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전쟁((用語戰爭)
서 언
그리스도인들은 용어의 개념에 너무 약하다. 성경이 말하는 몇 가지 용어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안다면 어찌 보면 성경은 그다지 어려운 책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세상적 관점에서 종교적으로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속담은 세상의 종교의 논리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하나님의 왕국에서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성이 통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세상과는 다른 세계다. 세상에서도 같은 용어라도 군대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경찰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이 다르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제압’이라는 개념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적 인원 및 장비의 전투능력을 제한시키는 것으로 그 효과는 통상 사격을 하고 있는 동안에만 지속됨’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경찰세계에서 ‘제압’은 범인을 완전히 굴복시켜 체포했다는 의미다. 의학계와 법조계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도 일반적인 사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세계에서는 그 세계에 맞는 용어의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목회자들이 일반적 상식수준에서 성경을 바라보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육신적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임에도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는 의미를 단순히 육신적 사망으로 받아 들임으로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세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善)한 것은 하나님의 왕국이고 악(惡)한 것은 사탄의 왕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세계로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제3의 세계다. 생명의 세계는 선과 악의 2분법적 세계가 아니라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세계라는 것이다. 곧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농사라고 하는 것이다.(고전 3:8) 곧 성경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개념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세상에서 말하는 선과 악의 2분법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윤리적 책이 아니다. 윤리적 관점에서 쓴 책을 보고 싶다면 도덕경(道德經)을 보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관점이 아닌 생명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고 몇 가지 용어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수 십 년을 교회를 다녀도 이러한 개념이 분별이 되지 않아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목회자들 마저 이러한 용어에 대한 개념이 희박함으로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1. 생명(生命)
성경에서 생명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 즉 영원한 생명이다. 각각의 피조물들도 자기 생명이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은 그 피조물의 생명이지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을 가리킬 때만 헬라어로 조에(zo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속성들이 있다. 하나님은 공의하시고, 사랑이시고,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등등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만 ‘사랑은 하나님이다’ 라고 정의할 수 없다. 이중에 오직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생명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등식만 성립된다.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은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영원한 생명이 창조될 수 있는 거라면 또 다른 하나님이 만들어진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가 나와야 한다. 하나님이란 말 그대로 피조될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을 만들 수 있는가?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창조될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영원한 생명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아담은 처음에 만들어진 존재지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고로 아담은 처음에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아담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논리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죽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죽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천사는 죽지 않지만 피조된 생명으로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요1:12) 그래서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은 씨-하나님께 대하여 흙-여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할 운명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의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거룩하고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다. 둘째,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생명이다. 셋째,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넷째,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피조물이 어떻게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질 수 있는가?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섯째,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사람의 입장에서 ‘관계적 생명’이라고 한다. 여기에 단 한 가지라도 조건에 충족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 곧 자기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자신 곧‘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념이 무지한지 모른다. 단지 죄만 사함 받으면 영생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무죄는 영생이 아니다. 아담은 처음에 무죄하였고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창3:22)
2. 죄(罪)
성경이 말하는 죄는 세상이 말하는 도덕인 죄라는 개념과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다’ 또는‘위치를 이탈하다’ 라는 의미다. 사탄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위치에 오르려다 타락했다.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만든 자야, 네가 어찌 끊어져 땅으로 떨어졌는가!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사 14:12~14)
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은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데 자신의 위치를 떠나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는 장면이 창세기 6장에 나온다.
‘사람들이 지면에서 번성하기 시작하고 그들에게 딸들이 태어나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창6:1~2)
이러한 위치를 이탈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이 유다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는데’(유 6)
그러면 아담은 왜 타락했는가? 이탈자인 사탄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3:4~5) 라는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이탈자가 또 다른 이탈자를 만든 것이다.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천사같이 된다고 하니까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위치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있는 것인데 사탄의 말에 속아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하니까 창조목적을 이탈해서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무엇인가?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해서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은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아담의 존재적 위치를 물으셨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죄란 위치 이탈을 말한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각자의 격을 부여하고 피조물들을 각각 필요에 의해 창조하셨다. 개는 개의 위치에 있어야 하고 천사는 천사의 위치에 있어야 하고, 사람은 사람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원숭이가 사람이 되겠다고 하든지, 사람이 천사가 되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혼란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세상은 이탈자가 만든 세계로 바벨이라고 하는데 ‘혼동’이라는 의미다.
그러면 율법에 의한 아담의 죄명은 무엇인가? 우리는 통상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연히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알아서는 부족하다. 판사 앞에서 피고인이 자신의 죄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예수님의 공식적인 죄명은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담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까 이 죄명은 아담의 죄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아담의 죄명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다고 하시면서 안식하셨다.(창1:31~창2:2) 그러나 아담은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창3:5~6)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아담의 근원적인 죄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제기한 것임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그리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은 아담, 곧 나를 대신하여 이 두 가지 죄명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것이다. 그래서 항상 성경에서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는 같이 따라 다니며 동일하게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출31:14, 레24:6)
3. 의(義)
의(義)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른 위치에 있다’라는 의미다. 성경이 말하는 의라는 개념도 세상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세상에서의 의라는 개념은 각 나라별로 다를 수가 있다. 마찬가지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의라는 개념도 우리가 흔히 아는 일반적 개념과는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성립이 안되는 용어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로 창조되었다.(눅3:38) 그래서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들의 위치에 있어야만 의(義)다. 그런데 아담은 죽지 않는 신이 된다고 하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이것이 죄(罪)고 불의(不義)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요 16:10) 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의 정상적 관계가 되면 의(義)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과는 관계가 좋아도 세상 사람과는 관계가 좋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내가 A라는 사람과는 관계가 좋아도 B라는 사람과는 관계가 안좋을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로 창조되었으며,(눅3:38) 천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종의 위치로 창조되었다.(히1:14) 하나님과 사람의 바른 관계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고 사람은 아들이 되는 생명의 관계로 율법의 관계가 아니다. 사람은 율법의 세계에 있는 천사를 다스릴 위치에 있는 피조물이다.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6:3)
죄(罪)란 아들의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 종의 자리로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죄(罪)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 아래 천사가 있는 것인데 사람이 천사가 부러워 천사의 위치로 이탈했다는 것이다. 즉 아들이 종의 위치로 위치를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그러니까 의는 위치를 이탈 한 사람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것을 의(義)라고 한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의 관계 하에 있지 않고 생명의 관계 하에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위치를 이탈하여 종의 위치, 곧 율법의 세계로 이탈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원래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이 아니고 사람의 범죄함으로 들어 온 것이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갈 3:19)
그래서 이것은 사람에게 적용될 법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율법이 말하는 것들은 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입을 막아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롬3:19)
그래서 율법은 사람에게 죄와 사망의 법이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원래의 세계인 생명의 세계로 위치를 옮긴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8:2)
성경은 이렇듯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선과 악의 도덕적인 세계가 아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생명의 관점에 기록된 책이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항상 생명의 관점에 보아야 한다.
4. 구속(救贖), 회개(悔改)
구속이란 타락한 인류, 곧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원래의 위치로 옮기었다는 의미다. 사람은 씨-하나님 앞에서 흙-사람의 위치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사탄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3:4~5) 라는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하셨다, 즉 흙-아담은 씨가 되려고 하였지만 사람은 본질이 흙이기 때문에 결코 씨가 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확증되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신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신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임으로 심판받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인류 유사이래 가장 신과 같은 사람이었고 아담-신과 같은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심판받으셨다. 예수님이 만일 죽이 않았다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창3:4)라는 사탄의 말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반 사람과 다름없이 너무도 평범하게 죽으셨다. 사탄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폭로된 것이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사람 예수가 신-사탄에게 승리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승리고 하나님의 승리다. 씨-하나님 앞에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신 것이다. 그러자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씨-생명을 주셔서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이다.(고전15:20) 사람의 위치를 지키심으로 사탄에게 승리하심으로 아담이 잃어버렸던 사람의 위치, 곧 인격(人格)을 되찾아 오신 것이다. 이것을 구속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또한 성경은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라고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렸던 흙-사람의 위치를 되찾아 오신 것이다. 이것을 ‘구속’이라고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위치, 씨-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흙이라는 위치를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확증된 것이다. 예수라는 가장 신과 같았던 인생도, 즉 1등 짜리 인생도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2등 이하는 십자가에 갈 필요도 없이 다 죽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으면 살아날 인생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확증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이 아니고 ‘함께’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동안 신도 아니면서 신처럼 행세하였다. 즉 사람은 무교병으로 지어졌는데 유교병처럼 행세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유교병이 아니고 무교병이다. 사람은 흙이지 씨가 아니다. 사람이 흙이라는 위치가 진실이고 씨-신과 같은 위치는 거짓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히 확증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사람의 위치를 찾아 온 것, 이것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구속( 救贖)’이라고 하고 사람의 입장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의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을 ‘회개(悔改)’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