 사탄의 열매를 맺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흙-사람이 사탄의 씨를 받아들여 육체가 죽고 불의한 자의 부활로 나타나고 최종적으로 둘째 사망이라는 불호수로 가게 되어있는데 이 과정 전체를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단지 육체가 죽는 어느 특정 과정만이 사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오해는 여기서 오는 것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사망의 세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흙-사람이 씨-하나님을 만나도 표면적으로 동일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흙은 어떤 씨를 만나도 열매를 맺으려면 동일한 과정을 겪는 거와 마찬가지다.
이미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죄가 없었다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지만 죄로 인해 피 흘림의 육체적 죽음으로 발전한 것이다. 죄가 있던 없건 죽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 안에서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하나님의 불을 만나면 죄가 있건 없건 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예수님도 우리의 대속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다시 취하기 위해 죽으신다고 하셨다.(요 10:17)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요10:17)
그러면 왜 죄로 인해 피 흘림의 육체적 죽음이 필요한가?
사탄과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하여 사망의 길로 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인생의 위치를 끝까지 지킴으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흙-사람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서 씨-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이다. 흙과 씨가 연합되어 하나님이 최종 목적인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것이다.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세상이 말하는 율법적인 죄가 아니다. 여기서 죄란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야할 흙-사람에게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가 다시 뿌려지려면 그 밭은 갈아 엎어져한다. 이게 십자가의 심판이다. 이것은 법리적인 것이다. 단순히 밭이 갈아엎어졌다고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갈아엎어진 밭에 씨가 들어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통해 씨가 발아하는 것이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15:50) 육신은 어차피 한 번 바꿔져야할 대상이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어차피 죽음을 통해 영적인 몸으로 바꿔져야 할 대상이었다.(창2:21~23, 요10:17) 그런데 이 과정이 싫어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나 결국 사탄에게 속아 사탄에게 사람의 인격과 인권을 빼앗기고 사탄의 밭이 돼서 사탄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빼앗긴 인격과 인권을 되찾아오려면 희생이 따른다. 그래서 피 흘림이 있는 것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분이기에 죄와 상관없는 분이다. 이것을 내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사탄과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피 흘림 없이 승리는 없다.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과 인권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통해 되찾아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교리적이고 법리적으로 대속이라고 하는 것이고 우리의 죄가 되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다. 단순히 예수님이 법리적인면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지 교리적이고 법리적인 아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흙-육체로 오셨다. 이 위치를 피 흘려 죽기까지 지키자 씨-하나님께서 씨를 뿌려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구속을 대속, 곧 대신으로 많이 이해한다. 물론 대속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만일 대신이라면 믿지 않는 자들의 죄도 다 용서 받고 인류 전체가 구원받아야한다. 그런데 왜 믿는 자들만 구원받는가? 성경은 ‘대신’이라는 말 대신 ‘함께’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생명은 대신 할 수 없다. 열매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성경의 일관된 진리는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생명의 길’을 보고 그분 안에서 함께 죽은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신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고 예수님은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신과 같은 능력은 모두 사라지고 인생의 존재적 위치만 남았다. 인생은 무교병이고 흙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흙이지 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생의 정체성이 폭로된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란 거짓이 폭로되고 진실이 드러난 자리다. 아담 안에서 신이 되고 싶은 모든 인류의 소망이 끝난 자리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너희들의 주제를 알라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흙이고 벌거숭이라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씨-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피조물에게는 생명의 과정이 있다. 예를 들어 땅은 씨를 받아들여 싹을 내고 열매를 산출한다. 바로 이 정상적인 과정을 예수님이 최초로 걸어가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류는 사망의 길 안에 있었고. 가만히 있으면 사망의 열매를 맺는다. 이런 인생에게 예수님께서 생명의 열매를 맺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면 사망 아래 있는 인생은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흙으로서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야 할 밭인데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어 갈아 엎어져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죄에 대한 대가로 갈아엎어지는 것이고 십자가의 고난이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인생은 씨가 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는 단순히 희생물이라는 부정적인 상황만 주로 인식하고 헌물이라는 긍정적 상황은 간과하고 있다. 희생물은 법리적이나 헌물은 생명의 교통을 위한 유기적인 것이다. 내가 흙이 되지 않으면 씨-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자리가 인생의 원래의 위치임을 발견하고 그 자리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시인하면 나는 예수님과 동일시된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지만 흙이라는 인생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믿으면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되어 죽은 자이고 예수님이 살아나심 안에서 나도 살아난 자이다.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헌물로 창조되어 육체가 한번 죽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진리다. 이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 되심을 전혀 훼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의 육체가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죄 때문에 죽음이 왔다고 하는 잘못된 교리가 성경전체에서 계시하고 있는 풍성한 은혜를 가리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위치는 변개할 수 없는 위치다. 사람은 흙이고 재라는 것이다.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씨-생명이 뿌려질 수 있다.
16.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졌으므로 다시는(no more)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는(no more)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는 줄 우리가 아노라. 그분께서는 죽는 것을 통해 친히 죄에 대하여 단 한번 죽으셨으나 살아계심을 통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시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참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위하여 산 자로 여길 지어다.’(롬6:9~11) 위 말씀에서 사망이 다시는 그리스도를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는데 ‘사망’이 그리스도를 한 번 죽게 한 것은 그분의 몸이다. 죄 때문에 예수님의 몸이 죽은 것 같이 우리도 죄 때문에 우리의 몸이 죽은 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죽을 몸으로 창조되었다면 몸은 죄의 삯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성경은 몸이 죽는 이유가 죄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말씀도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구별하지 못한 오해이다. 몸이 죄 때문에 죽는 것이라면 왜 죄인들도 부활하는가? 죄인들은 영원히 부활하지 말고 무덤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 안에서 죽음을 ‘죽지 않고 잔다’라고 표현하셨고 성경은 일관되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부정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생명의 길이건 사망의 길이건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 표면적으로 보면 동일한 육체적 죽음이지만 이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천당과 지옥의 차이다.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동일하게 보면 안되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는 아담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없는 번제헌물로서 죽음이 필요했다.(창2:21~23) 죄가 들어옴으로서 이에 대한 희생물로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법리적인 것이고 헌물은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유기적인 것이다. 수학적으로 보면 희생물과 헌물로서 두 번 죽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태우는 ‘태우는 희생물 곧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레1:9) 이라고 하면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다.(레1:9) 단순히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라면 희생물로서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 단지 예수님이 희생물로 죽으셨다면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없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헌물로서 제단 위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야 한다. 법리적인 희생물 안에 유기적인 헌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희생물과 헌물은 같이 따라 다닌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물로서 단 한번 죽으셨다. 그런데 단순히 법리적인 죄의 대가로서 예수님이 죽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가?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속을 위한 희생물인 동시에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졌기에 부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은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흙-사람에게 하나님의 씨가 들어가면 하나님의 아들로 열매를 맺고 사탄의 씨가 들어가면 사탄의 아들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담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면 아담은 생명의 길을 이탈하여 사망의 길로 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단순히 육신의 삶과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길 안에서는 모든 과정이 생명이고, 사망의 길 안에서는 모든 과정이 사망이라는 것이다. 사망노선 안에서는 육체가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고 부활해도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노선 안에서는 육체가 죽어도 생명이고 모든 과정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인생이라는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서 생명의 노선 안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아담이 빼앗긴 생명노선을 되찾아 오신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는 공짜가 없다. 그래서 피 흘림의 대가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피 흘림을 통해 사탄에게 승리하고 생명노선을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생명노선, 곧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심으로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하나님의 씨를 통해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전적으로 예수님은 유기적인 생명 노선 안에서 하나님의 씨를 통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이 과정 안에서 단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죽음을 법리적이고 교리적으로 표현한 것이 대속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신한 희생물만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번제헌물이 되셨다. 또 죽기까지 생명노선을 지킴으로서 사탄에게 승리하셨다. 십자가는 만유를 포함한 사건이다. 부정적인 모든 것과 긍정적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데 어떻게 죽으실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는 분인데 죄를 속하기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서 죽음을 허락했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으셨다. 자연사가 아니고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 그런데 그분이 죽을 수 없는 분인데 죽으신 것이 아니다. 죽을 수 있으니까 죽으신 것이다.
만일 그분이 그런 식으로 죽으셨다면 우리와 그분은 상관없는 분이다. 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분이고 나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분에게 적용되었던 것이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복음이지 만일 예수님이 죽을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특별하게 죽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절망이고 복음이 아니다.
1. ‘죄 때문에 예수님의 몸이 죽은 것 같이 우리도 죄 때문에 우리의 몸이 죽는 것이다. ’ 라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지 그분이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죄가 없음에도 죽으셨다. 그런데 왜 죽으셨는가? 죄가 없음에도 죽을 수 있으니까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죄가 없음에도 죽을 수 있는 몸이니까 죽으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특별히 전능하신 방법으로 그분에게 죽음을 허락한 것이 아니다. 이런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죄란 개념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할 있다. 죄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 곧 위치 이탈을 죄라고 한다. 인격에서 이탈하면 죄고 인격을 지키면 생명이다. 아담은 흙-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흙-사람의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분이 살아나신 것은 생명의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 의로운 자의 첫 부활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물이 되신 것이지 그분 자신이 죄가 있어서,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몸이 죽으셨다면 이것은 큰 오류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지만 인류의 죄를 위해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그분의 몸은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이 죄인이 아님에도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신 것이지 몸 자체가 죄인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신 것이다. 죄가 없으면 육신이 안 죽다는 논리는 말도 안 되는 논리다. 흙-육신은 원래부터 생명이 없다.
그런데 위 질문에서처럼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또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죄가 해결이 안되어 지옥으로 가야한다. 구원받은 신자가 죄가 있기 때문에 몸이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똑 같이 피를 흘려 죽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래야만 죄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리는 맞지 않다. 우리의 죄에 대한 희생물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하다. 더욱이 우리 몸은 죄를 위한 희생물이 될 수 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구속받았다. 구속이란 원래의 위치를 말한다. 우리의 원래의 위치는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물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이 되기 위해 죽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7~18절에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고전15:17~18) 말씀이 있다. 이 말씀대로라면 의로운 자의 부활이건 불의한 자의 부활이건 부활한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 알 것이다. 이 말씀은 의로운 자의 죽음과 부활, 곧 생명노선 안에 있는 자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자의 부활과 불의한 자의 부활이 있듯이 의로운 자의 죽음과 불의한 자의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원래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수학적으로 두 번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법리적인 희생물이라는 단 한 번의 죽음 안에 유기적인 헌물도 포함시킴으로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하는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한 희생물은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났다. 그런데 우리 몸이 죄로 인해 또 죽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완성이 안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 몸이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물이 되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고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이 되기 위해 죽는 것이다.
2.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죽을 몸으로 창조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죽음은 죄의 삯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속을 법리적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오는 오해이다. 그리고 사람의 몸이 원래부터 죽게 되었다고 해서 죄에 따른 대가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죄에는 당연히 심판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밭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사탄의 밭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밭이 되려면 사탄의 밭은 갈아엎어져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는 밭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게 십자가의 구속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원래의 위치로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밭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열매를 맺는 것이 부활이다. 그러나 흙은 본질적으로 생명이 없다. 단지 씨와 연합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밭에 씨가 들어가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생명을 발아할 수 있다. 흙이 하나님의 최종목표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흙에서 돌로, 최종적으로 돌에서 보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흙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보석으로 바꾸어져야 영원하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번제단이다. 번제단에서 헌물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진다. 사람과 하나님의 생명의 연합의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그래서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죄가 있기 때문에 번제헌물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희생물이 필요하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이 필요하다. 성경이 주는 계시는 사람이 죄가 없다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다.(창 2:21~23)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서 이에 대한 대가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레17:11) 사람이 죄가 없다면 희생물이 필요없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서 희생물이 추가 된 것이다. 그런데 희생물이나 헌물이나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은 매 한 가지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희생물을 태움으로서 번제헌물이 되게 한 것이다. 희생물 안에 헌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레1:9, 17) 이 희생물과 헌물의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다.(히10:5)
번제단 곧 십자가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불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피조물은 없기 때문이다. 용광로에는 좋은 쇠든 버려질 쇠든 어떠한 쇠도 한 목표를 위해 녹여진다. 십자가라는 불랙홀 안에서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한 목표를 위해 녹여지는 것이다. 희생물은 부정적인 것이고 헌물은 긍정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서 번제단에서 희생물도 태워져야 하고, 헌물도 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인생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씨를 받아 열매가 되어야할 존재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물이 되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이지 최종목표가 아니다. 그러므로 헌물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 녹여져 재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흙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씨가 들어오면 살아 있는 돌이 되고(벧전2:5)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최종적으로 보석이 된다고 한다.(계21:11) 이러한 물리적 변화의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위한 우리의 생명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 자신, 곧 생명과 생명의 원리를 계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의 원리를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지 법리적인 혜택정도로만 생각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부정적인 모든 것과 긍정적인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 12:9) 하나님과 우리는 번제단에서 만난다. 우리가 죄가 있기 때문에 번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레17:11) 그런데 우리는 죄가 없더라도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헌물로서 번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불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소멸되지 않는가?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다 소멸된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죄가 없으면 영생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구원을 단지 법리적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나온 발상이다. 그러나 누차 말하지만 무죄는 영생이 아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일 뿐이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육신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기록된 곳이 없고 죄로 인해 사망이 왔다고 기록한다. 사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사탄이 지배하는 체계를 말한다. 즉 사망이란 사탄이 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자신의 열매를 추수하는 과정 안에 있는 세계를 말한다. 지금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사망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생명의 세계로 옮겨 온 것이다. 육체가 죽더라도 산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사망이 아니고 생명의 길 안에서 당연한 과정이다. 씨를 땅에 뿌리면 씨도 죽어야 하고 땅도 죽어야 하는 당연한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아담은 만물에게 적용되는 이 우주적 생명의 원리를 거부하고 신이 되려고 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이라면 죽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영으로 창조되지 않고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흙은 완성품이 아니다. 최종 완성품인 영적인 몸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흙은 자체 씨가 있는 것이 아니고 씨와 한 몸이 돼서 열매를 맺어야 할 운명이다. 이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이 연합은 죽음을 통해 연결된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흙-사람이라는 인격을 이탈하여 하나님의 씨와 연합되지 않고 사탄의 씨와 연합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피 흘려 죽기까지 인격을 지킴으로서 농부이신 하나님의 첫 열매가 되셨다.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 사탄에 대한 승리이고 생명의 길이다. 이 과정을 보면 어떤 법리적인 요소도 없다.
그런데 이 생명의 과정 안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죽음을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는 것이다.(고전1:24)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한 것인데 어떻게 나에게 구원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의 영이고 우리는 형상이다. 영이 실재라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이 실재가 아니고 영이 실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예수님이 대신한 것이지만 영으로 내가 예수님과 동일시하면 나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산 것이라는 것이다.
17. 로마서 6장 6절은 우리의 몸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6:6)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서 육체적 죽음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위 말씀은 죄 때문에 몸이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죄 된 몸은 심판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 몸이 원래 영생하게 되어 있는데 죽음이 온 것이 아니다. 어떻게 영생하는 몸이 가다가 끊어 질 수 있는가? 성경이 보여주는 진리는 죄로 인한 대가로 희생물이 필요하고 죄 이전에 사람은 헌물로서 곧 죽음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다.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생명이 없고 거듭나야 했다. 또 죄가 없더라도 사람은 거듭나기 위해 잠자는 죽음이 필요했다.(창2:21~23) 그러나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심판으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레17:11)
왜 죄로 인해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한가? 아담은 사탄과의 영적전쟁에서 패함으로 사망의 길로 갔다. 그런데 누군가 와서 다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피 흘림이 필요한 것이다. 피 흘림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은 농부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 할 운명이다. 그런데 사탄이 먼저 와서 자신의 씨를 뿌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밭이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서 주인의 씨가 심겨지려면 그 밭은 갈아엎어져 주인이 쓸 수 있는 밭이 되어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고난이다. 그런데 밭은 어떤 씨가 심겨져도 흙이지 흙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흙인 아담이 씨가 되고 싶어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신 것이다.
위 말씀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후(과거) 거듭난 성도의 영적생활(미래)에 주안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생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따로 영생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영생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는 달성된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사탄이 와서 유혹한다고 영생이 끊어 질 수 있는가? 사람은 처음부터 흙으로 창조되었지 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위 말씀은 이미 과거의 일이다. 이미 우리 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이 멸하여졌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이미 영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우리는 앞에서 영과 형상, 곧 실재와 형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형상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실재고 만물은 형상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 실재-생명이고 보이는 것은 단지 보이지 않는 것의 형상이라는 의미다. 로마서 6장 6절 말씀은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안에서, 곧 실재 안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죄 때문에 우리 몸이 또 심판 받아 죽는다면 여전히 죄 문제가 해결이 안된 것이다. 성경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을 받았고 거듭났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죄들의 용서를 받았다.(골1:14) 그런데도 또 죄로 인해 몸이 죽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의미가 없다. 성경은 우리가 완전한 자고 의인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인인가? 우리가 죄인이라면 우리는 거듭날 수 없다. 우리가 사탄의 밭이었는데 갈아엎어져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하나님의 밭이 되어 있는 상태다. 그런데 죄 때문에 죽는다면 또 갈아엎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 번 갈아엎어져 하나님의 밭이 되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갈아엎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 육신이 죽는 것은 열매를 맺는 과정이다. 흙은 자체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고 씨와 연합되어 한 몸이 됨으로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도 같은 개념이다.
영생이라는 생명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이다. 단지 흙은 씨와 연합되어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흙은 씨를 받아 열매를 산출하는 것이 그 임무다. 농부는 열매를 거두지 흙을 거두지 않는다. 흙-육신은 농부이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지으시고 육신을 추수하는게 아니라 인격의 열매를 거두신다. 열매란 흙이 아니고 씨-생명이다. 씨-생명은 영이다. 그래서 부활한 영적인 몸을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지으시고 인격의 열매로 영적인 몸을 가진 사람을 추수하는 것이다. 흙-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전15:50) 사탄의 왕국도 영적인 왕국이다. 그래서 사탄도 흙-사람에게 똑 같은 과정을 거쳐 자신의 아들들을 추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영생하게 되어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죽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죽음은 원래부터 창조 안에서 정해진 것이다. 생명의 길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에서의 육체적 죽음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육체가 죽는 것이라면 우리의 죄는 여전히 해결이 안 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 죽으셨다. 그분은 표면적으로 아담이지만 본질은 죄가 없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 인한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죄로 인해 육신이 죽는다면 본질적으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실 있는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죄가 되게 하신 것이지 본질이 죄인은 아니다. 왕자가 거지의 옷을 입었다고 왕자가 아닌가? 죄인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대속물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원래 죽을 수 있으니까 죽는 것이다.
18.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 없는 몸을 우리에 주신 것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의 구속을 위한 것이었다.(롬8:23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구속 곧 대속은 대신 갚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대신 갚는 것인가? 죄의 삯을 대신 갚는 것이다. 몸의 죽음은 창조의 결과가 아니라 첫 사람의 의도적인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몸의 대속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만약 몸이 원래 죽도록 창조되었다면 죄로 인해 죽게 된 몸의 구속은 필요없게 될 것이고 죄인들을 대신해서 성육하신 주님께서 주님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고난과 희생은 한 낱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전락할 것이다.
이 주장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사람의 타락의 근원에 대한 오해에서 불거진 주장이다. 성경의 좀 더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신들과 같이 되려하지 말고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람을 사람으로 알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상식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종교적이고 비상식적인 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희생물은 죄로 인한 법리적 대가이고 번제헌물은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유기적 연합을 위한 사람의 근본적 위치다. 사람이 원래 한번 죽도록 창조되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한 낱 우스꽝스러운 희극이 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연합을 원리를 모르는데서 오는 오해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롬8:23~24)
앞서 살펴보았지만 구속, 곧 죄 없는 것이 영생이 아니다.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다. 아담은 창세기 2장 7절에서 무죄하게 지음 받았다. 그렇다고 아담이 영생하는 몸이 아니다. 아담은 왜 거듭나야하는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었는가?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흙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다른 피조물들은 모두 1차적 창조로 끝난다. 그런데 사람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을 자이기 때문에 씨-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 위해 흙-사람으로 창조되어 2차적 창조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고후5:17)
여기서 우리는 구속과 구원-거듭남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분명히 구속과 구원은 다르다. 구속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구속이 영생이 아니다. 무죄가 육체의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체의 영생은 부활한 영적인 몸이 되어야 한다.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전15:50)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죄가 있든 없든 살리는 것이 아니다.(요6:63)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창조된 사람은 영적인 몸을 입어야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단순히 죄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육신이기 때문에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부처 육신으로 창조되었다.(창2:24) 그러니까 사람은 죄 이전에도 육신은 한 번은 바꾸어져할 존재지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3절에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이라는 말을 단순하게 이해하면 우리 몸은 아직 구속이 안 된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몸은 죄 때문에 죽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생명의 노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결과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원칙상 구속이 먼저고 구원-거듭남이 나중이다. 죄란 쉽게 말하면 흙-사람에게 사탄의 씨가 뿌려진 상태다. 그래서 이것을 갈아엎는 것이 대속이고 갈아엎어진 밭을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구속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속과 구속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속(ransom)이란 희생물이고 구속(redemption)은 헌물이다. 대속을 위해서는 단순하게 피흘림이 필요했다. 이것은 법리적 심판이다. 그러나 법리적 심판을 받았다고 해서 이 위치가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위치가 아니다.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희생물이 헌물이 되어야 한다. 곧 처음 무죄한 상태로 원상복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속이 법리적이고 강제적인 심판의 위치라면 구속은 유기적이고 자발적인 위치다. 그런데 이 둘의 공통점은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 되었듯이 대속과 구속은 동일시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가 이미 구속을 받았다고 말한다.(엡1:7, 골1:14, 갈3:13, 벧1:18)
그분 안에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구속이 없이는 생명의 거듭남이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구속과 구원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어떤 때는 구속과 구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할 때도 있다. 구속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무죄상태로의 회복이고 이 구속된 몸에 생명을 넣어주어 거듭난 것이 구원이다.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가 이미 전인격적으로 구속을 받았고 그리고 전인격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꾸 환경적인 면을 생각해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데 무슨 완전한 구원을 받았느냐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지만 우리는 이미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늘 환경적인 것을 생각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물질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서 8장 23절에서는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 이라고 하면서 우리 몸이 아직 구속을 받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로마서 8장 23절의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 이라는 말씀과 베드로전서 1장 9절의 ‘이는 너희가 너희 믿음의 결말 곧 너희 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의 말씀을 들어 사람의 몸은 영생하게 되어 있었으나 죄 때문에 몸이 죽는 것이고 우리 몸은 아직 구속을 받지 못했고 혼만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을 말할 때 사람의 구성체인 영, 혼, 몸을 구분해서 말하지 않고 일관되게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구속을 받았고 전인격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구속에 대해 예외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구절은 로마서 8장 23절 한 구절이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성경 기록도 일관되게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단지 두 구절에서만 예외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를 멸하도록 판단하였으니 이것은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이는 너희가 믿음의 결말 곧 너희 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벧전1:9)
모든 성경 구절이 그렇듯이 어느 특정 구절만을 가지고 해석하면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고린도전서 5장 5절은 영이 주님의 날에 구원받는다고 기록하였으나 문맥으로 보았을 때 영만 따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날에 전인격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말한다. 베드전서 1장 9절 말씀은 물론 우리의 육체가 죽으면 믿지 않는 자들과 비교해서 믿지 않는 자들의 혼은 지옥으로 가고 신자들의 혼이 구원받는다는 말씀도 되겠지만 여기서 혼은 사람의 대표로서 전인격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몸은 죄 때문에 죽고 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 보았지만 구원받은 자의 몸이 죽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생명의 노선 안에서 생명의 연합을 위해 죽는 것이다. 즉 신자들은 희생물로서 죽는 것이 아니고 번제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만일 구원받은 우리 몸이 죄 때문에 죽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사역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한 희생물로 죽으시고 우리를 구속하셨다.
만일 로마서 8장 23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 드린다면 구속된 우리 몸은 창세기 2장 7절의 아담과 같이 범죄하기 전의 무죄한 육체가 되는 것이지 부활한 영적인 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구속된 몸을 갖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린도전서 5장 5절의 ‘주님의 날에 영이 구원받는다’는 말씀과 같이 문자적으로 받아 드린다면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로마서 8장 23절에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라는 것이다. 우선 로마서 8장 23절이 말하는 ‘구속’의 시기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는 개인적으로 창조-타락-대속-구속-부활 순이고 우주적으로도 창조-타락-대속-구속(천년왕국)-부활(새예루살렘) 순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단순히 창조에 있지 않고 창조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어 부활생명을 갖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된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대속과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3절이 말하고 있는 ‘구속’의 시기는 천년왕국 시대로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년왕국 안에는 비록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가진 사람과 육신을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온 구속받은 사람이 혼재해 있지만 천년왕국을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상 ‘구속’의 시기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시기를 ‘다시 나게 하는 때’(마 19:28),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때’(행 3:21)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시 나게 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른 너희들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자신의 모든 거룩한 대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때 곧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때까지는 하늘이 반드시 그분을 받아들여야 하리라.(행3;21)
이 시기를 현재와 비교해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면
① 영존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다.(사 35:10)
② 질병이 없고 환경이 회복된다.(사 35:5~6)
그때에 눈먼 자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자의 귀가 열리며 그때에 다리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광야에서 물들이 터져나오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며 또 바싹 마른 땅이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물들의 샘이 되며 용들이 각각 누워 거하던 곳에 풀과 갈대와 골풀이 함께 자라리라.(사 35:5~7)
③ 전쟁이 없다.(미 4:31)
.......그들이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고(미 4:3)
④ 창조질서가 회복된다(롬8:21)
이는 피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롬8:21)
⑤ 사람의 수명이 회복된다.(사 65:22) 그러나 죽는다.
그들이 짓되 다른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심되 다른 사람이 먹지 아니하리니 내 백성의 날 수는 나무의 날 수와 같으며 나의 선택한 자는 가지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리리라.(사 65: 22)
⑥ 사탄은 바닥없는 구덩이에 갇히게 된다.(계 20:3)
⑦ 사자와 같은 육식 동물의 음식이 채식으로 전환된다.(사 65:25)
땅위에 있는 모든 짐승은 원래 채소를 먹도록 되어 있었다.(창1:30) 그러므로 원래대로 회복된 것이다.
⑧ 주님께서 직접 친히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사 11:1~12, 미4:1~4, 슥8:3~6)
결론적으로 천년왕국 시기는 만물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의 상태로 구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3장 21절에서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때’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의 수명도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된다.(사 65:22) 천년왕국의 구성원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된다. 부활한 몸을 가진 사람과 대환란을 통과하여 천년왕국에 들어온 부활하지 않은 몸을 가진 사람이다. 부활한 몸은 영적인 몸을 가진 사람이고 부활하지 않은 몸은 육적인 몸을 가진 사람이다. 부활한 몸은 죽지 않지만 부활하지 않은 몸은 육신이기에 죽는다. 육신을 가진 부활하지 않은 몸도 천년왕국으로 넘어왔기에 만물이 회복되는 거와 같이 이들의 몸도 회복되어 수명이 나무의 날수와 같지만 결국 죽는다.(사 65:22)
또 이들도 부활한 영적인 몸을 얻으려면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죽은 다음 다시 부활해야 한다. 이것은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비록 범죄하지 않았더라도 영생하려면 생명나무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거듭나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3절에서 말하는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이란 의미는 이미 구속을 받고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우리 몸의 부활을 기다림은’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 이라고 이렇게 쓰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3절에서 주고자 하는 의미는 만물이 구속되는 날, 즉 천년왕국의 시기에 중점을 두고 기록이 됬다는 것이다. 또 몸(body)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소마(so-mah)로 우리 사람의 몸이라는 뜻도 있지만 행성과 별의 몸이라는 뜻도 있다. 즉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고 피조세계는 보이는 몸이라는 것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것도 다 그런 이유다. 광의적 의미로 보았을 때 몸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자 그대로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받아 드리면 교리적으로 모순이 있다. 우리는 장차 부활할 몸이어야지 구속받아야 할 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성경이 여기서 구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천년왕국이라는 구속의 시대에 중점을 두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는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가진 자들과 육체를 가지고 구속받아 천년왕국에 들어온 자들이 있지만 성경이 표현하는 천년왕국의 핵심 단어는 구속이다. 그래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또 구속된 자 안에는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가진 자들과 육체를 가지고 구속된 자들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구속이란 죄 없는 상태를 말하지만 구원, 즉 거듭남이 아니다. 분명히 천년왕국의 모든 환경은 창세기 2장의 상태로 구속-환원된 것이다.(마 19: 28, 행 3:21) 어쩌면 창세기 2장의 상황보다 더 좋은 상황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서 사탄은 마음대로 활동했지만 천년왕국에서는 사탄은 무저갱에 결박당해 있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 온 사람과 그들의 자손은 창세기 2장의 무죄한 아담의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는다. 이것은 죄가 없더라도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의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였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육신을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온 사람들은 타락한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죄가 있고 죽는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천년왕국은 예수님이 분명히 죄를 제거한 때이다.(행 3:19)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 또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너희에게 미리 선포된 분을 보내시리라.(행 3:19~20)
천년왕국은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된 시기다. 그러니까 창세기 2장의 환경으로 환원된 시기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구속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창세기 2장이 아니라 계시록 21, 22장의 새예루살렘으로 영원한 시대다. 흙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불과 연합되어 영원한 보석이 되는 시기다.
성경은 천년왕국은 아담의 죄가 말소되고 모든 환경이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때라고 말한다. 사자와 같은 육식 동물도 창세기 1장 30절에서 하나님께서 원래 정해주신 양식인 풀을 먹는다.(사65:25) 모든 만물이 새롭게 되는 때 이므로 분명히 아담이 지은 죄가 말소된 상태이고 심지어 예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시대이다. 만약에 이 시기에 아담이 지은 죄가 사람 안에 존재한다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의 구속은 타락한 아담의 본성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육신을 가진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과 천년왕국의 구성원을 비교해 보면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에는 사람이 있었고, 그리고 옛뱀, 곧 사탄이 있었고,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이 계셨다. 그러나 천년왕국에서는 사람과 예수님이 계시고, 사탄은 무저갱에 결박당해 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 시기가 창세기 2장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황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사람이 죄를 짓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천년왕국에 육신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부활체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것 같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사탄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죄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이 죄다. 사탄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면 죄라는 것이다. 사탄이 처음에 스스로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타락했듯이 사람도 사탄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면 죄라는 것이다. 스스로 이탈한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 아담의 타락은 스스로 타락한 것이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의해 타락했다. 그래서 유혹자가 있으면 구원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스스로 타락했기에 구원자가 없듯이 천년왕국에서 죄인들은 스스로 타락했기에 구원이 없고 예수님으로부터 철장으로 다스림을 당한다.(계2:27, 12:4)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무죄한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거듭나야 하듯이 천년왕국에서 육신을 가지고 들어온 무죄한 사람도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없음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죄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흙으로서 생명이 없는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죄가 없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에서 육신을 가진 사람과 그의 후손들은 무죄한 상태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영접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결박당해 있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이탈하면 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셨다.(요 16:9)
‘죄에 대하여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요 16:9)
아담은 창세기 3장에서 비록 사탄으로 인하여 죄를 지었지만 사탄의 유혹이 없는 천년왕국에서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고 죄라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단지 그분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희생물인 동시에 근원적으로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만일 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하면 천년왕국 시기에 왜 죄가 말소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느냐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니다.(요6:63) 육은 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15:50) 그러므로 아담이 처음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영생한다는 말은 자존한다는 의미다. 이것을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주장은 사탄이 한 말이고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 거짓에 지금 사람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자존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다.
19.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본래 몸이 죽도록 만드셨다면 자연적으로 죽게 될 몸을 굳이 예수님께서 죄 값을 치르고 몸을 대속하여 다시 부활시키는 것은 필요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원래 죽을 존재로 만드셨다면 몸이 죄의 삯인 사망을 이기고 일어나는 부활은 희극이 될 것이다.
이것도 결국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동일하게 보는데서 오는 오해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지 법리적인 희생물에 국한시키고 유기적인 헌물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오는 현상이다.
또 사망이라는 말을 너무도 단순하게 육체적 죽음에 국한시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담 안에 있는 자를 죄와 범법들 가운데 죽었다고 한다.(엡2:1) 이것이 육체적 사망인가? 육체적 사망이 아니다. 성경은 영적 사망이든 육체적 사망이든 불의한 자의 부활이든 둘째 사망이든 다 사망으로 보고 있다. 사망의 노선 안에 있기 때문에 사망이라는 것이다. 생명노선 안에 있으면 모든 과정이 생명이다. 내 육신이 죽더라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은 아담으로 인해 인류가 사망노선으로 갔는데 생명노선을 회복시키셨다는 것이다. 사망 열차를 타고 있던 인류에게 생명 열차로 갈아 탈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사망열차를 타고 육체적 죽음과 불의한 자의 부활이라는 사망노선을 가다가 불호수라는 최종역으로 가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노선이 개척된 것이다. 생명열차를 타고 잠자는 죽음과 의로운 자의 부활이라는 정거장을 거쳐 새예루살렘이라는 최종역에 도착하는 노선이다.
원래 사람은 생명노선 안에서 생명의 연합을 위해 육신이 한 번은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지만 아담이 이 길을 이탈했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과의 전쟁에서 잃어버린 생명노선을 회복하려면 피 흘림이 필요한 것이다. 피 흘림 없는 전쟁의 승리는 없다.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죽기까지 생명노선을 지키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이것이 인류가 생명노선을 이탈한 대가이다. 대가 없는 승리는 없다.
예수님이 원래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라고 알면 이것은 종교적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님이 일으키셨다고 했지 스스로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담은 생명노선을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생명노선을 지키신 분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조건하에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인생의 위치를 지키었기에 생명노선 안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류의 보편적 구원자가 되신 것이고 우리도 그분과 같이 생명노선 안에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격의 승리, 이것은 피 흘림을 통한 대가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은혜이고 법리적인 대가이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 피 흘릴 필요는 없다. 이것을 구약적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희생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에만 그친다면 우리의 구원이 없는 것이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생물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헌물이 되어야 한다. 희생물로서 단순히 대속만 한다면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희생물이 헌물이 돼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야 한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번제헌물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번제헌물이 되어야 생명의 연합을 통해 유기적인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대속과 구속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법리적인 희생물과 유기적인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죄가 없더라도 사람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로 창조되었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피 흘림의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희생물 안에 헌물을 포함시키신 것이다.
번제단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우리는 통상 사람이 죄만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 연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서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죄가 있으나 없으나 사람은 육이다. 육은 불을 만나면 다 태워진다. 죽지 않을 육신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큰 이질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과 육은 있는 그대로 연합될 수 없다. 육이 영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삼켜짐으로 하나님께 연합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완전히 태워져 삼켜짐으로서 연합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법리적인 대속의 혜택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철저히 생명의 연합의 원리에 따라 유기적인 방법으로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시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시다. 즉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는 밭을 하나님께서 갈아엎고 하나님께서 씨를 뿌려 첫 열매를 거두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는 말은 사탄이 뿌려놓은 가라지 가득한 밭에서 하나님의 첫 알곡이 이것을 이기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승리고 부활이다.
우리의 육신은 생명의 길이든 사망의 길이든 한번은 죽고 부활하게 되어있다. 씨를 땅에 뿌리면 어떤 씨도 똑 같은 과정을 거쳐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에게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면 생명의 부활로, 사탄의 씨가 뿌려지면 멸망의 부활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흙은 자체 씨가 없고 씨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뿌려짐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이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죽기까지 지키심으로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의 길을 회복하시고 인류를 다시 생명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이 한번 죽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지어 최종적으로 부활의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열매가 아니다. 열매는 부활한 영적인 몸이다. 우리 육신은 어차피 한번은 바꾸어져야할 몸이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매가 되어야 할 육신이 사탄의 열매가 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 가운데 처음으로 하나님의 열매, 곧 생명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고전15:20)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새인류의 조상되셨다는 것이고, 새인류의 씨가 되셨다는 것이다. 생명의 길을 걸어가진 첫 번째 주자가 되신 것이다.(히6:20)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우리도 그분과 동일시되어 새인류의 첫 열매 종류가 된 것이다.(약1:18)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씨를 가진 자로 하나님의 열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연합을 위해 사람의 육신을 원래 한번 죽도록 창조하였다고 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결코 희극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죽음 안에 있는 하나님에 경륜에 대한 오해이다.
20.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태초부터 죽게 만들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몸에 죄의 삯 곧 사망을 요구할 실 수 없다. 영혼만 죄의 삯으로 죽게 되고 몸은 죄와 상관없이 죽게 되게 되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이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공의의 하나님께서 몸의 죄를 다스릴 수 없게 된다.
1.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는 밭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개념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씨는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4장 26~2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것 같으니 그가 밤낮으로 자고 깨고 할 때에 그 씨가 돋아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 그가 알지 못하느니라. 이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니 처음에는 잎사귀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뒤에는 이삭 안의 알찬 곡식이라. 그러나 열매가 맺히면 그가 즉시 낫을 대나니 이는 수확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라.(막4:26~29)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람의 육체가 죽는 것을 죄가 들어와서 죽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씨와 땅의 관계를 비유로 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씨가 땅에 뿌려지면 열매를 맺는 자연의 원리에는 죄가 끼어들 틈이 없다.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땅이다. 씨를 땅에 뿌리면 씨가 땅과 연합되어 썩지만 그 씨는 생명을 발아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진리다(요12:24) 이것을 예수님이 우리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죽으신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은 흙-육신으로 생명이 없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은 헌물로서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제헌물이 됨으로서 하나님과의 유기적 생명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근원적으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다. 성경이 계시하는 진리는 사람은 죄를 속하기 위해서 법리적인 피 흘림의 희생물이 필요하고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유기적인 헌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 되어야 하지만 죄로 인해 희생물이 요구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희생물을 태움으로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여 법리적인 죄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사람을 태초부터 죽게 만들었다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몸에 죄의 삵을 요구하실 수 없다는 주장은 예수님의 죽음을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인 것을 알지 못하고 희생물에만 국한시켜 보기 때문에 오는 오해이다.
2. 사람이 태초부터 죽도록 창조되었다면 영혼만 죄의 삯으로 죽게 되고 몸은 죄와 상관없이 죽게 되게 되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이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공의의 하나님께서 몸의 죄를 다스릴 수 없게 된다.
사람의 육신의 죽음을 단순히 법리적인 죄의 대가로만 보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단순히 법리적으로 용서받았다고 해서 영생이 있는가? 무죄는 영생이 아니다. 무죄란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과 삶이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거와 같은 것이다.(막4:26) 씨를 땅에 뿌려 열매를 맺는 과정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흑백논리가 아니다. 생명의 노선이건 사망의 노선이건 표면적인 과정은 똑 같다. 씨가 땅에 뿌려지면 열매를 맺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사탄도 자기 씨를 뿌리면 똑 같은 과정을 거친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느 노선이건 육체적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죄가 있기 때문에 몸이 죽는다는 논리는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생명의 과정을 모르는데서 오는 오해이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할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오려면 사탄의 밭이었던 사람이 갈아엎어져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로 전환되어야 한다. 원래 영원히 갈아엎어질 수 없는 몸(밭)인데 사탄의 씨(죄)가 들어와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갈아엎은 것이 아니라 갈아엎어 질 수 있으니까 갈아엎어 지는 것이다. 갈아엎어져서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는 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탄의 씨가 들어왔던 밭이 강제적으로 갈아엎어진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심판이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대속-희생물이다. 그리고 단순히 갈아 엎었다고 씨를 뿌릴 수 는 없다. 그래서 갈아 엎은 밭을 씨가 뿌려질 수 있도록 원래의 상태로 정리해야 해야한다. 이것이 구속이다. 대속은 법리적인 것이고 구속은 원위치라는 의미로 유기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권능과 지혜로 희생물이 헌물이 되었듯이 대속이 구속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 질문에서처럼 사람이 태초부터 죽게 되었다면 영혼만 죄의 삯으로 죽게 된다는 말은 생명의 원리에 대한 오해이다. 또 영혼이 죽는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다는 말은 사망노선으로 들어왔다는 말이다. 사망노선 안에 있으면 어느 과정에 있건 사망이다. 육신이 살아 있어도 사망이고 육체가 죽어도 사망이고, 부활해도 사망인 것이다. 어느 특정 과정만을 선택해서 사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 안에 있는 자를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이다. 사망열차를 타고 종착역으로 향해 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라는 생명열차도 표면적으로 죽음과 부활이라는 같은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어느 과정에 있건 생명이다. 육체가 살아도 생명이고 죽어도 생명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여기서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말은 장차 부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누구든지 살아서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살아서 믿는 자의 육신이 죽지 않는가? 육신이 죽는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생명노선 안에 있으면 어느 과정에 있건 생명이라는 것이다. 육신이 죽어도 산 것이고 살아도 산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을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아래 말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아니하리라.(요6:50)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만일 내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8:51)
위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육신이 결코 죽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육신이 죽지 않는가? 그러므로 육신은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단순하게 죄 때문에 육신에 죽음이 왔다고 하는 것은 씨와 땅의 생명의 원리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오해이다. 하나님의 씨건 사탄의 씨건 흙-사람에게 들어오면 똑 같은 과정을 거쳐 부활하는 것이다.
죄로 인해 육신에 죽음이 왔다는 이분법적 논리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육신이 죽지 않아야 한다. 죄로 인해 육체적 사망이 왔으나 예수님으로 인해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죽지 않는가? 그러므로 원래 죽지 않을 육체가 죄로 인해 죽는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물로서 육신이 죽으셨다. 그런데 우리가 죄 때문에 정죄 받아 육신이 또 죽는다면 믿는 우리도 예수님과 똑 같이 피 흘림을 통한 희생물로서 죽어야 된다는 논리가 생긴다. 또 예수님의 대속사역이 완성이 안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희생물이 될 자격도 없고 희생물로서 죽을 수도 없다. 우리의 죄로 인한 희생물은 예수님이 대신하셨다. 희생물이란 원칙적으로 죽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보고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이 되라고 하지 않고 ‘살아 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한다.(롬12:1) 우리의 죄에 대한 법리적 대가는 예수님이 다 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물로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우리는 헌물로서 불-하나님께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주는 정확한 진리는 사람은 원래 죄가 없더라도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지만(창2:21) 죄가 들어옴으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레17:11)
인생은 하나님 앞에 근원적으로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인생이 원래 영생하는 자였다면 이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왜 유명 기독교 목사들 중에 나중에 변절자가 생기고, 또 신자들 중에도 처음에 잘 믿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변절하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근원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내가 영생이 있다고 하면 불교신자와 출발점이 같은 것이다. 타종교와의 구분이 불명확하고 내 인생의 출발점, 곧 기점이 모호한 것이다. 사람이 처음부터 영생을 가진 존재라면 말 그대로 영원해야지 어떻게 가다가 끊어지는가? 영생이라는 단어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이다. 영생이란 자존한다는 말이다. 자존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다. 오히려 죽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의 진리가 닫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계시된 풍성한 진리가 닫히게 된다. 단순하게 예수님이 법리적으로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하면 십자가가 어떻게 사탄에 대한 승리인지, 우리에 대한 생명인지 알 수도 없고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인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20. 맺는 말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방향과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마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모르니 향방없이 허공에 주먹을 치는 거와 같은 형국이다.(고전9:26) 그래서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는 줄 안다.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안다. 군대의 작전계획은 지휘관 의도를 구체화 시킨 것이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를 구체화 시킨 책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라는 인격과 단체적으로 교회라는 사회를 목표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도 그리스도라는 인격의 연합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관심도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표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마19:16, 막10:17, 눅10:25, 눅18:18, 행16:30) 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 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담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생명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종의 관계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은 늘 종이라는 행위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존재적 위치를 물으신다. 여기에는 행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정해주신 아들이라는 존재적 위치를 회복했다. 우리는 이제 전전긍긍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면서 걱정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남편과 아내의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전히 교회 내의 설교와 우리의 관심은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하면서 행위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을 율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보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에 중점을 둔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그분과의 연합이고 영생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부분의 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믿어라, 이렇게 단순하게 말한다. 그리고는 이것을 위해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한다. 다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아니고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설교를 듣고 나오는 동시에 다 잊어 먹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모르니 생활설교만 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하나 예수님에 대해 몰라도 한참 모른다.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거와 같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은 나의 어떠함과 관계가 없다. 그 은행을 신뢰하기 때문에 돈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은행을 신뢰하려면 그 은행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 오셨다. 생명은 그분 자신이고 인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되길 원하신다. 그러려면 그분을 우리는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내가 그분을 알아야 그분을 살아낼 것 아니겠는가?(갈2:20) 예수님은 우리의 죄들만을 위해 죽으신 단순한 분이 아니다. 바울을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지식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4~19)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으라고 말한다. 여기에 우주라는 말은 없지만 바울의 기도는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전 우주적 기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의 크기를 우주에 비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우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우주다. 우리는 우주의 크기를 알 수 없다.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 그분의 인격의 크기는 우주적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수준은 얼마나 왜소하고 가련한 상황에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입체적으로 알기를 원하신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단순한 한 점(點), 또는 한 선(線)만으로 알기 원하시지 않고 입체적으로 알고 그리스도의 인격의 충만을 누리기를 원하신다.(엡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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