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위대한 질문 -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가 창세기 3장 9절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성경구절을 주제로 삼아 ‘신의 위대한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혼동 그 자체였다. 그는 신학은 있을지언정 신앙은 없는 사람이다. 사실 이 말씀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른다면 사실 성경 전체를 모르는 거와 같다. 그리스도인라면 반드시 이 말씀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질문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위치를 이탈하자 ‘네가 무엇을 했느냐?’ 라고 행위를 물으시지 않고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인간의 근원적 위치를 물으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아담이 그러했듯이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나무 뒤에 숨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숨는다.(창3:10)
그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숨었나이다.(창3:10)
어떤 이는 종교라는 나무 뒤에, 어떤 이는 도덕이라는 나무 뒤에, 심지어 어떤 이는 의의 나무라는 나무 뒤에 자신을 숨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해 주신 위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쌓아 올린 종교, 도덕, 명예, 의를 내어 놓으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출제하신 시험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사탄에 속은 인간은 출제자의 의도와 관계없는 답만을 하고 있다. 출제자의 의도와 관계없는 모든 답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인격(人格)으로 창조됨
창조주는 만물에게 각자의 격을 부여하였다. 사람은 인격으로 창조되었다. 인격은 무엇인가? 사람에게 정해진 위치다. 개에게 정해진 위치는 개격이고, 소에게 정해진 위치는 소격이다. 모든 만물에는 정해진 격이 있다. 그것은 고유한 것이다. 절대로 변화될 수 없고 변치 못한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고 바꿀 수도 없고 교환할 수도 없다. 이것은 정해진 것이다. 개를 가지고 염소를 만들 수 없다.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염소가 될 수 없다. 염소를 가지고 개를 만들 수도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사람이지 신이 될 수 없다. 어떤 것도 자기의 격을 바꿀 수가 없다. 이것이 격이다.
사람은 등 뒤에 누가 있는지 안 보인다. 그런데 만일 등 뒤에 누가 앉아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아마 그를 보고 대단하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 이상의 어떤 것을 하면 영웅처럼 생각하고 신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신처럼 된 것도 괴물이고 동물처럼 된 것도 괴물이고 다 괴물이다. 사람은 사람처럼 된 것이 사람이다.
사람에게는 정해진 위치가 있다. 이것을 절대로 넘어서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한다. 사람은 사람이지 사람 이상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은 사람 이상이 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신선이 되어서 몇 백 년을 산다든가, 아니면 하늘을 통달해서 뭔가 되어 살려고 애를 쓴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으나 그 중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창2:18) 하였는데 먼저 창조된 가축들과 짐승들 중에서는 ‘아담을 위해서는 합당한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더라.(창2:20) 하였다. 그래서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이브를 지은 것이다. 여기서 아담은 하나님을 예표한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째 날까지 동물을 다 지으시고 왜 또 사람을 지으셨는가? 이는 아무리 봐도 동물들은 하나님의 배필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필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지으신 것인데 그 사람의 중심 모양은 인격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그를 대신할 위치와 존재를 가지고 태어났다. 사람은 다른 것을 다 못해도 이것은 할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이다. 도를 닦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하고, 천당을 가는 것도 열심이 있어야 간다. 게으른 사람은 천당에도 못 간다. 심지어 구원을 받는 것도 열심이 있어야 받는다. 이러한 능력위주의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못 받도록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민이 다 자기 백성이고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인데 우리 인간들처럼 50%는 합격시키고 50%는 탈락시키겠는가? 내가 아버지라면 내 자녀들이 10명인데 그 중에 50%는 탈락시키고 50%는 합격시키고 하겠는가? 아버지 같으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합격시키려고 할 것이다. 시험문제를 내서 불합격되면 문제의 난이도를 더 낮출게 아니겠는가? 어차피 10명이 다 합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못하지만 아버지는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그래서 만민이 다 구원을 받도록 만들어 놓았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인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인격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신할 위치와 존재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다른 것은 다 못해도 이것은 할 수 있다. 기도도 참 열심히 해야 된다. 기도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뭔가 좀 신령하다는 사람, 조금 괜찮아 보이는 사람은 그냥 된 게 아니다. 다 열심히 해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 가도 그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보통 사람은 다 불합격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격만 찾으신다. 인격만이 하나님께는 합격이다.
그날에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vs.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창3:5)
똑 같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것을 먹는 ‘그날에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하였고, 사탄은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창3:5) 하였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에서 단절된다는 말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임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될 것이라는 말이다. 무엇이 하나님 생명에서 단절 되었는가? 인격이 단절된다는 말이다.
한 편은 죽을 것이라 했고 또 다른 편은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날 안에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했다. 무엇이 죽는 것인가? 인격이 죽는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육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원래 안 죽도록 만들었는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만물은 한 번 낳았다가 죽도록 만들어져있다. 사람만 안 죽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되리라.’(창3:5) 고 속였다. 사람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사탄은 동일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사람은 원래 신들과 같이 죽지 않는 존재다. 그러니 열심히만 하면 너도 신들과 같이 될 수 있다’ 라고 속이고 있다. 사탄은 또 말하기를 지금도 ‘사람이 멀쩡하지 않냐, 잘 살고 있지 않냐, 훌륭한 일을 하고 있지 않냐, 놀라운 사람이 많지 않냐, 행복한 사람 많지 않냐, 너도 이 사람들과 같이 살고 싶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로는 다른 모든 것은 할 수 있어도 하나님 나라가 안된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향해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었도다.’(계3:1) 고 한다.
사람도 사람의 위치에 있어야 산 것인데 사람의 위치를 벗어난 것은 죽은 것이다. 다들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반드시 죽으리라’ 했던 그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이 만약에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보고 ‘반드시 죽으리라’ 했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나님은 성토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위치를 이탈한 사람은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기능만 살아 있는 것이다. 자기를 지으신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다 죽어버렸다. 마이크는 소리를 확산하려고 만든 것인데 마이크 안에는 울림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게 울려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완전한 데 그것이 없다면 그것을 보고 죽었다고 한다. 그것은 금으로 만들어도 소용이 없고 은으로 만들어도 소용이 없으며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 소리가 나면 산 것이고 소리가 안나면 죽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되었으면 성공한 것인가? 그것은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다. 기능이 죽어 버린 것이다. 자기 고유의 기능이 죽었다. 사람이 정해진 위치를 버린 것이다. 자신의 격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을 보고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고, 소라고 할 수도 없고, 신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신 같다면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람인 것 같지만 놀라운 사람이 아니고 그것은 사람도 아니고 신도 아니라 괴물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것을 추구한다. 신 같아지기를 좋아한다.
사람은 살아 있는 혼으로 만들어짐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고 코에 생명의 숨이 불어 넣어져서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혼이라는 것은 우리가 얼른 알기 쉽게 지, 정, 의 같은 기능들을 말한다. 이 기능들은 누구에 의해서 쓰이는 것이지 그 기능 자체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혼이라는 것은 살아 있기는 살아 있지만 누구에 의해서 쓰여 질 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기능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인지해서 무슨 형상으로 표현하는 그런 기능이다. 사람은 그것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다. 무엇을 보면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새겨서 다시 만들어 낸다. 이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능이다.
그림이라는 것은 물건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림은 사진과는 아주 다르다. 사진을 찍어 놓으면 똑 같다. 그런데 그림은 똑 같지 않다. 똑 같은 것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란 말이다. 그림을 잘 그려 놓은 것은 똑 같이 그린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보면서 느껴지는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잘 그린 그림이지 사진과 똑 같이 그린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 아니란 말이다. 사람은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 피카소의 그림을 잘 보라. 자세히 보면 눈알 하나도 제대로 그려 놓은 게 없다. 이상하게 그려 놓았는데 그것을 보면 생각하게 만든다. 그냥 눈을 그려 놓으면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이것을 생각이 몇 바퀴를 돌아서 그린 것이다.
사람만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 보고 듣고 만진 것을 인식해서 그것으로 내가 다른 것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참 특이한 동물이다. 무슨 형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만물은 사람에 의해서 다시 표현된다고 봐야 한다. 만물은 자기대로 있는데 사람이 와서 보기에 따라 다 다르게 표현된다. 이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표현하고, 똑 같은 꽃을 보고 왔는데 한 사람은 이렇게 그리고 한 사람은 저렇게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사람에 의해서 다시 표현되는 데 어떤 사람에 의해서 표현되면 별게 아닌데도 굉장히 좋게 표현되고, 어떤 사람에 의해서 표현되면 아주 좋은 데도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 써 있어서 성경이 나에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보고 인지하는 사람이 그 사람대로 또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생을 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그러나 세상 책은 여러 번 읽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성경은 평생을 읽는다. 볼 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사람에 의해서 다시 표현된다. 성경도 어떤 사람이 보면 약이 되고 어떤 사람이 보면 독이 된다. 사람을 죽일 때도 성경으로 죽였고 사람을 살릴 때도 성경으로 살린 것이다.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성경대로 한다고 하면서 성경을 빙자해서 죽였다. 유대인들도 성경대로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묘한 책이다. 이렇게 보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되도록 쓴 책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였다.(요16:2) 왜냐하면 하나님을 참람하게 하는 사람을 그냥 두면 내가 불의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람하게 여기는 자는 죽여야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참 특이한 동물이다. 하나님이 지어놓은 만물을 다시 인식해서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내는 기능이 있다. 이것이 살아 있는 혼의 기능이다.
이 기능이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신할 수 있는 이 기능이 하나님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음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알고 표현해 줘야 한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알면 표현을 할 수 있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도 있고 음악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을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느끼도록 표현 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살아있는 혼이다.
그런데 이 기능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려면 인격이 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런 놀라운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려면 인격이 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사람은 묘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기능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면 굉장히 좋은 것이다. 그런데 비정상적으로 사용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남에게 해를 준다든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격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면 재주가 있을수록 잘 쓰여질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인격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고 삐뚤어져 있으면 재주가 많으면 많을수록 문제가 된다. 좀도둑이 대도가 된다. 그러므로 인격은 정상적인 위치에 있어야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마귀가 인격을 이탈하도록 속임
마귀는 사람의 위치, 즉 인격을 흔들어 혼란시켜 버렸다. 이 위치를 버리면 신들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속인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하면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창3:5) 라면서 아담을 속인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 사람에게 ‘너는 숨이 코에 붙었는데 그래 가지고 되겠느냐?’ 네 위치를 버리면 너도 나와 같이 죽지 않고 능력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속인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속은 것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흙은 흙이지 흙이 씨가 될 수 없다.
이 위치를 이탈한 인간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바벨을 건설했다. 어차피 사람은 건축하는 존재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건축하라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런데 사람이 위치를 이탈해서 건축을 했는데 무엇을 건축했는가 하면 바벨론을 건축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기능을 가지고 바벨론을 건설하는데 썼다는 것이다. 북쪽을 향해 쏠 대포를 가지고 방향을 거꾸로 돌렸더니 남쪽으로 쏜거와 마찬가지다. 위치가 이탈되면 다른 데로 가버린다. 비슷한 것 같은데 전혀 아닌 것을 만들어버린다.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고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식은 하나님 같이 되었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죽어 버렸다. 지식에는 하나님 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된 것이다. 그러면 인간들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무엇이냐? 그것은 죽은 자의 행위이다. 죽음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다.(계3:1)
하나님을 돕는 천사와 거역하는 천사는 모양은 비슷하나 위치가 다르다. 위치가 다르면 다른 일을 하는 것이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모양이 비슷하지만 위치가 다르다. 그래서 아담은 대적하는 자가 되었고 그리스도는 그 나라를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성경이 예수님을 향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요1:14) 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굉장한 어떤 사람으로 생각을 하지만 생각해보라.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따라온 그 사람이다. 서른 살 남짓한 청년으로 조금도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생기기를 우리와 좀 다르게 생겼으면 안 버렸을 것이다. 눈이 세 개라든지 그러면 누구든지 하나님 아들이구나, 하고 알 것인데 똑같으니까 아니라고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대적하는 자가 되었고 그리스도는 그 나라를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고 부활하신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모양은 우리와 같지만 위치가 다르다. 모양이 다른 것이 아니고 위치가 다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격회복으로 시작됨
하나님 나라는 인격의 위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탈한 인격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가 없다. 그것은 바벨론밖에는 건설할 수가 없다. 인격을 회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구속이 필요하다. 원위치로 회복이 필요하다. 구속이란 원래의 위치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위치를 이탈한 사람은 아담이 나무 뒤에 숨었듯이 자기 위치를 감추고 양심이나 도덕이나 종교 같은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위치를 감추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양심을 강조하고 도덕을 강조하고 종교를 강조하고 이런 것을 모두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강조하는 뒤에는 자기가 숨어있다. 무엇을 주장하는 사람은 무엇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주장을 앞세우고 자기는 숨어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어떤 주장을 하면 자기가 그 사람이 되는 줄로 생각을 한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을 주장하는 사람, 도덕을 주장하는 사람, 종교를 주장하는 사람, 이런 특이한 사람들이 있다.
아담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조금씩은 다 있다. 그래서 어떤 것을 주장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듣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으신다. 인격, 그 위치를 지금 찾는 것이다. ‘넌 지금 어디가 있느냐? 어느 위치에 네가 있느냐? 네가 개의 위치에 있냐? 소의 위치에 있냐? 사람의 위치에 있느냐?’ 이 말이다. 그런데 아담은 나무 뒤에 숨었다고 했다. 선악의 지식나무 뒤에 숨은 것이다. 이 선악의 지식나무는 여러 나무들로 표현된다. 양심나무! 도덕나무! 종교나무! 많은 나무들이 있다. 능력나무도 있고 의의나무도 있다.
가인과 아벨은 자신들의 노력의 소출을 가지고 와서 자기들 소출 뒤에 숨었다. 양을 가지고 오고 곡식을 가지고 왔다는 말은 자기들이 농사를 지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양을 키운 것이기 때문에 가지고 온 것이다. 그것들이 자기들을 대표했다. 그러므로 자기들 소출 뒤에 숨은 것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것 뒤에 숨었다는 말이다.
그 다음 사람들은 천사들과 결합해서 큰 능력 뒤에 숨은 것이다. 옛적에 강력한 자들 즉 명성있는 자들이 되었다고 했다.(창6:4) 바로 거기 숨었다는 것이다. 요즘 사회에 나오면 다 그렇게 된다. 사람들이 다 거인들이 되려고 한다. 천사와 결합해서 거인이 되려고 한다. 왜 거인이 되려고 하는가? 그 뒤에 숨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큰 도시 바벨론! 바벨탑을 건설했다.(창11장) 왜냐하면 거기서 오르면 자기가 완전히 감춰진 사람이 되고 놀라운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나무 뒤에 숨은 인간의 모습이다. 오늘날 인간은 모두 이 선악의 지식 나무 뒤에 숨어 있다. 곧 율법의 세계 아래서 자기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는 어떤 경우에는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있는데 그런 것 뒤에 인간이 숨어 있다. 자기는 안 보여준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신다. 양심 뒤에 숨어도 알고, 도덕 뒤에 숨어도 알고, 종교 뒤에 숨어도 알고 하나님이 다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업적에 대해서는 관심 없고 오직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씨는 오직 벌거벗은 밭이 필요하다. 덧 씌어진 밭은 필요 없다.
하나님은 위치를 이탈한 인간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묻지만 인간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행위로 대답하려고 함
인간은 아담 이후 지금까지 ‘네가 어디 있느냐?’ 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항상 행위로 대답을 하려고 한다.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양을 길러서 왔습니다.’ ‘곡식 가지고 왔습니다.’ 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왜 자기를 안 내 놓으려고 하는가?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었기 때문에 못 내 놓는다. 나쁜 일을 해서 못 내 놓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었기 때문에 못 내 놓는 것이다. 행위로 대답하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행위를 내세우려니까 피곤한 것이다. 행위는 쉽게 하는 것이 아니다. 노력을 얼마나 많이 해야 되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행위인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
끝까지 자기 위치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아담은 여전히 지금도 여러 가지 나무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누가 특별히 그렇다는 것보다도 우리 모두가 그렇다. 종교, 능력, 양심, 도덕, 정치 등등으로 자기를 가리고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 사람 자체를 볼 수가 없다. 다 가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거창한 사람일수록 보기가 더 어렵다. 왜냐하면 가리 막이 더 크니까 안 보인다.
사탄은 나무 뒤에 숨어있는 아담을 두둔한다. 그리고 자기 종이 되게 하는 것이다. 숨어 있으니까 종을 만들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을 구원하기 위해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찾고 있다. 왜냐하면 ‘네가 무엇을 했느냐?’ 고 물으면 진짜 그렇게 물으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어떻게 불꽃같은 하나님 앞에서 내 행위를 가지고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겠는가! 하나님이 진짜 행위를 물어 버리면 모든 사람이 멸망이 된다. 위치를 묻는 것이 축복이다. 이 위치를 물을 때 내가 대답을 하면 복이 된다. 행위를 물을 때까지 기다리면 저주가 된다.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주어서 우리의 행위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를 몰랐는데 율법이 오니까 나의 죄가 드러난다.(롬3:20) 율법으로는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눈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자신의 경륜과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 밖에 있는 한 의(義)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속이다.(롬3:24) 위치를 이탈한 인간을 원 위치시키신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고 위치를 물으시지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변명만 계속하니까 우리의 구속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진짜 행위를 물으면 멸망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치를 물은 것이 축복이고 은혜다.
인간은 위치를 이탈하여 자신을 변명하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면 사탄에게 끌려 다니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위치를 내 놓으면 쉬운데 내 위치를 감추려고 계속 변명을 하면 내가 행위를 가지고 자꾸 변명하게 된다. 행위를 가지고 변명을 하다 보면 ‘인간은 불완전하다’ 이렇게 나온다.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거기 끌려 다닌다. 그래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이렇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행위를 내 놓으려고 하면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설 수가 없으니까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렇게 된다. 사탄은 무엇을 원하는가? 사탄은 우리가 무용지물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쓰이지 못하게 되기를 원한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 쓰일 수가 없다. 끌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해결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가서 마귀와 접전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시험을 받는 것과는 다르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고 주리신 상태에서 광야로 나가셨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사탄과 접전하신 것이다. 사탄에 비해 연약한 인간의 위치, 이 위치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부러 마귀의 시험을 받은 것이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거든...’ 이것이 마귀의 말이었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해봐라. ‘네가 하나님 아들이거든...’ 네가 하나님 아들이냐? 그렇다면 돌로 빵을 만들어봐라. 네가 하나님 아들이냐? 그렇다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봐라. 이렇게 시험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이 무엇인지 알고 사탄이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도덕이든지 종교든지 뭐든지 완전무결한 자를 하나님 아들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네가 하나님 아들이야? 그러면 돌로 빵을 한번 만들어 봐라, 하고 시험을 한 것이다.
그러니 행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시험에 대답할 수가 없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면’ 이러면 자라 모가지가 들어가듯 쏙 들어가 버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마귀의 우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 세 가지 대답의 요점이 ‘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사람이다. ‘네가 말하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나는 사람이다. 어떻게 사람이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느냐? 어떻게 사람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냐?’ ‘나는 사람이다’는 말에 마귀가 물러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싸움이 묘한 싸움이다. 이 간단한 말을 가지고 전쟁을 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냐?’ 그러면 ‘나는 인간이다.’ 이러면 끝나는 전쟁이다. 이렇게 하면 끝나는 전쟁을 변명하고 또 변명을 하다 보니 수 천 년을 내려오고 내려올수록 변명은 더 많아지고 짐은 더 많아져서 끝이 없는 것이다. 이 끝없는 전쟁에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가져야 이런 변명이 없어지게 된다. 알고 보면 간단한 문제다. 나는 인간이다. 너 돈이 있으면 이것 좀 해봐라 할 때 돈이 없는 사람이 있는 척 하려면 어렵다. 없으면 없다고 하는 것이 쉽다. 없는 사람이 있는 척 하려면 어렵고 있는 사람이 또 없는 척 하는 것도 어렵다.
사람이 사람으로 있으면 아주 쉽다. 숨이 코에 붙었으니 숨이 코에 붙은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인정하면 쉽다. 내가 누구를 판단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누구를 심사할 자격이 있는가, 아무 자격도 없다. 그러니 나는 아무런 자격도 없다 하면 쉽지만 뭔가 있는 걸로 생각하면 어렵다. 자기가 판단한 그것으로 또 자기가 판단을 받는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이러저러한 점을 판단을 했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또 그것으로 판단을 한다. 그러니 끝이 없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난후에 그때부터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여기서 승리하지 못하면 복음이 안 된다.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교회가 아무리 있어도 하나님 나라가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인간이 자기 위치를 알아야 된다. 나는 영적이니 안하니 이런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오합지졸일 뿐이다. 나는 인간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구성체는 정상적 인간들이 모인 연합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인 체하다가 송사하는 사탄에게 속아서 자신의 위치를 부인하고 변명하는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임을 선포하심으로서 승리하셨다.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속아서 종이 되었으나 예수님은 사람의 진실한 위치, 즉 인격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드러내어 승리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 복음을 선포하셨다. 이것이 인간 승리다.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려 하다가 속아서 종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진실한 위치에서 그 인격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드러내어 승리하셨다. 왜 아담이 그렇게 했는가? 인격을 부끄러워 한 것이다. 자기 인생의 본질을 생각해 보니 한줌의 흙에 불과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겠고 그래서 너무 초라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벗어나 하나님처럼 되어 팔자 고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참 자랑스럽고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 영광스럽게 보였다면 왜 그것을 먹었겠는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한 것을 왜 먹었겠는가? 사람의 위치가 천사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초라하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사람처럼 초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었던 그 사람이 지금 나무에 매달려 꼼짝 못하고 죽었다. 그것을 아담이 본 것이다. 그냥 먹었겠는가 생각해 보라 그 인격을 부끄러워하면 우리는 속아 넘어간다. 그 자리를 부끄러워하면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마찬가지다. 이 자리를 부끄러워하면 넘어가 버린다. 신앙이 좋고 안 좋고 이것도 아무 소용없다. 이 위치를 부끄러워하면 나는 속아 넘어가 버리고 만다. 지금 모든 이단들은 보라. 사람들을 어떻게 유혹하는가? 모두 이것을 가지고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것을 드러내고 승리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 복음을 선포했다. 이것이 인간 승리다. 복음 선포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선포를 의미한다. 인간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승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간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지키셨다. 이를 통해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음을 죽음으로 확증한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 자신들도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사람들은 드디어 예수님에게 와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주는 알았다. 그런데 그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말았다. 모든 아담의 기대와 소망이 끝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을 하나님이 참사람으로 인정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았다고 하는 것은 죽은 것이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인격만 살았다는 것이다. 인격의 승리, 죽었는데 승리다. 이 승리를 인정하면 이것이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다. 기대를 안했더라면 실망도 없을 텐데 기대를 잔뜩 했다가 실망이 컸다.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으니 사망이 온 것이다. 그런데 인격이 승리하면 사망이 없어진다. 사망이 승리에 삼킨바 될 것이다. 사망은 인격의 승리 앞에 무능해 질 것이다.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하였으나 아담은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변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율법이 와서 죄를 깨닫게 하면 사망에 빠지는 것이다. 자기는 종교와 율법과 양심으로 다 변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율법이 오면, 시험지가 오면 죄를 깨닫게 된다. 공부를 못한 것이 언제 불거지는가? 시험지가 올 때다. 율법은 시험지나 마찬가지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가 있어도 죄가 죄인 줄 몰랐다. 죄라고 규정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이 오더니 죄가 죄로 다 드러났다. 행위를 자랑하려고 하면 결국 마지막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3:9) 이 말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라 했다.(고전15:56) 사망을 쏘는 것은 침이다. 죄가 찌르는 것이다. 죄의 힘은 무엇인가? 율법이다. 율법이 법률적으로 뒷받침하여 사망이 오게 된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가 누구로 인해서 이겼는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긴다. 예수님의 승리를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내가 지금 이기느냐, 지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이 승리한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승리하면 그 안에서 내가 승리한 것이다. 내가 승리할 수 없도록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승리할 수있도록 승리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에게 훈련을 받아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공자님에게 훈련받으면 공자님이 되겠는가? 석가모니에게 훈련받으면 석가모니가 되겠는가? 안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훈련받아서 인간이 되려면 되겠는가?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리는 그렇게 승리하신 것이 아니고 나도 승리하게끔 승리하신 것이다. 인격만 있으면 누구나 승리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인격으로 승리하신 것, 이것은 누구나 승리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누구나 다 인격이라는 자리가 있다. 인격밖에 없는 인간들의 대표자가 승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무 것도 없다. 물위를 걸어간 것도 없어졌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것도 없어지고 다 없어졌다. 인격밖에 없다. 사람이 저런 것이구나 하는 인격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자리에서 사탄이 물러갔다. 사탄이 할 말이 없어졌다. 인격밖에 없는 대표자로 승리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승리한다. 동그라미만 치고 나오면 다 100점이 되도록 문제를 내놓았다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누구도 다 합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은 우리의 모두의 승리를 대표하신 것이다. 인격의 승리를 대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승리를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지 나를 점검해보고 있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격밖에 없는 인간의 대표자로서 승리하셨다.
인격이 승리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이것 때문에 온 것이다. 사람이 왜 불안한가? 사람이 왜 부끄러운가? 사람이 왜 못난 짓을 하는가? 사람이 왜 그런가? 생로병사가 왜 왔는가? 왜 인생은 이 모양인가? 이 모든 문제가, 이 모든 불만이 어디서 오는가? 인격이 죽어서다. 인격이 승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진다. 정말로 부족한 것이 없어진다. 물론 돈은 필요하다. 돈 제외하고, 인격이 승리하면 인생문제는 다 없어진다.
생명은 하나가 완전해지면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온다. 인간의 문제는 인격을 잃어버린 데서 온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손상시킨 것이다. 술집을 만들어라, 빠찡코를 만들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인격을 흔들어버렸다.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인간이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문제는 단 하나다.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활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의 정상적 위치를 지킴으로 생명노선 안에서 부활하셨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인생의 진실을 지킴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격의 승리고 신실하신 이와 참되신 이가 승리한 것이다.(계19:11) 주님의 일이란 인격의 승리는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고전15:58) 라는 말씀은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인격의 승리를 전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인격으로 부활하셨다. 어떤 죽은 사람인가? 공동묘지에 있는 사람인가? 그것이 아니다.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고 했던 그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다. 사탄에게 유린되었던 그 인격이 부활한 것이다. 그분의 승리는 인격의 승리다. 주님의 일은 무엇인가? 인격을 제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 주님의 일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관해 여러 가지 말을 하다가 갑자기 15장 맨 마지막 절에 ‘그러므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고전15:58) 라고 말하고 있다. 무엇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인가? 물론 사도바울은 우리가 부활할 것이니 현재의 고난에 흔들리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살라는 의도도 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것 보다는 우리가 무슨 모양으로 부활을 할 것인가, 어떻게 될 것인가, 저 사람이 부활하면 나는 부활하지 않을 것인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 부활할 것인가, 지구는 언제 종말이 올 것인가, 이런 헛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그것뿐이겠는가. 그 외에도 인생의 여러 가지 헛된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격이 승리하면 다 승리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의 일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것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다.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숨기면 지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다 내놓으면 승리한다. 예수님은 사탄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시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하나님 왕좌 우편으로 올라가셨다.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고난 받는 것이 육신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던 사람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 아들이냐, 인간도 제대로 안 된 놈이 무슨 하나님 아들이냐?’ 고 조롱받는 것이 더 괴로운 일이다. 죽는 것은 어차피 죽을지라도 심지어는 제자들마저도 고개를 돌리고 가버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볼 때 베드로가 고개가 쑥 빠져서 간다, 요한이 고개가 축 늘어져서 간다, 그것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어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것을 우리가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진실로 생각해야 내 인생이 진실해진다. 그것을 모르면 내 인생이 아무리 진실하려고 해도 진실해질 수가 없다. 무엇이 진실인 줄 모르는데 어떻게 진실해지겠는가!
주님의 일은 우리 인격을 되찾아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인격의 세계를 확장시켜야 된다. 기능 위주, 능력 위주로 가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인격을 선포하는 일이다. 이것을 멸시하는 인간들에게 이것을 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피조물은 각자의 근원이 있는데, 근원을 이탈해 있으면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다독여도 안 되고 쓰다듬어도 안 된다. 그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되겠는가? 안 된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다. 그런데 이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인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마스터키가 이것이다.
인격을 잃어버려서 문제가 생겼는데 다른 것을 아무리 한다고 해서 되겠는가? 옛날에 비하면 우리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 얼마나 부유하고 편안한가? 그런데 인생문제가 더 많다. 옛날에 시골에 살 때는 인생문제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너무 인간문제가 복잡하다.
우리가 모든 조건을 가질수록 문제는 더 많아진다. 왜? 인격이 점점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자꾸자꾸 인격은 속으로 들어가고 다른 것을 가지고 인생을 해석하려고 하니까 더욱 더 복잡해진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으면 계산하고 이사 가기 쉬운데 뭐가 많으면 이사 가기도 어렵다. 똑같다. 이건희 회장 같은 사람은 죽음을 정리하려고 하면 너무너무 어렵다. 엄청난 기업이다 보니 회계사 등을 다 동원하여 인수인계하려고 해도 너무 너무 어렵다.
인간 문제는 조건을 더 만들면 더 쉬워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문제는 단순한 것인데, 이 단순한 문제를 복잡한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제는 간단하다.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위치를 이탈했던 인류를 원 위치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인격의 승리를 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고 묻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