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머리는 권위를 상징한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창조된 존재로 스스로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고 하나님을 머리로 하고 있다. 사람은 남자건 여자건 모두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하나님을 남편으로 머리로 두고 있다. 사람은 씨-하나님 앞에 흙-여자의 위치라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창3:22) 하나님은 창세기 2장의 아담과 이브를 통해 자신의 경륜을 계시하고 있다. 아담-남자는 하나님의 예표이고 이브-여자는 사람의 예표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계시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아내로 삼기 위해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자신을 표현할 몸으로서 절대적으로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조력자, 곧 아내로 삼기위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창2:18)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영-하나님과 육-사람의 연합,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표인데 계시록에 가면 이것이 달성이 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계22:17)
성령과 신부가 따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 돼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연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아직까지 결혼식을 치루지 않은 신부이다. 신부는 장차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거쳐 아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릴지니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이르렀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도다.(계19:7)
그러므로 이 땅에서 남녀가 결혼해서 사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들끼리 잘 살으라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대표로서 긴 머리를 길러 머리를 덮는 것은 나는 스스로 머리가 없고 내 머리는 남편,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인즉 참으로 자기 머리를 덮지 않는 것이 마땅하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11:7)
사람-여자가 하나님-남편을 머리로 두지 않는다면 나는 머리 없는 자로 스스로 하나님임을 자처하는 것으로 근원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 18장에 가면 하나님 없는 세상인 큰 바빌론을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녀가 마음속에 이르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아 있고 과부가 아니므로 결코 슬픔을 보지 아니하리라.’(계18:7) 라고 한다. 이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하나님을 머리로 두어야 하는데 스스로 ‘여왕’이라는 것은 자신은 남편-머리 없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질서 안에서 남자를 하나님의 예표로 여자를 사람의 예표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남자는 머리를 짧게 해야 하고 여자는 머리를 길러서 자기 머리를 덮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계시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본성적으로도 그것을 안다는 것이다.
만일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면 그것이 그에게 수치가 되는 것을 본성 그 자체도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여자가 긴 머리를 가지면 그것이 그녀에게 영광이 되나니 여자의 머리는 덮는 것으로 주어졌느니라.(고전11:14)
그러므로 예수님이 머리를 길렀다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에 여자는 아무리 이쁘게 생겨도 머리를 깍으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여성들에게 수치를 주기위해 긴 머리를 밀어서 거리로 쫓아내는 관례가 있다. 이렇듯 여자에게는 긴 머리가 영광이 되고 머리를 미는 것은 수치가 된다.
그런데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단호하게 여자는 긴 머리에 추가하여 수건으로 덮으라고 말한다.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여자는 다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하나니 그것은 그녀가 머리를 민 것과 전적으로 같으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거든 또한 깎을 것이로되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수치가 되거든 덮을지니라.(고전11:5~6)
위에서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여자는 다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하나니 그것은 그녀가 머리를 민 것과 전적으로 같으니라.’라는 문맥을 보면 여기서 여자는 분명히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여자다. 여자가 긴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바울이 여기서 깍으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긴 머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덮지 않고 기도를 하거나 대언을 한다면 그녀가 비록 긴 머리를 가지고 있지만 민 것과 전적으로 같은 것이기에 ‘자기 머리’ 곧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긴 머리에 추가하여 ‘만일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거든 또한 깎을 것이로되’ 라고 하면서 아예 깍으라고 심하게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여자가 긴 머리를 하되 그 머리를 덮지 않으려거든 심지어 깍으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짜 깍으라는 것이 아니라 반어법적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어서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수치가 되거든 덮을지니라.’ 라고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긴 머리를 깍거나 미는 것은 본성적으로 당연히 수치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당연히 머리를 길러서 머리를 덮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당연한 것으로 여자에게 영광이 된다. 여자가 긴 머리를 가지면 그것이 그녀에게 영광이 되나니 여자의 머리는 덮는 것으로 주어졌느니라.(고전11:15)
그렇다면 여자는 긴 머리만 가져도 그것 자체로 영광이 되는데 왜 또 그 긴 머리위에 또 덮으라고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그 이유를 한 가지로 답하고 있지만 대략 이는 두 가지 정도로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여자가 그 긴 머리위에 수건을 덮는 것은 긴 머리 그 자체로도 영광이 되지만 타락한 천사들로 인하여 확실하게 ‘아멘’으로 화답해야 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천사들로 인하여 여자는 머리를 덮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나니 이런 까닭에 여자는 천사들로 인하여 마땅히 자기 머리 위에 권능을 두어야 하느니라.(고전11:9~10)
이는 성경에 의하면 사탄이 타락할 때 일부 천사들도 동조하여 타락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에 그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마25:41)
마귀는 천사장으로 근본은 천사와 하나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사람이 먼저 타락한게 아니고 천사가 먼저 타락한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머리는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다. 그런데 타락한 천사들은 스스로 머리가 되기 위해 타락했으므로 머리가 없는 자다. 천사는 스스로 타락하였지만 사람은 사탄에게 속아 타락하였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이 타락한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있지 않고 사탄에게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뿌린 것을 두고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마13:28)라고 말씀하신다. 곧 사탄이 이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지옥 또한 원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보내기 위해 예비된 곳이다. 여기에 사람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피조물의 으뜸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천사는 종의 운명으로 창조되었다.(히1;14) 아들은 종을 다스릴 자다. 아들이 제 위치를 지키면 자동적으로 종도 제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사람이 중심을 잡으면 어그러진 창조질서가 정상으로 돌아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타락한 천사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한 천사들을 향해 여자는 사람의 대표로서 너희들은 머리 없는 피조물이지만 사람인 우리는 머리가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해 확실하게 선언함으로서 사탄으로 인해 흐트러진 비정상적 우주질서를 바로 잡을 중차대한 임무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표하는 여자들은 타락한 천사들로 인하여 긴 머리를 가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해야하고 그 머리 위에 수건을 덮음으로 확실하게 ‘아멘’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세상에서도 군인이나 경찰들은 모자를 쓰고 있다. 이것 또한 내 머리는 내가 아니라 이 모자를 씌워준 조직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조직이 시키는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도 대제사장은 머리에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관을 썼다. 이 또한 대제사장은 사람의 대표로서 사람의 머리는 하나님임을 만천하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덮다(cover)’라는 말은 구약에서 히브리어 카파르(kaphar)로 속죄, 화해의 의미가 있다.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여자건 구원받지 않은 여자건 다 본성적으로 긴 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교회 안의 여자들이 단지 긴 머리만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 여자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교회 안의 여자들은 사람의 대표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함으로서 우리는 너희들과는 다르다 라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 세상 사람은 기본적으로 마귀의 자식으로 곧 타락한 천사와 하나다. 그래서 그들 또한 머리 없는 자다. 그러므로 여자는 사람의 대표로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과 하나님의 머리되심에 감사하고 우리는 세상 사람과의 구별의 의미로 긴 머리에 추가하여 수건을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긴 머리에 추가하여 그 위에 베일을 덮는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려보자. 아마도 교회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아마도 천주교 등 일부 이단종파에서 쓰기 때문에 나온 반작용인 것 같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머리를 덮는 문제는 이 의미를 모르고 쓴다면 그것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경 말씀은 표면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이면은 영원하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창1:31) 하시면서 안식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매우 만족 하시고 안식하셨는데 아담은 자기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사탄에게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이 되고자 했다.(창3:5)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창조자를 모독한 것이다. 하나님은 좋다고 하는데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나를 왜 이렇게 밖에 만들지 못했습니까? 라고 항의하고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보면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의 죄 값은 동일하게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출31:14, 레24:6) 이러한 아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의 공식적인 죄명은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의 영적 의미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일관된 한 목표를 가지고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에 영이 생명이고 하나님의 목표는 영에 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게 하며’(요6:63) 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책으로 성경 말씀은 표면과 이면(영)이 있다. 그런데 표면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이면은 영원하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현대에 와서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이면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씀의 표면만 알고 이면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유대인들은 성경말씀을 어긴 예수님을 보고 참지 못했던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3:6) 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성경대로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하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요8:7) 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두 돌아갔다. 예수님은 그녀를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요8:11) 하시면서 글자의 사역이 아닌 영의 사역을 통해 그녀를 살리셨다. 성경대로 하면 간음한 자는 죽여야 한다.(레20:10) 그러나 성경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죽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다. 지금도 어떤 종교에서는 자기들의 경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도 생명이 없는 글자대로 하면 죽이는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롬3:20) 왜냐하면 율법은 기계적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사람에게는 적용하면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마저도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로 정죄를 당하신 것이다.
이러한 외형적인 실행의 문제가 초기 교회시대에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할례에 관한 문제였다. 할례란 사실 침례, 곧 십자가의 예표였다.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죽음을 통과해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의미를 모르고 할례 의식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인을 향하여 '할례받지 않은 자'라고 하면서 경멸하곤 했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할례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하면서 외형적인 의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운 창조물만 있느니라'(갈6:15)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외형적인 의식의 문제가 아니면 내면적인 생명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원숭이가 아무리 외형적으로사람 흉내를 낸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려면 사람으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요1:12)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외형적인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생명에 있다는 것이다.
'오직 속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글자 안에 있지 아니하고 영 안에 있는 마음의 할례니라.' (롬2:29)
사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남자들의 할례나 신약에 와서 교회 안에서의 여자들 머리에 수건을 덮는 것이나 영적으로 보면 같은 의미다. 할례가 침례, 곧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덮는 문제도 구속, 곧 그리스도안에서 침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신약경륜하에 있다. 신약경륜은 외형적인 의식에 있지 않고 내면적인 생명의 문제다. 그래서 신약에서 와서 할례를 행하는 외형적인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내 생명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래서 그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별된 민족으로서 상징이었던 할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한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로 말미암아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림으로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로 할례를 받았느니라."(골2:11)
결론적으로 여자가 긴 머리에 추가하여 머리에 수건을 덮는 문제는 이 의미를 모르고 덮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어디에서든지 머리로 자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장소에 가서 주님을 부끄러워하여 머리를 푹 숙이고 있다면 그것은 여자가 수건을 벗은 것과 같이 구원받지 않은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임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수치가 된다는 것이다.
여자들이 긴 머리에 추가하여 머리를 덮건 덮지 않건 그것은 교회 내의 자유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왕이면 그 의미를 알고 실행한다면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쓴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우리가 이 의미를 분명히 알고 남자건 여자건 어디에서든지 주님을 머리로 삼고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