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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 23:46)

올더스조에 2017. 12. 8. 11:13

성경에는 3번에 걸쳐 ‘내 영을 맡긴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 다윗.
“주의 손에 내 영을 맡기나이다. 오 주 진리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 31:5)  

- 예수님.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눅 23:46)
 

- 스데반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그가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 7:59).

 

내 영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고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이것을 알기 위해서 창세기 2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 2:21~24)  

위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이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원 계시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계시해 주고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아담은 사람과 그리스도 둘 다를 예표하고 이브는 부활생명 곧 교회를 예표하고 ‘잠들다’라는 말은 죽는다는 의미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것은 큰 신비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여기서 보면 아담-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 부활생명인 이브를 산출했다. 이 말씀이 계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아담으로 태어나서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죽음 통과해서 부활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라는 것을 계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 계시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계시이다. 

우리가 죄라는 관념을 잊어버리고 순수하게 이 말씀을 바라보자.

우리는 죄 때문에 죽음이 왔다고 생각하지만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부활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반드시 잠자는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아담이 죄를 지어 죽음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담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창 3:22) 하나님께서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의미는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그날 안에(in the day) 죽으리라’ 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그날 죽지 않고 960살을 살다가 죽었다. 이것을 육체의 죽음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이것은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망의 어원적 의미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으면 육체가 살았으나 죽은 것이고 연결되어 있으면 육체가 죽었다 하더라도 산 것이다.
그리고 위 말씀은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는 영-하나님과 육-사람이 실질적으로 연합이 된다는 의미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이다. 그런데 성경의 기본관점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먹어야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도 영생을 얻기 위해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했지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믿음’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사실은 먹으라는 의미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요 6:54)

사복음서에서도 처음부터 ‘먹으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 처음에는 ‘믿으라’라고 하다가 요한복음에 와서 예수님도 자신을 먹어야 영생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을 먹어야 영생이 있다고 하자 이때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다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 하면서 오해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의 연합은 어느 일방이 먹히는 것이 아니고 결혼이라는 대등한 관점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먹고 먹히는 관계 안에서 연합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먹어야 하고 하나님도 사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먹고’ ‘먹힌다’는 말은 죽는다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죽는 것에 대해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진다’, 또는 ‘죽음을 맛본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하나님의 왕국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9:27)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는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요 8:52)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하나님은 영이시고 소멸시키는 불이시다.(히 12:29)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불의 혀’ 같다고 하는 것이다.(행 2:3) 구약의 제사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불에 태우는데 제물은 사람 자신을 상징하고 불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피조물은 불을 만나면 태워져 재가 되고 연기가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음식으로 드시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제물은 불에 태워지는 번제헌물로 드려지는 것이다.
  

이제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왕상 18:38~39)  

여기서 ‘주의 불’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핥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먹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가 불에 태워진다는 의미는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불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서 죄가 있건 없건 모든 피조물은 태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 자는 죄가 있건 없건 다 죽는다는 것이다.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고 스스로 조심하여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 죽으리라, 하매’(출 10:2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도 단순히 우리의 죄만을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큰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이식하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의 희생물이 되심으로 이를 먹은 사람들의 생명이 되셨고, 사람으로서 번제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죽은 자가 가운데 일어나신 첫 열매 – 부활의 몸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어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영적인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살리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니다. 육은 죄가 없다 하더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그래서 우리는 육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야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수 있는 것이다. 공중에 살려면 새의 몸을 입어야 하고, 물속에 살려면 물고기의 몸의 입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영적인 몸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고전 15:40)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이 처음 창조되어진 대로 육신을 입고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을 입고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최종 목표다. 그 세계에 살려면 그 세계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 본성에 속한 몸 곧 육신으로 태어나서 영에 속한 몸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 15:46)  

사람은 죄 때문에 육신에 속한 몸에서 영한 속한 몸을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이렇게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하게 죄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 왔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오해이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의식에서 드려지는 제물은 우리 자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예표하는데 이 제물은 하나님 앞에 두 가지 위치로 드려진다. 희생물과 헌물이다. 희생물은 죄 값을 치루기 위한 것이고 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드려지는 제물인데 공통점은 둘 다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 헌물도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레위기의 다섯 가지 제물-번제헌물, 음식헌물, 화평헌물, 죄헌물, 범법헌물-중 음식헌물을 제외한 다른 4가지 제물은 드리기 전에 먼저 죄로 인한 희생물을 드리고 죄와 관계없는 헌물을 드린다. 그런데 음식헌물 만은 희생물을 드리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헌물은 불에 태워지는데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께서 먹는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5:4)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영생이신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이라고 한다. 생명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이것은 육적이건 영적이건 동일하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 4:4)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고 육적 생명을 위해 식물의 열매를 먹을 것으로 주셨고(창 1:29) 영적 생명을 위해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하셨다.(창 3:22)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금 나와라 뚝딱하면 다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사람과 나무의자가 연합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모든 만물의 두 존재의 연합은 상호 공통지점에서 연합되어진다. 물과 기름이 연합이 되려면 중화제가 있어야 한다. 이렇듯 하나님과 사람도 연합이 되려면 중개자가 있어야 하며 그것도 반드시 중개자의 죽음 안에서 상호 연합된다. 다른데서는 안된다.  

모든 만물의 연합은 죽음, 곧 영안에서 연합된다. 예를 들어 사람과 나무의자가 연합되려면 둘 다 불에 태워져 재가 되면 연합된다. 쇠와 쇠가 연합되려면 용광로라는 불에 들어가 녹여지면 연합된다. 흙과 흙이 연합되려면 진흙으로 빚어져 불가마에 들어가 구워지면 도자기로 연합된다. 이렇듯 물질은 불-영안에서 연합되는데 이는 곧 죽음 안에서 연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도 반드시 죽음-영안에서 연합되는 것이다. 영만이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합을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결혼이라는 대등한 관점에 표현하고 있다. 즉 하나님도 사람을 먹어야 하지만 사람도 하나님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우리도 하나님께 먹혀야 하지만 우리도 하나님을 먹어야 영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근원적 위치를 음식헌물로 표현하고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고후 5:4), 또한 예수님도 오셔서 영생을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내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내 피는 참으로 음료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요 6:54~56)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께 헌물로 드려져야 할 위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희생물이라는 위치가 추가 된 것이다. 우리의 죄로 인한 희생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 되심으로 값을 치루었다. 그래서 성경은 희생물이란 말 그대로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보고 죽는 희생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롬 12:1) 현재 우리가 죽는 것은 죄로 인해 죽는 것이 아니고 죄와 관계없이 헌물로 죽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말할 때 헌물이라고 한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 4:6)  

예수님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의 위치와 사람의 근원적 위치인 헌물, 두 가지 위치로 드려졌지만 우리는 오직 헌물의 위치로 드려지는 것이다. 희생물은 제단 주위에 피를 뿌려 대속하지만 헌물은 생명의 연합을 위해 반드시 하나님의 불에 태워졌다. 그러니까 희생물은 법리적인 것이지만 헌물은 유기적인 것이다. 대속은 법리적인 위치지만 구속은 유기적인 위치이다. 우리의 죄로 인한 법리적 심판은 예수님께서 대속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한 생명의 연합을 위한 과정은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헌물로 드려지는 것이다.  

레위기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종류가 크게 희생물과 헌물이었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도 희생물과 헌물의 두 가지 위치로 드려졌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 하고 숨을 거두셨다고 마태와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고 숨을 거두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하나님’하고 부르는 것은 심판자와 죄인의 관계이다. 그런데 심판자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친밀한 관계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간격보다 큰 차이다. 구약시대 율법하에 있던 유대인들의 개념하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니까 유대인은 사람이 되어 어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냐고 하면서 참람하다고 하였던 것이다. 십자가상의 예수님께서 ‘하나님’하다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상황의 대반전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지 십자가를 심판의 의미로만 알고 있지만 십자가-죽음이 있어야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하나님’ 하다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피조물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로 전환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여’ 라는 말은 희생물로 드려지는 것을 의미하고 ‘아버지여’ 하는 것은 헌물로 드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메시아의 고난을 표현한 시편으로 알고 있는 시편 22편도 전반부는 고난을 나타내지만 후반부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로 대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시편22편은 총 32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1절부터 18절까지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18절부터 32절까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상적인 관계, 하나님 앞에 헌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표현하는 구절이다. 1절은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되지만 19절에는 ‘그러나(but), 오 주여, 주는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오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하면서 대반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내 영을 드린다’는 의미는 구약의 제사 의식에서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헌물이 된다는 의미로  제물이 불에 태워지면 재,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불에 태워지면 없어지니까 내가 영이 되어 드려진다는 의미다.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은 영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가 들어오기 전 이미 창세전에 계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인간의 육체가 죽어야 한다는 낮은 관념을 버려야 한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그러므로 ‘내 영을 맡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의 근원적 운명-번제헌물로 드려진다는 의미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