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전쟁

용어전쟁2

올더스조에 2017. 5. 1. 00:42

5. 사 망
  
성경에서 사망이란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전등에 전기가 끊어져 불이 안들어 오면 죽은 것이고 연결되어 있으면 살아 있는 거와 같은 이치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연결됨으로 하나님을 표현해야 할 존재였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이 사탄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망이다.  

성경은 생명을 예수 자신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 14:6)

예수님이 생명라면 사망은 누구인가? 바로 사탄인 것이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고전 15:55) 라고 할 때 성경은 여기서 사망을 의인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육신적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이 생명이므로 예수님께 연결되어 있으면 생명이고 다른 자 곧 사탄에게 연결되어 있으면 사망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자를 살아 있으나 죽은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었도다'.(계 3:1)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그 날 안에(in the day)’ 죽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창2:17) 그러나 아담은 바로 그 날 안에 육체가 죽지 않았다. 만약에 이것이 육체의 죽음이라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담담히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분명한 말씀을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지 않고 사탄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3:4~5) 라는 거짓말에 속은 인류는 지금도 어떻게 하면 육체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라는 헛된 소망이 깊은 내면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가 영생하도록 창조하셨는데 아담이 죄를 지어 육체의 사망이 왔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속은 것이다. 
  
성경은 구구절절 사망에 대하여 우리의 육체적 죽음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육체가 살아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면 죽은 것이고(엡2:1, 계3:1) 
‘또한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었도다.”(계3:1)
  
육체가 죽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으면 산 것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2)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가 없음에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죽은 것이지 죄인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죽을 수 없으면 죽지 말아야지 어떻게 죽을 수 없는 분이 죽는가? 
  
살과 피는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우리 사람은 살과 피를 입고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부활의 몸으로 바뀌어질 운명이지 육체를 가지고 영생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15:46)
부활의 몸 만이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고 영원한 생명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고 새로운 영적인 몸을 입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이것을 예수님이 첫 열매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6 연합
성경이 말하는 연합은 결혼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데 이 의미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결혼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곧 ‘생명의 연합’을 말한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cleave)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 2:24) 
성경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연합, 남녀 간의 결혼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곧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에베소서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것은 큰 신비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남녀 간에 결혼하는 것은 사람들끼리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라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은 가장 신성한 것이다. ‘결혼은 모든 것 가운데 존귀한 것이요..’(히13:4) 
이 ‘연합’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성취하는 대원리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자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주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해야 한다. 곧 한 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최종 결론에 가면 달성이 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하시더라’(계22:17) 현재 사람의 남녀 간의 결혼은 완전한 연합이 될 수 없다. 육체 간에 어차피 분리된 가운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사람과 완전하게 연합될 수 있다. 계시록 22장 17절에 보면 성령과 신부가 분리되서 말씀하는게 하니고 성령과 신부, 곧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이 돼서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궁극적인 완전한 연합이다. 
  
그런데 이 연합은 저절로 되는게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하늘들이 땅보다 높은 것보다 차이가 크다. 그래서 절대로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연합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연합이란 두 존재 간에 서로 공통되는 지점에서만 연합이 된다. 예를 들어 모든 물체의 연합은 불 또는 물 가운데 연합된다고 할 수 있다. 철과 철이 연결되려면 불로 용접해야 한다. 또 어떤 철이든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연합된다. 흙도 마찬가지다. 흙은 물로 빚든지 빚은 것을 가마에서 구우면 연합이 된다. 예를 들어 사람과 나무 의자가 서로 연합이 되려면 공통지점은 둘 다 불에 태우면 재가 되는데 이 재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연합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시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영’만이 생명이고 살리는 것이다. 성경은 영은 바람, 불(기름), 물로 상징된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에너지는 크게 풍력, 화력, 수력 세 가지 분야로 나뉘어 진다. 육은 죄가 있는 없든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으며(고전15:50), 생명이 아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요6:63)
사람의 육체가 죄가 없다고 해서 영생이 아니며 단지 죄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위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결혼도 마찬가지로 죽음, 곧 영 안에서 연합될 수 밖에 없다. 상호 영 안에서, 곧 상호 죽음 안에서 연합되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이란 대등한 관계다. 어느 일방만이 죽는 것이 아니고 상호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도 죽음이 필요하고 사람도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완전한 연합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하나님이 육체가 돼서 사람을 위해 죽으시는 방법을 택하셨다. 사람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예수님은 오셔서 ‘내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내 피는 참으로 음료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요6:55~56) 하시면서 자신을 먹으로라고 하셨다. 그분이 우리에게 음식으로서 먹힌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도 하나님께 먹혀야 한다. 레위기에 보면 죄와 관계없는 제물이 ‘음식헌물(소제)’이다. 다른 제물들은 죄와 관련이 있는 제물이지만 음식헌물은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다.(레위기 2장)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음식헌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라고 말하고 있다. 제물이란 말 그래도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지는 것은 없고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육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생명이신 하나님께 음식헌물로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이것은 상호 죽음 안에서 연합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두 가지 면이 있다. 희생물과 헌물이다. 희생물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드려지는 것이고 헌물은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물인 것이다. 곧 예수님은하나님으로서  지성소에서 나와 번제단으로 가셨고, 사람으로서는 세상으로부터 나와 번제단으로 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성경은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같이 따라 다니다. 
‘...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헌물이니라.(’레1:9, 17) 
여기에 깊은 십자가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필 육신이 돼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야 하며, 십자가가 우주의 중심점인지 알아야 한다. 십자가, 곧 죽음, ‘영’만이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곳이 갈보리인데 갈보리란 ‘기름틀’이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생명을 상징하고 영을 상징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육체로 계신다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없다. 우리게 생명을 주시려면 반드시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하고 영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이 생명의 연합, 곧 연결은 반드시 중재자, 곧 연결자가 필요하다. 사람이 죄가 없다고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다.(히12:29)
좋은 쇠는 나쁜 쇠는 불-용광로를 만나면 다 녹는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나님을 만나면 죽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사람도 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예수님이 사람을 위해 음식헌물, 곧 희생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있는 없든 반드시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만물은 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연결된다. 물과 기름도 섞이려면 중화제가 필요하듯이 하나님과 사람도 중개자, 연결자가 필요하다. 원자도 양성자와 음전자 사이를 중성자가 연결시켜 준다. 저절로 연합되는 것은 없다. 두 존재가 연합되려면 반드시 연결자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십자가 안에서 연결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현재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 되심으로 완전히 해결되었기에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은 희생물로서 죽는 것이 아니고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살아 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하지 ‘죽는 희생물’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롬12:1) 그리스도인 죽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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