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전쟁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올더스조에 2015. 3. 11. 22:42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를 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의 비밀은 감추어져 왔고 여러 이단들이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문제를 일으켜 왔기 때문에 기독교계에서는 이곳을 건드리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도 사탄의 작전일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근원이 잘 못되면 열매가 잘 못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제공하고 있는 정보를 통해 이에 대해 최대한 알아보기로 하자.

성경은 선악의 지식노선과 생명노선이라는 두 줄기가 있다는 것을 계시해 주고 있다. 우주 안에서는 어디를 가도 이 두 노선이 존재한다. 교회와 가정은 생명노선이지만 세상과 직장은 선악의 지식노선이다. 생명노선은 아들의 노선이고 지식 노선은 종의 노선이다. 회사 안에서도 사장과 종업원은 종의 노선이지만 사장과 사장의 아들은 생명노선 안에 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모든 법을 뛰어 넘는 생명 관계다. 원래 하나님은 사람을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 관계를 목표로 창조하였는데 사람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 인류의 문제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와 세상에서 말하는 죄의 의미는 차이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선하냐, 악하냐 이런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느냐, 이탈하지 않았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의 기준도 사람이 선하냐 악하냐, 위대하냐 위대하지 않느냐? 이런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했느냐, 이탈하지 않았느냐?의 기준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3:9) 하시면서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타락한 현 세상은 선악의 지식 노선, 즉 선악이라는 도덕과 지식이라는 능력이 가치 기준이 되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율법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세계에서 선악의 지식 세계로 위치를 이탈한 인류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그 씨를 뿌린 필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피조물의 머리로 창조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생명의 세계에서 인격 중심의 우주를 경영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다.

그래서 성경은 대부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의 지식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는 다섯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도덕적인 세상기준으로 보았을 때 지탄받아 마땅할 여자들이었지만 이들은 생명노선에 있던 여자들이었다. 이들 다섯 여자들은 인류를 대표한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세 가지 위치 하에 있다. 첫 번째는 피조물, 그리고 아들의 위치와 더불어 하나님의 아내가 될 위치에 있다.(21:9) 이 위치를 벗어나면 사망의 길이고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 하에도 이 운명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에서 가장 의구심이 있는 단어가 나무라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나무는 종종 인격적인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구약에서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올리브나무는 종교적 특권을, 무화과나무는 민족적 특권을 상징한다. 마태복음 1332절에서는 나무가 마귀를 상징하고, 에스겔서 31장에서는 적그리스도를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에스겔서 318절은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도 아름다움에 그와 같지 못하였도다.’ 하였고 에스겔서 3118절은 이처럼 영광과 위대함에서 네가 에덴의 나무들 중에 누구와 같으냐? ... 이것은 파라오(적그리스도 상징)와 그의 모든 무리니라. 하면서 나무를 적그리스도에 비유하고 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그분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잡고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아가사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그가 무엇을 보는지 그에게 물으시니 그가 쳐다보고 이르되, 사람들이 나무처럼 걷는 것을 내가 보나이다. 하거늘(8:23~24)

사악한 자가 큰 권능을 가진 것을 내가 본즉 스스로 푸른 월계수같이 뻗어 나갔으되(37:35)

그들이 짓되 다른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심되 다른 사람이 먹지 아니하리니 내 백성의 날수는 나무의 날수와 같으며 나의 선택된 자는 자기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리리라.(65:22)

그들이 푸른 나무 안에서 이런 일을 행할진대 마른 것 안에서는 무슨 일을 행하리요? 하시니라(23:31)

그리고 다니엘서 4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나무에 대한 꿈을 꾸었는데 한 가운데 있는 나무가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다니엘이 해석을 하였다.

왕이 보신 나무는 자라서 강하게 되어 그것의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아 그것의 모습이 온 땅에 이르렀으며....... 오 왕이여 그것 즉 자라서 강하게 된 것은 왕이시니 왕의 크신 위엄은 자라나서 하늘에까지 닿으며 왕의 통지는 땅 끝까지 이르나이다.(4:20~21)

사람과 나무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세포가 있고, 순환기가 있고, 숨을 쉬고, 손뼉을 치고, 노래를 한다. (44:23, 55:12) 모든 생물은 실재와 형상, 즉, 씨와 형상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무는 그 나무의 뿌리, 곧 생명-씨의 표현-형상이다. 그리고 그 나무의 열매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이다.(1:29) 예를 들어 감나무는 땅속에 있는 감 씨-생명의 표현이고, 감나무의 최종 산물은 감이라는 열매다. 사람은 나무를 먹지 않고 열매를 양식으로 취한다. 이 원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씨이시고 피조물은 그분의 어떠함을 표현하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아버지와 아들, 곧 씨와 열매, 실재와 형상의 관계로 창조하셨다. 하나님도 씨를 뿌려 사람 농사를 지으시고 인격이라는 열매를 거두신다. 그래서 만물 안에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있도록 그분의 권능과 신격이 보인다는 것이다.(1:20).

 

선악의 지식 나무

먼저 선악의 지식나무에 대한 성경의 정보를 살펴보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 여자가 본즉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3:5-6a)

여기서 창세기 35절의 신들이란 성경에 의하면 타락한 천사를 말한다. 사무엘하 1417절에 보면 내 주왕께서 하나님의 천사와 같으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간하시기 때문이니이다.’ 라는 말씀이 있듯이 분명히 선악을 분간하는 것은 천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겔서 2812절에 사탄을 묘사하는 말이 있는데 너는 지혜가 충만하며 아름다움이 완전하여 모든 것을 봉인하는 자로다.’ 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가 지혜아름다움인데 창세기 36절에서도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가 지혜아름다움으로 동일하다. 그런데 사탄은 이 충만한 지혜와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타락했다.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네 마음이 높아졌으며 네 광채로 인하여 네가 네 지혜를 부패시켰은즉 내가 너를 땅에 던지고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이 너를 바라보게 하리라.(28:17)

아담과 이브는 바로 사탄의 이런 면을 부러워하여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가 본즉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3:5-6a)

이 말을 요한일서 216절에서는 육신의 정욕(먹기에 좋고), 안목의 정욕(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인생의 자랑(사람을 지혜롭게함)’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요일2:16)

이것은 다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종교, 인생의 자랑-정치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빵과 종교와 정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2절에서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정치를 대표하는 그리스인(이방인)은 지혜를 구한다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결국 근원은 다 하나다. 계시록 203절에 옛 뱀은 창세기 3장에서 뱀으로 표현되었던 사탄이다. 그러니까 사탄이 에덴동산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성경이 계시하는 정보를 종합해 보면 선악의 지식나무는 사탄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나무

생명나무는 성경에서 창세기, 잠언, 계시록에 등장한다. 많이 나온다고 해서 중요하고 덜 나온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근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그 나무는 그 씨-생명의 표현이다. 그 생명이 그 나무로 표현된 것이다. 나무의 생명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살아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다고 한다.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결과만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어디 계신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무를 보면 그 생명을 본 것이다(14:9). 생명나무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표현이다.

생명나무에 관하여는 창세기에 나타났으나 아담이 버리고 간 이후 일체 나타나지 않다가 계시록 27절에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 되었고 222절에 생명수의 강과 함께 다시 나타난다. 그동안 이 나무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었던 것(2:7)으로 표현 된 것을 보면 없어졌던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다가 나타날 때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감추어졌던 것은 그 나무와 관계된 인간이 없었기 때문이고 다시 나타난 것은 받을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생명나무는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동산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해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산에 있으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나무란 어떤 인격적 존재를 말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그 나무의 씨-생명의 표현이므로 생명나무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을 포도나무(15:1)로 비유하였고, 요한복음 14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14:6)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생명은 아들이신 예수님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생명나무가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나무라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두 분이 되는 모순이 생기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성경 말씀과도 배치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오셔서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5:39)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긍정적인 모든 것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예표지만 신약은 예표되었던 그리스도가 실재로 오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의 생명나무는 죄가 들어오기 전의 상황이므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이지 불교나 이방종교의 설화에서 나오는 천도복숭아와 같은 개념으로 하나님과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은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관념을 분명히 가져한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종교와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들이 논리가 부족하면 무조건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하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 왜 사람이 죄인이 되게 했느냐, 전능자라면서 무엇하러 예수 그리스도가 오느냐,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늘에서 죄를 사해주면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축구공에 바람 넣듯이 생명을 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 곧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물이 다 이런 원리로 어떤 작용이 일어난다. 교선질작(交宣迭作)은 우주 안의 진리다. 서로 베풀어지며 교차되어 만물을 만들어낸다. 가만히 있는데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없다. 중재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자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 인식하에서 만물의 작용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사람만이 특별하지 않다. 사람이 밥을 먹어 이 밥이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도 밥이 바로 생명이 되지 않고 소화기관이라는 중재자를 거쳐 피와 살이 되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피조물은 없다. 그러므로 생명은 연합, 연결되는 것이지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예표인 아담을 창조하시고 사람의 예표인 이브와 더불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되라고 했지 이브 혼자 독립적으로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생명의 연합, 연결을 보여주고 있는 예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했고, 그 사람 안에 생명을 넣어주는 책임은 하나님의 생명을 유일하게 가진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생명나무란 생명이신 하나님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사람은 바로 나무를 먹을 수 없기에 그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란 곧 예수님의 인생에서 최종산물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사람의 근본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고, 무엇을 먹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음식의 한 형태로서 에덴동산에서는 생명나무와 열매로, 출애굽을 한 후 광야에서는 생명의 만나로,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고 있다. , 예수님은 구약시대 초반에도 주의 천사로(63:9) 나타나서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고 사역을 수행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사탄을 상징하는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는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3:6) 모습이었지만,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53:2)라고 말하고 있다.

즉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예수님과 비교했을 때 아담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죽지도 않고,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고(4:3) 날아다닐 수 있는 능력 있었다.(8:13) 그래서 아담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사탄은 천사와 같은 동류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피조물인데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인격(예수님)을 선택하지 않고 능력(사탄)을 선택하였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결국 성경은 종의 노선에 있는 능력 대 아들의 노선에 있는 인격의 싸움이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결국 인격을 선택하지 않고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인 타락한 천사 사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천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종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천사숭배를 금지하고 있고, 사람이 천사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2:18a)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물며 이 세상 삶에 속한 일들은 얼마나 더 많이 판단하겠느냐?(고전 6:3)

그분께서 천사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게 되신 것은 상속을 통해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라(1:5)

그분께서는 다가오는 세상 곧 우리가 말하는 그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시키지 아니하셨느니라.(2:5)

좌우간 사람은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하며 이 문제가 인류의 유일한 해결과제이다.

 

능력과 인격

어떤 존재에게는 항상 두 가지 면이 있다. 외부적인 능력적인 면과 내부적인 인격적인 면이다. 예를 들어 어떤 가수가 있다고 하자. 그 가수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해서 그 노래가 그 자신은 아니다. 가수가 노래를 잘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지만 인격은 아니다. 세상에서도 이름난 연예인들이나 운동선수들이 있는데 결혼을 하면 못 살겠다고 이혼하는 사례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도 두 가지 면이 있다. 능력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이다. 천사는 성경에 보면 날아다닐 수 있고, 죽지도 않고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천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과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해 섬기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다.(1:14) 반면에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벧전1:4) 곧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을 피조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경륜이라는 말이 영어로 dispensation(분배)라고 하는데 바로 이 의미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분배하겠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에서 사람은 세자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고, 천사들은 왕좌들, 통치들, 정사들, 권능들이라는 신하들로 창조되었다.(1:16)

 

선악과는 왜 만들었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악과라는 양식은 천사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섬기는 자들로서 일군이다. 신하들은 일을 하려면 선악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회사에서도 종업원들은 선악의 지식이 있어야 일을 잘 할 수 있는 거와 똑 같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아담이 범죄하게 만들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사해 주시는가? 이것은 병 주고 약 주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좋고 나쁨의 차원이 아니라 피조물들이 먹어야할 양식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도 어떤 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하고 어떤 차는 디젤을 넣어야 한다. 그에 맞지 않는 기름을 넣으면 자동차는 고장난다. 휘발유를 넣어야할 차가 디젤을 넣으면 사망이다. 이것은 디젤이 나빠서가 아니다. 그 차에 합당한 기름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악과와 생명과도 마찬가지다. ‘선악과는 나쁘고 생명과는 좋은 것이다.’ 이런 차원이 아니다. 그 피조물에 합당한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사람은 생명과를 먹어야하고 천사는 선악과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사들은 섬기는 자들로서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잘 판단해야 한다. 신하들이 마땅히 가져할 조건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이 선악의 지식을 가지면 사람은 하나님 마저도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로 가정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정과 같다하더라도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누가 옳으니 그르니 하면 늘 분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는 것에서 입증된다. 가정에서도 부부가 왜 이혼을 하는가?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가정과 교회는 선악의 지식이 작용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다. 생명의 세계와 율법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중력이 작용되는 세계와 무중력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인생은 선악의 지식세계가 아닌 생명의 세계에서 살도록 운명 지어졌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생명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생명의 노선이다.

우리 인생은 원래 하나님의 생명의 법 아래서 살도록 지음 받았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율법의 세계로 간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죄와 사망의 법이다. 땅에 살도록 되어 있는 피조물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사망이다. 같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 안으로 옮겨 온 것이다.(8:2) 그러므로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는 근원에 관한 문제다.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가 씨를 뿌려 큰 바벨론으로 열매를 맺고,(17, 18) 생명나무의 열매가 씨를 뿌려 새예루살렘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이 성경이 주는 계시다.(21, 22)